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왕, 여기 잠들다
필립 리브 지음, 오정아 옮김 / 부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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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아서왕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어릴 적 즐겨보았던 TV 애니메이션 “원탁의 기사(KBS1, 1980. 원작은 <원탁의 기사; 타올라라 아서, 1979, 토에이동화>)” 때문이었다. 그 당시 애니메이션 속의 아서왕의 멋진 투구와 갑옷, 그리고 백마는 연습장을 도배할 정도로 만화그리기의 단골 소재였으며, 아이들과의 전쟁놀이에서 아이들 장난감 칼은 모두 엑스칼리버로 이름 지었고, 우리 동네 아이들은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라고 이름 짓고 서로 아서왕은 자기라고 다투기까지 했었다. 벌써 수 십 년 전이라 등장 인물이며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희망이여~ 빛이여~ 아득한 하늘이여~~”로 시작했던 주제곡만큼은 아직도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런데 그런 어린 시절 영웅이었던 아서왕에 대한 환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것은 고등학교 시절 세계사 수업시간이었다. 세계사 선생님은 아서왕이 활동했다는 6세기 경 영국은 로마의 지배에서 막 벗어나 지금의 북부독일과 덴마크에서 지금의 영국 민족을 구성하는 앵글 족과 색슨 족이 건너와 7개의 왕국 -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왕국이 아니라 부족 국가 같은 원시적 형태의 왕국 - 을 건설하고 서로 싸움을 벌이는 시기였으며, 아서왕은 그 실존 여부 자체가 의심스러운 그런 인물로 실존했더라도 어릴적 애니메이션 속 그런 멋진 영웅이 아니라 토착 민족인 캘트족 중 어느 한 부족의 우두머리로 기껏 잘 봐줘야 피지배민족들이 결성한 산적단의 두목 정도로 봐줄 수 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아서왕의 이야기는 중세 유럽 정치적, 문화적으로 각색되고 부풀려진 전설 속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하셨다. 그 수업 이후로 아서왕 이야기에 대해 흥미를 잃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 켠에는 아서왕은 악에 맞서 정의를 수호하는 나만의 멋진 영웅으로서 각인된 모습이 쉽게 잊혀지지 않았던 그런 영웅으로 남아 아서왕을 소재로 한 각종 영화나 드라마, 소설들은 나이가 든 후에도 즐겨 찾게 되는 그런 아이템이 되곤 하였다. 그런데 최근 그나마 남아 있던 아서왕에 대한 환상을 철저히 깨뜨리는 그런 소설을 만났다. SF소설작가로 알려진 필립 리브의 “아서왕, 여기 잠들다(부키, 2010년 8월)”은 아서왕 이야기의 주 매력 포인트였던 마법과 환상을 말끔히 걷어낸, 건조하리만큼 실제 역사 속 아서왕을 치밀하게 복원해내 그에 대해 가지고 있던 한조각 환상마저 여지없이 깨뜨리고 말았다. 

아서왕이 활동했다는 500년경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영국은 유럽에서 건너온 야민인 색슨족의 침략에 시달리는 가운데, 여러 개의 작은 왕국과 부족으로 분리되어 서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하루가 멀다하고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이른바 혼돈의 시대였다. 남서부 어느 작은 마을 영주의 노예 소녀 그위나는 한밤 중에 습격해온 아서왕 부대를 피해 강을 헤엄쳐 달아나다가 아서왕의 음유시인이자 책사인 마르딘에게 잡히고 만다. 마르딘은 수영과 잠수를 잘하는 그위나를 이용해 호수의 여인이 아서에게 명검 “칼리번”을 주는 사기극을 연출하고, 아서는 이 사기극을 계기로 색슨족을 몰아내고 브리튼을 통일할 전설의 왕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호수의 여인 역할을 무사히 마친 그위나는 남장을 하고 마르딘의 먼 친척 아이이자 시동(侍童) “그윈”으로 둔갑하여 아서왕의 무리를 따르게 된다. 색슨족이 다시 변경 마을을 침범하자 아서와 그의 군대들은 출정하여 마을을 구해내지만, 마을의 영주는 전투 중에 죽게 되고, 아서는 영주의 아내 “그웬휘바르”와 결혼을 하여 그 마을을 차지하고 정착하게 된다. 그위나는 그웬휘바르의 동정을 감시하라는 마르딘의 명을 받고 남장을 풀고 그웬휘바르의 시녀로 일하게 된다. 아서는 마르딘이 원했던 위대한 통일왕의 모습이 아닌 여전히 주변 지역을 약탈하는 데 열심이고, 아서에게 애정이 없던 그웬휘바르는 아서의 조카이자 그위나의 친구였던 “베드위르”와 비밀스런 애정 관계를 맺게 된다. 그위나는 고민 끝에 주인인 마르딘에게 이 사실을 고하게 되고, 마르딘의 전갈을 받고 불같이 노한 아서는 아내와 조카의 불륜 현장을 덮쳐 조카를 한칼에 죽이고, 부상당한 그웬휘바르는 그위나의 부축을 받으며 달아나지만 결국 호수에 빠져 자살하고 만다. 한편 베드위르의 형이자 아서의 조카인 “메드로우트”는 자신의 동생이 아서에게 죽임을 당하자 간신히 도망하여 이웃 왕에게 의탁하여 아서에게 복수하기를 다짐하고, 군대를 끌어모은다. 마침내 메드로우트의 군대가 쳐들어오고 아서는 군대를 이끌고 최후의 전쟁에 나선다.

