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살 소년에게 엄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깊은 슬픔이다. 책을 좋아했던 엄마는 이야기들이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말해주었고 소년에게 곧잘 책을 읽어달라고 했으며 소년이 좋아하는 책을 엄마도 좋아해 주었다. 소년은 오랜 병마에 시달리던 엄마를 위해 자신만의 규칙과 의식을 만드는등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만 결국 엄마를 떠나보내야만 했다. 가엾은 데이빗... 엄마가 돌아가시자 데이빗은 책에만 파묻혀 지냈다. 책보다는 신문을 좋아하고 엄마가 돌아가시던 날 이후로는 한번도 울지 않았던 아빠, 아직도 엄마를 그리워하는 데이빗에게 아빠는 너무나 가혹한 짓을 저지른다. 엄마가 죽은지 '다섯달 하고도 석 주하고도 나흘'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로즈라는 여인을 데이빗에게 소개시켜 준 것이다. 그날 처음으로 정신착란을 일으킨 데이빗은 정신과 치료를 시작하고 아빠는 데이빗에게 동생이 생길거라 말하고는 로즈와의 결혼을 서두른다. 어른들의 이기심이란.... 솔직히 초반부터 살짝 열이 받았다. 작년인가 업계의 사장님이 재혼한다고 청첩을 보내왔는데 알고보니 상처한지 1년도 되지 않은 것이었다. 직원들이 입을 모아 아무리 그래도 첫기일은 지낸후에 식을 치르는 것이 함께한 세월에 대한 배려가 아니겠는가 하였는데 정작 본인은 배우자의 긴 병에 질려버렸고, 고등학생인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위해서도 결혼을 서두를 수 밖에 없었다고 변명을 하였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과 가족이 된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니 타인의 입장에서 뭐라할 것은 못되지만 여전히 '아무리 그래도...' 라는 말만 되풀이했던 기억이 난다. 아빠가 결혼한 후 데이빗은 로즈의 대저택에서 동생 조지와 함께 살게된다. 그무렵 전쟁이 일어나 아빠는 집에 자주 들어오지 못하게 되고 로즈와 데이빗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기만 한다. 어느날 데이빗은 죽은 엄마의 목소리를 듣게 되고, 대저택의 지하정원을 통해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숲사람은 데이빗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려 하지만, 누군가 데이빗이 돌아가려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숲사람은 데이빗에게 왕국의 임금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라고 하는데 국왕이 가진 '잃어버린 것들의 책'에는 분명 집으로 가는 방법이 적혀 있을거라고 말한다. 왕국을 찾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고 험하다. 이 새로운 세계는 현실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전쟁을 겪고 있는데 늑대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르푸라는 종족의 우두머리 르로이가 왕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굶주린 늑대들을 피해다녀야 할 뿐만 아니라 곳곳에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들과 맞서면서 여행을 계속한다. 왠지 모를 암울한 기운... 안개속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답답하다. 무엇보다 누군가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어린 아이라고 생각했던 데이빗이 칼을 휘두르며 피를 튀기는 장면은 '성장'으로 받아들여지기 보다 섬짓하게 와닿았던 것이 사실이다. 데이빗은 여행중에 숲사람과 기사 롤랜드에게 몇 편의 '동화'를 전해듣게 되는데 기존 동화를 패러디한 '동화 비틀기'라고 해야할지... 쉽게 말해 '엽기 동화'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빨간모자는 인간을 피해가려는 늑대를 유혹해서 르푸를 낳고, 백설공주는 난쟁이들을 못살게 구는 악녀라는 주장이다. 매번 이야기가 시작될때마다 호기심도 생기지만 쓰디 쓴 약을 삼킨 것처럼 쩝쩝거리게 된다. 좋았던 점은 본문에 대한 설명과 원작 동화의 내용이 부록에 따로 실려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내용이나 느낌상 <사자와 마녀와 옷장>이 떠오르고 <오즈의 마법사>, <반지의 제왕>도 언듯 스쳤다. 무엇보다 이 모든 상황이 데이빗의 분노에서 시작되었고 '꼬부라진 모자를 쓴 꼬부라진 사람'의 농간이라는 사실에 경악해야만 했다. 가령 말을 잘 듣지 않는 개구장이 아이들을 잡아가는 마법사가 있다고 치자. 하지만 아무리 개구장이라고 해도 결국은 어린 아이인 것을... 그들의 호기심이 분노가 욕심이 부모로 부터 떼어놓거나 영혼을 빼앗길만큼의 죄값을 치러야하는 사악함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작가의 경력탓인지 스릴러와 판타지가 만나니 결국은 '잔혹 동화'가 되었다. 내용상 청소년들에게는 권하고 싶지는 않지만 작가의 상상력과 구성면에서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솔직히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참 대단하다며 감탄하면서 읽었다. 더구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제가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소설을 썼습니다. 이 책 만으로도 저는 작가로서의 제 삶에 만족합니다. " 라고 한 작가의 자부심에도 손을 들어주고 싶다. 어쨌거나 판타지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른 세계로의 통로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