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에게 물을 (양장)
새러 그루언 지음, 김정아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내게도 서커스에 얽힌 추억이 있었던가. 솔직히 말하자면 대형 천막 아래서 "신사~ 숙녀~ 여러부운~" 하고 외쳐대는 제대로 된 서커스를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이었던 것 같은데 지역에서 가장 큰 시장에서 '차력쇼'를 보았던 기억만 있다. 철근을 목으로 구부리고, 불을 뿜는등 한바탕 쇼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엄마의 장바구니에는 회충약이 들려있었다는... ^ ^;; 요즘은 명절만 되면 약속이나 한듯이 '세기의 서커스'가 방송되곤 한다. 사정없이 몸이 휘어지는 사람을 보면 나도 모르게 관절이 뻐근해지고, 맹수의 입속에 머리를 넣는 장면은 언제 보아도 손에 땀이 난다. '명절용'이 아니냐며 투덜거리면서도 가족들과 함께 둘러앉아 보면 재미가 몇 배는 더해진다. 

 책의 배경은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기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수의사가 되고자 대학에서 공부를 하던 제이콥은 부모님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거기다 유산에 대해 설명해 주겠다던 변호사는 제이콥에게 남겨진 유산이 전혀 없다는 소식을 전한다. 아버지는 지난 20여년간 진료비를 낼 돈이 없었던 마을 사람들로부터 콩과 달걀을 받았을 뿐이라고 말이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제이콥은 자신에게 일어난 믿어지지 않는,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한 현실에 몸부림치면서 괴로워 하다가 졸업전 마지막 시험을 치르게 된다. 하지만 시험도중 교실을 뛰쳐나오고 때마침 제이콥의 곁으로 기차가 다가온다. 덜컹덜컹 칙칙폭폭, 칙칙폭폭... 제이콥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며 뒤를 한번 돌아보고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현실에서 도피하듯 기차에 올라탄 제이콥에게 서커스 기차에서의 생활은 너무나도 낯선 환경이다. 당시의 시,공간적 배경을 떠올려 본다면 대략 어떤 캐릭터들이 등장할지 상상할 수 있을것이다. 탐욕스러운 총감독 엉클 앨은 도산하는 다른 서커스를 찾아가 필요한 연기자와 동물등을 헐값으로 사들이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다. 오거스트는 동물감독이면서 동물들을 학대하고, 기차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더러운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잔인한 사람이다. 동물 연기자 말레나는 오거스트의 아내이자 제이콥에게는 운명같은 사랑이기도 하다. 뒤이어 등장하는 코끼리 로지를 통해서 두 사람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기차 안에서는 엄격한 계급이 존재하고 어떤 이들은 동물들보다 더 못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서커스에 인생을 건다. 제이콥에게 서커스는 낯선듯 하면서도 또 하나의 '세상'인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제이콥의 생활은 '대공황'이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한 생활을 하였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부모님이 보내 주시는 학비와 생활비로 살았을테니 말이다. 대공황은 미국인들에게 아니 전 세계인들에게 원자폭탄같은 위력으로 삶을 위협하였듯이 제이콥에게도 한순간 인생의 '대공황'이 닥쳤다. 사람들에게 '서커스'는 유일한 오락이고 일상의 고단함을 잠시 잊게 해주는 밀주와도 같은 존재였다. 신기한 것은 그 무렵 우리 나라에도 유랑극단 이라고도 불리었던 유랑서커스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유일하게 남은 동춘서커스단은 7-8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오래된 극단으로 가끔씩 방송에 소개되면서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다. 요즘엔 단원들이 거의 중국무용단으로 이루어져 있다니 아쉽기도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명맥이 유지되었음하는 간절함도 있다.  

서커스에 관해 생각하다보니 문득 피카소가 떠오른다. 파리에 정착해 몽마르뜨의 세탁선에서 작업을 하던 피카소는 우울했던 청색시대를 지나 장미빛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피카소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고, 또 하나 서커스가 있었다. 가난해서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지만 매일같이 서커스를 구경다녔다고 한다. 공연과 함께 단원들의 생활에 관심이 많았고 그들과 친하다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다고 한다. 서커스... 어떤 이에게는 현실을 도피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삶의 모든 것이기도 했다. 낙심한 이들에게는 희망이 혹은 삶의 빛이 되어 주었고, 천재 화가에게는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었다. 서커스의 천막속에는 분명 웃고 즐기는 오락 그 이상의 '무엇'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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