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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20세기 문학의 가장 아름다운 스캔들'이라 불리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Nabokov 1899~1977)의 대표작 <롤리타>를 드디어 읽었다. 나보코프의 소설을 진작에 읽고 싶었지만 그동안 미뤄 왔던 이유는 소아성애라는 아주 불편한 소재를 다뤘다는 점과 이미 내용을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책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법게 건드린다. 롤.리.타.'
너무나 아련하고 아름다워 몇 번이고 소리 내어 읽게 되는 첫 문장을 시작으로 나는 그냥 이 소설에 빠져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더럽고 어두운 소설이 아니었다. 물론 험버트의 롤리타를 향한 그 사랑은 병적으로 심하게 일그러져 있지만, 이 지적이고 소심하며 섬세한 남자가 12살 소녀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고 파렴치한 범죄까지 저지르는 과정에서의 그 집요함과 찌질함은 독자의 실소를 자아낸다.
험버트가 롤리타를 성적으로 착취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를 하고 그것을 묘사하는 나보코프의 문장에서 험버트를 향한 냉소적인 조롱을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이 교묘히 감춰져 있어 읽는 재미가 뛰어나다.
열두 살 소녀를 향한 한 중년 남자의 성적 욕망으로만 보기에는 이 소설이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 너무나 예술적이고 때로는 너무 웃겨서 정말 나보코프의 말대로 '심미적 희열'을 느꼈다고 해야 하겠다.
험버트는 '더러운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이 만나는 지점이 있는데, 나는 바로 그 경계선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전혀 성공하지 못한 듯하다'(p.214)고 말한다. 또한 '성은 예술의 시녀일 뿐이다'(p.411)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문학에 대한 나보코프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세상이 금지한 것들, 불편한 것들-살인, 불륜, 소아성애, 성적착취와 같은-을 문학은 다뤄왔고 또 당연히 다뤄야 함을 나보코프는 험버트의 입을 빌려 말한 게 아닐까 싶다.
뒤에 해설에서 <롤리타>는 최소한 두 번은 읽어야 한다고 서평가 이현우는 말한다. 한 번은 험버트의 목소리로, 다른 한 번은 나보코프의 목소리로. 실제로 나보코프는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는 물음에 "소설은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아니면 읽고 읽고 또 읽든가요."(p.528)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두 번째로 또 읽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작가가 교묘하게 숨겨 놓은 단서들이 보여 첫 번째 읽을 때보다 더 재미가 있다.
생각보다 문장이 어렵지 않아 무난히 읽을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또 마냥 술술 잘 읽히는 문장도 아니다. 작가가 러시아의 유서 깊은 귀족 집안의 자제로서 너무나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고 또 내가 보기엔 천재에 속하기 때문에(논문을 여러 개 발표한 나비 학자이기도!) 구사하는 문장이 예사롭지 않다. 여러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 다양한 문학 작품에서 차용한 관용어구 등 화려하면서도 재치가 번뜩이는 언어 유희가 일품이다. 영어로 쓴 작품이 이 정도인데 모국어인 러시아어로 쓴 작품은 얼마나 대단할까...
역자 김진준은 뒤에 '옮긴이의 말'에서 <롤리타>는 20년 '번역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숙제'였고 '이 번역은 미완성'이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치고 또 고치겠다'고 말하는데 독자로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김진준 역자는 <총,균,쇠>를 번역한 작가로 만난 적이 있지만 이 책의 번역은 정말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롤리타>는 중간중간 웃음이 나오는 재미있는 소설이다. 나보코프의 화려하면서도 논리적인 문장은 정말 '당신은 천재'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그러나 '먼저 유혹한 사람은 그녀'였다고, 나를 고발하면 고아원이나 감화원으로 간다며 협박한 일과 나중에 롤리타가 커서 '님펫의 마력'이 사라져 버릴 때에 대비에 롤리타를 임신시켜 롤리타 2세를 만들어내는 것을 상상하는 장면에서는 '아 정말 미친 나쁜 새끼!'라는 생각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이 참 슬프게 다가왔다.
마지막에 임신한 롤리타를 만나 험버트가 흘리는 뜨거운 눈물과 험버트가 롤리타 대신 마음속으로 하는 다음의 말.
"그 사람은 내 가슴에 상처를 남겼어요. 아저씨는 내 인생에 상처를 남겼을 뿐이고"
그리고 자신이 '그 어떤 영적 위안'을 얻었더라도 자신이 롤리타에게 '입힌 더러운 정욕의 상처'(p.450)는 절대 잊지 못할 것이라는 고백은 욕망 앞에서 너무나 나약한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인간에 대한 알 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얼마나 쉽게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으며 그런 자신의 감정을 미화하는가...
그러나 이 소설의 피해자는 단연코 롤리타이다. 아버지 없이 자라 부성에 대한 결핍과 엄마와 원만하지 못한 관계 속에서 정서적으로 방치되어 있던 롤리타 앞에 때마침 험버트 같은 소아성애자가 나타나 이런 비극이 일어났으니 말이다.
내가 사랑하는 소설 목록에 기꺼이 추가할 작품이다. 나도 불러 본다. 나의 롤리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