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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일 1 - 불멸의 사랑
앤드루 데이비드슨 지음, 이옥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넌 알았니? 누구랑 누구랑 사귄대~" "야~! 걔네들 사귀다가 헤어진지가 언젠인데... 완전 뒷북은..." 연예가를 다룬 기사란은 말할 것도 없고 주위에서도 남녀가 사귀고 헤어지는 것은 그다지 큰 충격으로 와닿지 않을 만큼 가쉽거리도 못되는 시대가 되었다. '인스턴트 사랑'이니 '원데이 스텐드'니 참 별별 신조어들을 잘도 만들어 낸다.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을까? 씁쓸하게도 남녀간의 가슴뛰는 사랑은 18개월에서 30개월까지 라고들 한다. 사랑을 느끼는 순간 분비되는 호르몬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과학의 발달이 가져온 통계라는 것은 때론 인간의 감정까지 숫자화하려고 한다.
역사를 돌아보아도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리기도 하고, 때론 훈훈함을 때론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한다. 세기의 스캔들로 알려진 헨리8세의 경우 앤 불린과의 사랑을 이루기위해 교황청과 등지면서까지 결혼을 성사시켰지만 그 사랑도 결국은 '천일'에 그쳤음을 떠올릴 때, 또한 음악계에서 유명한 슈만과 클라라의 사랑도(어릴 때 두 사람의 사랑에 관한 만화책을 본 적이 있는데 슈만이라는 작곡가의 이름과 함께 무척 오랫동안 기억속에 남아있다.) 힘겨운 과정을 거쳐 결혼에 이르렀고, 슈만이 작곡한 많은 아름다운 곡들은 대부분 이때 만들어진 것들이다. 결과적으로 이들 부부도 결혼으로 맺어진 후에는 전처럼 열정적이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지만 말이다.
<가고일> 이라는 제목이 던져주는 호기심과 함께 '불멸의 사랑'이란 글자에 잠시 눈길이 머물렀다. 죽어서도 잊지 못하는 사랑, 영혼이 되어서라도 사랑하는 이의 곁에 있고 싶어하는 사랑, 수백년의 세월뒤에 다시 환생해서 만나는 사랑등 '영원한 사랑'을 주제로한 영화나 소설은 흔하디 흔하다. 다만 그런 평범한 주제 속에서도 작가만의 빛나는 문체나 구성, 등장인물의 캐릭터가 살아 숨쉰다면 마음을 울리는 한 권의 작품일 수 있겠다 싶어 읽고 보고픈 충동이 느껴졌다. 덧붙여 이 책은 기대를 충분히 채워준 작품이다. (# 가고일은 고딕 성당을 장식한 괴물형상의 석상을 말한다.)
주인공은 잘나가는 포르노 배우이자 제작자로 불운했던 어린 시절을 뒤로하고 어느정도 성공을 이룬 캐릭터다. 그의 성공은 방종한 생활로 이어져 술과 마약, 여자에 빠져 살던 중 술에 취해 운전하다가 큰 사고를 당한다. 온 몸이 불에 탄 채 화상병동에서 눈을 뜬 남자,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사업은 파산해 버렸고 하루하루 재활훈련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가져다준다. 남은 희망은 두 발로 걸어 병원을 나갈 수 있게 되는 것.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미지의 여인 마리안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에게 마리안네와의 만남은 삶을 이어갈 의지이며 새로운 삶을 꿈꾸는 한줄기 빛이 되어준다. 그녀는 재활치료를 받는 주인공에게 큰 힘이 되어주면서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수세기에 걸쳐 불멸의 사랑을 꿈꾸었던 연인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미 오래전에 맺어졌던 두 사람의 인연에 대해서도... 남자는 혼란스럽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마리안네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어느새 그녀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고 진심으로 믿게 되었으니까.
700년전 엥겔탈 수도원의 수녀와 부상당한 용병으로 만나 남자에게 사랑을 깨닫게 해 주었던 마리안네는 현실에서도 화상당한 주인공에게 진정한 사랑을 일깨워주는 존재가 되었다. 돌덩어리 속에 갇힌 가고일들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심장을 하나씩 꺼내줌으로써 조각을 한다는 마리안네는 그녀의 마지막 심장을 남자에게 주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활 시위는 당겨졌고, 수백년동안 불멸의 사랑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의 가슴에 꽂혔다. 사랑에 대한 한편의 대서사극이 눈앞에 펼쳐졌지만 먹먹해져오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들의 사랑이 비극이라고 단정짓지는 못하겠다.
유행가의 가사였던가... 사랑이라는 흔한 말 하고 싶지 않아서 더 근사한 말을 찾아보려 했지만 결국은 사랑한다는 그 말보다 더 좋은 말은 없다더라 하는 말이 참으로 옳다. '사랑'이란 단어보다 가슴 설레게 만드는 말이 어디 있을까? 사랑에는 유효기간이 있다지만, 결혼하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될때까지 신혼처럼 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는 하지만 유효기간 지난 사랑이라고 썩어 없어지기야 하겠는가. 남편과 만난지 16년째, 결혼 8주년을 맞은 올 가을에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니 결혼이란 무엇이고 인생이란 무엇인지 마음 한구석이 뒤숭숭해져 온다. 우리 사랑은 갓 담은 김치처럼 뜨거운 사랑은 못되어도 청국장같은 깊은 맛 우러나는 사랑이기를... 푸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