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 사냥꾼 - 유쾌한 과일주의자의 달콤한 지식여행
아담 리스 골너 지음, 김선영 옮김 / 살림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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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과일을 즐겨하지 않았었다. 풍족하지 않았던 가정 형편상 과일은 비교적 사치스러운 먹을거리였기도 했지만, 객지에서의 오랜 자취 생활에서 과일은 항상 냉장고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처지 곤란한 음식이었다. 과일을 좋아하게 된 것은 결혼을 하고 나서 원래 과일을 즐겨 했던 아내가 꼬박꼬박 챙겨주면서부터였다. 식사를 배불리 하고 후식으로 뭘 또 먹는다는 게 영 익숙치 않아 처음에는 먹는 게 영 부담이 되었지만 맛을 들이고 나니 식사 후에는 자연스레 과일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정말로 과일이 좋다는 것을 제대로 느끼게 된 것은 거봉 포도 재배지로 유명한 천안시 입장면에 직장을 잡게 된 후 부터인데 포도 수확 철에 회사와 담 하나로 이웃하고 있는 포도재배 농가에서 갓 딴 포도를 맛본 후 였는데, 농약도 치지 않아 씻을 필요 없는 포도를 나무 줄기에서 갓 따내어 입안에 넣었을 때 입안 가득 퍼지는 그 달콤함과 과육의 싱그러움이란 그 어떤 가공식품이나 육류에서는 맛볼 수 없는 바로 천상의 맛 그 자체였다. 비록 비싸서 자주 맛볼 수 는 없지만 포도를 수확하는 9월이 되면 맛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 거릴 정도로 설레임을 느끼는 것을 보면 그 맛에 단단히 반하긴 반했나 보다. 과일의 문외한조차 포도가 익는 계절이 오면 그 맛을 떠올리면서 침이 고이는 데 과일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사람들이라면 과일이 풍성하게 익어가는 계절인 여름과 가을은 일년 중 가장 즐겁고 행복한 그런 시간들일 것이다. 그런데 그저 먹어도 그만, 안먹어도 그만이 아닌 과일에 자신의 인생을 바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소개하는 작가가 있다. 과일탐정, 과일 주의자, 과일사냥꾼으로 불리우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과일에 대한 온갖 상식을 소개하는 “과일사냥꾼”(살림출판사, 2010년 7월)의 저자 아담 리스 골너가 그 작가이다.  

  작가 소개글을 보니 작가는 세계를 여행하며 숨겨진 과일세계와 각국의 문화에 대해 기고하는 칼럼니스트로「뉴욕 타임스」등 각종 언론 매체에 과일 관련 글을 활발하게 기고하고 있으며, 데뷔작인 이 책으로 세계 유수 언론 매체의 극찬을 받았고,'맥오슬런 최고 저작상'을 수상했다고 하니 과일에 대해서만큼은 진정한 매니아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책을 읽어 보면 과일탐정, 과일주의자, 과일사냥꾼으로 불리우는, 작가보다 더한 열정으로 과일에 푹 빠져 지내는 범상치 않은 사람들이 수두룩한 것을 보면 놀라울 지경이다. 책에는 이처럼 과일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인터뷰들과 과일에 대한 온갖 역사적, 사회적, 과학적, 문화적 상식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동안 그저 먹는 음식으로만 알았던 과일에 이렇게 다양하고 즐거운 상식들이 숨어 있다니 읽는 내내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오게 만든다. 작가는 머리글에서 인간이 자연과 교감하는 이유를 에리히 프롬이 만들었다는 생명애(biophilia) 이론으로 설명하는 데 죽음을 맞는 유기체는 생명체와 접촉하면서 자신을 보호하려 하며, 과학자들이 환자들이 자연이 가득한 녹지를 접할 경우 빠른 회복속도를 보였다는 증거를 인용하면서 생명애는 상호의존적인 생명체의 생존을 보장하는 진화론적 장치라고 추측하였다고 설명하면서 우리는 과일의 존재를 발견하면서, 자연이라는 숭고한 영역과 결합하게 되며, 그것이 바로 다양성을 사랑하는 생명애 체험이라 할 수 있으며 이 책은 과일에 대한 이야기이자. 과일과 인간 사이의 긴밀한 유대에 대한 이야기라고 소개한다. 그러면서 이 사랑에 흠뻑 빠져버릴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애교스런 경고를 하는 데 이 책을 읽다보면 작가 말대로 과일에 대해 흠뻑 빠지게 되는 읽는 내내 절로 과일 향기와 그 맛이 떠오르게 되는 착각과 환상을 경험하게 된다. 

