퀀텀 패밀리즈
아즈마 히로키 지음, 이영미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판타지와 SF, 둘 다 현실에서 경험하기 불가능한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한 기발한 상상력을 한껏 발휘한 장르들이지만 철저하게 허구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판타지와는 달리 SF소설은 과학적 설정(Science)을 바탕으로 한 “실현 가능할 법한 이야기(Fiction)”라는 점에서 다르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과학적 설정”과 “이야기(敍事)”는 양날의 검과 같아서 과학적 설정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딱딱한 “과학 교과서”가 되고 말며, “이야기”에 지나치게 치중하다 보면 말 그대로 앞서 언급한 공상(空想) 수준의 “판타지 소설”이 되고 만다. 즉 “과학(Science)"과 “이야기(Fiction)"의 절묘한 조화야말로 SF소설의 매력이자 성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평행우주론(平行宇宙論, Parallel World)“를 소재로 한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의 SF소설 <퀀텀 패밀리즈(원제 Quantum Families/자음과모음(이룸)/2011년 3월)>는 과연 어떨까? 과학적 설정만큼은 그동안 읽어본 그 어떤 SF소설들보다도 치밀하고 정교한데 - 물론 이론적 타당성은 문외한인지라 평가할 수 없겠지만 - 오히려 너무 장황하고 어렵기만 한 과학적 설정이 서사구조(이야기)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즉 과학과 이야기의 “조화”에는 실패한 아쉬운 소설이었다. 

먼저 이 책에 등장하는 “평행우주론”에 대해 잠깐 살펴보자. “다중우주론(多重宇宙論)”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이론은 과학적으로는 “양자역학”,“우주파동함수이론” 등 최신 과학 이론을 이론적 배경으로 한다는 데 나에게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이해 불가의 이론들이니 과학적 설명은 제외하고, 간단히 말하면 우주가 여러 가지 일어나는 일들과 조건에 의해 통상적으로 갈래가 나뉘어 서로 다른 일이 일어나는 우주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이론이라고 한다(위키피디아 백과사전 발췌). 이미 SF소설이나 영화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는데, 영국 인기 드라마 <닥터 후(Doctor Who)>, 이연걸 주연의 <더 원(The One/2001)> 등이 대표적 작품이며, 1990년 큰 인기를 끌었던 예능 프로그램 <이휘재의 인생극장>도 이 평행우주론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말만 어렵다 뿐이지 꽤나 친숙한 소재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소설로는 2010년 베스트셀러였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가 “평행우주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데 아직 읽어보지 못했으니 소설로는 이 책이 처음이라 할 수 있다.  

2008년 현재 인문학부 부교수이자 일본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작가로도 유명한 “나”(아시후네 유키토)는 1999년 당시 편집자였던 4살 연상의 아내 “오시마 유리카”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지 9년이 되가는 36세의 남성이다. 장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지만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고, 여제자와 불륜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하루하루가 답답하고 무료한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정체불명의 편지 한 통이 이메일로 배달되어 온다. 발신자는 바로 2035년 “미래의 딸”. 아내가 자궁근종을 앓고 있어 아기를 갖기 어려운 상황에서, 거기에다가 1년 반 전에 태어난 미래의 딸에게서 온 편지라니. 나는 불륜관계였던 여제자가 보내온 메시지라 생각하고 무시해버리지만 계속되는 편지에 답장을 보내기 시작한다. 반년 후 아내가 수술을 받으러 들어가기로 한 날 나에게 애리조나 사막으로 오라는 메일과 함께 비행기 티켓이 도착한다. 나는 아내를 뒤로 하고 “딸”을 만나러 비행기에 오른다. 애리조나에 도착해서 미래의 “딸”에게 전화를 걸지만 오히려 낯선 남자와 통화를 하게 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나는 자신이 떠나온 세상과는 전혀 달라진, 자근근종을 앓고 있던 아내는 병이 언제 걸렸냐고 묻듯이 병의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으며, 예쁜 딸 “후코”가 그를 반기는 그런 세상을 마주하게 된다. 변해버린 세상에 어리둥절하면서도 나는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화목한 가정의 행복을 만끽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자신이 급진적인 혁명을 조장하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블로그 회원이자 불륜 상대였던 옛 제자 “나기사”와 그의 남자친구를 만나서 미국과 일본 두 곳에서 동시다발적인 테러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테러를 막아보려고 하지만 그만쇼핑몰 테러는 예정대로 일어나 버리고 만다. 한편 나에게 편지를 보냈던 30년 후 미래의 딸 “후코”는 집에서 과거의 아버지와 통화하던 중 괴한에게 기습을 당해 기절하고 마는데, 깨어나 마주한 괴한은 바로 자신의 남동생이라는, 자신의 세계에서는 태어난 적이 없는, 또 다른 평행우주의 남동생 “리키” - 유키토가 애리조나로 가기전 세계에서 태어난 아들 - 였다. 그에게서 자신의 세상과는 다른 개념의 평행우주에 관한 설명을 들은 후코는 리키와 함께 아버지 유키토가 건너간 평행세계로 테러를 막기 위해 전송 - 이 책에서 평행 우주 속 다른 세계로 가는 방법이 육체가 이동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영혼)이 다른 몸에 깃드는 형식으로 이뤄진다. 유키토는 애리조나 사막에서 다른 세계의 자신의 육체로 정신이 전송되엇지만 후코와 리키는 “나기사”와 그의 애인의 몸에 정신이 전송된다 - 하지만 역시 실패하고 만다. 끔찍한 테러 현장에서 만난 유키토와 리키, 후코는 또다른 평행세계의 유리카에 의해 미래로 전송된다. 그곳에서 서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던 가족(패밀리즈), 즉 유키토, 유리카, 후코, 리키가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의문의 인물 “시오코”까지. 

