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주의자를 위한 경제학 - 대통령들의 경제교사, 최용식 소장의 경제학 혁명
최용식 지음 / 알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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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경제(經濟)는 참 어렵다. 하루에도 수십 건 씩 쏟아져 나오는 경제 관련 통계나 경제 분석 기사들을 보면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 - 4년 학부과정에 불과하고 그것도 졸업한지 오래되어 교과 과정에 뭐가 있는지도 가물가물해졌지만 - 했던 나로서도 십분의 일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눈길을 돌리고 말게 된다. 이런 무지함 탓도 있겠지만 경제에 대한 각종 진단이나 전망에 대해서도 신뢰보다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게 되는데, 특히 2008년 전 세계에 몰아닥친 금융 위기에 대해서도 전세계 내노라 하는 경제 석학(碩學)들의 진단이 하나같이 제각각이라 과연 위기는 끝났는지 아니면 아직도 현재진행형(ing)인지 판단이 서지 않아 결국 정확한 진단과 처방이 아닌 그저 자기들이 신봉하는 학파적 귄위에 입각해 떠들어대기만 하는 “말”의 성찬(盛饌)에 불과하다고 느낄 수 밖에 없게 되고, 연말마다 경쟁 하듯 발표하는 유수의 경제기관들과 공공기관의 내년도 경제전망들은 어차피 맞지도 않는 건데 하며 자조 섞인 웃음 - 실제로 이제 2011년이 채 6개월도 지나지 않는데 수정전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 이 먼저 나오게 되며, 국가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외치며 쏟아내는 정부의 각종 공공사업이나 경제 대책들은 그 결과에 대한 예측보다도 선거일이 얼마나 남았길래 저러나, 또는 누구 배를 불리려고 저러나 하며 색안경부터 끼고 삐딱하게 바라보게 된다. 이런 경제에 대한 불신(不信)이 비단 나 뿐만은 아닌, 그 어느 때보다 경제에 대한 불확실성(不確實性)이 커진 요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것 일 테다. 그렇다면 이런 경제에 대한 불신과 불안감을 해소할 만한 진정한 “경제학”은 없는 것일까? 노스트라다무스도 불가능하다는 경제 예측을 제대로 해내는 그런 “경제학”은 앞으로도 요원(遼遠)한 것일까? ‘국민의정부’ 출범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경제정책 멘토로서, 참여정부 시절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제 과외교사로 활약하며 ‘재야의 경제교사’로 이름을 떨쳤다는 “21세기경제학연구소” 최용식 소장은 <회의주의자를 위한 경제학(알키/2011년 4월)>에서 나처럼 많은 사람들이 "경제“에 대해 냉소적이고 회의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지금까지 오류투성이의 경제학을 접해왔기 때문이며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는 경제학은 전혀 쓸모가 없다면서 그런 경제학은 버리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현 경제학의 대안으로써 그가 40여 년에 걸친 오랜 연구 끝에 완성해냈다는 “미래경제학”을 제시하고 있다. 

작가는 머리말에서 현 경제학은 가격은 수요와 공급이 결정하고 소득은 저축과투자의 균형점에서 형성된다는, 즉 가격이론이든 소득이론이든 모두 일원론 구조에 머무르고 있으며, 이러한 일원론 구조로는 아무리 많은 변수들을 포함시키더라도 변곡점을 제대로 읽고 예측해낼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하나의 운동 원리는 하나의 벡터만 생성하고, 그 벡터는 운동 뱡항과 속도가 일정하기 때문에, 경기가 좋을 때는 앞으로도 계속 좋을 것이라고, 경기가 나쁠 때는 앞으로도 계속 나쁠 것이라고 예측할 수 밖에 없고 이는 현 경제학의 근원적인 한계에 따른 결과라는 주장이다. 반면 그가 이 책을 통해서 설명하려고 하는 “미래경제학”은 모든 경제현상을 하나의 운동원리가 만들어낸 단순현상이 아니라, 서로 다른 운동 원리들이 만들어낸 각각의 현상들이 중첩되어 나타나는 합성현상이라고 보기 때문에 경제의 변곡점을 포착해낼 수 있는 이론구조를 갖췄다고 말하면서 실제로 작가는 이런 미래경제학 이론을 바탕으로 여러 차례 변곡점들을 정확하게 예측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책이 천동설이 지동설로 진화함으로써 신의 세계가 비로소 과학의 세계로 편입되었듯이 미래 경제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역시 신의 세계로 여겨졌던 경제예측을 부분적으로나마 과학의 세계로 편입시켜주는, 경제학의 진화를 불러오기를 기대한다고 집필동기를 밝힌다. 