  "마법과 환상, 로맨스를 걷어 내고 그들이 정말로 어땠을까를 상상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은 그동안 전설 속 신비의 영웅으로 묘사되었던 아서왕에 대한 환상을 철저히 걷어낸, 실제 역사 속 날 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복원해서 우리에게 그동안 알고 있었던 아서왕의 모습은 거짓이라고 마치 일러주는 듯하다. 어릴 적 애니메이션 속의 멋진 원탁의 기사들도 마지막 작가 후기를 읽고 나서야 겨우 짐작이 될 정도로 철저하게 현실적으로 그려냈는데, 아서의 곁에서 온갖 악과 맞써 싸웠던 위대한 마법사 "멀린" -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마법사   "간달프"의 원형(原型)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한다 -은 아서의 이야기를 부풀리고 각색하여 허황된 아서의 모습을 그려내는 음유시인 "마르딘"으로, 아서의 아내이자 만인의 연인이었던 "기네비어"는 "그웬휘바르"로, 원탁의 기사 수장이자 기네비어와의 아름답고도 슬픈 로맨스의 주인공이었던 "랜슬롯 경"은 불륜의 현장에서 들켜 단칼에 죽임을 당하는 "베드위르"로, 성배 전설의 주인공이었던 "퍼시발 경"은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기 위해 여장해서 키웠던, 나중 냄비를 투구로 쓰고 아서를 찾아오는 우스꽝스러운 인물인 "페레디르"로 그려지고 있다. 전설 속 아서가 아닌 역사 속 실제의 아서를 그렸다고 하지만 아직도 아서왕의 전설을 기리고 추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불편할, 어찌 보면 모욕과도 같은 이 소설이 과연 아서왕 전설의 본고장인 “영국”에서는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뒷 표지 글을 보니 "2007년 네슬레 스마티즈 어워드 동상", "2008년 카네기 메달"- 얼마나 권위가 있는 상인지는 잘 모르겠다^^ -을 수상했다는 것을 보면 문학성이나 진정성이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환상과 전설로 포장된 두꺼운 화장을 걷어내고 기름끼 하나 없는 맨 얼굴로 우리 앞에 선 아서의 모습이 영 낯설게 다가오지만 생동감 있는 묘사와 스토리 전개로 읽는 내내 지루한 줄 모르고 내처 읽게 만드는 몰입감과 재미가 뛰어난 그런 소설이었다. 그리고 이 소설 때문에 아서왕에 대해 갖고 있던 환상이 완전히 깨져버릴 거라는 그런 염려도 괜한 기우였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홍길동을 좋아하는 것은 서로 자신 고향 출신이라고 싸우고 있는 몇 몇 지자체들의 말대로 그가 조선왕조실록 몇 째 쪽에 나오는 실존인물이어서가 아니라, 허균의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그 모습과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인 것처럼, 오히려 이 책 덕분에 그저 애니메이션 속이나 몇몇 글들 속 등장인물로만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아서왕의 전설을 제대로 한번 알아보자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오히려 이 책이 나에게는 아서왕에 대한 관심을 더 불러일으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 책은 이렇게 아서의 진면목을 만나보는 것도 꽤나 흥미 있고 재밌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준, 그리고 앞으로 이 책의 아서처럼 전설 속에서 걸어 나와 우리 앞에 서게 될 수많은 영웅들의 진실된 모습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 그런 책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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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그림 이야기 - 옛그림의 인문학적 독법
이종수 지음 / 돌베개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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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참 어렵다.
