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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타이거 - 2008년 부커상 수상작
아라빈드 아디가 지음, 권기대 옮김 / 베가북스 / 2009년 3월
평점 :
옛날 옛적의 인도에는 천 개의 카스트와 천 개의 숙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딱 두 개의 카스트만 남았어요 : 배때기가 커다란 남자들, 그리고 배때기라곤 없는 남자들.
그리고 숙명 또한 딱 두 가지뿐이랍니다 : 먹거나, 먹히거나. (p.85)
<화이트 타이거>는 인도 출신 작가 아라빈드 아디가(Aravind Adiga 1974~ )의 작품으로 2008년 부커상 수상작이다. 이 소설은 북플 친구 '레삭매냐'님의 리뷰를 읽고 기억해 둔 책인데, 작년 말 중고서점에서 발견, 바로 구입해 쟁여 둔 책이다.
살만 루시디, 아룬다티 로이, 키란 데사이에 이어 인도 출신 작가의 4번 째 부커상 수상이었고, 최연소 수상이었기에 더욱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발람 할와이라는 기업가가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전기를 인도를 방문하는 중국의 총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전개, 스토리와 구성이 독특한 소설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인도의 실상이 여과없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데 인도 입장에서는 이 소설이 굉장히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주인공 발람의 조롱과 풍자, 신랄한 위트가 처음부터 끝까지 시니컬한 목소리로 전개된다.
착하고 순진한 사람은 살아남을 수 없는 정글과도 같은 인도,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과 열심히 정직하게 일해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나라에서 과연 어떻게 해야 이 인간 이하의 삶을 탈출할 수 있는가... 이 소설은 이런 신분과 빈부격차의 속박을 깨부수고 나오는 한 인간의 결단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준다.
발람의 눈에 비친 인도의 모습 중 인상적인 대목을 옮겨본다.
여기 인도에는 독재라는 것이 없답니다. 비밀경찰도 없구요.
우리에겐 닭장이 있잖아요.
인류 역사의 어느 장에도 이처럼 소수의 인간들이 이처럼 대다수에게 이처럼 많은 것을 빚지고 있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지아바오 선생님. 이 나라의 몇몇 안 되는 사람들이 나머지 99.9 퍼센트를-어느 모로 봐도 그들에 못지않게 강하고, 못지않게 재능 있고, 못지않게 똑똑한 나머지를-훈련시켜서 영원한 예속의 상태에서 살도록 만든 거죠. 그것은 얼마나 튼튼한 속박의 굴레인지, 그의 손에 해방의 열쇠를 쥐어주더라도 그는 욕설을 하며 그걸 되던져버릴 정도입니다.(p.204)
발람의 수탉장 이론이 나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수탉장이란 것이 어째서 먹혀들어가는 걸까? 어떻게 해서 수백만의 인간들을 그처럼 효율적으로 가둬놓을 수 있는 거지?' (p.205)
이 질문에 그는 '인도의 가족'을 그 원인으로 든다. 만약 인도의 하인이 주인의 돈을 훔쳐 달아나면 어떻게 되는가...도망친 하인의 대가족은 몰살을 당하게 된다. 주인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지 못한 하인과 그의 가족은 '쫓기고, 두들겨 맞고, 산 채로 불타 죽임을 당'하기에, 이런 모든 것을 '볼 각오가 된 사람만이 닭장을 부수고 나올 수가 있다'(p.205) 고 말한다.
따라서 '정상적인 인간'은 닭장을 빠져나올 수가 없고 '괴물'이 되거나 '비정상적인 성격'이라야 가능하다는 것.
가족을 위해 인력거를 끌다 결핵에 결려 돌아가신 아버지, 결혼하고 그런 아버지의 모습처럼 변한 형 키샨을 보며 발람은 한 인간의 실존을 위협하는 인도의 가족주의를 거부하고 분노한다.
0.1%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인도 사회의 냉혹한 현실과 그들의 지배 하에 닭장에 갇혀 자신이 갇힌 줄도 모르고 사는 99.9%의 인도 국민들, 인도 사회에 너무나 뿌리깊게 박혀있는 부정부패는 이 사회를 점점 더 병들게 한다.
세 차례나 유죄판결을 받고 감옥에 갇힌 장관, 그러나 장관직은 그대로 유지되는 나라에서 국민들은 하인의 숙명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 급식이 나오지만 발람은 한 번도 그 음식을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선생님이 그 급식 보조금을 '쓱싹'하기 때문. 근데 선생님도 이유가 있다 6개월간 봉급을 못 받았기 때문에.
가난한 시골학교에 정부가 교복을 지원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교복을 보지 못한다. 그 교복은 일주일 뒤 시장 장터에서 볼 수 있다.
아버지를 업고 병원에 갔으나 의사는 보이지 않는다. 치료도 한 번 못 받아 보고 죽은 아버지, 그러나 정부의 기록에는 '아버지의 결핵은 완벽하게 치유'되었다고 쓰여있다.
시골병원에 의사들이 정기적으로 가는지 감독하는 의료감독관은 의사들로부터 월급의 삼분의 일을 받고 병원에 다녀온 걸로 처리해준다.
발람은 선거가 있을 때마다 투표를 한다. 그러나 그는 기표소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투표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기표소 안을 본 적이 없다.
이처럼 기막힌 실상에 웃음이 나오지만 그 웃음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이렇게 잘못된 세상, 그 속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99.9%의 사람들 속에서 백 년에 딱 한 번만 나타난다는 동물, 화이트 타이거. 발람은 바로 '이 험한 정글의 화이트 타이거'이다.
"할머니, 전 남은 인생을 우리 속에 갇혀 살 수는 없어요. 미안해요." (p.317)
자신이 '화이트 타이거'임을 발람은 어떻게 증명해 보일까...
닭장을 탈출하고자 그가 시도하는 '모종의 기업가적 행위'(p.28)는 자신이 도둑맞은 것들을 되찾기 위한 최후의 몸부림이며 자유를 향한 외침이다.
"인도의 젊은이들이여, 그대 혁명의 책은 바로 그대들의 뱃속에 들어있도다. 그것을 배출해내서 읽으라! (p.344)
<화이트 타이거>는 '소수의 인간들이 그 많은 대다수에게 진 빚을 고발하는 소설'(p.367 작품해설)이며 거대한 인도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관습과 불합리함, 부패를 폭로한다.
'갠지스강의 시커먼 진흙탕 속에 산처럼 쌓여 썩어문드러질 이름 없는 육신으로 삶을 마감하지 않'기 위해, 어둠의 세계에서 조금이라도 빛을 보기 위해 촌구석 소년이 어떻게 변신해 가는지 그 과정이 매우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 책을 덮고 나서도 마치 내가 인도의 대도시 한복판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 소설은 현재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데, 그저 읽고 싶어서 집어든 책이 작년에 영화로 만들어져 올해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로 올랐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놀랐다. 조만간 영화로도 볼 생각이지만 책의 재미를 절대 능가하지 못하리라 본다. 책을 펼치자마자 9페이지에 걸쳐 전 세계에서 쏟아진 찬사를 볼 수 있는데, 그 수많은 호평이 결코 허풍이 아님을 책을 읽다보면 알 수 있다.
주인공 발람의 입담에 끌려가다보면 어느새 책장이 한참 넘어가 있어 아쉬운 마음까지 든다.
국내에 번역된 작가의 유일한 작품이라 많이 아쉽다. 다른 작품도 번역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