그렇다면 작가가 체계화했다고 하는 “미래경제학”이란 무엇일까? 간단하게 살펴보면 이렇다. 경제체는 4개의 주체 즉, 가계(소비), 기업(생산), 정부(재정정책), 무역과 3개의 시장, 즉 재화시장(교환, 유통), 생산요소시장(분배). 금융시장(통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주체와 시장이 어우러져 일으키는 시장경제현상은 운동에너지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경제현상은 합성현상이고 그 합성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가격현상, 소득현상, 체제현상 등의 3원 현상이며 이 3원 현상에는 결정원리와 변동원리 그리고 카오스 원리라는 각각의 운동 원리에 의해 구현되며, 그렇다면 경제학의 이론체계도 당연히 여기에 맞춰 재구성해야 할 것이다. 경제체를 온전한 모습으로 이해하고 운동에너지 개념을 도입해야 함은 물론 각각 가격, 소득, 체제의 운동 원리로 구분하여 경제학의 이론체계를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에서는 이처럼 각 운동 원리별 이론들을 전체 책의 3분의 2 가까이를 할애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마지막장(5장 예측하는 경제학, 미래경제학의 탄생편)에서는 이런 이론들을 근거로 한 단계적인 경제예측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책에서는 또한 “경제 병리학”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작가는 이미 하나의 학문으로써 자리 잡은 생물학에서의 “병리학”처럼 생물체보다 경제에서 병리적 현상이 훨씬 더 자주 나타나는 경제학에서도 병리학은 이미 발전단계에 이르렀어야 하는데, 병리학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경제위기 혹은 경제 파국에 대한 연구가 그동안 다양하게 이뤄져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연구들은 여전히 과학적인 뒷받침을 받지 못한 가운데 오로지 대중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전제하며, 그런 까닭에 환율급변, 외화부채, 국가 신용등급 추락, 교역조건 악화, 통화량 급증, 예금 인츨 등을 포함한 금융시장 불안을 나타내는 경제지표들이 왜, 어떻게 경제 위기의 경보지표로서 작동하는지에 대한 이론적 기반은 여전히 마련되지 못함에 따라 그 한계를 드러냈다고 주장한다. 또한 현 경제학 이론 체계에서는 경제 질병이 발생할 여지가 없는데, 그 이유가 일반 균형이론에 입각해 경제가 전반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며, 설령 외부 충격이 가해져 일시적으로 균형에서 이탈하더라도 '항상 완벽한 정보를 신속하게 얻는다'는 전제에 따른 경제주체의 합리적 행동이 균형의 이탈을 신속하게 회복시키곤 한다고 주류 경제학은 믿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시장에서는 이 가설이 쉽게 무너진다고 말한다. 즉 실제 시장에서는 신속하고 완벽한 정보를 얻는다는 것이 불가능하고 합리적인 행동을 추구한다는 것 또한 언제든지 합리적인 행동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경제는 일반균형을 이루는 경향이 있다는 말도 경제가 일반균형에서 언제든지 이탈할 수 있다는, 즉 언제든지 경제적 불균형현상 혹은 병리적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경제 병리 현상을 연구하는 “경제 병리학” 개념이 이제는 태동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경제 질병의 임상사례로 경제정책의 실패로 장기화된 1930년대 세계 대공황, 국제수지 흑자와 경기 부양을 위한 대대적인 재정지출의 증가가 오히려 초장기 침체를 가져온 일본의 장기침체, 외환위기 직전 지속된 경상수지 적자의 누적으로 인한 외환 보유고의 고갈, 이를 막기 위한 외채 도입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가속화된 우리의 외환위기를 예로 들어 분석한다. 

작가는 맺음말에서 무엇보다 우리나라 젊은 경제학자들의 활약을 기대하며, 세계적인 경제학 전문지에 글을 기고하면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다섯 가지 주제, 경제병리학의 개념, 신용창조의 역과정인 신용수렴, 수요의 시간이동의 도입을 통한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에서의 경기순환 및 금융위기의 근본 원인과 전개과정, 한계 개념의 소득이론에로의 확장, 우리나라 외환위기의 성공적인 극복과정에 대한 논문 작성 등을 제시하며 끝을 맺는다.  

65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빽빽한 줄 간과 작은 글씨 등 분량만 보면 대학교 경제학 교재와 맞먹지만 각종 학설이나 생소한 경제용어만 나열한 딱딱한 이론서가 아닌 일반 독자들도 이해하기 쉽게 씌여진 경제 교양서로서 충분히 가치 있다고 할 것이다. 특히 세계 대공황과 같은 역사적인 경제 위기에 대한 병리학적인 명쾌한 해석은 기존의 중구난방격인 경제 해설서와는 충분히 차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알량한 내 경제상식으로는 감히 이 책 이론에 대한 타당성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어불성설일 것이다. 다만 궁금한 점 몇가지를 들어본다면, 먼저 경제 주체들과 시장들, 그리고 3원 현상이라는 가격, 소득, 체제라는 세 가지 현상이 이뤄내는 융합(합성)적인 접근과 해석이 새로워 보이기는 하는데, 이러한 분석과 시도가 과연 이 책이 처음인지 여부이다.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통론(通論)이라 할 수 있는 미시(微視), 거시(巨視)경제학을 배우고 나면, 각론(各論)이라 할 수 있는 “화폐금융론”, “재정학”, “국제경제학” 등을 배우는 이유가 개별 주체와 시장 분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개별 주체들의 상호작용 - 상호간의 작용이 결국 이 책에서 말하는 합성 현상을 일으킬 것이다 - 을 분석하여 거대한 경제체를 해석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최근 또한 이론적 준거로서 수리적 모델과 해석이 필 수 일 텐데 미래경제학에 대한 수리적 모델 구성과 해석은 가능한 지, 그리고 미래경제학으로써 예측 가능한 경제 전망의 신뢰성을 검증받은 사례가 있었는지, 또한 작가가 미래경제학 예측 시스템을 바탕으로 전망하는 2011년과 중장기 경제 변화는 어떤 방향인지 구체적인 사례가 궁금해진다.  

