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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읽는 해적의 역사 ㅣ 단숨에 읽는 시리즈
한잉신.뤼팡 지음, 김정자 옮김 / 베이직북스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아들한테 해적이 되라고 말하는 엄마가 어디 있어~!!" 일곱살 아들녀석과 한참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은 엄마인 내가 지고 만다. 유치원에서 '피터팬' 영어동극을 준비중인데 원하는 배역을 1순위부터 3순위까지 적어 내란다. 아무래도 아이들이다 보니 남아들은 피터팬, 여아들은 웬디역에 지원자가 몰릴 것은 당연한데 이런저런 고민끝에 키가 크다는 장점을 내세워 아예 후크 선장에 지원하면 어떻겠느냐고, 극 중 해적의 역할도 얼마나 멋진데 하면서 아이를 꼬드겨 보았지만 결국은 실패다. '도라에몽' 광팬인 우리 아들, '원피스'를 즐겨보았더라면 생각이 달라졌을까.
사실... '그냥 해적'이 주는 이미지는 말 그대로 공해상에서 배를 나포하고, 사람을 죽이거나 재물을 빼앗는 범죄자들이다. 그런데도 문학 작품속에 등장하는 해적들은 뭔가 한꺼풀 벗겨지고 새로 포장된듯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들이다. '보물섬'의 재치만점 실버 선장부터 '피터팬' 후크도 막연히 악당으로만 알려졌으나, 알고보면 평생 악어한테 쫓겨야 하는 고달픈 신세에 외로움 가득한 '한 사람'일 뿐이다. 거기다 영화 '캐리비언의 해적' 잭 스페로우는 어떠한가. 조금은 어눌한듯 하면서도 멋진(모순된 표현이지만) 영화속 캐릭터 때문에 조니 뎁이라는 배우의 팬이 되어 버렸을 정도다.
이처럼 현실에서의 해적들과 작품속 해적들의 모습이 다른 이유는 무얼까. 어쩜 자유분방해 보이는 그들의 삶의 방식이나 행위가 일탈을 꿈꾸는 현대인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때문일지로 모르겠다. 어짜피 우리가 아는 것은 해적에 대한 몇줄짜리 정보밖에는 없으니 그저 적당한 포장지를 씌우기만 하는 되는 것이다. 실제로 현실에서의 조폭은 의리도 없고 잔인하고 비열하며 말그대로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지만, 작품 속에 그려질 때는 막연하게(?) 멋진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단숨에 읽는 해적의 역사> 첫장에서부터 처형된 해적의 사진이 공개되어 많이 놀랐다. 해적에 대한 어떤 '환상'같은 것을 깨버리기위한 의도였을까. 영화적인 기법으로 본다면 초반부터 요란스럽게 시작하고 차근히 스토리를 풀어가는 과정으로 보면 좋겠지만 '책'이라서 그런지... 적당한 때에 뒷부분에 실어주었더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사이즈에 비해 생각보다 가볍고 컬러 도판이 풍부해 맘에 든다. 전체적인 내용은 '해적의 역사'에 대한 인문학적인 접근으로, 해적에 대한 모든 것을 일체의 '포장' 없이 '사실'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나를 들뜨게 했던 문학 작품속 해적 캐릭터들이 책을 읽는 동안 하나씩 죽어나가는 느낌이랄까.
해적의 발생은 '해상 교통'의 시작과 함께 하며 스페인을 비롯해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등을 중심으로 해상 무역이 활발하던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끊임없이 출몰하였다. 일부 해적들은 빈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수 없이 해적이 된 경우도 있었는데 먹고 살기 힘들어 산적이 되어야만 했던 내륙의 역사와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다. 또한 '사략선'이라 하여 적국으로 간주되는 나라의 배를 강제로 나포할 권리를 부여받은 해적선이 활동함으로써 자국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A나라의 해적이 B나라에는 국민적인 영웅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기도 하지만 시각에 따라 상반된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이다.
18세기 이후 미국의 사략선까지 가세하자 해상의 상황은 더욱 복잡해 지는듯하다. 각 나라들은 사략선을 통한 부의 축적에 눈이 멀고, 해적들 또한 전통적인 해적들이 가졌던 애국심보다는 오직 개인적 '탐욕'에만 관심이 있었다. 오늘날의 해적은 더하다. 이들은 바다에 거점을 둔 '노상 강도'와 같다. 그저깨 원양 어선이 좌초되어 구조를 기다릴때도 해적들이 가장 걱정이었다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 언젠가 소말리아 근해에서 해적들에게 나포되었던 어선이 떠올라 아찔했다. 원양 어선에 몸을 실어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선원들의 생활을 생각한다면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거리 정도로 취급해서는 안될 문제다. '해적은 역사가 존재하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라는 문구가 섬뜩하게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