작가가 소개하는 수많은 과일에 대한 이야기 하나하나가 흥미롭고 재밌지만 , 그중 가장 특이한 과일은‘숙녀과일 Lady Fruit' 을 뽑고 싶다. 여성의 골반 부위를 앞뒤로 빼닮은, 어찌보면 흉측할 수 도 있는 이 열매는 그동안은 라마야나(고대 인도의 대서사시) 전설과 멜라네시아의 창조신화에서나 볼 수 있는 가상의 과일로 생각되어 왔는데, 작가는 인도의 주술을 다룬 책을 접하고서 그 과일이 실재하는 과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인터넷과 각종 서적을 검색하면서 이 과일이 코코드메르coco-de-mer-라고 불리우는 실제 과일임을, 그동안 보아왔던 과일 중 단연코 제일 야한 모습의 과일로 이 과일을 소개하는 여행 안내서조차 “불경스럽다”고 언급할 정도로 그 생김새가 여성의 둔부와 앞모습을 꼭 빼 닮았는 것을 알게 된 작가는 인도의 세이셀로 날아가 이 과일을 실제로 맛보게 된다. 맛은 어땠을까? 작가는 맛은 순한 감귤 같고 산뜻했으며 원기가 느껴지는 소박한 단맛이었다. 코코넛과 비슷햇지만, 섹시한 맛이 났다고 밝히면서 아담이 이브를 맛보는 그런 경험을 느끼게 된다. 숙녀과일 외에도 신 맛을 만나면 황홀할 정도의 단맛을 느끼게 하는 “기적의 열매”와 그 열매의 상업화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각종 흥미로운 이야기들 , 이제는 세계인의 과일로 인기가 높은 “키위”가 사실은 중국의 야생 다래였으며 뉴질랜드의 나라 새를 뜻하는 마오리족 단어인 "키위"라는 이름을 얻게 된 재밌는 사연을 들려주기도 한다. 

 작가는 손에 넣기 힘든 보물이었던 과거에 비해 오늘날 너무나도 풍족해서 흔히 만날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생화학적 성장 억제제와 호르몬 억제제를 사용하면서 과일의 평균 저장 수명이 대폭 늘어나버린 과일 저장의 문제, 즉 에틸렌 가스 주입으로 빨갛게 만들어 버린 생기 없는 토마토, 역시 가스를 주입하고 합성 착색료로 범벅한 과일인 오렌지들과 제철에도 평균 이하의 똑같은 사과와 오렌지. 딸기만 들여놓는 '전 세계가 사시사철 여름'이라고 불리우는 현재 과일 유통의 문제를 꼬집는다. 또한 과일을 일종의 명상이나 종교 수단으로 여기는 단체들을 언급하면서 과일에 대한 이러한 집착은 어떻게 해서든 과일에 대해 모조리 알고 싶고 박식해지길 원하는 욕망으로, 선악과 열매를 맛본 이후 우리는 다른 나무의 열매에 눈을 돌려 영생을 찾으려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창세기에서 암시하듯 우리가 얻은 지식이 우리를 반드시 자유롭게 해주지는 않으며 오히려 그 노예가 되거나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고 경고하기도 한다. 

  최근 사람의 얼굴 한복판에 있는 장기인 “코”에 대한 역사적, 사회적, 과학적 탐구에 대한 책을 읽고서 어찌 보면 별날 수 있는 것에 대한 지적 탐구가 더 색다르고 흥미로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런 생각이 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 확실해졌음을 느끼게 되었다.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일반적이고 광범위한 백과사전식의 상식들은 더욱 쉽게 접하게 되었지만, 이렇게 하나의 주제에 대한 깊이 있고 전문적인 지식 - 물론 그러한 지식의 유용성이나 흥미는 각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 들을 접하기에는 아직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특히 우리가 자주 접하지만 오히려 피상적인 상식밖에 모르고 있던 과일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즐겁고 재밌는 책이었고, 평소에도 과일을 즐겨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색다른 지적 즐거움을 찾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읽어봐도 좋을 과일 상식 백과사전으로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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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 워킹 Book One : 절대 놓을 수 없는 칼 1 카오스워킹 1