어쩌면 책 속에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다 담겨있었을 텐데, 책을 꼼꼼히 읽어내지 못한 내 서툰 독서를 탓해야 할 것이다. 바람이 있다면 이 책이 그저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경제 교양서로 끝날 것이 아니라 경제학자와 경제 전문가들의 비판을 간절히 기다린다는 작가의 바람처럼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미래 경제학”과 “경제 병리학”의 개념이 경제학의 신조류(新潮流)로서 진정 가치가 있는지 활발한 검증과 토론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 이상 경제 예측이 믿거나 말거나 식의 “예언(豫言)”과 같은 무책임한 예측이 아니라 우리 같은 일반 사람들도 충분히 대비하고 준비할 수 있는 희망(希望)의 예측이 되어주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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퀀텀 패밀리즈
아즈마 히로키 지음, 이영미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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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판타지와 SF, 둘 다 현실에서 경험하기 불가능한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한 기발한 상상력을 한껏 발휘한 장르들이지만 철저하게 허구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판타지와는 달리 SF소설은 과학적 설정(Science)을 바탕으로 한 “실현 가능할 법한 이야기(Fiction)”라는 점에서 다르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과학적 설정”과 “이야기(敍事)”는 양날의 검과 같아서 과학적 설정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딱딱한 “과학 교과서”가 되고 말며, “이야기”에 지나치게 치중하다 보면 말 그대로 앞서 언급한 공상(空想) 수준의 “판타지 소설”이 되고 만다. 즉 “과학(Science)"과 “이야기(Fiction)"의 절묘한 조화야말로 SF소설의 매력이자 성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평행우주론(平行宇宙論, Parallel World)“를 소재로 한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의 SF소설 <퀀텀 패밀리즈(원제 Quantum Families/자음과모음(이룸)/2011년 3월)>는 과연 어떨까? 과학적 설정만큼은 그동안 읽어본 그 어떤 SF소설들보다도 치밀하고 정교한데 - 물론 이론적 타당성은 문외한인지라 평가할 수 없겠지만 - 오히려 너무 장황하고 어렵기만 한 과학적 설정이 서사구조(이야기)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즉 과학과 이야기의 “조화”에는 실패한 아쉬운 소설이었다. 

먼저 이 책에 등장하는 “평행우주론”에 대해 잠깐 살펴보자. “다중우주론(多重宇宙論)”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이론은 과학적으로는 “양자역학”,“우주파동함수이론” 등 최신 과학 이론을 이론적 배경으로 한다는 데 나에게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이해 불가의 이론들이니 과학적 설명은 제외하고, 간단히 말하면 우주가 여러 가지 일어나는 일들과 조건에 의해 통상적으로 갈래가 나뉘어 서로 다른 일이 일어나는 우주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이론이라고 한다(위키피디아 백과사전 발췌). 이미 SF소설이나 영화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는데, 영국 인기 드라마 <닥터 후(Doctor Who)>, 이연걸 주연의 <더 원(The One/2001)> 등이 대표적 작품이며, 1990년 큰 인기를 끌었던 예능 프로그램 <이휘재의 인생극장>도 이 평행우주론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말만 어렵다 뿐이지 꽤나 친숙한 소재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소설로는 2010년 베스트셀러였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가 “평행우주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데 아직 읽어보지 못했으니 소설로는 이 책이 처음이라 할 수 있다.  

2008년 현재 인문학부 부교수이자 일본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작가로도 유명한 “나”(아시후네 유키토)는 1999년 당시 편집자였던 4살 연상의 아내 “오시마 유리카”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지 9년이 되가는 36세의 남성이다. 장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지만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고, 여제자와 불륜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하루하루가 답답하고 무료한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정체불명의 편지 한 통이 이메일로 배달되어 온다. 발신자는 바로 2035년 “미래의 딸”. 아내가 자궁근종을 앓고 있어 아기를 갖기 어려운 상황에서, 거기에다가 1년 반 전에 태어난 미래의 딸에게서 온 편지라니. 나는 불륜관계였던 여제자가 보내온 메시지라 생각하고 무시해버리지만 계속되는 편지에 답장을 보내기 시작한다. 반년 후 아내가 수술을 받으러 들어가기로 한 날 나에게 애리조나 사막으로 오라는 메일과 함께 비행기 티켓이 도착한다. 나는 아내를 뒤로 하고 “딸”을 만나러 비행기에 오른다. 애리조나에 도착해서 미래의 “딸”에게 전화를 걸지만 오히려 낯선 남자와 통화를 하게 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나는 자신이 떠나온 세상과는 전혀 달라진, 자근근종을 앓고 있던 아내는 병이 언제 걸렸냐고 묻듯이 병의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으며, 예쁜 딸 “후코”가 그를 반기는 그런 세상을 마주하게 된다. 변해버린 세상에 어리둥절하면서도 나는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화목한 가정의 행복을 만끽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자신이 급진적인 혁명을 조장하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블로그 회원이자 불륜 상대였던 옛 제자 “나기사”와 그의 남자친구를 만나서 미국과 일본 두 곳에서 동시다발적인 테러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테러를 막아보려고 하지만 그만쇼핑몰 테러는 예정대로 일어나 버리고 만다. 한편 나에게 편지를 보냈던 30년 후 미래의 딸 “후코”는 집에서 과거의 아버지와 통화하던 중 괴한에게 기습을 당해 기절하고 마는데, 깨어나 마주한 괴한은 바로 자신의 남동생이라는, 자신의 세계에서는 태어난 적이 없는, 또 다른 평행우주의 남동생 “리키” - 유키토가 애리조나로 가기전 세계에서 태어난 아들 - 였다. 그에게서 자신의 세상과는 다른 개념의 평행우주에 관한 설명을 들은 후코는 리키와 함께 아버지 유키토가 건너간 평행세계로 테러를 막기 위해 전송 - 이 책에서 평행 우주 속 다른 세계로 가는 방법이 육체가 이동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영혼)이 다른 몸에 깃드는 형식으로 이뤄진다. 유키토는 애리조나 사막에서 다른 세계의 자신의 육체로 정신이 전송되엇지만 후코와 리키는 “나기사”와 그의 애인의 몸에 정신이 전송된다 - 하지만 역시 실패하고 만다. 끔찍한 테러 현장에서 만난 유키토와 리키, 후코는 또다른 평행세계의 유리카에 의해 미래로 전송된다. 그곳에서 서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던 가족(패밀리즈), 즉 유키토, 유리카, 후코, 리키가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의문의 인물 “시오코”까지. 

