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왕, 여기 잠들다
필립 리브 지음, 오정아 옮김 / 부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내가 아서왕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어릴 적 즐겨보았던 TV 애니메이션 “원탁의 기사(KBS1, 1980. 원작은 <원탁의 기사; 타올라라 아서, 1979, 토에이동화>)” 때문이었다. 그 당시 애니메이션 속의 아서왕의 멋진 투구와 갑옷, 그리고 백마는 연습장을 도배할 정도로 만화그리기의 단골 소재였으며, 아이들과의 전쟁놀이에서 아이들 장난감 칼은 모두 엑스칼리버로 이름 지었고, 우리 동네 아이들은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라고 이름 짓고 서로 아서왕은 자기라고 다투기까지 했었다. 벌써 수 십 년 전이라 등장 인물이며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희망이여~ 빛이여~ 아득한 하늘이여~~”로 시작했던 주제곡만큼은 아직도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런데 그런 어린 시절 영웅이었던 아서왕에 대한 환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것은 고등학교 시절 세계사 수업시간이었다. 세계사 선생님은 아서왕이 활동했다는 6세기 경 영국은 로마의 지배에서 막 벗어나 지금의 북부독일과 덴마크에서 지금의 영국 민족을 구성하는 앵글 족과 색슨 족이 건너와 7개의 왕국 -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왕국이 아니라 부족 국가 같은 원시적 형태의 왕국 - 을 건설하고 서로 싸움을 벌이는 시기였으며, 아서왕은 그 실존 여부 자체가 의심스러운 그런 인물로 실존했더라도 어릴적 애니메이션 속 그런 멋진 영웅이 아니라 토착 민족인 캘트족 중 어느 한 부족의 우두머리로 기껏 잘 봐줘야 피지배민족들이 결성한 산적단의 두목 정도로 봐줄 수 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아서왕의 이야기는 중세 유럽 정치적, 문화적으로 각색되고 부풀려진 전설 속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하셨다. 그 수업 이후로 아서왕 이야기에 대해 흥미를 잃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 켠에는 아서왕은 악에 맞서 정의를 수호하는 나만의 멋진 영웅으로서 각인된 모습이 쉽게 잊혀지지 않았던 그런 영웅으로 남아 아서왕을 소재로 한 각종 영화나 드라마, 소설들은 나이가 든 후에도 즐겨 찾게 되는 그런 아이템이 되곤 하였다. 그런데 최근 그나마 남아 있던 아서왕에 대한 환상을 철저히 깨뜨리는 그런 소설을 만났다. SF소설작가로 알려진 필립 리브의 “아서왕, 여기 잠들다(부키, 2010년 8월)”은 아서왕 이야기의 주 매력 포인트였던 마법과 환상을 말끔히 걷어낸, 건조하리만큼 실제 역사 속 아서왕을 치밀하게 복원해내 그에 대해 가지고 있던 한조각 환상마저 여지없이 깨뜨리고 말았다. 

아서왕이 활동했다는 500년경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영국은 유럽에서 건너온 야민인 색슨족의 침략에 시달리는 가운데, 여러 개의 작은 왕국과 부족으로 분리되어 서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하루가 멀다하고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이른바 혼돈의 시대였다. 남서부 어느 작은 마을 영주의 노예 소녀 그위나는 한밤 중에 습격해온 아서왕 부대를 피해 강을 헤엄쳐 달아나다가 아서왕의 음유시인이자 책사인 마르딘에게 잡히고 만다. 마르딘은 수영과 잠수를 잘하는 그위나를 이용해 호수의 여인이 아서에게 명검 “칼리번”을 주는 사기극을 연출하고, 아서는 이 사기극을 계기로 색슨족을 몰아내고 브리튼을 통일할 전설의 왕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호수의 여인 역할을 무사히 마친 그위나는 남장을 하고 마르딘의 먼 친척 아이이자 시동(侍童) “그윈”으로 둔갑하여 아서왕의 무리를 따르게 된다. 색슨족이 다시 변경 마을을 침범하자 아서와 그의 군대들은 출정하여 마을을 구해내지만, 마을의 영주는 전투 중에 죽게 되고, 아서는 영주의 아내 “그웬휘바르”와 결혼을 하여 그 마을을 차지하고 정착하게 된다. 그위나는 그웬휘바르의 동정을 감시하라는 마르딘의 명을 받고 남장을 풀고 그웬휘바르의 시녀로 일하게 된다. 아서는 마르딘이 원했던 위대한 통일왕의 모습이 아닌 여전히 주변 지역을 약탈하는 데 열심이고, 아서에게 애정이 없던 그웬휘바르는 아서의 조카이자 그위나의 친구였던 “베드위르”와 비밀스런 애정 관계를 맺게 된다. 그위나는 고민 끝에 주인인 마르딘에게 이 사실을 고하게 되고, 마르딘의 전갈을 받고 불같이 노한 아서는 아내와 조카의 불륜 현장을 덮쳐 조카를 한칼에 죽이고, 부상당한 그웬휘바르는 그위나의 부축을 받으며 달아나지만 결국 호수에 빠져 자살하고 만다. 한편 베드위르의 형이자 아서의 조카인 “메드로우트”는 자신의 동생이 아서에게 죽임을 당하자 간신히 도망하여 이웃 왕에게 의탁하여 아서에게 복수하기를 다짐하고, 군대를 끌어모은다. 마침내 메드로우트의 군대가 쳐들어오고 아서는 군대를 이끌고 최후의 전쟁에 나선다.

