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그릇 2
신한균 지음 / 아우라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야심한 밤,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이야기는 시작된다.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 퇴각하던 왜군은 조선의 사기장들을 닥치는 대로 납치했다. 대대로 도자기를 빚는 사기장이었던 주인공 신석도 왜군에 납치되다시피 하여 배에 오른다. 전쟁이 시작된 직후부터 조선의 백성들은 관군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더구나 천민 취급을 받던 사기장들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비단 사기장들 뿐만 아니라 여염집 여인들과 아이들을 비롯해 닥치는 대로 납치된 이들은 먼 타국으로 향하는 배위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기도 하였다. 첫 장면부터 가슴 아픈 장면의 연속이었다. 이는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삶을 예고하는 서막에 불과하다. 

"한 맺힌 조선의 영혼들이 하얀 눈으로 겨울 바다를 떠돌건만, 격군들의 노는 파도를 계속 때리고, 무심한 배는 휘날리는 눈발 사이를 헤집고 남으로 남으로 나아갔다." p.16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시간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인공 신석의 집안은 대대로 도자기를 빚는 사기장이다. 임진년 이듬해 왜군의 공격이 본격화되자 신석과 아버지는 도자기를 빚어 왜장에게 바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아버지는 왜장이 시키는대로 갖가지 도자기를 빚어 주었지만 단 한가지 '황도'만은 빚어줄 수 없었다. '황도'는 평범한 그릇이 아니라 제기였으며 쓰임새를 다하면 깨뜨려 땅에 묻는 그릇이었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비법을 가진 할아버지가 편찮으신 이유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사기장에게도 지켜할 도리가 있다고 하시며 '황도'를 빚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황도를 빚어 왜장에게 바친다는 것은 '조선의 혼'을 바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라는 아버지와는 달리 신석은 가족의 안위를 위해 '황도'를 빚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사기장을 천한 신분으로 여기면서 애써 빚은 도자기를 빼앗아 가는 조선 관원들의 횡포에 비하면 왜국에서는 실력있는 사기장을 '양반'으로 대우해준다고 하니 솔깃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코 조선을 떠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조선은 그가 태어나 자라온 곳이고 부모님과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가정을 꾸릴 곳이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일본으로 끌려온 신석은 사무라이로 봉해지고 한 마을을 책임지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는 그릇을 빚어주고 받은 댓가로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인 노예들을 사들이는등 조선인과 일본인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도자기 마을인 '고려촌'을 만든다. 

비록 일본인 주군을 위해 일하는 몸이지만 신석의 마음은 항상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그를 지탱해 주는 가장 큰 힘은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믿음' 하나였다. 전쟁 후 일본과의 수교가 다시 이루어지자 조선으로 부터 '쇄환사'가 방문했다. 일본인들의 방해로 첫번째 쇄환사를 놓치고만 신석의 낙심은 누구보다도 컸다. 하지만 2차, 3차 쇄환사가 방문했을 때는 한국인들 스스로가 귀국을 거부한다. 이미 일본에서 자리를 잡을 만큼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지금 아무런 대책도 세워주지 않고 배만 태워주겠다는 정부의 입장도 못미덥거니와 쇄환사 관리들 또한 오만함으로 가득차 어떤 의지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재외 국민에 대한 불성실한 태도는 예나 오늘이나 어쩜 이리도 똑같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임진왜란에 대한 명목상의 이유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진바와 같으나 이 책에서는 '도자기 전쟁'이라는 시각에 촛점을 맞추었다. 당시 중국과 조선은 일본에 비해 도자기를 빚는 기술력이 월등했으며, 도자기 산업은 오늘날 IT 기술에 견줄만큼 고급 기술에 고부가 가치 산업이었던 것이다. 안타까운것은 정작 그 기술을 가진 조선은 도자기나 도자기 빚는 기술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였는데 비해 일본은 수많은 조선의 사기장에게 기술을 전수받음으로써 다른 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는 점이다. "이도가 일본으로 건너오지 않았더라면 조선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이야말로 그 고향이다. - 야나기 무네요시" 라고 말하는 일본의 미학자의 주장이 가시처럼 파고픈다. 아... 우리는 왜 스스로가 가진 '보물'을 몰랐던 것일까. 남에게 빼앗기고 그것이 빛을 발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을까. '속상하다'라는 말로는 너무나 부족한 표현하지 못할 안타까운 심정이다.

책의 저자 신한균님은 주인공 신석처럼 대를 이은 사기장이다. 사기장이 쓴 글... 낯설면서도 독특하다. 때문인지 도자기 빚는 과정이 눈앞에서 보는듯 선명하게 재현되었고, 투박한 문체조차 정겹다. 이 책은 소설가가 아닌 사기장이 말하는 '그릇'에 대한 철학이자 굳건한 믿음이다. 도자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냈을 뿐 아니라 일본으로 끌려간 사기장들의 역사를 철저한 고증을 통해 밝히고, 사기장이 단순히 그릇을 빚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한 예술가임을 말하고 있다. <신의 그릇>은 도자기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역사적 사실이 만나 활자화 된 신한균님이 빚은 또 하나의 '신의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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