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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거울을 본다.
그 거울 안에는 ‘내가 보는’ 내가 있다. 어떤 날은 예쁘고, 어떤 날은 암담해 보이고, 어떤 날은 거울 안의 내 눈을 똑바로 볼 수 없는 내가 있다. 거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내 얼굴에 흠이 있다면 그대로, 내 얼굴에 광채가 나면 또 그대로, 내 눈에 슬픔이 담겨 있다면 그대로 보여준다.
‘내가 보는’ 거울 안의 나는 언제나 다른 모습이지만, 본질은 결국 나다. 그대로의 나다.
여기 한 가족이 있다.
스스로를 스스럼없이 막장이라 부르는 가족이다. 보고 있으면 한숨 밖에 나지 않는 그런 가족이다.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가 어쩜 이렇게 제대로 된 삶을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 어쩜 이렇게 구질구질하고, 징글징글하게 살고 있는지...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스스로 막장이라 인정했으니, 내가 콩가루 집안이라고 비웃어도 하나도 안 미안해질 정도다.
그런데.. 이 가족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마음에 남는 것이 있다. 그냥 묵직하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뾰족한 무언가로 나를 콕콕 찌른다. 아, 뜨끔해.
다시금 책을 쳐다본다. 표지의 가족들이 나를 보고 있다.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나에게 자신들을 비웃을 자격이 있는지 묻고 있는 것만 같다.
집을 떠난 지 이십여년 만에 우리 삼남매는 모두 후줄근한 중년이 되어 다시 엄마 곁으로 모여들었다. 일찍이 꿈을 안고 떠났지만, 그 꿈은 혹독한 세상살이에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p39)
신도시 외곽, 낡은 연립주택들 가운데 하나인 엄마의 집에 이들 삼남매가 다시 모이게 된 것은 이렇게 삶에 한번 실패하고 난 뒤였다. 첫째 오한모는 전과 5범으로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 듯 하다 캄보디아로 라텍스 사업을 벌여 떠났다가 쫄딱 망하고 엄마의 집으로 슬그머니 들어와 눌러 살고 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둘째 오인모는 영화감독이었지만 한 편의 영화를 제대로 말아먹어 제작사 하나를 파산시킨 후 영화계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힌 인물이다. 아무도 그를 원하지 않았다. 세간도 모두 팔고 집을 비워달라는 최후통첩을 받아든, 낭떠러지 위에 선 위태로운 그에게 엄마의 ‘ 닭죽 먹으러 올래?’ 란 말은 구원의 메시지였다. 그렇게 그도 닭죽을 핑계로 엄마의 집에 눌러 앉는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셋째 미연도 바람을 피우다 이혼을 하고 딸 민경과 함께 엄마의 집으로 들어온다.
칠순을 넘기신 엄마, 쉰 두 살, 마흔 여덟 살의 아들, 모두 중년을 넘겨 모이게 된 이 가족의 평균 나이는 사십 구 세이다. <고령화 가족>의 탄생이다.
혹독한 세상살이에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나서 모인 그들이었지만, 그렇게 모여서도 서로 보듬고 상처를 쓰다듬으며 위로를 나누기는커녕 혹시나 자신의 영역에 불이익이 있을까 으르렁대기 바쁘다. 하여튼 이 가족 구성원들, 나이도 먹을만치 먹고, 인생도 살만큼 산 것 같은데 같이 모여 살게 된 후에도 유치한 싸움과 반목,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도대체 왜 그들은 이렇게 아웅다웅하는 걸까? ‘살아있음’을 느끼려는 몸부림같은 것인가?
왜 상어도 지느러미를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물에 떠서 살 수 있다질 않는가. 이 가족도 그렇게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외삼촌이란 사람은 조카가 담배를 피우는데 혼을 내지는 못할망정, 그걸 빌미로 조카에게 용돈을 타낸다. 바람피워 이혼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미연에게는 또다른 남자가 생겼다. 미연의 딸, 민경은 가출을 하고, 이 모든 사건들이 얽히고 설켜 그것을 계기로 저 아래 기억의 맨 밑바닥에 가라 앉아 있던 가족의 복잡한 과거사가 두둥실 수면으로 떠올라 봉인해제되어 버린다. 그 진실이라니~ 하, 쳐다보고 있기도 민망하다.
