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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8
이디스 워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평점 :
내가 좋아하는 계절 여름, 물론 요 몇년 간의 여름은 공포로 다가왔지만 그래서 앞으로는 여름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힘들거 같지만, 그래도 모든 것을 발산하는 그 여름의 기세등등한 기운을 나는 참 좋아한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면 나는 또 한 해가 이렇게 가는구나... 싶어 슬퍼지곤 한다.
이제는 좋아할 수 없는 여름이지만 그래도 이 여름이 가기 전 이디스 워튼의 <여름>을 읽고 싶어졌다.
이 소설은 작가의 다른 작품 <이선 프롬>과 단짝인 소설이다. 이디스 워튼이 편집자에게 쓴 편지에서 <여름>은 '무더운 이선'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한 점을 봐도 그렇다. 워튼은 <이선 프롬>과 <여름>을 두고 "자신이 쓴 뉴잉글랜드의 두 이야기"라고 했다.
<이선 프롬>이 뉴잉글랜드 지방의 기나긴 겨울을 배경으로 삼았다면 <여름>은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흐르는 무더운 여름을 배경으로 한다. 또한 두 작품 다 삼각관계의 사랑을 다룬다는 점, 외부인의 발길이 뜸한 뉴잉글랜드 시골에서 자신의 꿈과 가능성을 펼치지 못하고 답답한 현실에 갇혀 있는 젊은 남녀를 주인공을 했다는 점이 비슷하다.
'젊은 여자 하나가 노스도머의 거리 한 끄트머리에 있는 로열 변호사의 집에서 나와 문가에 섰다'(p.7)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바로 이 '젊은 여자' 채리티가 주인공이다.
<이선 프롬>이 외부 화자에 의해 이야기가 묘사된다면 <여름>은 채러티의 시선으로 인물들이 그려진다.
18살의 채리티(Charity)는 노스도머(가상의 마을)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자신의 후견인인 로열(Royall) 변호사와 함께 살고 있다. 로열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채리티가 17살이 되던 해 로열 씨는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 어릴 적 산에서 살던 자신을 데려와 키워준 그이지만 채리티는 이 일로 그를 경멸하게 되고, 아무도 찾지 않는, '상점도, 극장도, 강연장이나 상가'도 없는 노스도머를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러던 6월의 어느 아름다운 오후, 그녀가 일하는 도서관에 도서관 주인인 해처드 부인의 사촌이자 건축가인 루시어스 하니(Lucius Harney)가 나타난다. 그는 도시에서 온 건축가로서 뉴잉글랜드 지역의 옛날 집들을 공부하기 위해 왔는데, 도시에서 온 그에게 채러티는 강한 호기심을 느끼고 하니 또한 시골처녀인 채리티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어느 순간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그들의 사랑은 마치 '수액이 부글부글 끓고 잎집이 훌훌 옷을 벗고 꽃받침이 터질 듯 차오르는 모습'(p.53)처럼 뜨거운 여름 햇살과 함께 무르익어 간다.
루시어스 하니의 출현과 함께 시작된 여름, 그들의 사랑은 7월 4일 독립기념일 불꽃놀이를 보는 순간 최고조에 달한다.
채리티의 가슴은 환희로 고동쳤다. 사물의 잠재된 모든 아름다움이 갑자기 그녀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한 아름다움은 상상할 수 없었다. (중략) 그녀는 별 속에 갇힌 것 같았다...... 그림은 이제 사라졌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둠 속에서 채리티는 두 손이 자기 머리를 감싸고 있는 것을 느꼈다. 얼굴이 뒤로 젖혀지면서 하니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포개졌다. 갑작스러운 격정에 휩싸여 그가 머리를 가슴에 끌어당기고 두팔로 안았을 때 채리티는 그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이제껏 알지 못하던 하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를 지배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그녀 자신이 그의 새롭고 신비스러운 힘을 소유하고 있는 느낌이 드는 그런 하니 말이다. (p.139)
나는 채리티의 저 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는데, 나 또한 한강에서 불꽃놀이를 보며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이 또 있을까...'생각을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터질 것 같은 가슴, 고개를 젖히고 팡팡 터지는 불꽃을 바라보며, 이 아름다운 세상, 내 가족,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 다 행복했으면 싶고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보기만 해도 설레는 사람과는 불꽃놀이 무조건 가야한다. 그걸 못해봐서 너무너무 아쉽다...
채리티와 하니의 저 장면은 참 아름다우면서도 이 최고의 행복을 끝으로 두 사람의 미래가 밝지 않을 것임을 독자로서 예감할 수 있기에 슬프게도 다가왔다.