이미지보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미술관 관람만큼 곤혹스러운 것도 없다. 교과서에 실린 유명 화가의 그림을 보아도 그저 잘 그렸구나 일뿐 별 감흥이 없어 그저 동선에 따라 훑어보는 수준에 그치고 만다. 최근 들어 그림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감상을 소재로 한 책들을 몇 권 읽게 되면서 그림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 책은 그림과 음악을 연계한 일종의 크로스 오버처럼 소리와 시각이라는 상이한 감각을 통해서 서로를 연상케 하는 책이었고, 또 다른 한 책은 미술사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미지에 걸 맞는 명화들을 소개하는 그런 책이었는데, 그림의 문외한인 내가 읽어도 그림을 새롭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색다른 감흥을 느낄 수 있었던 “그림 읽기”였다. 그렇다면 아예 이야기를 형상화한 “이야기 그림”들이라면 어떨까? 기독교 예수의 최후의 만찬 장면을 그림으로 형상화한 미켈란젤로의 “그리스도 최후의 만찬”이나 도연명의 이상향을 마치 꿈 속에서나 볼 법한 그런 모습으로 그려낸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감상할 때 자연스레 그림의 원천인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면 훨씬 더 이해가 빠르고, 활자 속에서 자신이 형상화한 이미지와 비교해보는 그런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이종수의 “이야기 그림이야기”(돌베게, 2010년 7월)는 중국의 문학 작품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린 “이야기 그림”에 대한 이야기로 문학, 즉 이야기와 어우러진 옛 그림을 이해하는 안목을 넓힐 수 있었던, 그림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는 유익한 “그림 공부”가 되었던 책이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그림을 “읽는다”는 것은 문자로 구성된 이야기를 대할 때와 유사한 체험을 동반하다는 의미이며 곰곰이, 시간을 들여 천천히 살펴보면서 그 안에 담긴 이런저런 생각들을 만나보라는 뜻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런 의미를 넘어 정말로 “읽어야”할 그런 그림이 있는데 바로 중국의 문학 작품을 바탕으로 그려져 말 그대로 그 이야기를 짚어가며 감상해야 하는 그림, 즉 “이야기 그림”이 바로 그런 그림으로 이 책은 그런 장르를 읽는 방법에 관한 것이라고 책의 집필 목적을 소개한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읽어야 좋을까. 작가는 ‘동양미술사’라는 거창한 것에 경도되지 말고 그냥 솔직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읽으라고 이야기한다. 이야기 그림은 ‘문자’가 ‘이미지’로 전환되는 과정을 이미지의 입장에서 고백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화가의 마음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어떻게 그림으로 풀어낼 것인가, 즉 이야기 전개에 어울리는 화면을 선택하는 일에서 화가의 고민이 출발했다면 우리도 그 형식을 존중하며 따라 가보자고 우리에게 제안한다. 책에서는 권(두루마리), 축(족), 병풍, 삽화의 4가지 형식으로 그려진 이야기 그림을 각기 2편씩 골라 다루고 있는데, 모두 텍스트에 대한 해석, 그 독특한 시각이 빛나는 작품들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작품을 읽어가는 즐거움을 넘어 중국의 이야기 그림을 읽는 것은 ‘한자’ 문화권에서 오래도록 공유해온 사상과 체험의 문제를 생각해보는 데서 의미가 있으며 그저 이웃 나라의 것일 수 만은 없었던 중국 그림을 읽는 이유 또한 이러한 배경에서 생각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작가가 소개하고 있는 여러 그림들 중에서 걸어놓고 음미하는 그림, 축(족)에서 20세기 최고의 회가라는 장대천(張大千)의 도원도(桃園圖) 편을 소개해보자. 말 그대로 복숭아 꽃이 만발한 그림이어야 할 도원도에 장대천은 엉뚱하게도 매화를 그려 넣었다. 작가는 ‘매화로 이야기하는 도원도하니, 뭐 이런 실없는.....’이라는 반응이 절로 나올 이 그림에서 장대천이 찾아낸 숨겨진 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동진의 유명한 문사 도잠(도연명)이 썼다는 “도화원기”는 어쩌면 서양 기독교 신화의 ‘에덴동산’에 버금가는 동양에서 가장 유명한 이상향을 그린 그런 작품일 것이다. 도연명은 이야기의 화자로 ‘나’가 아닌 제 3자인 어부, 즉 ‘그’라는 타인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형식을 도입했는데 이것이 바로 도원의 이미지가 누군가, 즉 도연명의 주관적인 형상이 아니라 모두가 이 도원을 이상향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보편적 이상향’으로 자리잡게 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즉 도원이라는 곳이 어떤 구체적 장소가 아니라 독자 스스로 알고 있는 어느 시내에 배를 띄우면 될 일인 즉 열린 공간으로서의 가능성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도원의 모습이 대단히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그림으로 재현하기에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춘 ‘도화원기’는 여러 화가들에 의해 형상화되는 데, 책에서는 텍스트 그 자체였던 문징명의 “도원문진도”와 전통적인 방식과 달이 이야기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끌어낸 석도의 “도원도”, 길게 늘어뜨린 화면 가득 화가의 특유의 필선이 넘실대는 왕몽의 “도원춘효도”를 설명하고 드디어 문제작(?)인 장대천의 “도원도”를 보여준다. 장대천이 85세에 그린 대형 축화도인 “도원도”는 앞에서 소개했던 여러 그림들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전혀 새로운 도원도이다. 복숭아꽃 대신 매화를 그려넣은 것도 그렇고, 추상과 구상이 절묘하게 섞여 이야기는 구상 쪽, 회화적 효과는 추상 쪽으로 나누어 맡은 형국의 그림 또한 그렇다. 제목을 추리할 수 있는 소재들은 화면 한쪽에 작게 그려졌을 뿐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형체를 알 수 없이 신비롭게 번져 나가는 색채들인 이 그림은 이야기보다는 중국 전통에서 비롯된 그의 창조적인 회화기법인 발묵(潑墨;먹물이 번지어 퍼지게 하는 산수화법) 기법쪽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어 이 발묵이 대단히 효과적으로 구사되어 있는, 멋진 표현법이 적절한 주제를 만난 덕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시선을 압도하는 것은 주제를 암시하는 소재들이 아닌, 이 거대한 발묵의 효과인데 굳이 ‘도원도’라 불렀다는 것은 화가가 분명 이야기적인 요소를 신경쓰고 있었으며, ‘회화’ 자체에 집중한 이 추상적인 작품이 이야기 그림으로서도 매력적인 이유는, 도리어 그 모호한 추상성이 감상자의 상상을 더욱 자극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그가 그린 것이 매화인가 도화인가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우리가 이 아름다운 한 촉의 축화 앛에서 환상의 도원을 꿈꿀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작가는 설명한다. 그리고 장 마지막에는 도연명의 ‘도화원기’ 한글 번역본을 실어 글을 읽고서 다시 한번 그 장을 반복해서 읽고 그림들을 눈여겨보게 만든다. 