이처럼 “이야기(Fiction)”는 참 흥미롭고 재미있는데, 지나치게 치밀한 “과학적 설정(Science)”과 복잡한 이야기 전개가 몰입을 방해하는 형국이 되어버려 나에게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소설이 되어버렸다. 이 책에서 사용하고 있는 과학적 설정들인 슈뢰딩거 방정식, 양자 뇌계산기 과학, 글로벌 베이직과 캐퍼빌리티와 퀀텀 라이프로그, 에버렛-크립키-쉔 함수, 비튜링형 알고리즘 등이 나에게는 외계어(外界語)로만 들리는 그런 이해 불가의 설정들이라 장황하고 지루하게만 느껴졌고, 이런 이론들을 토대로 구축해낸 이 책의 평행 우주에 대한 세계관, 즉 각 평행 세계가 다른 평행 세계의 “시뮬레이션”이라는 개념 - 이 책에서는 “게임”에 비유하고 다른 평행세계로 이동하여 살게 된 유키토의 삶을 “리셋”이라고 표현한다 -과, 결국에는 평행세계들이 서로 간섭 현상 - 200개 이상의 서로 다른 삶들이 중첩되어 기억 속으로 들어와 기억의 혼란을 일으키는 “검색성 정체장애”가 전염병처럼 번지게 된다 - 을 일으켜 결국 종말적 상황에 이른다는 설정,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을 연상케 하는 마지막 반전 또한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차근차근 읽던 것이 중반 이후부터는 이런 설정 해설 부분은 건너뛰고 이야기만 찾아 읽게 되었다.  

이런 과학적 설정과 배경은 올곧이 이해하는 데 실패했지만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풀사이드>에서 착안했다는 "서른다섯 살 문제" 만큼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인생의 중간점인 서른다섯 살을 지나면 미래의 가능성은 줄어들 뿐, '그랬을지도 모를 가능성'에 끌리게 된다는 이 설정에 대하여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람의 인생은 과거에 성취한 것, 현재 성취하고 있는 것, 미래에 성취할 지도 모르는 것 뿐만 아니라, 과거에는 절대로 성취할 수 없었던 것, 그러나 성취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으로도 지탱된다. 그리고 산다는 것은 성취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의 극히 일부만을 현실에서 성취한 것으로 바꾸고, 나머지는 모조리 가차 없이 가정법 과거인 성취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 속에 밀어 넣는 작업이다. 그리고 35세가 지나면, 그 성취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의 저장고는 실로 크고 무거워져버린다. 다시 말해 과거보다도 가정법 과거가, 존재한 과거보다도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가 더 크고 무거워져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우울해진다. 그리고 그 우울로부터는, 우리가 하나의 인생에서 제 아무리 성공하고 제 아무리 행복을 움켜쥐었다 해도 결코 도망칠 수 없다......" - P.282 

