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 1
송은일 지음 / 문이당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많고 많은 성씨들중 가문에 대한 자긍심이 특별하셨던 시어머니는 '광산'을 본으로 하는 성씨를 가진 분이셨다. 사시던 마을 일대가 집성촌이었고, 집안을 통틀어 장녀였던 어린시절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흡사 토지의 '서희'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10대의 나이에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자리에 빠지지 않았고, 이따금씩 집을 나설때마다 남녀노소가 '아씨'라는 호칭으로 예를 갖추었단다. 개울가 건널 땐 따라다니던 머슴이 업어다 건네주고 했다는데... 말년에 가세가 기운 것을 애달아 하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요즘 세상에 양반, 상놈 없다지만 그래, 타고 난 양반이 무슨 소용인가. 돈이 양반이지. "


소설 <반야>에는 낯익은 설정이 몇가지 있다. 먼저 책의 시간적 배경은 영조 때로 추정된다. 기가 세고 장수한 성군, 그 자식이 굶어 죽는 다는 암시, 노론과 소론이 대립을 이루는 배경이 독자로 하여금 영조 때 쯤인 것 같다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설정은 책의 내용이 100% 허구임에도 조선시대 어느 때쯤이라는 막연한 설정보다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또 한가지는 '사신계'라는 조직이 등장한다. '모든 인간은 동등하고 자유로우며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삶을 가꿀 권리가 있다'라는 강령아래 그 시대의 사회적 통념에 반하는 특별한 단체, '동학'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사신계'는 법을 초월한 조직이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특수 암살조직 비슷하기도 한데 크게는 고위 관직자들중에도 사신계원인 자가 있으면서 정치, 외교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든지 탐관오리나 사신계에 위협을 가하는 인물을 죽인 후 사고로 위장하는 일을 하고, 작게는 사신계원들의 사사로운 어려움을 해결하는 목적으로도 움직이는 흥미로운 조직이다.

다음은 등장인물에 관한 것이다. 주인공 반야는 뛰어난 미모에 가냘픈 이미지, 당차면서도 여리고, 당돌하면서도 생각이 깊은 약간은 복잡한 인물이다. 타고난 신기로 예정된 수순에 따라 사신계의 '칠요'라는 중책을 맡아 많은 것을 예언하지만 정작 동마로와는 어긋날 수 밖에 없는 사랑을 하고,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는 앞날을 보지 못하는 슬픈 운명을 가진 여인이다. 거기다 평생 반야를 흠모하며 지켜주는 동마로, 무녀의 삶을 사는 딸을 안타까이 여기며 버려진 아이들을 돌봐주는 반야의 어머니, 자신의 직위를 이용하여 백성들을 핍박하는 김학주등 사극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케릭터들이 많이 등장한다.


사신계의 강령과 조직도, 수련과정등에 관한 것은 작가가 많은 공을 들였을 것이라 짐작됨에도 책을 읽을 때는 겉돌수 밖에 없는 부분이었고, 반야가 사신계원들의 적극적인 권유에도 불구하고 불행의 씨앗을 일찌기 처리하지 못한 점, 어머니와 동마로에 관한 이야기는 매끄럽지 못하면서 조금 아쉬웠다. 어쩌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주지 않았을 때의 섭섭함일런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동안 눈을 뗄 수 없었던 것, 이 책에 높은 점수를 주는 이유는 사신계가 추구하는 세상에 대한 기대감과 무녀 반야에 대한 연민... 어떤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표지에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자신을 던져 악과 싸우는 피투성이 검투사 무녀 반야',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의 끝없는 투쟁의 대서사시' 우리 역사에서 인간을 동등하게 보지 않았던 시대일지라도 분명 다른 이름의 사신계와 또 다른 반야가 존재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작가의 주장처럼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을 뿐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현재를 사는 우리는 진정 평등한 세상에 살고 있는가. 정치인들과 기업총수의 비리, 폭력등 연일 듣고 싶지 않은 뉴스를 대할 때마다 왠지 또다른 천민과 평민, 중인과 양반 사회에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상류층, 중산층, 서민, 하층민의 기준은 결국 '돈'이 아닌가. 게다가 예전처럼 거의 대물림 되기까지 한다. 권력이 양반인 세상, 돈이 양반인 세상, 유전무죄... ? 시대와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반야가 묻는다.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동등하다, 마땅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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