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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평점 :
<밝은 밤>은 <쇼코의 미소>와 <내게 무해한 사람> 두 권의 단편집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최은영 작가가 2021년 발표한 첫 장편소설로 증조모, 할머니, 엄마, 나 4대에 걸친 여자들의 우정과 사랑의 이야기이다.
서른두 살의 지연은 이혼 후 서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바닷가 근처 희령이라는 곳으로 직장을 옮겨 이사를 간다. 지연은 이사 간 아파트에서 거의 20년 동안 연락이 끊겨 만나지 못했던 할머니를 우연히 만나고, 할머니를 통해 일제시대의 증조모를 시작으로 할머니와 어머니, 그 주변 인물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일제 강점기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아픈 어머니를 두고 개성으로 도망쳐야 했던 증조모 '삼천', 남편이 유부남인 줄도 모르고 속아 결혼해 결국엔 딸과 함께 버림 받은 할머니 박영옥, 그런 할머니 밑에서 아비 없는 자식으로 세상의 눈치를 보며 오직 평범한 삶만을 갈망하던 엄마 길미선, 결혼 후 남편의 외도로 자신의 삶을 사랑할 수 없는 화자 지연의 이야기를 통해 여자이기에 겪어야 했던 아픔을 최은영 작가만의 차분하면서도 정성이 담긴 문체로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인상적인 점은 여성들이 서로를 향해 보여주는 애틋하면서도 다정한 마음이다. 증조모 삼천과 새비 아주머니, 할머니와 새비 아주머니의 딸 희자, 엄마와 명희 아줌마, 지연과 친구 지우, 이들의 서로를 향한 따뜻한 마음은 인생의 고비마다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다음은 개성을 떠나 고향으로 떠난 새비 아주머니가 삼천에게 보낸 편지로 그 애틋함과 그리움이 눈물겹다.
["삼천아, 새비에는 지금 진달래가 한창이야. 개성도 그렇니. 너랑 같이 꽃을 뽑아다가 꿀을 먹던 게 생각나. 그걸 따다가 전을 부쳐 먹던 것두, 같이 쑥을 캐다가 떡을 만들어 먹던 것도. 인제 나는 꽃을 봐도 풀을 봐도 네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됐어. 별을 봐도 달을 봐도 그걸 올려다보던 삼천이 네 얼굴만 떠올라. 새비야, 참 희한하지 않아? 밤하늘을 보면서 그리 말하던 네가 떠올라. 이것도 희한하구 저것도 희한한 우리 삼천이가 생각나누나."(p.120,121)]
반면 소설에서 남자들은 '새비 아저씨'를 제외하고는 비겁하고 실망스럽다. 속이고 바람을 펴도 죄책감은 커녕 오히려 당당하고 절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위안부로 끌려갈 뻔 한 증조모를 개성으로 데리고 온 증조부는 자기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 증조모를 평생 '빚쟁이 대하듯'하고, 영옥은 딸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대한다. 또한 길남선이 중혼인줄 알면서도 딸 영옥을 결혼시켰고, 본부인이 나타나 길남선이 떠나자 딸에게 남편하나 묶어두지 못한다고 오히려 영옥을 꾸짖는다. 영옥의 남편 길남선도 영옥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자신의 행동에도 이유가 있었다며 딸을 호적에는 올려줄테니 키우기나 하라며 오히려 큰소리치며 떠난다.
사실 저 시대 남자들이 대체로 저렇게 무책임하고 가부장적이었으니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긴 하지만, 여자들은 다 따뜻하고 인간적으로 좋게 그려진 반면 남자들은 새비 아저씨를 빼고 모두 비겁하고 나쁘게 그려진거 같아 조금 작위적인 느낌이 들었다.
다음은 지연이 지하철에서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자는 모르는 여자를 보며 하는 생각이다.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 이름 모를 여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자나,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별 것 아닌 듯한 그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깨에 기대는 사람도,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도. (p.299,300)]
서로가 서로에게 어깨가 되어주는 세상, 작가 최은영은 이런 세상을 바라며 이 소설을 쓰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제목이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캄캄한 밤이 아니라 서로의 얼굴을 보며 따뜻한 눈빛과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밝은 밤'이라고 지은 것이 아닐까...
오랜만에 한국 소설을 읽으니 정말 마음이 편하고 좋았다. 몇년 전 <쇼코의 미소>를 읽었을 때도 그랬지만 최은영 작가의 책을 읽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 마음을 내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진다. 이제는 지하철에서 누군가 졸면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도 짜증이 안 날거 같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사람들이 다 보는 지하철에서 이렇게 졸까...' 안쓰러운 마음이 들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