“꺾어진 칠십”이라고 부르는 나이인 “서른다섯 살”, 이 순간을 지나 나이가 자꾸 들어 갈수록 세월의 흐름이 더욱 버거워지는 이유가 과거의 경험이나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는 과거에 대한 회한(悔恨)과 집착이 점점 커지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바로 이런 회한과 아쉬움이 이 책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종류의 평행세계를 만들어내는 분기점(分岐點)이 된다는 뜻으로 해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서른다섯 살의 유키토가 새롭게 주어진 다른 평행 세계의 삶에 그렇게 애착을 보였던 이유도 현실에서는 멀게만 느껴졌던 아내와의 불행한 가정생활이 평행세계에서는 사랑스러운 아내와 딸과 함께하는 행복을 맛보는 , “그랬더라면”이라는 가정법 과거가 실제로 이뤄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이 책을 통해서 우주 어딘가의 다른 세계 - 평행세계 - 에 또 다른 “나”가 살고 있으며. 지금 나의 삶을 우울하게 만드는 과거에 실현되지 않았던 “가정법 과거”가 그 세계에서는 실제로 실현된 삶을 살고 있을 또 다른 “나”가 있다는 , 그 또 다른 “나”가 결코 다른 존재가 아닌 “나”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냥 이렇게 내 멋대로 작가의 의도를 해석해보며 두서없는 리뷰를 마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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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라이트 - 성지 바티칸에서 벌어지는 비밀 의식
매트 바글리오 지음, 유영희.김양미 옮김 / 북돋움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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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신앙의 힘, 즉 기독교적인 믿음으로 악마를 물리친다는 카톨릭 구마사제(驅魔司祭; Exocist)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공포 영화의 고전이라는 <엑소시스트(The Exocist/윌리엄 프리드킨 감독/1973)>에서 등장하는 신부들과 “PC 통신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했다고 평가받고 있는 소설인 이우혁의 <퇴마록(退魔錄/들녘/1994)>에서 퇴마사들의 좌장(座長)인 “박신부”, 이 두 가지 모습이다. 먼저 영화에서는 악마에게 빙의(憑依)당한 소녀가 끔찍하고 흉칙한 얼굴로 변하질 않나, 목이 뒤로 돌아가고 물구나무서서 계단을 내려와 피를 토하지 않나, 침대에서 공중부양(空中浮揚)까지 해대는 온갖 공포스러운 현상을 연출하는데도 성경 구절을 외우며 십자가를 들이대고 성수(聖水)만 뿌려대는 무기력한 대응만 보이더니 결국 악마를 몸 안으로 받아들여 몸을 창밖으로 투신자살하여 퇴치하는 데 반해, 소설에서는 중세 기독교 회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연록색 오로라(Aurora)를 발현시키고 심지어 오로라 구체를 발사하여 흡혈귀와 악마들을 퇴치하는 흡사 성자(聖者)의 위용(威容)을 보여주지만 둘 다 비현실적(非現實的)이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처럼 엑소시스트는 과연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허구(虛構)일까 실재(實在)하는 것일까? AP통신과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로마 통신원인 언론인 매트 바글리오의 <더 라이트; 성지 바티칸에서 벌어지는 비밀의식(원제 The Rite / 북돋움 / 2011년 5월)>에서는 엑소시스트는 실재하며 심지어 엑소시스트 양성을 위한 정식 교육 프로그램이 로마 교황청에 개설되어 있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2007년 1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실제로 있었다는 한 여성의 충격적인 퇴마의식 장면부터 시작하는 이 책은 “프롤로그”에서 엑소시즘(Exocism)에 대한 정의부터 설명한다. 엑소시즘은 종교 용어로, ‘맹세로써 속박’하거나 끊임없이 요구한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엑소르키조(exorkizo)"에서 유래된 용어로 카톨릭 교회 내에서 주교의 승인을 받은 사제가 집행하는 공식적인 의식이라고 한다. 그 권위는 신약(新約)에서 자세히 기록된 것처럼 그 자신이 수많은 엑소시즘을 행했고 나중에 제자들에게도 같은 일을 시켰던 예수에게서 나온다고 하는데,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개종자를 얻고 그의 믿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의학이 눈부시게 발달하면서 교회 내부에서조차 엑소시즘을 간질이나 정신분열증 같은 질병을 퇴치해야 할 ‘악마’로 여기던 시대에 행해진 미신의 잔재라고 여기게 되면서 사제들 중에서도 자신의 신앙과 관련된 풍부한 역사를 배척하지 않으면서 악마를 상징으로 보는 현대의 실재론적인 관점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극단적인 경우 악마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제들도 있다고 한다. 오히려 오컬트(occult)가 유행하면서 일반인들 사이에 천사와 악마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이탈리아에서만 매년 5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엑소시스트를 찾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교계 내에서 이러한 현실을 심각하게 받아 들여야 하고 더 많은 엑소시스트와 적절한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수년간 제기되어 왔다고 한다. 급기야 2004년 가을 교황청 신양교리회에서는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교구에 서한을 보내 주교들에게 공식 엑소시스트를 임명하라고 지시하고, 같은 시기에 로마 교황청이 운영하는 한 대학에서 최초로 ‘엑소시즘과 해방의 기도(Exocism and Prayer of Liberation)'이라는 정식 엑소시스트 양성 강좌를 개설하기에 이른다. 이 책은 미국인 사제인 “게리 토마스” 신부가 2005년 여름 이 교육을 참가해서 9개월간 교육 과정을 마치고, 이탈리아인 선배 사제와 함께 80 여회의 실제 엑소시즘 의식에 참여하고 미국으로 돌아와 자신 또한 엑소시즘을 시행하는 과정을 그린 일종의 다큐멘터리 기록이라 할 수 있다. 

2005년 당시 쉰두 살이었던 게리 신부는 1983년 서품을 받은 뒤 22년간 신부로 일하고 안식년을 맞게 되었는데 몸담고 있는 교구의 주교가 엑소시스트가 되는 특별 과정을 이수하고 오라는 요청에 로마로 향하게 된다. 사실 악마에 관란 이야기를 특별히 선호하지도 혐오하지도 않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게리 신부는 사람들을 돕고 싶어 신부가 되기로 했던 결심과 악령을 쫓아내고 아픈 사람을 치유했던 예수님이 하신 일이 바로 이 일이었다고 생각하며 엑소시즘 프로그램 교육 신청서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게 된 것이다. 언어(이탈리아어) 문제로 첫 교육부터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다행히 통역이 제공되면서 수업에 집중하게 된 게리 신부는 엑소시즘 의식과 악마의 존재에 대한 정의와 천사들의 계급, 악마에게 영혼을 지배당한 사람들의 구분법 등 기초부터 차례차례 공부한 후 로마에서 실제 교구 엑소시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카르미네” 신부의 80여 회에 이르는 엑소시즘 의식을 참관하게 된다. 모든 교육 과정과 실습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와 교구에서 임명한 정식 엑소시스트가 된 그에게 엑소시스트 의뢰가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악마와의 싸움에 첫걸음을 내딛는다. 이처럼 한 신부가 엑소시스트가 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마지막에 이르러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가졌을 의문인 악마의 존재에 대한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하며 끝을 맺는다. 

