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이 인 더 시티
신윤동욱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이것은 일종의 발버둥의 흔적이다. 덜컥 청탁을 수락하고, 막상 마감이 닥치면 도망가버리고 싶었던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고투들이다. (중략) 비록 조롱의 언어로나마 이땅의 보이지 않는 감옥으로 신음하는 이들의 사정을 아는대로 전하려는 글들도 있었다. 정말로 내가 썼나, 싶은 글도 있다. 잘 썼단 얘기가 아니라 낯설단 말이다. "    책 머리말중
 
이 책은 <한겨례21> 기자인 신윤동욱님의 칼럼집이다. 문화와 사회 사이에서 전공을 몰라 헤메고 있다는 그는 문화와 사회를 총괄한 우리 사회 전반적인 모습을 다루고 있다. 칼럼은 사설과 달리 풍자적 요소가 많아 시선이 삐딱해 보이기 십상이다. 사실 이 책도 상당히 삐딱하다. 하지만 동성애자의 결혼 문제나 대마초 관련등 일부 민감한 사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공감이 가고, 때론 속이 시원하기까지 하다.  

2002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2003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는 경기뿐만 아니라 북측에서 온 미녀 응원단에 온통 관심이 집중되었다. 카메라는 발빠르게 대표 미녀 몇 명을 색출해내고 네티즌들은 팬 사이트를 만들어 환호한다. 여기에 여성 단체들은 민족 화해 분위기를 의식한듯 침묵으로 일관한다. 김정일의 사진이 비에 젖자 울부짖으며 현수막을 거두어 들이고, 인근의 것까지 모두 회수한 후에야 이동했다는 그녀들의 일화를 보면서 정말 체제를 알 수 없는 집단이라는 생각을 다시한번 하기도 했었다. 북한처럼 폐쇄적인 국가에서 미녀응원단을 내세운 속내도 알 수 없거니와 국제적 행사때마다 '미녀응원단'을 요청하는 남쪽의 고위공직자나, 언론도 이해되지 않는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북쪽 응원단에 대한 '민족적 관음증'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미디어는 그녀들이 진정 '통일의 꽃'이라고 믿는 것일까? 

한국말은 어렵다. 한국어로 솔직하게 말하면 무례한 사람이 되고, 정확하게 주문하면 까다로운 사람 취급 받는다. 대표적인 소통 불능, 중국집의 다꽝 이야기 "조금 더" 라고 이야기하면 항상 처음 만큼, 혹은 그보다 더 많은 다꽝이 나온다는 것. 자장면은 두어 젓가락 남았을 뿐인데... 더 달라고 해놓고 남길려니 엄청 눈치 보인다. 이것이 바로 '정량 2배의 법칙' 이라나. 한가지 더, 택시 안에서 "아저씨, 볼륨 좀 낮춰주실래요." 크게 라디오를 켠 택시기사에게 주문을 한다. 아저씨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라디오를 꺼버린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말이 통하는 사회, 진심이 통하는 사회를 꿈꿔본다. ㅋㅋ

기자 특유의 냉철함과 설득력있는 문장이 돋보인다. 우리 사회 다방면에 대하여, 소수자를 대변하여 거침없이 할말 다 하는 솔직담백, 당당함이 멋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쓰고 있을까.  먼저 이름부터 살펴보자. 저자의 이름은 신윤동욱, 1997년도에 시작된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에 영향을 받았다. 독특함 때문에 주위에 이름을 각인시키기가 너무 힘들고 "어쩌다가" 부모성을 함께 쓰게 되었냐는등 질문속에 반감을 드러낸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산다. 부모성 함께쓰기 그 후 10여년, 그는 여전히 마이너리티에 속한다. 호주제가 폐지되는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부모성을 함께 쓰는 이가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성을 선택할 수 있으되 결국은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모순적 사회 분위기 탓이리라.   

"저에게 기자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늘 빚지는 직업"이라고 답하겠다. p.109"  생면부지의 누군가에게 인터뷰를 부탁하고, 변변한 보상없이 누군가의 시간을 뺏고, 전문가 견해랍시고 남의 생각 따옴표 치고 전하면서 절반은 자신의 생각인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직업이라고, 그들의 공신력에 빌붙는 직업이라고 말해버린다. 아직은 우리 사회에 기자라는 직업이 '중립적 정보 전달자'의 역할보다 무슨 완장이라도 찬듯 거칠것이 없는 사람들이란 이미지가 강한 것이 사실이기에 그의 고백이 진심이기를, 그 마음이 변치 않기를 기대해 본다.  

문화의 다양성은 오랜 세월동안 인류를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어왔다. 서로 다른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신들의 문화와 융화시켜 새로운 미래를 이루어 낸다. '원리주의'는 항상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다른 문화와 충돌하여 피를 부르는 인류의 가장 큰 '악'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사회의 발전 가능성은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가늠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좀더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 볼줄 아는 사람. 마이너리티, 당당함이 멋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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