이처럼 이야기와 어우러진 그림들을 읽으니 어느 정도 그림에 대한 이해가 훨씬 쉽게 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이야기가 그림을 읽는 길잡이가 되고 그림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바탕이 되는, 서로에게 이해의 지평을 제공하는 ‘이야기 그림’의 전통이 이미 이천년 전인 위진 시대부터 시작되었다니 그 역사가 정말 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말대로 이 책은 이론적 연구서도 아니고, 그림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엮은 에세이도 아닌, 그 중간의 그냥 ‘그림이야기’로서 나처럼 그림을 모르는 문외한들이 오랜 전통의 이야기 그림을 이해하는 길라잡이로서 참 유익한, 그렇다고 결코 쉬운 책이 아닌 다소 어려운 그런 입문서로 평가하고 싶다. 최근 읽은 그림 이해서들 덕분에 이제 미술관이 마냥 따분하고 지겨운 그런 곳이 아닌, 조금은 즐겁고 재밌는 나들이 장소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조만간 그림을 ‘읽으러’ 미술관에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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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대학 - 대한민국 청춘, 무엇을 할 것인가?
이인 지음 / 동녘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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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지역 풍습에 “천자문(千字文)”에 씌인 천 개의 글자를 지인(知人)들에게 한 자씩 써달라고 부탁하여 완성하는 “걸자집(乞字集; 글자를 구걸하여 책을 만들다)”이라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주로 할아버지께서 손자의 학업과 건강을 위해 선물하던 풍습이라고 하는데, 글자를 써주게 되는 사람들도 아무나가 아닌 학문적 성취로 이름을 높은 사람이거나 무병다복한 사람들로 고르고, 글자와 함께 손자를 위한 덕담 한마디를 같이 받아 기록해둔다고 한다. 최근에는 연극배우 출신 영화배우 오지혜씨가 자신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한 특별한 방법으로 천자문(千字文)을 갖고 다니며 사람들을 만날 때 이들에게 천자문에 쓰인 한자를 한 글자씩 받는 방법으로 “걸자집”을 만들고 있다고 한 기사를 어떤 인터넷 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이렇듯 이인의 “청춘대학”(도서출판 동녘, 2010년 7월)을 읽으면서 나는 그 옛날 금쪽같은 손자를 위해 스승님들을 찾아가 귀한 글씨를 받아내던 할아버지와 자신의 인연을 기억하기 위해 한 글자씩 모은다는 배우 오지혜의 걸자집이 계속 연상되었다. 20대 후반, 이제 사회에 발을 내딛을 나이의 젊은 청년이 이 시대의 참 선생님들을 한 분씩 찾아뵙고 자신과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따뜻하면서도 호된 가르침을 듣고 이렇게 책으로 엮어 방황하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것에서 일맥상통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이가 먹어가는 데 예전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데서 오는 조급함과 실망감이 컸던 작가는 자신의 깜냥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다는 일들 앞에서 더욱 움츠려감을 느끼고는 선생님이 그리웠다고 한다. 휘청대는 젊음에게 토닥여주면서도 매섭게 호통도 쳐주시고, 어깨동무를 하면서도 같이 콧노래를 부르지만 헤맬 때는 이리로 오라고 손짓을 해주시는 그런 선생님을 말이다. 진짜 행복이 뭔지. 가장 아름다운 시기라는 젊음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하던 작가는 죽비처럼 어리석음을 꾸짖어주고 봄바람처럼 마음을 설레게 하는 선생님들을 만나기 위한 “사람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의 알을 깨고 나올 수 있게 밖에서 도와줄, 즉 “줄탁동시(啐啄同同時)” 역할을 해주실 그런 선생님들을 찾기 위해 신문이나 뉴스를 꼼꼼히 보면서 젊은이들에게 애정 어린 말을 하거나 관심을 보인 분들을 찾아 “하루 제자”를 청하게 된다. 그렇게 1년 동안 찾아가서 만난 선생님들의 말씀들을 묶어 낸 것이 바로 이 책 “청춘대학”이며 작가 가슴 깊숙한 곳을 묵직하게 건드렸듯, 이 책이 시대를 고민하며 좀 더 줏대 있게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따끔한 회초리가 되어주길 바라며, 나이가 20대인 사람들이라는 생물학 나이를 떠나 모든 “청춘”들에게 이 책을 전한다고 서문인 “들어가며”에서 밝히고 있다. 

