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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이 너무 많다 ㅣ 귀족 탐정 피터 윔지 2
도로시 L. 세이어즈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0년 3월
평점 :
셜록 홈즈.
영국 런던 베이커가 221-B번지에 살고 있다는 이 유명한 탐정에게 어린 시절 마음을 쏙 빼앗긴 후 추리 소설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렇게 알게 된 세계에서 나는 미스 마플, 에르큘 포와로, 서점에서 일하며 사건을 해결하는 교코와 다에, 할머니 탐정단 글래디와 글래디에이터들, 김전일, 코난 등 다양한 탐정들을 만났다. 내가 만났던 그 사람들은 자신은 절대로 잡히지 않을거라 안심하고 있던 범인을 끈질기게 찾아내었고, 어려운 다른 사람을 위해 몸바쳐 사건을 해결하는 멋진 사람들이었다. 거기다가 어찌나 똑똑하고, 예측할 수 없는 매력을 갖고 있던지! 탐정들을 생각할 때면 감탄 뿐 아니라 동경의 마음까지 절로 생긴다.
그렇다해도 나에게 이 멋진 세계를 알려준 셜록 홈즈는 언제나 내 마음 속 첫 번째! 였다.
지금까지는 그래왔는데... 그랬는데..
셜록 홈즈의 매력에 비견되는... ‘귀족 탐정’이라 불리는 새로운 탐정이 등장했다.
셜록 홈즈와 같은 시기에 피카딜리 110번지에 살고 있었으며 공작 집안의 둘째 피터 데스 브레든 윔지경 되시겠다.
자신만만,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는 듯한 자심감을 온 몸에 두르고, 하인과 만담같은 대화나 나누고, 아름다운 여인에게는 바로 바로 마음을 빼앗겨 자신도 모르는 행동을 마구 하는 이 고귀한 귀족을 보면서 살짝 미소짓지 않을 사람, 누가 있을까.
분명 같은 시대를 살고 있어서 그런지 셜록 홈즈와 비슷한 듯, 비슷한 듯... 느껴지다가도, 두 사람을 구분짓게 하는 또 다른 매력이 존재했다.
애인에게 차인 후 마음을 추스르려 코르시아로 휴가를 가있던 피터 윔지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바로 자신의 형인 덴버 공작이 살인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피해자는 덴버 공작의 여동생-물론 피터 윔지경에게도 여동생인 메리양의 약혼자인 데니스 캐스카트 대위라는 것이었다. 눈치 빠른 하인 번터는 자신의 주인을 위해 덴버 공작에게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경로를 미리 알아봐 두었고, 그렇게 피터 윔지경은 실연의 아픔을 달랠 시간 없이 사건 수사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미리 알아두어야 할 것은 ‘사건 수사’라 해서 CSI라는 미국 드라마에서 봐왔듯이 지문 검사, DNA검사 외에 각종 첨단 장비들을 사용하는 수사를 생각해서는 안된다.
책 속의 시대는 1920년대... 영국의 신사들은 아름다운 여인들에게 신사의 매력을 발휘하고, 말투에서 고귀한 신분을 나타내며 아직은 순진한 사람들이 있는 시절이란 말이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탐문 수사와 하나의 단서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꼼꼼함, 꼭 범인을 잡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같이 ‘기본에 충실한 수사’이다. 우리의 피터 윔지경.
두려움에도 꺾이지 않는 의지와 누구에게나 통하는 ‘말빨’, 영국-프랑스, 바다건너 뉴욕까지 이어지는 끈질긴 수사를 벌여 결국 사건을 해결해 내고야 만다. 올레!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애마냥 즐거웠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오래된 책에서만 볼 수 있는 고풍스러운 단어와 표현들이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이다.
‘야성적 아름다움’ ‘ 고귀한 이유’ ‘ 불결한’ ‘ 위엄이 떨어진다 ’ ‘정중한 거절을 정중한 수락으로 바꿔 ’ ‘활력이 절정에 이른 젊은이’ ... 중간 중간 삽입된 시의적절한 시구와 고전은 또 어떻고.. 친구들 앞에서 짐짓 도도하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경건하게 시를 읊던 앤 셜리가 이런 마음이었을까..
독특한 장소와 멋진 시절이 합쳐져 만들어내는 근사하면서 환상적인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사건이 해결되고, 헤어질 시간이 다가온다. 안타까움에 탄성이 절로 나오게 된다.
사건은 멋지게 해결이 되었고,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 고귀하신 피터 윔지경을 다른 책으로 만나 볼 수 있다는 게 위안이 된다. 오랜만에 처음 내가 추리소설을 읽었을 때의 기분으로 즐겁게 책을 읽었다. 아니,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한 기분도 든다. ‘추리’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진, 복잡하고 지저분한 사건과 피와 폭력이 난무하는 수사가 아니라 깔끔하게 사건이 해결되는 정통 추리 소설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왜 갑자기 그 시절이 부럽게만 느껴지는 걸까? ‘추리의 초심’ 이 되어줄거라 생각되는 <증인이 너무 많다>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