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메모리 북
하워드 엥겔 지음, 박현주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추리소설을 좋아하다 보니 참 다양한 탐정들을 만나게 된다. 명탐정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천재탐정 셜록 홈즈, 추리소설의 여왕인 애거서 크리스티의 두 분신인, 회색 뇌세포를 자랑하는 에르큘 포와로와 이웃집 할머니처럼 푸근한 인상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예리한 관찰력과 추리력을 보여주는 미스 마플, 왠만한 액션 영화 이상의 거친 활극을 보여주는 하드 보일드 탐정인 샘 스페이드와 필립 말로,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범인을 멋지게 잡아내지만 항상 연쇄살인을 몰고 다니는,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말도 안 되는 우연의 연속인 괴상한 탐정 "김전일"에 이르기까지 탐정 이름과 등장 사건들 개요만 정리해도 책 한권이 될 만큼 수많은 탐정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최근 그 어느 추리소설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그야말로 가장 독창적인 탐정을 만났다. 범인에 의해 뒤통수를 얻어맞고 혼수상태에 빠져 8주만에 의식이 돌아왔지만 "실서증(失書症)" 없는 "실독증(失讀症)"에 걸린, 즉 글을 쓸 줄은 알지만 읽을 줄 모르는 병에 걸린, 거기에다가 사람 이름을 듣고도 돌아누우면 바로 잊어버리는 심각한 기억상실증에 걸린 탐정, 이 정도라면 탐정의 고유 능력인 비범한 기억력과 관찰력은 절대 기대할 수 없는, 사실상 탐정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그런 탐정을 말이다. 하워드 엥겔의 "메모리북(밀리언 하우스, 2010년 8월)" 의 탐정 베니 쿠퍼맨이 바로 그 탐정이다.
사립탐정 베니 쿠퍼맨은 의뢰받은 사건을 수사하던 중 범인에게서 불의의 일격을 받고 의식을 잃고 여자 시체와 함께 쓰레기장에 버려진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8주 동안이나 의식 불명의 상태에 빠져 있다가 겨우 깨어나게 된다. 그러나 기억나는 거라고는 정체불명의 기차 사고가 나는 꿈만 떠오를 뿐 사건에 관해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거기다가 글을 쓸 줄은 알지만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실독증(失讀症)" 에 걸리고, 오렌지와 자몽, 면도 크림과 치약을 구별해내지 못하고 방금 들은 간호사의 이름도 바로 잊어버리는 탐정으로서는 거의 사망선고와 다름없는 그런 심각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사건의 의뢰인조차 기억해내지 못하는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재활 훈련에 열심히 임하면서 마치 깨어진 거울처럼 조각 조각난 기억의 편린들과 자신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이야기를 병원에서 치료목적으로 나눠 준 "메모리 북"에 차근차근 적어나가면서 사건의 얼개를 재구성해낸다. 마침내 사건의 윤곽을 알아낸 그는 사건 관련자를 한 곳에 불러 모아 "범인은 바로 너!" 라고 지목하는 추리소설의 전통적인 상황극을 연출하기로 하고 병원으로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과 자신의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들을 불러 모은다.
추리소설로서 기막힌 트릭이나 반전을 기대했다면 실망스러울 책이지만 치명적인 사고로 육체적 능력을 상실해서 익히 보아왔던 "안락의자형 탐정"으로 활약하겠거니 하는 짐작을 여지없이 무너뜨려 버리는, 뇌손상이라는 재기 불가능의 최악의 위기에 처한 탐정이 실낱같은 사건의 실마리와 단편적인 기억을 재구성해 사건을 해결해 내가는 과정이 그 어느 소설보다도 독특하면서도 실감나는 색다른 재미가 압권인 그런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글을 쓸 수 가 있는데 읽지 못한다는 정신질환이 실제로 있는 일일까 그저 작가의 놀라운 상상이 아닐까 할 정도로 믿기 어려운 "실서증 없는 실독증"- 자신이 쓴 글도 읽지 못하고 마치 외국어를 대하는 그런 느낌이라니 사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쉽게 믿기가 어려운 그런 질환이다 - 이라는 병을 이처럼 생생하고 실감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책 소개 글과 책 도입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올리버 색슨의 추천 글에서도 나와 있듯이 뇌졸증으로 같은 병에 실제로 걸려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작가의 경험이 전혀 과장되거나 왜곡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배어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미 전작들에서 명탐정으로서 놀라운 활약을 펼친 베니 쿠퍼맨 - 아쉽게도 전작들은 읽어보지 않아 그가 어떤 유형의 탐정인지는 알 수 가 없지만 이 책을 통해서 짐작해보면 직관과 추리력이 뛰어난 천재형의 탐정보다는 탐문과 증거 위주의 수사와 액션형의 하드보일드 탐정에 가까울 것으로 생각된다 - 은 자신의 창조주인 작가 하워드 엥겔이 병에 걸리면서 사실상 사망선고가 내려졌지만 작가의 기적적인 재활과 회복 덕분에 비록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지만 기존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탐정으로서 완전히 새롭게 부활한 베니 쿠퍼맨은 이 책을 통해서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나뉘어지는, 전작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전작을 능가하는 매력적인 탐정으로 추리소설사에서 자리매김할 것이다. 또한 어쩌면 부담감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했지만 독자들의 성화에 의해 마지못해 부활시키고 만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나 자신의 분신을 다른 작가들이 멋대로 재단하는 게 싫어 자신의 죽음에 맞춰 결국 죽이고 만 애거서 크리스티의 "에르큘 포와로" 보다도 더욱 극적이고 멋지게 부활한 그런 탐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실제 경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창조된 탐정이지만 "역사상 가장 재밌는 사립탐정"이라는 어느 평을 넘어 “역사상 가장 독특하고 매력적인 탐정”으로서의 베니 쿠퍼맨의 활약들이 계속될 수 있도록 작가의 건강이 계속 호전되길 바래보며, 우리나라에도 이번 한 편으로 그치지 말고 계속 소개되어지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