 책의 구성은 마치 대학 한 학년 커리큘럼처럼 1학기와 방학 2학기로 나누고 작가가 만난 선생님들의 “수업” 전에 선생님들에 대한 이력과 소개를 간략하게 하고 선생님들과의 대화를 다룬 후에 자신이 느낀 감상과 이해를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선생님들은 작가가 말한 것처럼 신문이나 방송 등 언론 매체 뿐만 아니라 그분들의 책을 통해서도 한번 씩은 들어봤을 유명한 분들이다. 시인이자 소설 “캔들 플라워”의 저자인 김선우는 젊은이들이 싸우는 것을 무서워한다고 하지만 촛불을 거피면서 싸우는 방식이 다양할 수 있고, 문화적일 수 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생각이 들며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개개인의 행복에 대해서 충분히 사유하고 연대해서 싸워야만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고전 평론가이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의 저자 고미숙은 20대들이 자신의 몸과 정신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자기가 길들여져 있는 조건, 가족과 제도, 학교를 포함해 모든 것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질문을 하고 일상을 재배치하라고 충고한다. 철학 아카데미 공동대표인 박남희는 철학을 삶에 녹여내는 방법으로 삶의 가장 기본인 정직성이 필요하고 이런 정직함이란 너나 할 것 없이 사라이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다는 자기 겸손함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겸손과 맞물린 정직에서 출발해야 철학사회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문화비평가인 이택광은 인문학의 위기는 현실 문제에 개입하는 인문학자들이 별로 없다는 데서 오는 것이며, 삶에 개입하기 위해 들어온 우리나 인문학이 지금은 사라져버리고 이른바 “인문학 오타쿠”들만 남아 있는 암담한 현실이라고 비판하면서, 인문학은 현실문제에 개입할 때 의미가 있으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인문ㄹ학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시사프로그램 진행자인 김미화는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아자!”하는 게, 즉 뭔가 자기 스스로 개척하고 찾아내야 하는 것이 부족하며 부모님이나 친구나 친척 눈치 보지 말고, 자신의 인생, 자신이 주인공인 삶에서 자신의 꿈을 위해서 자신이 간다는 생각을 하라고, 몇 번을 실패해도 젊으니까 괜찮으니 아자 하는 정신으로 도전해보라고 충고한다.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의 저자이자 진보 지식인으로 유명한 홍세화는 젊은이들이 연대와 단결, ‘함께 하자’는 정신이 중요하게 제기되어야 하며,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같은 세대로서 느끼는 세대 감각이 필요하고 그런 점에서 기성세대에 편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만 계층 상승하겠다는 게 아니라 젊은 세대가 함께 사는 구조로 변화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변화경영사상가인 구본형은 취직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꿈을 얘기하는 것을 사치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에게 인생을 너무 짧게만 생각하지 말고, 밥과 자기조재(영혼), 이 두가지를 화해시키기 위해 애를 서야 하며, 현실적인 문제에만 치중하게 되면 밥은 건질지 모르지만 끊임없이 공허할 것이라고 충고하며, 다양하게 살아가는 삶과 사는 방법에 대한 그림을 그려보라고 이야기한다. 교육 부총리를 역임한 학자 한완상은 요즘 섦은 세대들은 소시민적인 자족감에 빠져 있으며, 조그마한 자유, 자유롭게 연애할 수 있는 자유, 보고 싶은 영화를 보는 자유 등 이런 작은 자유에 매몰되지 말고 패러다임의 근본적 변화가 오는 시점인 이때야말로 젊은이들이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현대사학자 한홍구는 20대들이 국회의원도 나가고 정치 사회에 참여하여 청년실업 등 과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즉 자신들을 위한 정책을 만들고 동참하여 아래에서부터 바람을 일으키라고 이야기한다. 

 작가는 맺음말 “나가며”에서 선생님들을 만난 시간은 큰 축복이었으며, 그들과 나눈 시간은 자신의 삶에 굵은 마디로 자리 잡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아직 아무에게도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시인이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으며 모두 함께 자신의 필명처럼 “까르르” 웃을 수 있을 때를 꿈꾸며, 지금은 사회의 그늘을 조금이라도 밝히고 싶어 조금은 날이 선 글을 세상에 던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자신보다는 덜 아프게 자신만의 길들을 찾기 바라며 사람들과의 귀한 인연도 놓지 않았으면 한다고 당부하며 이 책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소중한 씨앗이 가슴에 뿌려지길 바라고 용기를 내서 같이 세상을 향해 걸어가자고 말하며 끝을 맺는다.  

