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곳을 사유하자 - 정주하지 않는 지식인의 삶과 사유
니콜 라피에르 지음, 이세진 옮김 / 푸른숲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10여분만 걸어나가면 산책하기 좋을 만큼 높이의 나즈막한 산과 그 아래 '운암지'라는 작은 못이 있다. 인근의 회색 건물들로 가려진 탓에 직접 가보지 않은 사람은 그곳에 못이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여섯살 아이와 손을 잡고 산책로를 걷다보면 도심 한가운데 이런 공원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감사할 따름이다. 매연을 뿜어대는 도로를 건너 분수가 보이는 공원 입구에 다다르면 숨쉬는 공기부터 달라지는 것을 느끼곤 하는데 가끔씩 난감한 것이 아이가 들꽃과 풀들, 나무, 작은 벌레들의 이름을 물을 때 대답해주기가 상당히 곤란하다는 것이다. 태어나 자란 곳이 도시라는 이유를 대면서 이도저도 모른다고만 말하는 엄마의 변명은 궁색하기만 하다.

일상에서의 10여분 도보로 이동된 공간은 별천지와도 같다. 회색은 초록빛으로 바뀌고 능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들을 수없이 만난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의지가 먼저인지 공간적 이동에 의한 생각의 전환이 주인지는 알수 없으나 일상에서 '몸의 이동'이 주는 감동은 그 어떤것과도 견줄 수 없을만큼의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그저 평범한 모자의 일상이 이러할진데 학문을 탐구하는 지식인들에게는 공간의 이동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다른 곳을 사유하자> 이 책은 현대의 인간 조건을 파악하는 요소중 지리적인 이동을 통해 '실천의 사유'와 '사유의 실천'이 가능했던 지식인들의 사례들을 실었다. '몸의 이동'을 통해 학문과 예술에 대한 탐구열을 불태웠던 지식인들, 사실상 인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통틀어 셀수 없을 만큼 많은 지식인들의 이름이 언급된다. 어쩜 이 부분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매 페이지마다 다양한 지식인들과 그들의 저서, 탐구했던 분야등이 짧게 언급되고 넘어가다보니 인물에 대한 생소함때문에 책장을 넘기기가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학술언어나 학문적 신조어등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도 인문학에 대한 상당한 수준을 말해주는듯 하다. 그럼에도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다른 곳을 사유함'으로 얻은 학문적 성과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인데 인물을 통해서 인문학의 큰 틀을 읽어 낼수 있었다. 게다가 따로 메모해 두었다가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문구들이 많아 마치 모래사장 널린 이쁜 조가비를 모으는 심정이었다.

등장하는 지식인들 중에는 본인의 의지대로 유랑이나 여행의 형태로 다른 곳을 사유한 이가 있는 반면에 망명이나 유배처럼 정치적,사회적 이유로 피치못해 떠날 수 밖에 없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모습이든지 결과적으로는 그들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학문적 보상을 안겨주었다. 학문의 완성은 결국 인간의 체험과 새로운 것을 사유함으로서 얻어지는 자극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화가 밀레의 작품중 <만종>,<이삭줍기>는 유년시절 농촌에의 향수가 그대로 배어난 작품이고, 고흐는 작품 하나하나에 삶의 힘겨움과 고뇌가 그대로 드러난다. 음악가 모짜르트가 어린시절 경험했던 연주 여행은 일생동안 작품활동의 밑거름이 되었고, 오늘날 글을 쓰는 작가나 많은 예술가들 또한 넓은 곳을 두루 다니며 영감을 얻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서 있는 자리만을 사수하려 몸부림치는 것은 결국 퇴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 떠오른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다른 곳을 사유함으로써 다른 것을 사유하는 것' 이야말로 인류 발전의 원동력인 것이다.

인문학은 내게 여전히 낯설고 어려운 분야다. 지금까지는 거의 입문서 수준의 책들만 읽어오다가 이번 독서를 통해서 수준을 끌어올리려 나름 애써보았는데 솔직히 흐뭇할 만큼 이해했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그러나, 결국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정치,경제,역사,문학, 철학등 인간과 인류문화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던가. 공원에서의 산책을 즐기되 나무의 이름과 풀,꽃,벌레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하여도 상관없다. 상쾌한 공기와 꽃의 향기, 숲이 주는 싱그러움은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상관없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더딜지라도 하나씩 알아가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세계가 그토록 광대한 것은 우리 모두가 그 안에서 흩어지기 위함이니 - 괴테
저마다 자기의 관습이 아닌 것을 야만이라 부른다. 우리는 자기가 사는 고장의 풍습이나 견해에서 얻은 사례나 관념만이 오로지 진리나 이성의 규범인 것처럼 생각한다. - 몽테뉴
올라가는 게 아니라 올라가면서 자기 모습을 지켜나가는 게 어려운 것이다. - 쥘 미슐레
모험은 우리 존재 안의 낯선 몸이다. 그렇지만 그 몸은 나름대로 중추와 연결되어 있다. - 게오르그 짐멜
위 혹은아래로 계급을 이탈한 불안정한 사람들이 결국 역사를 만드는,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다. - 피에르 부르디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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