패트릭 네스 지음, 이선혜 옮김 / 문학수첩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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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때로 말이 안 통하는 고집스런 사람이나 도통 자식의 속내를 이야기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답답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독심술이라도 익혀서 저 사람의 속내가 과연 어떤지 마음 속 소리를 듣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생각을 가감 없이 온전히 알 수 있다면 과연 어떠할까? 일견 남을 속이는 거짓이나 사기가 없어지고 오로지 진실만이 존재하는 정직한 사회가 될 것 같지만 왠지 사회가 더 삭막해지고 무서워질 것 같다. 남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이나 선의의 ‘하얀 거짓말’도 용납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진실의 무거움 때문에 거짓보다 더 혼란스럽고 심지어 더 공포스럽게 변하지 않을까? 페트릭 넥스의 “카오스워킹”(문학수첩, 2010년 7월)은 바로 이처럼 모든 사람의 생각이 가감 없이 들리는 것이 얼마나 공포스럽고 끔찍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토드가 사는 마을인 “프렌티스 마을”은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과 동물들의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마치 말처럼 들리는 “노이즈(Noise)"로 가득찬 세계이다. 따라서 굳이 말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자신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타인에게 들려지게 되니 자신의 생각을 감춘다는 것이 불가능한 그런 세계이다. 외계인인 스팩클과의 전쟁에서 그들이 퍼뜨린 신종무기인 노이즈 세균에 의해 생긴 이 질병은 항체가 없는 여자들은 전부 죽음을 맞이했고 일부 남자들만 살아남게 되었고, 토드는 이제 성년식을 30여일도 채 남기지 않은 그 마을에서 마지막 남은 유일한 미성년자이다. 어느날 마을 주민의 심부름으로 늪으로 사과를 따러 갔다가 토드는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누구나 지니고 있어야 할 노이즈가 전혀 들리지 않는 이상한 존재를 만나게 된다. 당황하여 마을에 돌아온 토드는 자신을 키워준 벤과 킬리언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벤과 킬리언은 당황하면서 어머니의 유품인 일기장과 배낭을 챙겨주면서 어서 마을을 떠나라고 종용한다. 토드는 영문도 모른 채 마을을 떠날 수 없다고 반항해보지만 마을 주민들이 총을 들고 벤과 킬리언의 집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는 질겁을 하고 마을을 떠나게 된다. 벤과 킬리언의 생사도 모른 채 그들이 알려준 이웃 마을로 떠나게 된 토드는 늪에서 노이즈가 전혀 들리지 않는 존재인 소녀 ”비올라“를 만나고 그녀를 죽이려고 하는 미친 남자 아론의 위협을 물리치고, 자신을 뒤쫓는 마을 주민들을 피해 늪을 가로질러 이웃마을인 파브랜치로 향한다. 자신의 마을과 달리 남자와 여자가 가정을 이루고 평화롭게 살고 있는 파브랜치 마을을 신기해하는 토드는 자신이 프렌티스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파브랜치 주민들에게서 까닭모를 적의를 느끼지만 당분간은 마을에 머무르기로 한다. 그러나 이내 자신을 추적해온 프렌티스의 군대에 의해 파브랜치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토드는 비올라와 함께 뉴월드 최초의 개척도시라는 헤이븐으로 향하게 된다. 

  인터넷, 문자, 네트워크 등 온통 소음으로 가득 찬 오늘날의 세상이 모티프가 되어 이글을 쓰게 되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어쩌면 지금 이 세상은 수많은 생각들과 주장들이 보이지 않는 전파라는 형태로 가득 메운 그런 세상일지도 모르겠다. 라디오나 핸드폰처럼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그런 전파를 집어낼 수 있는 능력을 인간이 가지게 된다면 아마도 이 책과 같은 상황이 지금 현실에서도 충분히 벌어지지 않을 까 생각해보게 된다. 지금도 하루에도 수십 수백건 씩 주고받는 메일이나 문자, 쪽지들, 인터넷 서핑 정보가 고스란히 각종 데이터 마이닝 업체들에게 고스란히 제공되고 있고, 범죄 예방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CCTV로 일거수 일투족이 낱낱이 들어나는 조지오웰의 빅브라더의 세계가 이미 우리 삶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작가가 묘사하고 있는 뉴월드 속의 “노이즈”나 별반 다름이 없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아직 1부 1권이라 지구로 생각되는 올드 월드를 떠나 뉴 월드에 사람들이 정착하게 된 사연이나 파브랜치 주민들이 토드에게 느끼는 적의의 근원인 프렌티스 마을의 정체, 토드의 어머니가 남긴 일기장에 담긴 비밀들은 밝혀지지 않아 앞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지, 어떤 충격적인 반전과 결말이 우리를 놀라게 할 지 등 이 책에 대한 평가는 3부작까지 있다는 전 권을 읽고 나서야 제대로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시리즈의 도입부인 1부 1권 만으로도 그 재미에 흠뻑 빠지게 하는 몰입도를 보여주는 것을 보면 후속권들이 더욱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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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삼국지