그런데도 왜 나는 이런 막장 드라마를 끝까지 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길 즈음, 이들은 ‘회심의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깔끔한 한방으로 말이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운 나머지, 다시 알코올 중독의 늪에 빠져들거나, 서로 슬금 슬금 피하거나, 원망만 하던 가족들이었지만, 가족은 가족인 법!
이 총체적 난국을 타개하고자 가장 먼저 나선 것은, 밥버러지, 인간 망종이라 괄시받던 첫째, 오한모 일명, 오함마였다.
이 가족 중에 가장 싫었고, 눈살 찌푸리게 하는 주범이던 그의 인생이 ‘ 그동안 헛살진 않았네’ 라는 생각까지 들게 만드는 반전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면서 같이 웃음지으며 ‘ 인생이란, 참 알수 없는 것’ 이란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함께 살기 전까지 가족에 대해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던 둘째 인모도, 가족 속에서 대화하고, 살을 비비고 부대끼며 살아 보면서 무능하고, 상처주고, 불명예스럽다 느껴왔던 가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가족을 위해 무언가 해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되고, 어설픈 자기 합리화를 위해 만들어낸 가공의 기억을 진짜라 믿으며 살아온 자신의 삶을 바로잡으려 한다. 그의 깨달음을 보며 아, 그래 나도 요즘 이런 것을 느끼고 깨달아가고 있어...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비상을 위한 도약 한번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나이든 자식들이 사고를 치고 집에 돌아와도 고기를 사다 먹이며 힘을 북돋우는 엄마, 게으르고 무책임하지 않게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지만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아버지, 변변한 직업 하나 없이 부모에게 얹혀사는 자식들......
이 ‘고령화 가족’은 거울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있는 우리 가족, 그 속의 내 모습일지 모르겠다. 이 책은 거울이었다. 그래서 거울에 그대로 투영되는 너무도 현실적인 가족의 모습에 지레 뜨끔하고 불편해 하는 것이겠지.
<고령화 가족>을 통해 나는, 늙어가는 부모를 앞에 두고 내가 깨달아 가는 것들, 나이들어 가면서 느끼게 되는 형제간의 묘한 의리와 동질감, 어긋나 버리기도 하지만 결국은 서로를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되는 낯간지러운 가족의 사랑을 똑바로 응시하게 되고 만다. 가족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새삼 확인하게 되는 인모처럼 결국 징글징글해도, 지긋지긋해도 가족의 굴레 안에서 안도하고 행복을 찾아가려 하는 나를 보는 것이다.
나에 대한 기대가 부서져 산산조각난 뒤에도 그들은 나를 버리지 않았고 나 자신이 나를 포기한 뒤에도 그들은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p253)
인모의 말처럼 가족 안에서는 아무도 실패자가 아니었고, 서로 포기하지 않았으며, 누구도 약하지 않았고, 누구나 행복해질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제대로 살지 않았다고, 실패하고 돌아왔다고 가족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며, 또 인생의 끝도 아니었다.
한바탕 난장을 펼치고 난 후, 이 고령 가족은 행복해진다. 아슬아슬 밑바닥까지 내려가지 않고, 자존심이라는 선을 지킨 덕분에 발견하게 되는 신세계요, 행복한 결말이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똑같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불행하다.’ (p128) 는 불행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행복에 대한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실, 행복이 별거인가, 더불어 인생이 뭐 별거였던가.
진정 행복한 삶이란, ‘초라하면 초라한대로 지질하면 지질한대로 허용된 삶을 살아’ ‘이전보다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일지 모른다.
내게 주어진 인생을 살아내는 것의 중요함,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는 가족의 소중함을 이 책을 통해 다시금 깨달았다. ‘그대로의 나’로 세상을 살아갈 용기 한줌을 얻은 것만 같아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