세상에 악마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을 물리칠 방법 역시 존재한다. - P.317 

서두에서 언급한 공포· 퇴마 소설이나 영화에 관심이 많다면, 특히 베일에 쌓여있는 카톨릭 엑소시즘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을 책인데 아쉽게도 나는 그다지 큰 감흥이 느껴지지 않은 책이었다.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엑소시즘의 정의와 연원, 악마의 유래나 천사의 계급, 악마의 유혹 방법 등은 체계적으로 잘 정리가 되어 있지만 인터넷이나 관련 서적 등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즉 비밀스러울 것 까지는 없는 상식에 가까운 것 들이 대부분이었고, 책에서 수차례 소개하고 있는 엑소시즘 장면들도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이것도 관련 다큐멘터리나 영화 등에서 여러 번 접한 내용이라 그런지 그다지 공포스럽거나 충격적이지 않은 평범한 수준의 내용들이었다. 어쩌면 책 속의 엑소시즘의 사례들이 오히려 소설이나 영화 속의 그것보다 시시하고 밋밋하다 못해 실망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이유는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는 저 유명한 경제 격언처럼 소설이나 영화의 과장된 허구에 더 익숙한 나머지 실재가 오히려 더 싱겁게 느껴지는 지도 모르겠다. 실제 격투기인 “K1”보다 짜고 치는 고스톱인 미국 프로레슬링인 “WWE"를 더 재미있다고 느끼는 독특한 개인적 취향 탓 일 것이다.  

작가는 호기심은 있지만 종교를 믿지 않은 나와 같은 비신자들이나 엑소시즘이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을 의식했는지 작가는 종교와 과학은 서로 양극단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러한 현상들을 부정하겠지만, 부정하는 것 자체가 과학의 기본 정신이라 할 수 있는 과학적 호기심을 배반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즉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부정되어서는 안 되는 실재성(實在性)이 분명 있다는, 그 실재성이 바로 악마의 존재이며 그것을 물리치는 방법인 “엑소시즘”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종교를 믿지 않지만 그렇다고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 즉 과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이 책에서 주장하는 신과 악마의 존재와 엑소시즘의 실재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이처럼 기독교식 방법만이 유효할까? 각자 신봉하고 있는 종교나 문화권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는 각종 퇴마의식들, 즉 우리한테는 더 친숙할 수 도 있는 불교 “구병시식(救病施食)”이나 무당(巫堂) “굿”, 부적(符籍) 등은 전혀 의미도 없고 효과도 없는 이교도(異敎徒)의 사술(邪術)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이렇게 종교마다 다른 방법들도 유효하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신과 악마의 존재도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닌 각자마다 가지고 있는 내재적 가치관에 의해 만들어지는 심리적인 현상에 불과하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책 소개에서 언급한 악마를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다르지 않을 듯 한데 더 고민해볼 만한 대목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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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게 - 제144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일본 소설들을 자주 읽는데, 일본의 대표적인 문학상은 모두 휩쓸 정도로 유명 작가라는 “미치오 슈스케(道尾秀介)”는 2011년 나오키상 수상작이라는 <달과 게(원제 月と蟹/북폴리오/2011년 3월)>이 처음이다. 작가를 검색해보니 추리소설로 유명한 작가인지라 처음 이 책의 광고 문구인 "엄마의 남자가 사라지게 해주세요."를 접했을 때는 추리소설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예상과는 전혀 다른 “성장소설”이었다. 그것도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심리와 성장과정을 섬세하고도 잔잔하게 그린, 결말에 가서는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묘한” 성장소설이었다. 

올해 초등학교 5학년인 열두 살 “신이치”가 가마쿠라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해변 마을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2년 전 부터였다. 아빠 마사나오가 근무하던 상사가 도산하면서 사택에서 나가야 될 처지가 되자 불편한 다리로 혼자 살고 있는 할아버지 “쇼조”와 같이 살기 위해 이 마을에 내려온 것이다. 아버지는 이사온 후 1년 만에 암으로 돌아가시고 이제 할아버지와 혼자가 된 엄마 “스미에”와 살고 있다. 신이치에게는 간사이 지방 해변마을에서 나고 자라 이사를 온, 그 지방 사투리를 쓰는 “하루야”라는 절친한 친구가 있다. 그런데 이 하루야도 툭하면 술주정뱅이 아버지께 매맞아 온 몸이 멍투성이고 밥을 굶어 배가 홀쭉해지는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가여운 아이이다. 둘은 방과 후 해변 바위터 그늘에 설치해 놓은, 콜라 페트병을 잘라내 만든 수제통발인 “블랙홀”로 작은 물고기나 새우, 멸치, 소라게를 잡으며 노는 것이 일과다. 같이 어울려 놀던 어느날, 엄마가 낯선 남자와 함께 차에 앉아 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면서 엄마가 다른 남자와 사귄다는 사실에 불편해하지만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고 끙끙 앓는다. 그러던 어느날, 하루야와 동네 산을 올라갔다가 정상 부근에 바람소리가 마치 우는 소리같이 들리는 바위와 조그만 웅덩이를 발견하고 그곳을 자신들만의 비밀기지로 삼아 바다에서 소라게를 잡아다가 키우기로 한다. 같은 반 친구이자 10년 전 할아버지가 몰던 어선의 사고 로 그만 엄마를 여읜 - 신이치 할아버지 쇼조는 다리를 잃고 만다 - 동급생 “나루미”와도 어울리게 되고, 이 세 명은 방과 후 산으로 올라가 자신들이 키우는 소라게를 “소라검님”이라 부르며 불로 지져 소원을 비는 놀이에 열중하게 된다. 신이치는 엄마가 만나는 사람이 바로 나루미의 아빠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나루미 또한 눈치를 채고 신이치 집에 와서 저녁을 먹게 된다. 자신이 지은 죄는 언젠가는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자신의 어머니도 죄를 지어 돌아가신거냐며 뛰쳐나가는 나루미를 쫓다가 쇼조는 그만 머리를 땅에 부딪혀 두개골에 금이 가는 사고가 발생하여 입원하게 된다. 그런 사실을 나루미에게는 알리지 않은 신이치는 나루미가 가져온 아빠 차 스페어 키를 사용해 나루미 아버지 차에 숨어 들고 엄마와 나루미 아버지의 밀회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신이치는 결국 소라검님에게 “나루미네 아빠를 이 세상에서 없애 주세요.”라는 무서운 소원을 빌게 된다.  