장연 편역, 김협중 그림 / 김영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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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의 최고의 책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내가 주저 없이 꼽는 책은 바로 “삼국지”이다. 내가 처음 삼국지를 읽은 것은 초등학교 4학년때 동화작가인 조풍연의 "소년판 삼국지(전 12권, 계림출판사)"였었다. 앞 표지에는 금장 입힌 삼국지 인물들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고 책 중간 중간 칼라 삽화가 그려져 있던 전 권 양장본인 이 책은 그 당시에는 꽤나 고급스러운 책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부모님께 처음 선물 받은 책이기도 했었던 터라 이 책 십 여번을 넘게 읽을 정도로 자주 읽었었고, 지금도 본가 책장 한 켠에 고이 모셔두고 있을 정도로 나에게는 보물과도 같은 책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삼국지에 대한 관심은 더 커져 정비석, 박종화, 김홍신, 이문열, 장정일 등 국내 유명 작가들이 펴낸 삼국지와 일본, 중국 작가들 작품들, 고우영, 박봉성, 일본 작가 등 만화로 나온 삼국지들, 주대황의 "반삼국지"처럼 삼국지를 변형시키는 작품들, 무협 스타일의 야설록, 검궁인의 삼국지, 각종 삼국지 관련 해설서, 코에이사의 게임인 "삼국지","진 삼국무쌍" 등에 이르기까지 “삼국지”라고 이름 붙여진 모든 장르의 컨텐츠들은 중년의 나이가 된 지금까지도 그 애정이 식을 줄 모르고 갈수록 더해가는 것 같다. 수없이 봐서 이제는 줄거리며 인물들까지 외울 정도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이렇게 삼국지에 열광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엮어내는 바로 그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유비, 조조, 제갈량 등 영웅들 뿐만 아니라 주목받지는 못하지만 개성이 강하고 저마다의 꿈과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조연급 인물들, 그저 몇 만 몇 십만으로 지칭되는 이름모를 군인들과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상처받았을 민초들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 엮어내는 그 거대하고 장대한 서사시는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읽을 때마다 새로운 재미와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이렇게 읽을 때마다 항상 새롭고 항상 즐거움을 주는 책이 또 어디에 있을까? 보통 10권 이상의 대하소설로 출간되는 삼국지를 그 정수만을 모아 한권으로 엮어낸 장연의 “한권으로 읽는 삼국지”(김영사, 2010년 6월)도 나에게 “삼국지를 읽는다”라는 가장 큰 즐거움과 재미를 맛보게 해준 그런 책이었다. 

 

   책은 삼국지를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을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에서 시작하여 사마염이 삼국을 통일하고 “진(晉)”을 세울 때까지를 그리고 있다. 과연 앞에서 말한 대로 10권 이상의 분량인 삼국지를 한권으로 어떻게 축약할 수 있었을까? 역시나 작가는 머리말에서 방대한 분량의 삼국지를 한권으로 축약하기란 벅차고 힘든 일이었지만 가능한한 원작에 충실했다고 자부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기존에 읽었던 삼국지와 비교하게 되는데, 유비와 제갈량이 만나는 삼고초려(三顧草廬)나 적벽대전에서 연환계를 펼치는 방통과 동남풍을 부르는 제갈량, 심금을 울리는 명문장(名文章)으로 꼽히는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 등을 빠짐없이 수록한 것을 보면 작가의 고심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작가가 “역사의 진실에서 벗어난 듯한 내용과 미신적인 부분은 과감히 생략했고, 반복되는 전투의 세세한 묘사도 가능한 한 압축”했다는 부분일 유비가 조자룡과 처음 만나는 장면, 관우가 조조의 만류를 뿌리치고 유비를 찾아 떠나면서 그의 무용(武勇)을 여실히 보여줬던 “오관참장(五關斬將)”, 삼국지에서 가장 기이하면서도 재밌는 에피소드인 도인 좌자(左子)가 조조를 골탕먹이는 장면, 제갈량이 남만왕 맹획을 마음으로 포섭하고자 벌인 “칠종칠금(七縱七擒)”의 장면들은 삭제되거나 간략하게 몇 단어로만 소개되어 있고, 원전 연의(演義 )에 등장하는 후대 문인들이 삼국지의 영웅들에게 헌사하는, 삼국지의 풍미를 더욱 높여주는 각종 시(詩)나 문장(文章)들은 생략되어 있어 다소 아쉽게 느껴진다.  

