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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1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
스탕달 지음, 이규식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적과 흑>(Le Rouge et le Noir)은 스탕달(Stendhal1783~1842)이 1830년 발표, 프랑스 근대 문학의 출발을 알리는 최초의 사실주의 소설로 평가 받고 있다.
스탕달은 1783년 프랑스 그르노블의 부유한 부르주아 집안 출신으로 본명은 마리 앙리 벨(Marie Henry Beyle)이다. 프랑스 근대 문학의 시초로 불리며 작가 활동 외에도 나폴레옹 시대에는 군인으로 이탈리아 원정에도 참가했고, 감사관 등 여러 직책을 맡다가 1830년 7월 혁명으로 부르주아의 시대가 오자 이탈리아 트리스테 영사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적과 흑>을 발표, 프랑스 근대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몰락한 후 프랑스는 다시 구체제로 돌아가는데 이 시기를 왕정복고 시대(1814~1830)라 한다. <적과 흑>은 이러한 왕정복고 시대의 후반기, 샤를 10세가 통치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스탕달은 이 작품에 '1830년의 연대기'라는 부제를 붙였는데, '소설이란 큰 길을 어슬렁거리는 거울'(2권 p.213)이라는 그의 생각이 이 소설에 잘 드러나 있다.
소설이 거울이라는 말은 소설이 당대의 현실 사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담아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스탕달의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시작으로 나폴레옹 시대를 지나 왕정복고 시대에 왕당파와 공화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파로 나뉘어 권력투쟁을 벌이는 혼란한 프랑스 사회가 눈앞에 펼쳐진다.
많은 정치적 격변을 겪고 귀족, 사제, 부르주아, 평민 각 집단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스탕달은 예리하게 보여준다.
프랑스 대혁명을 거쳐 나폴레옹 제정이라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 다시 돌아온 왕정이기에 특권을 다시 얻은 귀족들은 '교육을 너무 잘 받은 하류 계층 젊은이들 중에 로베스피에르 같은 자가 다시 나타날'(1권 p.147)것을 두려워하며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다지고자 한다. 또한 사제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권력을 조종하여 다시 예전의 권위를 누리기 위해 온갖 음모를 꾸미고, 신흥세력으로 떠오른 중산계층은 자신들의 탐욕을 노골적으로 보이며 귀족과 성직자 뒤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근데 이런 사회를 어떻게 보여주는가 하면 바로 그 유명한 주인공 쥘리앵 소렐이라는 청년의 눈을 통해 보여준다. 쥘리앵 소렐, 그는 어떤 사람인가? 피라르 사제가 라 몰 후작에게 쥘리앵을 비서로 추천하는 장면이다.
"그 청년은 비록 출신은 무척 비천하지만 높은 기개를 품고 있습니다. 그의 자존심을 언짢게 하면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질 것입니다. 그를 바보로 만들게 되는 겁니다." (1권 p.334)
쥘리앵 소렐은 제재소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 교활한 아버지와 난폭한 두 형에게 맞으며 자란다. 수려한 외모에 호리호리한 몸매의 미남이지만 틈만 나면 책만 읽는 아들이 아버지는 맘에 들지 않는다. 그는 하층 계급이지만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하고 총명하며 고귀한 품성을 갖춘 인물이다. '출세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천번 만번 죽겠노라'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으나 위선적인 지배계급을 혐오하고 경멸한다. 그러나 그가 마냥 고결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성공해야 한다 생각과 함께 하층계급 특유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어 늘 계산하고 위선적으로 행동한다. 특히 여자에게 '경험많은 남자'로 보이기 위해 '스스로 규정한 것을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실천'하는 등 늘 자기 자신을 점검한다. 쥘리앵의 이런 모순된 성격은 작품을 더욱 생생하게 만드는데, 나는 이런 쥘리앵의 복잡한 성격과 심리에 묘하게 마음이 끌렸다.
<적과 흑>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쥘리앵의 고향 베리에르(가상의 시골마을)를 무대로 한다. 아버지의 제재소에서 일하던 쥘리앵이 레날 시장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고 레날 부인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쥘리앵을 짝사랑하던 하녀가 소문을 내 부인과의 관계가 탄로나자 베리에르를 떠나 브장송에 있는 신학교에 가게 된다. 2부의 무대는 파리로 쥘리앵은 피라르 사제의 추천으로 라 몰 후작의 비서가 되어 드디어 파리에 입성! 후작의 딸 마틸드와 또 다른 밀고 당기는 사랑을 하게 된다는게 이 소설의 간략한 줄거리이다.
온갖 정치적 투쟁이 난무하던 프랑스 왕정복고 시기, 오직 출세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가혹한 세상에 도전장을 내민 아름다운 그러나 그 내면은 너무나 복잡한 한 청년의 이야기. 무엇보다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서 나타나는 섬세하면서도 예리한 심리묘사가 매우 뛰어난 소설이다. 특히 여자를 유혹하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머리로 계산하는 쥘리앵의 내적 갈등의 묘사가 굉장하다.
고전 연애소설을 읽고 싶으신 분들, 왕정복고기의 프랑스 사회가 궁금하신 분들께 추천한다.
여담이지만 '스탕달 증후군(Stendhal Syndrome)'이라는 말이 있다. '뛰어난 예술 작품을 접하였을 때, 그 충격과 감흥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정신적, 육체적 이상 반응'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스탕달이 이탈리아 피렌체 산타크로체 성당에서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을 보고 이런 증상을 겪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이 용어가 단번에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이 소설을 읽다보면 스탕달이 얼마나 예민한 사람인지 매 문장마다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스탕달이 얼마나 섬세하면서도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였는지 슈테판 츠파이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여자 근처에만 가면 어지럽다. 혼란스러워지고, 걱정이 된다. 어떻게 말을 걸고 처신해야 할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거칠고 무례해진다. 도대체 이런 뒤섞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토록 많은 살덩이, 비계, 뱃살, 이토록 둔중한 마부의 골격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거미줄처럼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운 감정을 감싸고 있을까? 어떻게 이토록 둔탁하고 나무밑동 같은 재미없는 몸매가 이렇게 복잡하고 자극받기 쉬운 영혼을 에워싸고 있을까?"
유럽 신사 슈테판 츠바이크가 스탕달의 외모를 너무 노골적으로 묘사해서 놀라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후로는 계속 칭송이 이어지다가 마지막엔 이런 문장으로 감동을 준다.
"그는 자신과 함께 살았던 동시대인들의 뒤에 물러서 있다가 결국 그들 모두를 능가했다. 발자크만이 예외였다. "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콜리니코프는 쥘리앵 없이는 탄생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