돼지꿈 - 오정희 우화소설
오정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책을 읽으면서 손뼉을 치고, 무릎을 쳐가며 이따금씩 깊이 깊이 동화되는 느낌이 들었다면 적지 않은 내 나이를 인정하는 셈이 되는 것일까. 언젠가 읽은 글 중에 '인생은 두루마리 휴지 같다.' 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처음 꺼내 놓으면 줄어드는 것이 여간해서는 눈에 띄지도 않던것이 지름이 반정도 줄어든 시점부터는 금새 심지가 드러나더라는 것이다. 회식자리에서 아저씨들이 농담처럼 던지는 말들... 나이먹는 속도가 20대는 20킬로, 30대는 30킬로... 50대는 50킬로라는 말이 더이상 우습지 않다. 그저 씁쓸할 뿐이다.   
 
"나는 서른 살이 넘으면서부터 나이에 대해 신경질적이 되었다. 나, 예뻐요? 날 어떻게 생각하죠? 그냥 여편네예요? 아니면 여자예요? 아니면 인간이예요? 거의 호소에 가까운 내 물음에 남편은 픽픽 웃었다. p.79"
"당신은 내가 외로워하리란 생각을 해본 적이 있나요. 당신의 아내로서가 아닌 독립된 한 인생으로 본 적이 있나요? p.87 " 

 
<돼지꿈> 이 책에는 총 25편의 짧은 소설들이 수록되어 있다. 각각의 소설에는 서로다른 1인칭 화자가 자신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어 어찌보면 일기나 에세이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대부분 3,40대 여인들이다. 남편에게 더이상 '여자'가 아닌 존재가 되어가는 것에 괴로워하고, 가족들에게 점점 존재감이 없어지는... 가끔은 우울하고 공허해지는 심리적 위기를 겪는다. 책의 표현대로 '새로이 시작하기에도, 포기하기에도 어려운' 나이가 아니던가. 

  못말리는 애주가인 남편의 술버릇을 고치기 위해 됫병짜리 소주를 입에 부어넣는 아내의 이야기, 남편이 가장 듣기싫어하는 이야기인줄 알면서도 (그렇다고 보석에 그렇게 욕심도 없으면서) 예식장만 다녀오면 예물 타령으로 한바탕 하게 된다는 부부의 이야기, 친정엄마는 푸석해진 딸이 안스러워 억지로 보약을 지어 보내자 딸은 그 보약을 남편 먹이고, 딸이 친정엄마한테 보낸 보약은 친정아부지가 잡숫더라는 어느 집안의 보약이야기하며 정말 남의 일 같지 않았다. ^^;; 
  
 그렇다고 책의 내용을 아줌마들의 수다나 푸념으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살다보면 누구나 겪을 법한 이야기들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때론 따뜻하고, 때론 유쾌하게...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단편에 '반전'이 들어있다고 보면 된다. 사실 책의 초반부에는 중년 남성인 화자가 이야기를 이끌고 있는데다 이웃간의 이야기나 직장이야기등 우리네 사는 이야기들이 적절히 구성되어 있어 편안하고 정감이 가는 내용이다. 

 간만에 돼지꿈을 꾼 주인공이 오래전 시누한테 빌려준 돈의 일부라도 받을 요량으로 열차를 탔는데 뜻하지 않은 업둥이를 품게 된다는 '돼지꿈'과 입양한 아이를 키우면서 자신의 위선을 깨닫고 진정으로 아이를 끌어안게 된다는 '색동저고리'의 내용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도 그 뒷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이 짙은 여운으로 남은 까닭이지 싶다. 

책을 덮은 뒤에도 쉽사리 책꽂이에 꽂아 두질 못한다. 모르겠다. 마음이 심란한 것은 아닌데 그냥 책 내용을 다시 떠올리게 되고 피식피식 웃음이 나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표지 그림이 내용과 어울리긴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놀이터라는 공간과 작은 소녀,  다른 친구들은 보이지 않고 소녀는 작은 박스 안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있다. 그래 누구나 작고 예쁜 소녀시절이 있었지. 몸은 비록 '아줌마'이지만 마음은 아직도... ^^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살아온 그녀들의 삶과 희생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다만 중년에 뜬금없이 사로잡힌 외로움과 고독은 주위를 둘러싼 '벽'이기도 하지만 한낱 종이박스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인생의 해답은 누군가 차린 밥상을 내밀듯 답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스스로 찾아가는 것임을 마음에 깊이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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