  물론 이 책만의 장점도 여럿 보이는데 작가가 머리말에서 밝혀 놓았듯이 책 곳곳에 등장하는 중국의 유명화가 김협중의 삼국지 그림들이나 삼국지의 고사성어들을 책 하단부 각주(各主)로 달고 지금도 종종 쓰는 삼국지 명언들과 연표를 부록으로 실은 점들은 장점으로 들 수 가 있다. 특히 각 장 말미에 실려 있는 “삼국지 깊이 읽기”가 이 책의 압권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가 그동안 삼국지를 읽으면서 느꼈던 의문들을 역사서와 소설들을 비교하며 해설하는 내용은 나처럼 삼국지 스토리라면 훤히 꿰고 있을 매니아들이 읽어도 재밌을 그런 내용들로 꾸며져 있다. 몇 몇 예를 들어보자면, 제갈량이 능력도 의심스럽고 기반도 없었던 유비를 택한 이유는 유표가 보잘 것 없는 인물임을 간파하였고, 자신의 형이 모시는 군주인 손권 주변에는 이미 장소와 주유 같은 쟁쟁한 인재가 넘쳐나서 자신이 크게 쓰일 자리가 없다고 판단했고, 상대적으로 훌륭한 인재가 부족해 경쟁상대가 없었고, 황실의 후손이라는 명분을 갖춘 유비가 제갈량에게는 더 적합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삼국지 최고의 맹장이자 고리눈에 밤송이 같은 수염으로 묘사되고 있는 장비는 사실은 최근 출토된 자료나 삼국시대 그림을 보면 수염이 없고 얼굴이 보름달 같으며 부드러운 표정을 보여주는 미남자이며, 그의 두 딸이 모두 후주 유선의 황후가 된 것도 그가 추남이 아니었음을 알려주는 증거라고 소개한다. 더구나 무식의 대명사였던 장비는 서예에 뛰어나 지금도 그의 글씨가 전해 내려오며 그림에도 재질이 있었다고 한다니 그동안의 상식을 한꺼번에 깨버리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이 외에도 주유가 평가 절하된 까닭 - 홍콩 영화배우 주윤발이 주유의 직계자손이란다 - 이나 조조가 황제가 되지 않은 이유,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고사성어로 유명한 제갈량이 마속을 죽인 이유 등등 흥미로운 사건에 대한 재밌는 해설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아직 삼국지를 접해보지 못한 청소년이나 여성들이 삼국지의 재미를 사전에 맛볼 수 있는 책으로는 제격이며, 나처럼 삼국지 매니아들도 오랜만에 삼국지의 재미와 감동을 되새겨볼 만한 그런 책이다. 다만 이 책만을 읽고 삼국지의 진정한 재미를 다 알았다고 이야기하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하니 본편이라고 할 수 있는 국내외 유명 작가들이 펴낸 책들을 꼭 읽어보길 권한다.  

   이제 다시 한번 삼국지를 읽었다. 이렇게 한 권으로 요약된 삼국지를 읽어도 그 재미가 쏠쏠한 것을 보면 아직 나의 삼국지에 대한 사랑은 식질 않았나 보다. 최근 국내 유명작가가 삼국지를 새로 써서 펴낸다는 소식에 벌써부터 반갑고 설레이는 것을 보면 삼국지는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내 인생의 최고의 책으로 꼽을 것이며, 내 아이들과 그 손자들에게도 꼭 읽히고 싶은 그런 책으로 남아있을 것임에 분명할 것 같다. 비록 실제 역사와는 다른 허구가 더 많은 그런 이야기지만 그 어느 역사서나 소설보다도 삼국지는 우리들에게 더 오래 기억되고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에 열광할 것이다. 삼국지의 분량이나 수많은 등장인물에 지레 겁먹고 포기해서 아직도 삼국지를 읽어보지 않았다면 당신은 인생에 있어 가장 즐거운 경험일지도 모를 하나를 아직도 누려보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겁먹지 말고 책을 펼쳐보라. 삼국지의 수많은 영웅들이 자신들의 모험에 당신이 동참해주길 손짓하고 있다. 그들과 같이 웃고 울고 같이 뒹구는 사이 당신도 어느새 삼국지의 매니아가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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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학교다 - 함께 돌보고 배우는 교육공동체 박원순의 희망 찾기 2
박원순 지음 / 검둥소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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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때는 입시 지옥이라고 고3 1년 남짓이 고생이었지만 지금 아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야”

오랜만에 만난 대학 선배가 술자리에서 내뱉은 푸념이다. 중학교 1학년 아들, 초등학교 5학년 딸 두 남매를 둔 선배는 집 대출금 이자보다 더 많이 지출되는 아이들 사교육비에 등골이 휠 것 같다고 말하면서, 최근 학원에 계속 빠지는 아들에게 왜 자꾸 빠지냐고 다그쳤더니 아이가 학원가는 것이 마치 지옥에 가는 것처럼 싫다고 울며 말하는 소리를 듣고 큰 충격에 빠졌었다고 털어놓았다. 우리 때는 그나마 고등학교 2, 3학년 대학 진학을 위해 코피 쏟으면서 공부했던 1년 남짓만 힘들면 되었는데, 지금은 초등학교 입학하자마자 전쟁이 시작되고, 수업이 끝나도 학원으로 내몰려 밤 11시, 12시가 되어서야 들어오는 아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전쟁이고 지옥일 거라고, 얼마나 힘들까 안쓰러워하면서도 주말이나 방학에 더 보낼 새로운 학원을 알아보고 있는, 속물처럼 변해버린 자신과 아내에게 화가 난다고 이야기한다. 