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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쿤데라의 첫장편 <농담>을 읽으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이러니가 꽃피고, 삶을 꿰뚫는 사유가 넘실대는 이 작품을 쓴 나이가 스물여섯이라니! <농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삶을 이해하는 태도는 스물여섯이라는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스물여섯에 <농담>을 쓴 쿤데라는 진짜 천재인가? 결국 이건 작품의 출간 년도와 작가의 출생 년도의 뺄셈을 제대로 하지 못한 실수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쿤데라는 <농담>을 서른여섯에 썼다. 그럼 조금 이해가 되는군.
쿤데라가 <불멸>을 쓴 것은 오십 아홉이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쓴 것은 오십 셋이다. 역시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에는 젊은 천재가 있을 수 있어도, 소설에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안심이 된다. 소설에도 어린(혹은 젊은) 천재가 존재한다면 아마도 우울할 것이다. 세상일에 대해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은 소설이라는 장르가 순전히 상상력만으로, 인생의 질곡을 경험해보지도 못한 어린 천재의 손에서 나온다면, 그 작품을 읽는 독자의 기분은 어떨까? 소설에는 단순히 작가의 재능만으로 채워넣을 수 없는 영역이 있다. 그래서 독자는 소설가를 존중한다. 아무리 시답지 않은 작품이라도 최소한의 땀과 노력, 삶의 흔적이 베어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읽은 쿤데라는 잊고 있던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일깨워주었다. 낯선 장소, 낯선 문화, 낯선 시간대에서 펼쳐지는 낯선 인물들의 이야기가 독자의 현재를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독자는 2010년 자본주의 국가 대한민국에 살고 있지만, 1960년대 사회주의 체제 아래 체코에서 벌어진 일들이 전혀 낯설지 않다. <농담>은 역사와 정치, 이념, 문화, 시간의 벽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정작 <농담>은 역사와 정치, 이념, 문화,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도 신랄하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불멸>을 잊은 지 오래다. 읽었던 경험은 이제 하나의 이미지로만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런데 우연히 꺼내든 <농담>은 쿤데라를 다시 현재로 불러들이라고 말한다. 살아있으나 독자에게는 죽은 작가나 다름없던 쿤데라를 회생시켰다. 작가와 작품, 독자를 돌이켜보게 만드는 좋은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