여름의 열기가 뜨거워 질수록 채리티와 하니의 사랑이 뜨거워 졌듯이, 가을의 냉기가 공기 중에 스며들면서 두 사람의 사랑에도 현실이라는 무시 못할 방해꾼이 등장한다.
산 속에서 태어나 어머니로부터 버림받고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자란 채리티에 비해 하니는 대도시의 높은 신분 집안의 남자이다.
채리티는 '고향맞이 주간행사' 에서 평소 자신이 부러움의 대상으로 질투하던 도시에 사는 애너벨이 하니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순간 자신의 현실을 직시한다. '연인의 포옹이라는 부서지기 쉬운 은막 뒤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의 삶이 수수께기처럼 숨어 있'음을 느끼며 자신과 하니 사이의 엄청난 격차를 실감한다.
채리티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니에게 주었다. 그러나 삶이 그에게 줄 수 있는 다른 선물과 비교한다면 도대체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채리티는 이런 일을 겪은 다른 젊은 여자들의 경우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갖고 있던 것을 모두 주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았다. 그것 가지고는 짧은 순간밖에 살 수 없었다. (p.181)
하니와 애너벨이 나란히 앉아 이야기 나누는 모습은 채리티에게 공포와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채리티는 하니와 몰래 만나는 폐가에서 하니를 기다리면서 그래도 자신이 애너벨보다 더 예쁘고 하니도 그 사실을 안다는 사실, 다른 아가씨들과 춤출 때 자신에게 허락을 구했던 자잘한 사실들에 위안을 얻으면서도 그와의 관계가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을 느낀다.
결국 이런 불안의 실체는 로열 씨에 의해 드러나게 된다.
"그렇다면 언제 결혼해 줄는지 물어봐라... 그렇게 못하잖아! 넌 그렇게 못 하잖니, 넌 그걸 잘 알고 있지... 왜 못 하는지도 말이야. 그리고 자넨 왜 저 애한테 결혼하자고 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잘 알아. 왜 그럴 생각이 없는지 말이지." (p.190)
로열 씨의 결혼에 대한 추궁에 두 사람다 아무런 말도 못한다. 로열 씨가 떠나고 하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잠시 이곳을 떠나 있어야겠어...... 어쩌면 한 달이나 두 달 정도...... 일을 정리하려고. 그러고 나서 다시 돌아올게... 그러면 결혼하자." (p.193)
'낯선 사람'처럼 들리는 하니의 목소리, 하니에게 절망적으로 매달리던 자신을 돌아보며 그녀는 '납덩어리' 같은 수치심을 느낀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그의 거듭되는 약속이 오히려 상처'로 다가온다.
떠난 하니를 기다리며 채리티는 그들 사이엔 서로를 향한 욕망과 사랑외에는 그 어떤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로열 씨가 결혼 여부를 추궁하기 전까지 하니가 결혼이라는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줄거리는 여기까지만 하겠다. 나름 충격과 반전이 있는 이야기라...
이 소설은 주인공 채리티의 심리묘사가 굉장히 훌륭하다. 산 속에서 태어나 엄마로부터 버림받고 후견인 밑에서 자라며 교육과 문화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으나 당차고 솔직하며 자존심이 강한 채리티의 마음을 워튼은 자신의 이야기처럼 세세하게 묘사한다.
<이선 프롬>에서 이선이 그랬듯이 채리티도 환경과 사회의 관습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특히 여자로서 더욱 선택의 폭이 좁은 현실은 같은 여자로서 막막했고 안타까웠다.
그러나 <여름>은 <이선 프롬>보다는 희망적이다. <이선 프롬>이 어두운 청교도적 가치관과 지리적 환경 등으로 억압받고 그 결과 비극적인 삶을 사는 인물들을 그린 반면, <여름>은 채리티라는 여성을 통해 솔직하면서도 열정적인 사랑을 보여주고 그 과정에서 더욱더 성숙한 인간으로 발전하면서 현실을 자각, 세상과 타협해서 어떻게든 살아가고자 하는 여성의 모습을 담았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디스 워튼의 작품은 <순수의 시대>,<이선 프롬>,<여름> 이렇게 세 권을 읽었는데, 이 중에서 이번에 읽은 <여름>이 가장 마음에 든다. 작가도 <여름>을 자신의 작품들 중 가장 좋아했고 이 작품을 쓰면서 희열을 느꼈다고 하는데 '아마 이 작품과 작가의 개인적 삶이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일 것'(p.269)이라고 역자는 말한다.
나에게 채리티의 심리묘사가 돋보였던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영화 Summer (1981) Diane Lane (채러티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