고3 수험시절, 너무 힘든 공부에 나중에 우리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우리 아이가 우리 나이 때가 되면 입시 지옥도 없어지고, 정말 공부하고 싶은 아이들만 대학에 가고 진학하지 않은 친구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 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그런 세상이 반드시 올 꺼야 하던 20여년 전 우리가 가졌던 희망은 오히려 더 절망스럽게 변했고, 이런 상황이 2010년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와 우리 자식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천형(天刑)의 저주처럼 느껴지는 지금 과연 우리 교육에 희망이 있을까? 참여연대 사무처장, 아름다운 재단, 아름다운 가게 상임이사,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등 우리 사회 시민운동의 선도주자로 이름 높은 박원순씨는 이렇게 암울할 것 만 같은 우리 교육의 미래에 대해서 희망이 철철 넘친다고 소리높여 이야기한다. 그가 우리 교육의 희망의 단서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누빈 지난 4년간의 기록인 “마을이 학교다: 함께 돌보고 배우는 교육공동체(검둥소, 2010년 6월)”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말이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나와 선배가 느꼈던 교육의 미래에 대한 절망의 분위기 속에서 지난 몇 년동안 교육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마치 봄의 들판에서 온 생명이 일순간 돋아나는 것을 본 것 처럼 희망의 새순들이 곳곳에서 돋아나는 것을 보았고 바로 공교육에서 찾을 수 없었던 희망을 사람들이 대안교육에서 찾고 있었고, 대안교육은 서로가 네트워크를 이루고 교육에 큰 변화의 물꼬를 텄고, 공교육도 크게 변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런 교육 현장과 지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교육의 변화에는 수 많은 선구자들의 노고가 숨어 있으며, 지난 4년간 이런 분들과의 만남과 인터뷰를 통해 이제는 희망이 없다는 세상에 희망이 철철 넘쳐 흐른다고 자신에게 말할 수 있다고 털어 놓는다. 책에서는 우리가 각종 언론이나 방송에서 한번쯤은 들어봤을 대안학교들과 최근 공립초등학교에서 시작되면서 새로운 공교육 모델로까지 주목받고 있는 “작은학교”들, 학교 울타리 밖에서 전개되고 있는 지역사회기반의 아동 청소년 교육 공동체들, 새로운 교육 모델을 제시하고 실제로 교육 풍토를 바꾸기 위해 각종 활동을 벌이는 각종 단체 등 4가지로 나누어 지금 교육현장에서 활발히 벌어지고 있는 각종 교육활동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저 몇몇 언론에서나 방송에서 화제성 기사니 보도로 잠깐 소개되고 마는 일회성이겠거니 했던 이런 활동들이 실제로 저렇게 많은 학교나 단체들이, 저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니 놀라움이 들 정도였다.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수많은 학교나 단체 중에서 내가 살고 있는 지역(천안) 생활권인 아산의 “거산초등학교” 사례가 가장 눈길을 끌었다. 최근 아파트 단지 이웃 중에 한 분이 이 학교에 아이를 보내려고 지원했는데 대기자 수 가 너무 많아 힘들 것 같다고 걱정스러워 하던 말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서울의 유명 사립 학교같은 그런 사치스런 학교가 아닌가 생각했었는 데, 이 책과 궁금해서 들어가 본 이 학교의 홈페이지를 보고서는 그런 오해가 말끔히 가셨다. 이 학교의 홈페이지를 둘러보니 폐교위기에 놓여 있던 농촌의 ‘작은 분교’이었던 이 학교가 분교 통폐합을 반대하는 지역주민과 ‘작은 학교’ 살리기 운동을 추진하던 시민단체,  좀더 ‘다른’ 교육을 바라던 학부모들, 새로운 학교 만들기를 고민하던 교사들이 뜻을 모으면서 일선 공교육 현장에서 시도한 변화가 어떻게 뿌리내리고 어떤 파급효과를 불러일으켰는지를 하나하나 찾아볼 수 있었다 그저 교과서로만 만나볼 수 있는 교육들을 유기농 텃밭에서 채소를 심고 운동장에서 토끼와 개도 직접 기르고, 학교 뒷산에서 꿀도 채취하는 등 농촌 친환경을 활용한 생생한 체험교육을 받고, 아이들의 학업 성적으로 평가받고 일선 교육청에서 상명 하달식으로 지시만 받는 수동적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교사들이 교사회의를 통해서 자발적이고 민주적인 학교운영을 이끌고, 학생들이나 학부모가 그저 교육 대상이 아니라 교육의 주체로서 각종 교과 과정이나 교육 평가, 학교운영에 적극 참여하고, 나아가 지역사회의 전문가들이나 시민단체, 공공기관들이 학교 운영과 발전에 다함께 참여하는 이 학교의 여러 활동들은 바로 우리가 그렇게 꿈꿔왔던,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마을과 어우러진 학교” 그 자체였다. 첫 팝업창으로 뜨는 메시지가 이 학교에서 운영하고 있는 병설 유치원에 대기자 수가 너무 많아 더 이상 대기자를 받지 않겠다는 공지사항이니 이 학교에 대한 관심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책에서 소개하는 수많은 사례들로만은 아직 우리 교육의 미래가 희망차다고 판단하는 것은 금물일 것 같다. 