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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ㅣ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평점 :
일본 근대 문학의 아버지 나쓰메 소세키(1867~1916)의 전기(前期) 3부작 중 가운데 작품에 해당하는 <그 후>(1909)를 읽었다. <그 후>는 <산시로> 다음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 후'이고, 이 소설의 주인공 다이스케의 결말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그 후'라고 소세키는 소설 연재 전에 밝힌다.
이 세 작품은 각각 주인공도 다르고 상황도 달라 어떤 것을 먼저 읽어도 상관은 없지만, <산시로>를 시작으로 순서대로 읽으면 더 좋을 듯 싶다.
나는 <산시로>가 없는 관계로, 또 도서관에서 빌린 책으로 읽기 싫어서 그냥 <그 후>를 먼저 읽었는데, 왜 사람들이 소세키를 좋아하는지 이해가 갔고 나 또한 그 섬세하면서도 때로는 대담한 묘사와 인물간의 심리, 담백한 문체 등에 그냥 반해버렸다.
주인공 다이스케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매달 집에서 돈을 받아 하녀와 서생을 두고 생활한다. 그는 '자신이 밥벌이 문제로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는 고귀한 인간'(p.48)이며, 돈을 벌기 위해 하는 노동은 '저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 일을 하지 않는 건가?"라는 질문에 그것은 자신의 탓이 아니라 세상 탓이며, 억지로 선진국 대열에 끼기 위해 너 나 할 것 없이 경쟁하느라 여유가 없으며 도덕적으로 타락한 현 일본의 상황을 '온통 암흑'(p.105)이라고 비판한다. 따라서 이런 세상에서 일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기에 그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참 뭐랄까, 한 마디로 세상이 더러우니 자기는 세상과 떨어져 고상한 삶을 향유하겠다는 건데, '이 사람 웃기는 사람이네...' 싶다가도 논리적으로 자신이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따박따박 말하는걸 보면 귀엽기도 하고, 나 같아도 '부모가 경제적으로 뒷받침해주면 이렇게 느긋하게 살겠지' 싶어 이해도 되었다.
근데 이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자기만의 세상에서 살던 다이스케에게 변화가 찾아오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그에게는 대학 시절 히라오카와 스가누마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스가누마에게는 미치요라는 여동생이 있었다. 이 네 사람은 함께 어울리며 지내는데 어느 날 스가누마가 병으로 죽게 된다. 1년 뒤 히라오카는 미치요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 두 사람을 이어 준 사람이 바로 다이스케였던 것.
당시 다이스케 또한 미치요와 묘한 감정을 나누고 있었지만 '의협심'때문에 미치요를 히라오카에게 양보했던 것이다.
결혼한 히라오카와 미치요는 직장때문에 도쿄를 떠나게 되고 3년 후 직장을 그만두게 되면서 다시 도쿄로 돌아오는데 <그 후>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친구의 아내이자 자신도 사랑했던 미치요의 등장은 조용했던 다이스케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며 삶에 서서히 변화를 가져오는데 나쓰메 소세키는 이 과정을 정말 담백하면서도 예리하게 묘사 나를 이야기 속으로 흠뻑 빠지게 만들었다.
다이스케는 두 가지 난관에 봉착하는데 미치요가 바로 유뷰녀라는 사실과 자신이 경제력이 없는 무능한 남자라는 것. 미치요를 선택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것이고, 자신이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아버지와도 절연을 해야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도 미치요를 향한 사랑은 점점 더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이 커져만 가고 다이스케는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본다.
이 소설은 100년도 더 된 작품인데, 소세키가 인간의 마음-국가와 사회의 관습에 대항하는-을 다뤘다는 점이 참으로 놀라웠다. 영국 유학을 다녀와서 서양문학에 많은 영향을 받은 덕분인지 지금 읽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메이지유신의 시작과 함께 발전을 향해 질주하는 혼란스러운 일본 사회 안에서 지극히 사적인 개인의 문제, 즉 유부녀와의 불륜과 돈줄이 끊기는 문제로 고민하고 갈등,대립하는 인간의 모습을 이토록 섬세하게 보여줬다는 점이 너무나 놀라웠다.
