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지다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오유리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초등학교 시절, 비오는 날 등교길에 하수구 덮개가 열린(이유는 알 수 없지만 ) 곳이 간혹 눈에 띄었는데 뻥 뚫린 하수구 위로 엄청나게 굵은 물줄기가 솟아 올랐다. 아이들 서넛이 둘러서서 실랑이를 벌인다. 솟아 오른 물줄기 위에 올라타면 만화에서 처럼 튕겨 올라갈까? 아니면 하수구로 빨려 들어갈까 하고 말이다.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그중 젤 어리숙해 보이는 아이에게 물줄기 위에 올라타 보라고 부추긴다. 단지 체구가 작다는 이유때문에 가장 적합하다며 아이들의 재촉은 계속된다. 만약 그 때 하수구로 뛰어들었다면... 지금 서평을 쓰고 있는 '나'의 존재는 없으리라. 일곱살 어린나이 였지만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결과에 대해 생각하는 신중함을 보였다. 즉, 물 위에 올라타는 신나는 경험이나 물에 빠졌을 때 두 가지 경우 모두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옷이 젖을 것이고, 몸에 하수구 냄새가 배일지도 모른다는 점. 그리고 가장 큰 두려움은 최종적인 결과로 엄마한테 혼난다는 것이었다.

<빠지다>는 사랑에 대한 8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미성숙한 어른들, 사랑에 서툰 어른들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무작정 도피여행을 떠나고, 애욕에 빠지고, 또다른 사랑을 위해 사랑을 배신하고, 서로를 가학함으로써 사랑을 확인하고, 불륜에 빠지는 슬픈 사랑이다. 책을 덮은 후 잠시 멍~한 상태에 빠졌다. 책을 읽으면서 이토록 내용에 공감하지 못하고 책의 주변에서 겉돌기는 처음이다. <빠지다>라는 책의 제목처럼 책 속에 빠지고 싶었는데... 딱히 어떤 말로도 책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저 안타깝다고 해야하나. 사람이 사람을 강요하고 사랑이 사랑을 부추기는 습하고 서늘한 감성 소설집 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 책 읽는 내내 습하고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개운하지 못하고 책과 내가 따로 노는 듯한 느낌, 진정 이것이 작가가 원했는 것일까? 참으로 묘한 책이다.

사랑을 몰랐던 시절, '내게도 사랑이라는 것이 찾아올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나의 첫사랑은 이러이러한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상상하면서 사랑을 주제로 습작글을 끄적이기도 하고 이왕 사랑을 할바에는 처음 보는 순간에 전율을 느끼는 운명적인 사랑, 미친듯이 빠져드는... 그러면서도 때론 슬프고도 아름다운 드라마틱한 사랑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사랑에 대한 환상은 그 시절 나의 감성을 풍부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로 오랜뒤에 현실이 될 때까지 '어른 세계'에 대한 동경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금지된 사랑'은 누구에게나 달콤한 '금단의 열매'일 수 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을 통틀어 격정적인 사랑에 빠져보고픈 욕심은 누구나 품음직 하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독자가 공감할 수 있을만큼 자연스럽게 풀어나가기엔 지면이 너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매회마다 전후 스토리는 짧게 서술되고 주인공들의 현재 상황만 습하고 서늘하게 표현되었다. 사랑에 풍덩 빠져 유영하는 모습이 아니라 허우적 거리는 모습, '수렁'에 빠진 모습만 보인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서 우중충한 회색빛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까? 젊은 시절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행복과 아픔을 겪은 기억이 있다. 지금은 결혼을 했고, 아이도 있지만 사랑은 여전히 내게 핑크빛 설레임이다. '시간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좋겠어~' 서로를 품에 안은 연인들만큼 이 말이 절실한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시간은 멈출 수 없고,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현실속에서의 감정일뿐. 사랑은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의 결과에 책임지며, 두 사람의 미래를 함께 고민한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그 의미가 있다. <빠지다>의 주인공들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 에 가깝다.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대책 없는 사랑, 그래서 더욱 서늘하다. 절제되지 못하고 책임감 없는 사랑은 우산을 들고 지붕에서 뛰어내리는 어린 아이의 유치함과 다 르지 않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빠지고 싶지 않은, 빠져서는 안되는 사랑에 대한 경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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