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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
김정현 지음 / 역사와사람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십 수년 간의 서울 생활을 접고 지방으로 내려오면서 가장 서운했던 것은 서울에서 만난 인연들과의 작별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서울에서 나의 젊은 시절인 대학시절과 졸업 후 10여 년 가까이의 직장 생활을 보냈던 터라 그 동안의 선후배들과 친구, 동료들과 이제는 떨어져야 한다는 아쉬움과 지방의 새로운 직장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다시 인간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그 부담감에 선뜻 지방으로 내려가기가 내키치 않았었다. 그래서 지방으로 내려와서 근 3개월 동안은 주말마다 서울에 올라가서 친구들을 만나고 같이 어울렸었다.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면서 서울행이 조금씩 뜸해지더니 이제 5년 가까이 된 지금은 바쁜 일상과 가정 생활을 핑계로 1년에 한 두 번 올라가기도 힘들 정도가 되었고, 이제는 서로들 삶에 지치고 바빠서 애경사 때나 얼굴을 겨우 볼 뿐 사실상 연락이 끊겨버린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멀리 있으면 멀어진다는 말이 남녀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동성(同姓)간의 우정에도 해당된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그래도 손가락이 부러졌는지 전화 한 통화 없고 모임에도 빼먹기 일 수인 내가 어쩌다 전화해도 마치 오랫동안 헤어진 이산가족을 다시 만나는 것처럼 반가워하는 친구들이 있다. 대학시절 좁은 하숙집에서 서로 살을 맞대며 살았던 소중한 친구들, 이제는 번듯한 기업의 중견 간부가 되어 안정된 직장생활과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중년남성들이 되었지만, 오랜만에 건 전화에도 나의 무심함을 탓하기 보다는 나의 건강과 안녕을 먼저 물어오고 욕설과 함께 섞여 나오는 장난스런 목소리에 반가움과 기쁨이 담뿍 담겨있는 그 친구들이 있어 떠나온 서울이 아직도 그립고 생각이 나나 보다. 사회적 위치나 사는 처지가 서로 다르지만 언제나 스스럼없이 연락하고 만날 수 있는 친구들, 나이가 들면 제일 생각나는 게 친구라는 어른들 말씀이 새삼 맞다는 것을 느끼며 살고 있다. 대한민국 아버지들의 모습을 그려왔던 중견 작가 김정현의 신작 “36.5도”(역사와 사람, 2010년 7월)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중년 남성들의 우정과 사랑을 그려낸 가슴 따뜻한 소설이다.
영국 런던 안보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던 김인하는 인류학을 전공하는 아내 가경이 답사를 떠난 뒤 이혼을 통보해오자 크게 흔들리게 되고 마침내 7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어릴 적 고향친구였던 최수혁과 황대식을 다시 만나게 된다. 수혁은 굴지의 대기업 부회장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지만 어릴 적 가난했던 자신의 처지를 평생의 콤플렉스로 간직하면서 인하의 귀국에도 선뜻 만나려 하지 않고, 중국집을 하며 경상도 사내 특유의 박력과 의리를 가지고 있는 대식은 인하를 진심으로 환영한다. 자신의 회사 세계 지사망을 통해 인하의 소식을 알고 있는 수혁은 인하에게 가경이 있는 몽골의 호텔 연락처를 알려주고, 인하의 처남에게서 인하와 가경 사이가 이상하다는 것을 들은 대식은 자신이 나서서 해결해줄 수 없기에 답답해한다. 그러던 중 수혁의 회사에서 비의 혐의로 퇴직당한 직원이 고향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수혁의 부모님이 다툰 것 때문에 자신을 내쫓았다고 앙심을 품고는 수혁과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던 여교수 “인희”와 수혁에게 여동생처럼 위안이 되어주는 “서주”와의 관계를 폭로하겠다는 협박을 해오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대식은 크게 격분하여 고향 후배이기도 한 그 후배를 찾아가 단단히 엄포를 놓는다. 그러나 결정적인 물증을 확보한 그 직원은 수혁과 협박사건 후 관계를 정리한 인희까지 협박하고, 수혁은 그를 회수해보려고 하지만 직원은 더욱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온다. 그동안 성공을 위해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나 여유도 없이 오직 앞만 보고 달려오면서 오히려 성취감보다는 소외감과 허무함을 느껴온 수혁은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하지만 인하와 대식의 도움으로 다시금 삶에 대한 의미를 찾아보기로 결심한다. 잠깐 딴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에 대한 죄책감과 부끄러움으로 이혼을 선언했던 가경은 인하와의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고는 서로에게 시간을 더 주기로 마음먹고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고, 인하와 수혁은 삶의 의미를 찾아 여행을 떠나기로 하고, 대식은 친구들과의 여행에 동참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
“아버지”,“아버지의 눈물”에 이어 세 번째로 읽게 된 이 작품은 우리 사회에서의 아버지의 위상과 역할, 가족에 대한 사랑을 주로 써왔던 전작과는 달리 중년 남성들의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우정과 방황하는 사랑에 대해 사실적이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제목이자 인간의 체온을 나타내기도 하는 말인 “36.5도”는 인하가 가경에게 전화하는 장면에서 “36.5도가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우린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을 거야”라는 대사에서 그 의미가 잘 드러나 있다. 조금만 온도가 떨어지거나 높아져도 목숨을 잃게 되는 36.5도라는 체온은 인하, 수혁, 대식 세 사람의 변치않는 우정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며, 잠시간의 방황이었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을 다시 확인하고 서로를 그리워하는 인하와 가경의 사랑의 온도이기도 하고, 칼 날이 선 것처럼 항상 긴장된 삶 속에서도 인간답고 따뜻한 삶을 동경하는 수혁에게 위로와 쉼터가 되어준 서주의 마음의 온도일 수 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사랑, 우정, 연민과 같은 사람사이의 관계를 지칭하는 말들은 서로의 체온을 주고 받으면서 항상 36.5도라는 온도를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자연스런 나눔일 수 있으며, 자신만을 위한 이기심이나 혹은 타인에 대한 과도한 욕심이나 집착은 결국 항상 유지되어야 하는 36.5도를 잃게 하는 치명적인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경고로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책에서는 몇몇 아쉬운 점들이 보이는 데 극단적인 상황까지 치닫다가 책 후반부에 들어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장면은 너무 극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이긴 하지만 수혁을 위해 감옥을 들어가겠다고 나서는 대식의 행동 - 물론 해프닝으로 끝나 유머러스하게 결말이 났지만 - 또한 이야기의 사실성을 떨어뜨리기도 하지만 남자들만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우정을 그려내기 위한 조금은 과도한 설정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 하다.
오랜만에 우정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그런 책을 만났다. 이번 주말에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러 서울 나들이를 해야겠다. 그래서 그들의 체온으로 조금은 힘들었던 타지 생활의 외로움을 달래고 와야겠다. 벌써부터 그들을 만날 생각에 주말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