이 소설에서 내가 또 한 가지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곳곳에 드러나는 일본 사회를 향한 소세키의 날선 비판이다. 무분별한 근대화, 산업화로 흉측하게 변해가는 일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히라오카의 집은 최근 10여 년간 계속된 물가 상승으로 형편이 점점 어려워진 중류층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볼품없는 외관을 하고 있었다.(p.96)
비탈길을 올라 덴즈인 옆으로 나오자 가늘고 높은 굴뚝이 절과 절 사이에서 더러운 연기를 구름 낀 하늘에 토해내고 있엇다. 다이스케는 그걸 보고 빈약한 공업이 생존을 위해 무리하게 숨을 내쉬는 것 같아 흉측하다고 생각했다. (p.132)
서양 선진국 대열에 끼기 위해 너도 나도 앞다투어 경쟁하는 일본 사회는 정경유착, 각종 비리로 얼룩져 있으며 그것을 알면서도 쉬쉬하는 부패한 사회이다. 다이스케는 이런 '격렬한 생존경쟁'의 세상에서는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울 수 있는 사람'(p.140)을 만날 수 없으며, 인간을 고립시키고 신뢰를 무너뜨리기 때문에 사회가 '불안에 지배'당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바로 '일본의 경제 상황', 즉 돈이 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돈이 세상을 지배하기에 그 돈을 움켜쥐기위해 서로를 짓밟고 올라가는 사회, 다이스케는 자신의 아버지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알고 있다. 자신이 그 돈으로 기생하며 살고 있기에 모른척하고 살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속마음은 이런 아버지에게 반발심을 갖고 있다.
작가 소세키는 갑작스럽고도 무분별한 근대화가 초래한 일본 사회 곳곳의 위기를 불륜의 사랑을 소재로 한 이 소설에서 꽤나 비중있게 다루고 있고 나는 이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 소설에는 다이스케를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 간에 대화가 나오는데 나는 그 대화들이 참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다이스케가 미치요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기 전에 백합 향기 가득한 방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어찌나 은은하고 애잔하던지 나 또한 백합향에 취하는 느낌이었다.
마주보고 앉아 있는 두 사람을 소세키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비는 여전히 거침없이 세찬 소리를 내며 내렸다. 두 사람은 비로 인해, 빗소리로 세상과 분리되었다. 같은 집에 살고 있는 가도노와 할멈으로부터도 분리되었다. 두 사람은 고립된 채 흰 백합 향기 속에 갇혀 있었다. (p.263)
빗소리에 세상과 분리된 두 사람만의 작은 세상 속에서 조곤조곤 주고 받는 대화들, 그리고 고개 숙인 미치요의 떨리는 긴 속눈썹을 보며 갑자기 튀어나오는 다이스케의 고백!
"내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반드시 필요해요. 저는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일부러 당신을 부른 겁니다." (p.267)
그동안 현실의 제약과 사랑하는 감정 사이에서 동요하고 갈등했던 다이스케의 고백은 너무나 '단순하고 소박'하여 더 강렬하고 절실하게 다가온다.
단정하면서도 꾸밈없는 고백과 백합향이 나는 분위기는 불륜이라는 상황을 잊게 만들 정도로 담백하면서도 깨끗한 이미지로 다가왔고 미치요가 떠나고 홀로 남은 다이스케를 묘사한 부분에서는 눈물이 나올 뻔 했다.
다이스케는 그 한가운데 서서 넓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낮에 사왔던 백합을 응접실에서 가지고 와서 자기 주위에 흩뿌렸다. 흩어진 하얀 꽃잎이 달빛을 받아 선명했다. 어떤 것은 나무 밑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다이스케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속에 쭈그리고 앉았다.
잘 시간이 되어서야 다시 응접실로 돌아왔다. 방 안에는 아직 꽃향기가 남아 있었다. (p.272)
백합꽃잎 속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다이스케. 가슴 속에 담아뒀던 사랑을 고백하고 후련함도 잠시 그의 머리 속은 굉장히 복잡했을 것이다. 그의 앞에는 '개인의 자유와 저마다의 사정을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는 기계 같은 사회'(p.273)가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 자신이 짊어져야 할 운명앞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미치요와 함께 맡았던 백합향에 취하고 싶었으리라...
소세키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얼마전 소세키 특집으로 잠자냥님이 올려주신 페이퍼를 읽고 일단 집에 있던 그의 전기 3부작 중 하나인 이 책을 읽었는데 정말 기대 이상이었다. <마음>도 갖고 있는데, 소세키의 다른 작품들도 구해놔야지 싶다.
소세키의 팬이 될 거 같다. 일본 문학은 추리 소설 외에는 읽은게 별로 없는데 내가 소세키를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