충분치 못한 예산 지원에 따른 어려운 재정 상태, 이런 대안학교나 단체를 마치 외고나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처럼 또 다른 특목고로 오해하고 입학시키려는 학부모들, 이런 교육 운동을 이념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삐닥하게 보는 사람들 때문에 이런 교육활동이 진정으로 이 땅에 뿌리 내려 꽃을 피우고 결실을 맺기에는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특히 이번 정권들어 아이들 무상 급식문제를 두고 포퓰리즘이니 좌파니 하면서 색깔로 덧칠해버리는 정권의 작태에 어렵게 피어난 저 희망의 새싹들이 언제 다시 짓밟혀버릴지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이미 띄운 싹을 잘 가꾸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바로 학부형들인 우리들 몫일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우리가 나서서 더욱 동참하고 그들을 응원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아직은 기반이 취약하지만 전국 곳곳으로 확대되고 있는 이런 교육 운동은 마른 벌판의 들불처럼 언젠가는 전 교육 현장으로 확대되어 큰 성과를 거둘 것 이라는 희망을 우리 스스로가 반드시 실현시켜야 할 것이다. 지금 당장 우리들의 자녀가 저런 교육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기에는 여러 여건상 어려울 수 도 있겠지만 - 물론 지금 자녀들을 저런 학교나 단체에 보내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사실 그런 선택을 하기에는 주저하는 분들이 더 많을 것 같다 -  우리 자녀들의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게 되는 몇 십년 후에는 우리가 꿈꿨던 교육 천국이 이 땅에도 실현되기를, 더 이상 교육이 남을 짓밟고 나아가는 경쟁을 부추기는 그런 곳이 아니라 넘어진 자는 일으켜 세우고 뒤쳐진 자 앞서간 자 차별 없이 함께 어깨동무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참교육을 만나게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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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
김정현 지음 / 역사와사람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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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십 수년 간의 서울 생활을 접고 지방으로 내려오면서 가장 서운했던 것은 서울에서 만난 인연들과의 작별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서울에서 나의 젊은 시절인 대학시절과 졸업 후 10여 년 가까이의 직장 생활을 보냈던 터라 그 동안의 선후배들과 친구, 동료들과 이제는 떨어져야 한다는 아쉬움과 지방의 새로운 직장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다시 인간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그 부담감에 선뜻 지방으로 내려가기가 내키치 않았었다. 그래서 지방으로 내려와서 근 3개월 동안은 주말마다 서울에 올라가서 친구들을 만나고 같이 어울렸었다.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면서 서울행이 조금씩 뜸해지더니 이제 5년 가까이 된 지금은 바쁜 일상과 가정 생활을 핑계로 1년에 한 두 번 올라가기도 힘들 정도가 되었고, 이제는 서로들 삶에 지치고 바빠서 애경사 때나 얼굴을 겨우 볼 뿐 사실상 연락이 끊겨버린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멀리 있으면 멀어진다는 말이 남녀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동성(同姓)간의 우정에도 해당된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그래도 손가락이 부러졌는지 전화 한 통화 없고 모임에도 빼먹기 일 수인 내가 어쩌다 전화해도 마치 오랫동안 헤어진 이산가족을 다시 만나는 것처럼 반가워하는 친구들이 있다. 대학시절 좁은 하숙집에서 서로 살을 맞대며 살았던 소중한 친구들, 이제는 번듯한 기업의 중견 간부가 되어 안정된 직장생활과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중년남성들이 되었지만, 오랜만에 건 전화에도 나의 무심함을 탓하기 보다는 나의 건강과 안녕을 먼저 물어오고 욕설과 함께 섞여 나오는 장난스런 목소리에 반가움과 기쁨이 담뿍 담겨있는 그 친구들이 있어 떠나온 서울이 아직도 그립고 생각이 나나 보다. 사회적 위치나 사는 처지가 서로 다르지만 언제나 스스럼없이 연락하고 만날 수 있는 친구들, 나이가 들면 제일 생각나는 게 친구라는 어른들 말씀이 새삼 맞다는 것을 느끼며 살고 있다. 대한민국 아버지들의 모습을 그려왔던 중견 작가 김정현의 신작 “36.5도”(역사와 사람, 2010년 7월)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중년 남성들의 우정과 사랑을 그려낸 가슴 따뜻한 소설이다.  