이처럼 “이야기(Fiction)”는 참 흥미롭고 재미있는데, 지나치게 치밀한 “과학적 설정(Science)”과 복잡한 이야기 전개가 몰입을 방해하는 형국이 되어버려 나에게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소설이 되어버렸다. 이 책에서 사용하고 있는 과학적 설정들인 슈뢰딩거 방정식, 양자 뇌계산기 과학, 글로벌 베이직과 캐퍼빌리티와 퀀텀 라이프로그, 에버렛-크립키-쉔 함수, 비튜링형 알고리즘 등이 나에게는 외계어(外界語)로만 들리는 그런 이해 불가의 설정들이라 장황하고 지루하게만 느껴졌고, 이런 이론들을 토대로 구축해낸 이 책의 평행 우주에 대한 세계관, 즉 각 평행 세계가 다른 평행 세계의 “시뮬레이션”이라는 개념 - 이 책에서는 “게임”에 비유하고 다른 평행세계로 이동하여 살게 된 유키토의 삶을 “리셋”이라고 표현한다 -과, 결국에는 평행세계들이 서로 간섭 현상 - 200개 이상의 서로 다른 삶들이 중첩되어 기억 속으로 들어와 기억의 혼란을 일으키는 “검색성 정체장애”가 전염병처럼 번지게 된다 - 을 일으켜 결국 종말적 상황에 이른다는 설정,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을 연상케 하는 마지막 반전 또한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차근차근 읽던 것이 중반 이후부터는 이런 설정 해설 부분은 건너뛰고 이야기만 찾아 읽게 되었다.  

이런 과학적 설정과 배경은 올곧이 이해하는 데 실패했지만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풀사이드>에서 착안했다는 "서른다섯 살 문제" 만큼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인생의 중간점인 서른다섯 살을 지나면 미래의 가능성은 줄어들 뿐, '그랬을지도 모를 가능성'에 끌리게 된다는 이 설정에 대하여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람의 인생은 과거에 성취한 것, 현재 성취하고 있는 것, 미래에 성취할 지도 모르는 것 뿐만 아니라, 과거에는 절대로 성취할 수 없었던 것, 그러나 성취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으로도 지탱된다. 그리고 산다는 것은 성취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의 극히 일부만을 현실에서 성취한 것으로 바꾸고, 나머지는 모조리 가차 없이 가정법 과거인 성취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 속에 밀어 넣는 작업이다. 그리고 35세가 지나면, 그 성취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의 저장고는 실로 크고 무거워져버린다. 다시 말해 과거보다도 가정법 과거가, 존재한 과거보다도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가 더 크고 무거워져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우울해진다. 그리고 그 우울로부터는, 우리가 하나의 인생에서 제 아무리 성공하고 제 아무리 행복을 움켜쥐었다 해도 결코 도망칠 수 없다......" - P.282 

“꺾어진 칠십”이라고 부르는 나이인 “서른다섯 살”, 이 순간을 지나 나이가 자꾸 들어 갈수록 세월의 흐름이 더욱 버거워지는 이유가 과거의 경험이나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는 과거에 대한 회한(悔恨)과 집착이 점점 커지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바로 이런 회한과 아쉬움이 이 책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종류의 평행세계를 만들어내는 분기점(分岐點)이 된다는 뜻으로 해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서른다섯 살의 유키토가 새롭게 주어진 다른 평행 세계의 삶에 그렇게 애착을 보였던 이유도 현실에서는 멀게만 느껴졌던 아내와의 불행한 가정생활이 평행세계에서는 사랑스러운 아내와 딸과 함께하는 행복을 맛보는 , “그랬더라면”이라는 가정법 과거가 실제로 이뤄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이 책을 통해서 우주 어딘가의 다른 세계 - 평행세계 - 에 또 다른 “나”가 살고 있으며. 지금 나의 삶을 우울하게 만드는 과거에 실현되지 않았던 “가정법 과거”가 그 세계에서는 실제로 실현된 삶을 살고 있을 또 다른 “나”가 있다는 , 그 또 다른 “나”가 결코 다른 존재가 아닌 “나”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냥 이렇게 내 멋대로 작가의 의도를 해석해보며 두서없는 리뷰를 마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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