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에 머물다
카타야마 쿄이치 지음, 김활란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저자 카타야마 쿄이치의 작품이라는 떠들썩한 홍보 문구는 사실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쉽게도 그의 전작에 대해 어렴풋이 들어본 것 같기도 하지만 소설이든 영화든 제대로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순애보 완결작'이라는 문구와 마치 그곳이 세상의 끝인 양 물위에 떠있는 작은 배가 그려진 표지 였다. 결혼한지 올해로 9년째다. 여섯살된 아들도 있다. 그런데도 '순애보'라는 말에 가슴 설레이는 나 자신이 싫지는 않다. ^^;


매일 밤 아파트 벽 넘어로 들려오는 여인 사에코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사랑에 빠져버린 남자 šœ이치. "짜증나지 않았어?" "그런 생각은 안 들었나봐. 왠지 나를 대신해서 울어주는 것 같았거든." p.44 인연이 될려면 그렇게도 되는가 보다. "당신은 당신대로 제정신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나 역시 위험했어. p.46" 인생에 있어 힘든 시기에 만났던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받아들이고 여느 부부들처럼 행복한 생활을 누린다.

평온한 일상을 보내던 두 사람은 사에코가 여동생 이즈미를 위해 대리모가 되면서 위기를 맞는다. 임신 초기, 중기를 거치면서 잘 견디어(?) 냈던 사에코는 출산일이 가까와 올수록 아기에 대한 집착이 극에 달하고, 정서적 혼란이 심해져 정신 분열증에 가까운 증세를 보인다. 결국 아기를 유산하고서야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러 버렸다고 후회하는데...

10달동안 새끼를 품어 본 어미로서 사에코의 심정, 혼란등은 전적으로 이해가 된다. 내 속에 또 하나의 생명, 밤낮으로 태아와 소통하면서 내 몸과 마음을 함께 나누었던 그 경이로움을 어찌 말로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사에코의 광기가 지나친 면이 있어 섬뜩하기도 했지만, 극적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면 좋겠다.

그렇다면 이 책의 어떤 점이 순애보인가? 책을 읽으면서 혼란에 빠져 버렸다.
두 사람의 사랑이 싹트는 부분과 평온한 일상은 뒤이어 몰아닥칠 폭풍같은 상황에 강한 대비를 이루는 듯 지극히 평범한 부부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비슷하게 그려냈다. 그러나, 세상에 자신의 부인이 (아무리 형제라도) 대리모가 되겠다는데 하고싶은대로 하라고 남의 이야기 하듯 대답해 버리는 남편이 어디 있으며, 만삭의 부인이 심각한 정신병 증세를 보이는데 밤마다 눈 덮힌 거리를 배회하도록 방치하는 남편은 어디 있으며, 아내가 유산할 지경인데도 철저히 남의 아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내 눈에 비친 šœ이치는 이기적이고, 미성숙한 남편일 뿐이었다.

šœ이치는 아기가 죽고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아이임을 인정하고 이로써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된다. '순애보'는 말그대로 순수한 사랑, 사랑을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을 만큼의 사랑이라고 알고 있다. 그렇다고해서 상대방이 어떤 선택을 하든지 '방관'하듯 지켜만 보는 것이 순애보일까? 사랑하는 연인을 곁에서 지키며, 설사 자신을 떠나버려도 언젠가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을 때 편히 쉴 수 있는 '둥지'가 되어 목빠지게 기다리는 옛날식 '순애보'는 싫다. 서정적이긴 하지만 조금은 밋밋한 것이 자기 표현이 확실한 요즘 세대의 사랑 방법과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조금 아쉬웠다.

또 한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안타깝게도 내 주위엔 간절히 원하면서도 아기를 갖지 못하는 부부가 여러쌍 있다. 그들 중에는 육제적으로 문제가 있어 임신률이 낮은 부부도 있지만 아무 이유없이 정신적인 스트레스등으로 불임인 부부도 있다. 그들의 아픔을 잘 아는 사람으로서 사에코만큼이나 이즈미부부도 안쓰러운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책을 덮으며, 처음 기대했던 설레임은 더이상 남아있지 않다. 내가 바라던 현실에 맞춰 업그레이드 된 '순애보'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은 숨을 고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이 책 <세상의 끝에 머물다>는 젊은 남녀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뛰어 넘어 이 시대를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임을 깨닫게 되었다. 굵은 줄거리는 šœ이치와 사에코 부부의 이야기지만 불임으로 고민하는 이즈미 부부, 주식 투자를 통해 재테크를 하려다 손해 본 이야기, 암 선고를 받은 한 가정의 가장, 정신병을 앓는 이웃 아주머니등 주변 인물들을 통해 현대인들이 겪을 법한 여러가지 삶의 모습, 그것도 위기의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소설의 소재로서는 다소 무거운듯한 내용을 담담하게 풀어낸 점은 좋았다. 부부란 무엇이고, 사랑은 무엇이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죽음을 의식하지 않는 인간의 습성, 언젠가 분명하게 일어날 파국이라고 할지라도 실제로 일어나기 전까지는 현실감을 모르는 편리한 회로가 우리 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p. 173" "마지막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 지금의 삶의 모습이 아닐까요? 현재를 사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거죠. p. 176"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서 절실히 느낀것이 있다면 모리 교수가 이야기 한 것이 분명 '죽음'이 아니라 '삶' 이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하는 것은 곧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와 같다. 세상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다면... 지금 서 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누리고, 나누면 된다.

세상의 끝과 지금 서 있는 곳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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