  "마법과 환상, 로맨스를 걷어 내고 그들이 정말로 어땠을까를 상상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은 그동안 전설 속 신비의 영웅으로 묘사되었던 아서왕에 대한 환상을 철저히 걷어낸, 실제 역사 속 날 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복원해서 우리에게 그동안 알고 있었던 아서왕의 모습은 거짓이라고 마치 일러주는 듯하다. 어릴 적 애니메이션 속의 멋진 원탁의 기사들도 마지막 작가 후기를 읽고 나서야 겨우 짐작이 될 정도로 철저하게 현실적으로 그려냈는데, 아서의 곁에서 온갖 악과 맞써 싸웠던 위대한 마법사 "멀린" -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마법사   "간달프"의 원형(原型)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한다 -은 아서의 이야기를 부풀리고 각색하여 허황된 아서의 모습을 그려내는 음유시인 "마르딘"으로, 아서의 아내이자 만인의 연인이었던 "기네비어"는 "그웬휘바르"로, 원탁의 기사 수장이자 기네비어와의 아름답고도 슬픈 로맨스의 주인공이었던 "랜슬롯 경"은 불륜의 현장에서 들켜 단칼에 죽임을 당하는 "베드위르"로, 성배 전설의 주인공이었던 "퍼시발 경"은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기 위해 여장해서 키웠던, 나중 냄비를 투구로 쓰고 아서를 찾아오는 우스꽝스러운 인물인 "페레디르"로 그려지고 있다. 전설 속 아서가 아닌 역사 속 실제의 아서를 그렸다고 하지만 아직도 아서왕의 전설을 기리고 추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불편할, 어찌 보면 모욕과도 같은 이 소설이 과연 아서왕 전설의 본고장인 “영국”에서는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뒷 표지 글을 보니 "2007년 네슬레 스마티즈 어워드 동상", "2008년 카네기 메달"- 얼마나 권위가 있는 상인지는 잘 모르겠다^^ -을 수상했다는 것을 보면 문학성이나 진정성이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환상과 전설로 포장된 두꺼운 화장을 걷어내고 기름끼 하나 없는 맨 얼굴로 우리 앞에 선 아서의 모습이 영 낯설게 다가오지만 생동감 있는 묘사와 스토리 전개로 읽는 내내 지루한 줄 모르고 내처 읽게 만드는 몰입감과 재미가 뛰어난 그런 소설이었다. 그리고 이 소설 때문에 아서왕에 대해 갖고 있던 환상이 완전히 깨져버릴 거라는 그런 염려도 괜한 기우였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홍길동을 좋아하는 것은 서로 자신 고향 출신이라고 싸우고 있는 몇 몇 지자체들의 말대로 그가 조선왕조실록 몇 째 쪽에 나오는 실존인물이어서가 아니라, 허균의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그 모습과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인 것처럼, 오히려 이 책 덕분에 그저 애니메이션 속이나 몇몇 글들 속 등장인물로만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아서왕의 전설을 제대로 한번 알아보자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오히려 이 책이 나에게는 아서왕에 대한 관심을 더 불러일으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 책은 이렇게 아서의 진면목을 만나보는 것도 꽤나 흥미 있고 재밌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준, 그리고 앞으로 이 책의 아서처럼 전설 속에서 걸어 나와 우리 앞에 서게 될 수많은 영웅들의 진실된 모습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 그런 책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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