 작가가 전문 인터뷰어가 아니어서 선생님들의 인생과 철학, 주장들을 올곧이 끌어내지 못하고 주로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라는 교훈적인 주제에 한정되어 있어 읽는 맛은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다양한 목소리로 들어보는 젊음에 대한 이야기는 한번쯤은 새겨볼 만한 그런 이야기들이다. 그중에서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택광 선생과 조정환 선생의 촛불 논쟁을 다시 다룬 부분은 그당시 그 분들의 글들을 읽으면서 때론 동조하고 때론 너무 편협하다고 비판했던 그 당시 느낌들을 다시 상기시켜주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인터뷰집의 장점인 다양한 목소리를 재미있고 의미있게 담아낸 이 책 - 사실 이 책이 작가의 말대로 순수한 마음에 선생님들을 찾아 그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출판사 기획으로 진행된 인터뷰 책인지는 판단하기가 솔직히 어렵다 - 은 작가 또래인 20대 젊은이들이 우선 읽어보길 권하고 작가의 말대로 생물학의 나이를 떠나 아직도 가슴 한 켠에 무언가를 새롭게 해보고 싶은 열정을 가진 “청춘”들과, 갈 수 록 편안한 생활에 안주하고 변화하기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늙은 분”들에게도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는 그런 책으로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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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여단 샘터 외국소설선 3
존 스칼지 지음, 이수현 옮김 / 샘터사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판타지, 무협, 추리, 공포 등 장르소설이라면 가리지 않고 즐겨 읽는 나에게 있어 유독 부담스러운 장르는 바로 “SF(Science Fiction)"소설이다. 특히 최근 들어 활성화 조짐이 보이고 있는 우리나라나 우리보다 장르 역사가 더 오래되어 이미 다양한 작품들이 출간되어 있는 이웃 일본 작가 작품 - 재밌게 읽은 다나카 요시키의 <은하영웅전설>은 “스페이스오페라(Space Opera)"라고 별도의 장르로 불리우며, 과학적 배경보다는 만화와 같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존하여 거대한 우주 공간을 배경으로 주인공의 용맹한 혹은 황당한 스토리를 펼쳐가는 이야기로 정통파 SF 팬들에게는 이단으로 취급받는 그런 장르이기도 하다 - 들 보다는 소위 정통파 SF소설이라 불리우는 서양 작가들 작품들은 선뜻 읽기가 영 부담스러운 그런 책들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주 경원시하는 것은 아니어서 프랭크 허버트의 <듄>, 로저 젤라즈니의 <신들의 사회>, 아서 클라크의 <라마와의 랑데부> 등 읽은 책들도 몇 권 있지만 그 책들도 읽기 전에 몇 번을 망설였고, 읽고 나서야 의외(!)로 재밌다는 것을 알게 된 그런 작품들이고, 아직도 내 책장에는 다른 분들의 추천으로, 또는 이벤트나 할인행사로 구입해놓고는 읽지 않고 있는 유명 SF소설이 몇 권 된다. 분명히 좋아할 만한 점들이 많은 장르임에도 왜 이렇게 부담스러울까? 아마도 문과 출신의 한계인 과학적인 개연성에 대한 이해 부족, 그리고 재미 위주의 다른 장르와는 달리 미래를 배경으로 하지만 현대 사회, 문화, 정치, 종교에 대한 모순들을 투영한 결코 가볍지 않은 묵직한 주제의식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노인의 전쟁>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다는 신예작가 존 스칼지의 “유령여단(샘터, 2010년 7월)”을 읽기 시작하면서도 어려운 설정과 주제 때문에 중도에 읽다가 포기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먼저 앞섰었다, 그런데 막상 읽기 시작하니 책장 넘어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어떻게 결말이 날지 궁금해서 책을 놓을 수 없는, SF소설이 이렇게 뛰어난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소중한 즐거운 시간이었다.   

  책의 시대적 배경은 인류가 우주로 뛰쳐나가 외계 종족들과 "부동산"을 놓고 동맹과 결전을 반복하는 먼 미래이다. 지구를 모태로 하여 우주의 자원을 채취하고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만들어진 "우주개척연맹"은 외계 종족과의 전쟁을 담당하는 일종의 군대인 ‘우주개척방위군(CDF)'를 창설한다. 그러나 지구와는 다른 우주환경에서의 전투는 인류의 신체적 특성상 매우 불리하기에  우주개척 방위군은 별도의 군인을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75세 이상의 노인들의 의식을 DNA를 조작하여 만들어낸 젊은 육체에 전이하여 정규 군대를 조직하고 - 전작인 <노인의 전쟁>이 바로 이 군인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 한편으로 이미 사망한 인간들의 DNA와 동물, 외계 종족의 DNA를 혼합하여 인간을 뛰어넘는 특수한 신체 능력과 기술을 가진  '인조인간'으로 구성된 부대, 즉 "유령여단"이라는 일종의 특수부대를 운영한다. 의식 전이,  뇌도우미,  신체 생성 연구를 담당하던 과학자 샤를 부탱은 자신이 자살한 것으로 위장하고  외계종족에게 망명하여 르레이, 에네샤, 오빈 외계종족 연합군과 우주개척방위군과의 전쟁을 일으킨다.  부탱의 배신을 알아낸 우주개척방위군은 부탱의 연구실을 조사하던 중 부탱이 자신의 기억을 프로그램 형식으로 저장해놓은 사실을 알게 되고, 그의 배신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 그의 기억을 DNA 조작을 통해 만들어낸 인공 인간에 이식을 하지만 부탱의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고 단지 기억만 이식한 상태인지라 기억을 복원해내는 데 실패하고 한다. 결국 부탱의 기억을 이식한 "재러드 디랙"은 "유령여단"에 합류하여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어느 날 부탱의 경험과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된 재러드는 부탱의 기억이 하나 둘씩 떠오르게 되고 방위군은 기억을 촉발하기 위해 부탱의 가족들이 죽은 곳으로 재러드를 보내고, 그 곳에서 부탱의 기억을 완전히 복원해낸 재러드는 부탱이 인류를 배신한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유령여단을 태운 전함이 계속 실종되는 사건을 조사하던 중 부탱이 숨어있는 곳을 알아낸 방위군은 그를 체포하기 위해 재러드와 유령여단을 파견하지만, 이미 대비하고 있던 부탱에 의해 그만 재러드는 붙잡히게 된다. 자신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부탱과 마주선 재러드는 그에게서 전 우주적 연합인 “콘클라베”가 전쟁만을 일삼고 있는 우주개척연맹을 징벌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킬 거라는 사실과 인류의 종말을 막기 위해 방위군을 없애겠다는 부탱의 계획을 듣게 된다. 재러드는 복종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 병기로서, 그리고 부탱의 기억을 재생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지만 “인간”으로서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된다.