   영국 런던 안보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던 김인하는 인류학을 전공하는 아내 가경이 답사를 떠난 뒤 이혼을 통보해오자 크게 흔들리게 되고 마침내 7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어릴 적 고향친구였던 최수혁과 황대식을 다시 만나게 된다. 수혁은 굴지의 대기업 부회장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지만 어릴 적 가난했던 자신의 처지를 평생의 콤플렉스로 간직하면서 인하의 귀국에도 선뜻 만나려 하지 않고, 중국집을 하며 경상도 사내 특유의 박력과 의리를 가지고 있는 대식은 인하를 진심으로 환영한다. 자신의 회사 세계 지사망을 통해 인하의 소식을 알고 있는 수혁은 인하에게 가경이 있는 몽골의 호텔 연락처를 알려주고, 인하의 처남에게서 인하와 가경 사이가 이상하다는 것을 들은 대식은 자신이 나서서 해결해줄 수 없기에 답답해한다. 그러던 중 수혁의 회사에서 비의 혐의로 퇴직당한 직원이 고향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수혁의 부모님이 다툰 것 때문에 자신을 내쫓았다고 앙심을 품고는 수혁과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던 여교수 “인희”와 수혁에게 여동생처럼 위안이 되어주는 “서주”와의 관계를 폭로하겠다는 협박을 해오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대식은 크게 격분하여 고향 후배이기도 한 그 후배를 찾아가 단단히 엄포를 놓는다. 그러나 결정적인 물증을 확보한 그 직원은 수혁과 협박사건 후 관계를 정리한 인희까지 협박하고, 수혁은 그를 회수해보려고 하지만 직원은 더욱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온다. 그동안 성공을 위해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나 여유도 없이 오직 앞만 보고 달려오면서 오히려 성취감보다는 소외감과 허무함을 느껴온 수혁은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하지만 인하와 대식의 도움으로 다시금 삶에 대한 의미를 찾아보기로 결심한다. 잠깐 딴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에 대한 죄책감과 부끄러움으로 이혼을 선언했던 가경은 인하와의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고는 서로에게 시간을 더 주기로 마음먹고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고, 인하와 수혁은 삶의 의미를 찾아 여행을 떠나기로 하고, 대식은 친구들과의 여행에 동참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

  “아버지”,“아버지의 눈물”에 이어 세 번째로 읽게 된 이 작품은 우리 사회에서의 아버지의 위상과 역할, 가족에 대한 사랑을 주로 써왔던 전작과는 달리 중년 남성들의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우정과 방황하는 사랑에 대해 사실적이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제목이자 인간의 체온을 나타내기도 하는 말인 “36.5도”는 인하가 가경에게 전화하는 장면에서 “36.5도가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우린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을 거야”라는 대사에서 그 의미가 잘 드러나 있다.  조금만 온도가 떨어지거나 높아져도 목숨을 잃게 되는 36.5도라는 체온은 인하, 수혁, 대식 세 사람의 변치않는 우정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며, 잠시간의 방황이었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을 다시 확인하고 서로를 그리워하는 인하와 가경의 사랑의 온도이기도 하고, 칼 날이 선 것처럼 항상 긴장된 삶 속에서도 인간답고 따뜻한 삶을 동경하는 수혁에게 위로와 쉼터가 되어준 서주의 마음의 온도일 수 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사랑, 우정, 연민과 같은 사람사이의 관계를 지칭하는 말들은 서로의 체온을 주고 받으면서 항상 36.5도라는 온도를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자연스런 나눔일 수 있으며, 자신만을 위한 이기심이나 혹은 타인에 대한 과도한 욕심이나 집착은 결국 항상 유지되어야 하는 36.5도를 잃게 하는 치명적인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경고로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책에서는 몇몇 아쉬운 점들이 보이는 데 극단적인 상황까지 치닫다가 책 후반부에 들어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장면은 너무 극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이긴 하지만 수혁을 위해 감옥을 들어가겠다고 나서는 대식의 행동 - 물론 해프닝으로 끝나 유머러스하게 결말이 났지만 - 또한 이야기의 사실성을 떨어뜨리기도 하지만 남자들만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우정을 그려내기 위한 조금은 과도한 설정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 하다. 

오랜만에 우정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그런 책을 만났다. 이번 주말에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러 서울 나들이를 해야겠다. 그래서 그들의 체온으로 조금은 힘들었던 타지 생활의 외로움을 달래고 와야겠다. 벌써부터 그들을 만날 생각에 주말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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