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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 탐정 동물기
야나기 코지 지음, 박현미 옮김 / 루비박스 / 2010년 5월
평점 :
“파브르 곤충기”와 함께 청소년 필독도서로 항상 선정되는 “시튼 동물기”의 저자 "어니스트 톰슨 시튼"이 사실은 셜록 홈즈와 비견될 만한 명탐정이었다? 그저 어린이들 신문이나 잡지 흥밋거리 기사로나 나올법한 이 독특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야나기 코지의 “시튼 탐정 동물기(루비박스, 2010년 5월)”을 읽고 나서는 그럴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즈 신문기자인 "나"는 시튼의 "자서전" 서평 기사를 쓰라는 지시를 받고, 자서전에 담지 못했던 에피소드 한 두 개 정도를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시튼을 만나러 온다. 시튼은 “나”를 만나자 마자 내가 편지를 부치려고 우체국에 들렸다 온 사실을 맞추고, 놀란 나에게 구두 테두리에 붙은 붉은 색 흙과 오른 쪽 새끼손가락 뿌리의 바깥 쪽에 묻은 잉크 얼룩을 보고 추리해냈으며, 그것이 가능한 이유가
"오랫동안 야생동물과 접촉하며 살았던 탓인지. 나도 모르게 자그마한 일들을 관창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이 부근의 지형이나 식물, 흙의 종류 등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들어와 있고, 또 그런 것들을 보면 반사적으로 상대의 행동을 추리해 버립니다. 그러지 않으면 야생동물이란 것은 절대로 진짜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니까요"
라고 밝히면서 동물기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인 “늑대왕 로브” 이야기의 이면에 감춰진 놀라운 미스테리를 “나”에게 털어놓는다. 이 이야기를 자서전 서평에 곁들어 신문에 소개하자 큰 인기를 얻게 되고, 후속편을 쓰라는 편집장의 성화에 “나”는 또다른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시튼을 다시 찾아오게 되고, 시튼은 따뜻한 웃음과 함께 “나”에게 동물과 얽힌 7 편의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저 동물학자이자 “동물기”를 저술한 유명한 작가 정도로만 알고 있던 “시튼”을 작가는 셜록 홈즈에 버금가는 명탐정으로 재탄생시켜 기발하면서도 재밌는 이야기를 창조해냈는데, 작가는 자신이 창조해낸 시튼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어니스트 톰슨 시튼 씨, 세상에 알려진 <시튼통물기> 시리즈의 저자이다. 시튼 씨를 방문할 때마가 항상 놀라게 된다. 빠릿빠릿한 동작과 안경 너머로 생기있게 움직이는 갈색 눈동자, 무엇보다도 유연한 사고와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발상은 도저히 80세 노인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놀라운 것은 시튼 씨가 때때로 발휘하는 뛰어난 추리력이었다. 보통사람이라면 놓쳐버리고 마는 아주 세세한 것을 한눈에 파악하여 대담하고도 정밀한 논리를 그 자리에서 세워버리는 것이다. 시튼 씨에 의하면 야생동물과 오랫동안 가까이 하면 그들이 남긴 아주 작은 흔적을 관찰하고 그것으로 동물들의 행동을 추리하는 버릇이 자연스럽게 생긴다고 한다.
책에서는 7편의 에피소드가 소개되고 있는데, 매 편 마다 동물들, 즉 늑대, 고양이, 젖소, 까마귀, 스컹크, 곰, 다람쥐가 등장하여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 의인화된 동물이 의도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학자인 시튼 만이 발견해낼 수 있는 동물들의 생태나 습성 형식으로 주어진다 -, 누구보다 예리한 관찰력을 가진 명탐정 시튼은 멋지게 해결한다. 시튼은 사건의 내용과 주요 단서들을 들려주고는 “나”에게 의견을 묻는데,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사건을 전말을 들려주는 형식은 이미 코난도일이나 애거서 크리스티의 단편 추리소설에서 볼 수 있었던 익숙한 방식을 취해 마치 고전 추리소설을 읽는 흥취를 느끼게 한다. 책 말미에 포함되어 있는 해설을 읽어보면 이처럼 역사상 위인이나 유명 소설 주인공을 차용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꾸미는 것을 “파스티슈(Pastiche)"라고 부른다는 데, 원작의 스타일, 관습, 모티브를 뒤틀고, 비웃고, 비아냥거림으로써 웃음을 만나는 풍자적 모방인 ”패러디(Parody)"나 원작자의 존경의 뜻으로 작품의 일부를 인용하거나 비슷한 설정을 하는 “오마주(Hommage)"와는 남의 작품 속의 스타일이나 아이디어를 과감히 가져와 새로운 이미지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구분된다고 한다. 작가는 이런 파스티슈 미스터리로 이미 트로이 발굴로 유명한 하인리히 슐리만이 등장하는 "황금의 재", 진화론의 찰스 다윈이 등장하는 "시작의 섬", 마르코 폴로를 소재로 한 "백만의 마르코" 등을 집필한 바가 있어 작가에게는 낯익은 시도로 보여진다. 이런 파스타슈 작품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18세기말 정조 치세를 배경으로 박지원, 홍대용, 유득공 등 젊은 실학자들의 이야기를 추리소설로 엮어낸 김탁환의 “백탑파” 연작이나 정약용을 둘러싼 살인사건을 그린 김상현의 “정약용 살인사건”, 또한 같은 인물인 정약용이 명탐정으로 등장하는 케이블 TV 드라마인 “조선추리활극 정약용”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80년대 팬더 추리물 시리즈로 유명했던 해문출판사의 “세계의 위인은 명탐정(김가형 엮, 1982년 12월)”이 떠올랐는데, 네로 황제, 마릴린 몬로 등 유명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추리 퀴즈를 내고, 독자가 맞혀보게 하는 어린이들을 위한 추리 퀴즈집으로 여기서도 위인들이 명탐정으로 등장해 사건을 해결한다는 점에서 이 책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비록 기발한 트릭이나 반전은 없지만, 어린 시절에 읽었던 “동물기”의 저자 “시튼”을 명탐정으로 새롭게 다시 만나니 “동물기”를 읽고 나도 동물학자가 되겠다는 생각에 집에서 키우던 닭의 관찰일기를 열심히 썼던 어린 시절 추억을 새록새록 떠오르게 하고, 오랜만에 고전 추리소설의 읽는 맛을 느끼게 해준 재밌는 책이었다. 야나기 코지 작품은 이 책이 처음이었는데, 이 작가의 대표 작품이라는, 도서관에서 괜히 제목만 보고 피식 웃고는 고르지 않았던 “소세키 선생의 사건일지"를 이번 주말에는 빌려서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