  전편인 <노인의 전쟁>을 읽지 않아 읽으면서 전체 스토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걱정을 했지만 전편과는 독립적인 스토리 전개로 읽는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 전편의 주인공인 "존 페리"는 대화 속에서 몇 몇 언급되고 마지막 결말에 이르러 재러드의 상사인 세이건 중위와 연관된 인물로 묘사된다-. 역시 과학 소설 인만큼 다양한 과학적 설정이 많이 등장하는 데, 일종의 생체 컴퓨터라 할 수 있는 “뇌 도우미”와 군인들의 뇌파를 공유하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인 "통합", 그리고 상처를 치유하고 육체능력을 극대화하는 장치이자 결말에서 치명적인 무기로까지 작동되는 인공 피인 "똑똑한 피", 그리고 우주개척연맹과 전쟁을 벌이는 외계종족인 르레이, 에네샤, 오빈에 대한 설정들은 그 독특함과 기발한 설정이 과학소설에서만 맛볼 수 있는 그런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작가가 담아내고자 했던 주제 또한 결코 가볍지가 않은 데, 재러드가 유령여단 초기 자신처럼 만들어진 생명체인 "프랑켄슈타인"을 읽고 충격을 받은 장면, 부탱의 기억이 복원되기 시작하면서, 부탱의 딸인 "조이"를 그리워하며 괴로워하는 장면, 인간의 특징으로 "유머"와 "선택"으로 설명하는 점,  부탱이 가담하고 있던 외계종족 오빈의 기원과 그들이 갖고자 했던 "의식"의 중요성에 대한 설명들, 오히려 인간들보다 더 영혼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리고 마침내 영예로운 자살을 택하는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외계종족 포로 카이넨, 그저 소모품으로 만들어진 존재임에도 자신 또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임을 깨닫고 마침내 내리게 되는 재러드의 최종 선택 - 어쩌면 이 소설의 백미이자 주제의식을 극명하게 드러낸 재러드의 선택은 이렇게 슬프게 끝내지 말고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해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작가에 대한 원망이 들 정도로 가슴이 찡해지는 그런 감동이 느껴졌다-  등 작가는 다양한 인물들과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에게 인간다움의 가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역자는 존 스칼지의 “노인의 우주”3부작에서 2부인 이 책을 가장 뛰어나다고 말하는데, 판단에 대한 동의 여부는 이 시리즈의 사실상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존 페리"가 등장한다는, 그리고 2부와는 전혀 다른 전개방식이라는 1부 <노인의 전쟁>과  3부 <마지막 행성>까지 다 읽고 나서야 가능할 것 같다.  470 여 페이지에 달하는 만만치 않은 분량 임에도 전혀 지루함 없이 단숨에 읽히는 몰입감과 감동을 보여준 이 책 덕분에 SF 소설에 대한 부담감을 한결 덜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이  노인의 우주 3부작을 끝내고 난 후에는 책장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던 로버트 하인라인의 <낯선 땅 이방인(스트레인저)>와 <스타쉽 트루퍼스>,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 아서 C 클라크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읽는 데 전혀 망설임을 없어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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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 북
하워드 엥겔 지음, 박현주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추리소설을 좋아하다 보니 참 다양한 탐정들을 만나게 된다. 명탐정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천재탐정 셜록 홈즈, 추리소설의 여왕인 애거서 크리스티의 두 분신인, 회색 뇌세포를 자랑하는 에르큘 포와로와 이웃집 할머니처럼 푸근한 인상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예리한 관찰력과 추리력을 보여주는 미스 마플, 왠만한 액션 영화 이상의 거친 활극을 보여주는 하드 보일드 탐정인 샘 스페이드와 필립 말로,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범인을 멋지게 잡아내지만 항상 연쇄살인을 몰고 다니는,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말도 안 되는 우연의 연속인 괴상한 탐정 "김전일"에 이르기까지 탐정 이름과 등장 사건들 개요만 정리해도 책 한권이 될 만큼 수많은 탐정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최근 그 어느 추리소설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그야말로 가장 독창적인 탐정을 만났다. 범인에 의해 뒤통수를 얻어맞고 혼수상태에 빠져 8주만에 의식이 돌아왔지만 "실서증(失書症)" 없는 "실독증(失讀症)"에 걸린, 즉 글을 쓸 줄은 알지만 읽을 줄 모르는 병에 걸린, 거기에다가 사람 이름을 듣고도 돌아누우면 바로 잊어버리는 심각한 기억상실증에 걸린 탐정, 이 정도라면 탐정의 고유 능력인 비범한 기억력과 관찰력은 절대 기대할 수 없는, 사실상 탐정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그런 탐정을 말이다. 하워드 엥겔의 "메모리북(밀리언 하우스, 2010년 8월)" 의 탐정 베니 쿠퍼맨이 바로 그 탐정이다. 