 책 중반까지는 상처를 가진 세 명의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나누는 우정을 그린 잔잔한 성장소설로 읽히다가 말미에 가서는 빌지 말아야 할 금단(禁斷)의 소원을 빌고서도 한 편으로는 그 소원이 이뤄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나루미 아버지 차로 신이치가 뛰어드는 장면에서는 비극적인 결말을 맺는 것이 아닌가 싶어 긴장케 만들더니, 결국 결말은 성장소설 특유의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한다. 결국 뱃속에 이상한 것을 키우지 말라는 할아버지 말처럼 어린아이 특유의 순수함이 아닌 미움과 증오를 품게 되지만 결국 스스로 그런 마음을 버리고 마는 신이치 뿐만 아니라 하루야, 나루미 세 명 모두는 비슷한 아픔을 겪게 된다. 

껍데기를 짊어지믄 어느 정도 안전할지도 모르지만 대신에 전혀 헤엄 몬 친다 아이가. - P.352

라는 하루야의 말처럼 소라 껍데기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벗어버려야 하는 유년의 상징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세 명의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벗어던지지 못하고 불로 달궈지는 껍데기처럼 숙명과도 같은 자신들의 상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벗게 된다. 그러다 보니 “소라 껍데기”라는 보호의 상징을 벗어버리게 되는 과정이 너무나도 아프고 쓰라리기만 하다. 결국 껍데기를 벗어나 말라 죽어버리는 소라게처럼 고통스런 “성장통(成長痛)”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아이들의 성장통을 그리는 방법이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다. 소라게를 불로 지지는 놀이가 일견 잔인해 보일 수 도 있지만 어린 시절 시골이나 바닷가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비슷한 놀이 - 개구리 뒷다리만 떼 내고 풀어주기, 잠자리 날개 떼기 등등 - 를 경험해본 지라 그렇게까지 눈살을 찌푸리지는 않지만, 하루야가 친구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아버지에게 대들어 팔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거나 자신을 학대하는 아버지에게 칼을 들고 덤비는 장면, 나루미 아버지 차에 칼을 들고 몰래 숨어드는 장면 - 물론 그게 하루야인지는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지만 - 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섬뜩함마저 느껴지는 그런 설정이라 할 수 있겠다. “유년시절을 서정적으로만 그려낸 작품이 아닌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라는 어느 일본 작가의 감상평이 제격이었다고 할까?

아쉽게도 난 이 책에서 성장소설 특유의 감동을 느끼는 데는 실패했음을, 결코 편히 읽히는 책은 아니었음을 밝혀둬야겠다. 그러나 많은 독자들이 감동적이었다고 평하는 것을 보면 이 작품의 완성도를 탓할 것이 아니라 이 책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나를 탓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미치오 슈스케, 이 책 한 권 밖에 읽어보지 못했지만 독특한 느낌의 작가로 기억될 것 같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전작 "추리소설"들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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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8
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20~3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없던 “왕따 문제”가 외래문화의 무분별한 유입으로 인해 일본의 “이지메(イジメ; 괴롭힘)” 문화가 우리나라에 상륙하면서 시작된 것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당시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그때도 분명 “왕따”라는 것이 존재했었다. 다만 지금과는 정도가 차이가 있고 - 물론 당시 괴롭힘을 당했던 아이들이 느꼈을 상처와 아픔은 지금과 다르지 않겠지만 -, 그 당시에는 그런 괴롭힘을 미성숙한 청소년들이 겪는 일종의 “성장통(成長痛)”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는 것이 지금과 다르다 할 것이다. 그런데 2009년 기준 15~24세 청소년들의 사망원인 1위가 바로 “자살”- 2011.5.3. 통계청 자료 <2011 청소년 통계> - 이라고 하며, 하루가 멀다 하고 왕따로 인해 자살한 청소년들 기사가 올라오는 것을 보면 이제는 심각한 사회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 보니 왕따를 소재로 한 국내 소설들도 여럿 만나볼 수 있는데, 특히 왕따의 원조격인 이웃 일본에서는 조금만 둘러보면 소설 뿐 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 등 참 다양한 장르로 만나볼 수 있다. 이번에 읽은 아쿠타가와상 수상작가인 “가와카미 미에코(川上未映子)”의 <헤븐(원제 Heaven/비채/2011년 4월)>도 바로 이런 “이지메”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다만 기존 이지메 소재 소설들이 피해자의 상처와 아픔만을 강조했다면 이 책은 가해자의 이야기도 들어볼 수 있다는 점이 이색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얼토당토않은 궤변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지만. 

