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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의 라틴화첩기행 ㅣ 문학동네 화첩기행 5
김병종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접하는 형식의 기행문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인지 인상 깊은 기행문이었다고나 할까. 처음으로 보는 그의 그림은 단순함에서는 이중섭과 닮았고, 색감은 라틴의 느낌이 물씬 풍겨 나온다. 그림과 함께 읽는 남미의 모습은 그래서 더 생생하고 감각적이다. 글은 또 어떤지…
“ 폐허 같은 어두운 건물 안쪽에서 눈을 빛내고 있는 고양이며 아랫도리를 벗고 다니는 아이들. 키 큰 나무 아래 희미한 불빛, 웃통을 멋고 두런두런 둘러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어둠은 화선지에 스미는 먹물처럼 쿠바 음악의 모태인 손(Son)의 가락에 자연스럽게 젖어든다. “ (p59)
그림만큼이나 생생함이 전해지는 글이 아닐 수 없다. 글을 읽고 있으면 남미 특유의 후덥지근하고 끈적끈적한 공기 속에서 세상 모든 일상을 예술처럼 살아가고 있을 사람들의 모습이 저절로 상상되곤 했다. 쿠바, 멕시코,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페루, 각 나라의 특징을 잘 잡아서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쿠바의 체 게바라, 헤밍웨이, 멕시코의 프리다 칼로, 브라질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삼바, 칠레의 이사벨 아옌데와 파블로 네루다, 마지막 페루는 쿠스코, 마추픽추, 리마. 그동안 ‘남미’ 안에 모든 것이 뒤섞여 있었다면 이번 책을 통해 뭉뚱그려진 ‘남미’가 아닌 각 나라별로 특징에 따라 나뉘어져 분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
여행자의 입장에서 쓴, 여행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담긴 그의 문장 하나하나가 마음에 와 닿고, 공감을 불어 일으킨다. 나역시 프놈펜이라는 새로운 생활에 동화되지 못하고 여행자의 시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아바나 거리를 10분만 걷는다면 누구나 곤궁의 기미를 읽게 된다. 아무리 원색의 판넬로 붙여놓아도 어둡고 눅눅한 안쪽으로부터 스며나오는 가난의 냄새만은 가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활기에 차 있고 사람들의 표정은 밝다. 그뿐인가 춤추고 노래한다. 스파이는 아니지만 나도 이해할 수 없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p103-4)
(p118)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도시에서 온 나. 낯선 타인은, 특히 여행지에서의 타인은 모두 경계 대상이라고 학습받은 쪼잔한 남자. 입술을 달삭였다. 바보 같으니……
책을 읽으며 이렇게 공감되기는 또 오랜만이다. 나는 남미의 거리를 묘사한 글을 눈으로 읽으며 지금, 프놈펜의 내 마음이라고 해석한다. 프놈펜에서 내가 지내고 있는 타운 하우스를 벗어나면 바로 현지인들의 거리가 펼쳐진다. 궁핍해보이고, 혼란스럽고, 지저분한 거리, 하지만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당당하다. 주눅들고 두려움에 떠는 건 오히려 나일뿐. 정말 바보 같으니……
이 글을 읽으면서 프놈펜에 있는 내 마음을 이제사 알아챘다. 남미를 표현한 글에서 내 상황을 알아버리다니… 이런 묘한 공감으로 인해 나는 이 책이 마음에 들어버렸다.
멋진 그림도 감상하고, 뜨거운 남미의 이야기도 듣고, 덧붙여 시대와 나라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덤처럼 느껴지는 책이다.
매혹적인 라틴의 세계에 나도 가보고 싶어지게 하는, 같은 일정으로 같은 장소에 가보고 싶어지게 하는 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