사립탐정 베니 쿠퍼맨은 의뢰받은 사건을 수사하던 중 범인에게서 불의의 일격을 받고 의식을 잃고 여자 시체와 함께 쓰레기장에 버려진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8주 동안이나 의식 불명의 상태에 빠져 있다가 겨우 깨어나게 된다. 그러나 기억나는 거라고는 정체불명의 기차 사고가 나는 꿈만 떠오를 뿐 사건에 관해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거기다가 글을 쓸 줄은 알지만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실독증(失讀症)" 에 걸리고, 오렌지와 자몽, 면도 크림과 치약을 구별해내지 못하고 방금 들은 간호사의 이름도 바로 잊어버리는 탐정으로서는 거의 사망선고와 다름없는 그런 심각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사건의 의뢰인조차 기억해내지 못하는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재활 훈련에 열심히 임하면서 마치 깨어진 거울처럼 조각 조각난 기억의 편린들과 자신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이야기를 병원에서 치료목적으로 나눠 준 "메모리 북"에 차근차근 적어나가면서 사건의 얼개를 재구성해낸다.  마침내 사건의 윤곽을 알아낸 그는 사건 관련자를 한 곳에 불러 모아 "범인은 바로 너!" 라고 지목하는 추리소설의 전통적인 상황극을 연출하기로 하고 병원으로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과 자신의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들을 불러 모은다. 

  추리소설로서 기막힌 트릭이나 반전을 기대했다면 실망스러울 책이지만 치명적인 사고로 육체적 능력을 상실해서 익히 보아왔던 "안락의자형 탐정"으로 활약하겠거니 하는 짐작을 여지없이 무너뜨려 버리는,  뇌손상이라는 재기 불가능의 최악의 위기에 처한 탐정이 실낱같은 사건의 실마리와 단편적인 기억을 재구성해 사건을 해결해 내가는 과정이 그 어느 소설보다도 독특하면서도 실감나는 색다른 재미가 압권인 그런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글을 쓸 수 가 있는데 읽지 못한다는 정신질환이 실제로 있는 일일까 그저 작가의 놀라운 상상이 아닐까 할 정도로 믿기 어려운 "실서증 없는 실독증"- 자신이 쓴 글도 읽지 못하고 마치 외국어를 대하는 그런 느낌이라니 사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쉽게 믿기가 어려운 그런 질환이다 - 이라는 병을 이처럼 생생하고 실감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책 소개 글과 책 도입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올리버 색슨의 추천 글에서도 나와 있듯이 뇌졸증으로 같은 병에 실제로 걸려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작가의 경험이 전혀 과장되거나 왜곡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배어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미 전작들에서 명탐정으로서 놀라운 활약을 펼친 베니 쿠퍼맨 - 아쉽게도 전작들은 읽어보지 않아 그가 어떤 유형의 탐정인지는 알 수 가 없지만 이 책을 통해서 짐작해보면 직관과 추리력이 뛰어난 천재형의 탐정보다는 탐문과 증거 위주의 수사와 액션형의 하드보일드 탐정에 가까울 것으로 생각된다 - 은 자신의 창조주인 작가 하워드 엥겔이 병에 걸리면서 사실상 사망선고가 내려졌지만 작가의 기적적인 재활과 회복 덕분에 비록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지만 기존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탐정으로서 완전히 새롭게 부활한 베니 쿠퍼맨은 이 책을 통해서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나뉘어지는, 전작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전작을 능가하는 매력적인 탐정으로 추리소설사에서 자리매김할 것이다. 또한 어쩌면 부담감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했지만 독자들의 성화에 의해 마지못해 부활시키고 만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나 자신의 분신을 다른 작가들이 멋대로 재단하는 게 싫어 자신의 죽음에 맞춰 결국 죽이고 만 애거서 크리스티의 "에르큘 포와로" 보다도 더욱 극적이고 멋지게 부활한 그런 탐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실제 경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창조된 탐정이지만 "역사상 가장 재밌는 사립탐정"이라는 어느 평을 넘어 “역사상 가장 독특하고 매력적인 탐정”으로서의 베니 쿠퍼맨의  활약들이 계속될 수 있도록 작가의 건강이 계속 호전되길 바래보며, 우리나라에도 이번 한 편으로 그치지 말고 계속 소개되어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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