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밝은세상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최근들어 절실히 느낀다. 어릴 때 가정이나 학교로 부터 받은 교육을 통해 '고정관념화'된 사고는 어른이 되어서도 쉽게 떨쳐버리기가 어렵다는 것을.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때는 학교 운동장에 '이승복 동상'이 있었고 '모의 간첩훈련'이 실시되었으며, 명절때면 북한군이 늑대로 그려진 만화영화를 방송했다. 같은 민족끼리도 이러할진데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서는 어떠하랴. 할머니로부터 일제치하의 끔찍했던 현실을 직접 듣고 자랐고, 부모님들은 해방직전에 태어나 격변의 한국사를 몸소 겪으신 세대다. 일제 강점기때 우리 나라를 짓밟은 것도 모자라 민족의 비극인 6.25를 발판삼아 경제선진국으로 도약한 일본, 생각할수록 파렴치하고 괴씸하기 짝이없다.

고백하건데 일본 소설 읽어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20대 초반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책을 읽었던 시기에는 주로 고전 명작이나 한수산, 양귀자, 이문열님등 한국작가의 작품세계에 빠져 살았고 이따금씩 전여옥님 <일본은 없다>, 이어령님 < 축소지향의 일본인 그 이후> 라는 책을 통해 일본 사회를 엿보았을 뿐이었다. 최근에 시사프로였던가... '한국의 20대 일본 소설 읽는다' 라는 제목을 보고 첨엔 맘이 좀 그랬다. 나 자신의 책에 대한 편식은 마치 책상 한가운데 줄을 긋고 학용품이 넘어올때마다 교실 구석으로 휙~ 던져버리던 초등학생처럼 유치했던 것은 아닐까? 지금에야 느끼는 것이지만 어린시절 내가 가장 아끼던 샤프에는 Made in japen 이라는 문구가 찍혀 있었다. ^^;;

책에 대한 나의 편견을 깨뜨리고 싶었다. 그래서, 일본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에쿠니 가오리, 츠치 히토나리,구로다 겐지,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을 한권씩 읽었다. 가볍기도 하지만 깔끔하고 담백한 맛이 난다. 책한권만으로 그 작가의 작품세계를 모두 알 순 없다. 한권의 책으로 나를 광팬으로 만든 작가도 아직 못만났다. 그러나, 그 책들을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선 조금 알것 같기도 하다. 이번엔 요시다 슈이치다. 상복이 많은 작가라고 많이들 띄워준다. 대표작이라는 <동경만경>, <캐러멜 팝콘> 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어쨌거나 내가만난 그의 첫작품은 <나가사키> 였다.

미무라가의 3남 2녀중 차녀인 치즈루는 남편과 사별하고 친정으로 돌아온다. 치즈루의 두 아들 šœ과 유타, 이 이야기는 5학년 šœ의 눈으로 바라본 야쿠자 집안의 떠들썩한 풍경에서 시작한다. 문신이 새겨진 덩치큰 남자들이 날마다 술판을 벌이고 수발하는 여인들이 뒤섞여 분주했던 집안은 시대적 상황이 변함에 따라 점점 몰락하게 되고, šœ은 야쿠자 세계에 대한 동경과 내면에 존재하는 예술적 감수성 사이에서 갈등하고, 나가사키를 떠나고 싶은 마음과 고향에 대한 미련으로 갈등하고, 어머니기에 앞서 여자이기를 선택한 어머니 치즈루에대한 애증으로 고통스러워하며 점차 청년으로 성장해 간다.

"떠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조용히 남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지. 어딘가로 가려고 결정하면 장래가불안해지고, 남겠다고 결심하면 나중에 떠나지 못한 걸 후회하게 될 것 같아 또 불안해지더군." "젊었을 때는 무슨 일이든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왠지 인생에서 진 것 같은 패배감이 드는데, 실제로는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더라는 말이지. p. 178,179

새벽녘 차를 타고 시골길을 달려본적이 있는가?
희뿌연 안개가 자욱하고 여기저기 김이 무럭무럭 피어 오르는 한폭의 그림같은 풍경, <나가사키>는 그런 시골냄새가 난다. 비포장도로, 깜장고무신, 졸졸 흐르는 시내가 눈에 선하다. 너무나도 낯익은 정서적 공감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기존의 일본소설에 심취한 이들에게는 <나가사키>가 낯설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후한 점수를 주고싶다. 야쿠자가 등장함에도 그다지 요란스럽지 않은 점, 지루한듯 보이는 일상 속에서도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주인공들의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점, 역자의 말을 빌리자면 '요란 하지 않은 담담한 묘사, 객관적인 시각을 잃지 않는 절제의 재능'이 느껴진다. 조용하고 잔잔한 흑백영화같은 내용으로 60년대에서 80대를 걸친 시대적 배경, 가속화되는 도시화와 대비되는 농촌의 현실이나 인간의 가치관의 변화등을 떠올리면서 감상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 참고로 우리 영화중에 <집으로>같은 느낌, 같은 느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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