 

남들과 다른 눈(사시(斜視)) 때문에 아이들에게 상습적으로 집단 괴롭힘(이지메)을 당하는 중학교 2학년생인 “나”에게 4월이 끝나가는 어느날 “우리는 같은 편이야”라는 쪽지를 받는다.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의 못된 장난으로 밖에 생각이 안되어 무시해버리지만 편지는 계속되고, 5월 접어들어 만나자는 편지에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던 나는 편지에서 일러준 약속 장소로 나가게 된다. 약속 장소에 나와 있던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는 “니노미야” 패거리가 아니라 집이 가난하다고 해서, 불결하다고 해서 괴롭힘을 당하던 같은 반 여학생인 “고지마”였다. 서로 친구가 되기로 한 둘은 계속 편지를 주고 받게 되고, 고즈미의 편지들은 갈수록 심해지는 니노미야 패거리들의 괴롭힘을 견디게 하는 유일한 위안거리가 된다. 고지마는 “나”의 “사시”에 대해 “있잖아 나는 네 눈이 참 좋아”라고 말하며 아이들이 “나”의 눈이 기분 나쁘다느니 뭐니 하지만 그건 다 거짓말이고 실제로는 자기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무서워 그런 거라고 이야기한다. 둘의 우정은 계속되지만 괴롭힘은 더욱 계속되고, 급기야 인간 축구 놀이라고 해서 축구공 가죽을 머리에 씌우고 구타당해 크게 상처를 입게 된다.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갔던 나는 의사에게서 천형(天刑)처럼 여겨온 사시가 쉽게 교정이 가능하다면, 그것도 적은 비용으로 가능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런데 그런 말이 고지마 와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들어 버린다. 오랜만에 만나자는 고지마의 편지를 받고 처음 만난 장소인 “고래 공원”에 달려 나간 “나”, 그곳에는 니노미야 패거리들이 고지마를 둘러싼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고지마는 니노미야 패거리들에게 옷 벗김과 성행위를 강요당하기에까지 이르게 되고, 망설이고만 있는 나 대신 고지마가 패거리들에게 달려든다.  

작가의 실제 경험담이었을지 아님 취재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도 잔인한 이지메 장면들과 어린 소년 소녀들의 사실적인 심리 묘사 장면 때문에 읽는 내내 불편했던 책이다. 둘 다 이지메의 이유가 극복할 수 있는 문제 - “나”의 사시는 간단하게 교정될 수 있으며, 고지마의 더러움도 집이 가난해서가 아니라 이혼하고 가난하게 사는 아버지 때문에 일부러 씻지 않는, 일종의 “의리”라고 볼 수 있다 - 임에도, 그리고 괴롭힘에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듯한 두 소년 소녀의 태도가 영 마땅치가 않다. 특히 고지마가 “나”에게  

“너도 나도 약하기 때문에 당하고만 있는 게 아니야. 녀석들이 하라는 대로 그냥 복종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처음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냥 복종하는 게 아니야. 받아들이고 있는 거야. 우리는 눈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면서 받아들이고 있는 거라고. 강한가 약한가 하는 기준으로 말한다면, 그건 오히려 강하지 않으면 못하는 일이야.” 

라는 말처럼 아이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그냥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이해하면서 받아들인다는 것을 살아남기 위한 서글픈 생존 방법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그렇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두 아이의 생각이 왠지 처량하면서도 안타깝게 느껴진다. 또한 병원에 치료하기 위해 갔다가 마주친 “니노미야” 패거리의 “모모세”와의 대화는 이지메 가해자의 변(辯)이라 할 수 있는데 괴롭힘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으며 - “나”는 “사시”가 괴롭힘의 원인으로 여겨왔었다 - 모든 것은 그저 우연히 “나”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며 양심의 가책 은 전혀 받지 않는다는 모모세의 말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잖아? 하고 싶으면 하면 돼. 아무도 너를 제지할, 그야말로 권리 같은 것은 안 갖고 있어. 그렇지만 문제는 말이야, 그런 비유가 아니고, 왜 너는 죽일 동기라든가 타이밍이 충분히 있는데도 지금 우리 중에 누구라도, 나라도 상관없지만, 죽이지 않는가 하는 것 아닐까? (중략) “왜 너는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을까? 왜 못할까? 문제는 그거야. 왜 너는 우리를 부엌칼이나 뭔가로 찌르지 않을까? 막상 하면 예상 외로 상황이 바뀔지도 모르는데, 왜 너는 그것을 못할까? 잡히는 게 무서워서? 그렇지만 우리는 14세 미만이니까 처벌을 안 받거든. 소년원에는 가겠지만.”(중략) “하면 죄책감이 생기니까? 그럼 왜 너는 죄책감이 생기고 나는 안 생길까? 어느 쪽이 제대로 된 걸까?” “이 세상은 이런 저런 일을 할 수 있거나 할 수 없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지.” 

할 수 있기 때문에 괴롭히는 것이고 괴롭힘의 대상인 “나”는 저항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생각, 이것이 지금 이지메 문제의 진정한 원인일까? 그저 아무 이유 없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니, 그저 즉흥적인 답변이 아니라 오랜 시간 곰곰이 생각한 흔적까지 엿볼 수 있는, 14세 소년의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이 말에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극단까지 치달은 이지메가 고지마의 저항으로 일단락되고, 주인공도 사시 교정 수술을 받아 더 이상 놀림을 당하지 않게 되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지만 그 해피엔딩이 결코 행복하지 않은 “슬픔”으로까지 느껴지는 이유가. 그런 괴롭힘이 정말 이유 없는 그런 것이라면 괴롭힘에 저항했다고 해서, 놀림의 대상으로 여겨왔던 눈을 교정했다고 해서 해결된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현재진행형(ing)이 될 것임에는 분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왕따문제”를 제3자의 동정이 아니라 당사자인 가해자와 피해자, 둘의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한 다는 것을 일깨워준 소설이었다. 나에게는 지극히 불편했던 이야기였긴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살아갈 용기가 생겼다”라는 어느 일본 중학생의 독후감처럼 이지메를 당하는 학생들에게 희망을 선사하는 작품이 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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