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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발터 벤야민 지음, 김남시 옮김 / 그린비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정말 일기입니다. 벤야민이 1926년 12월 6일부터 이듬해 2월 1일까지 모스크바에 머무르는 동안 쓴 일기죠. (조금 짜증스러웠던 건 독자가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이 일기가 쓰인 해를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수많은 주석에는 그렇게 친절하리만치 별 관심 없는 사항과 관계된 연도를 기록해놓았으면서도, 정작 일기가 쓰인 해는 옮긴이의 서문을 꼼꼼히 뒤적거려야만 알 수 있습니다.)
벤야민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릅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집어든 것은 사적인 기록인 일기를 통해 그의 지성과 감성의 풍경을 조금이나마 엿보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이 일기는 정말 일기였습니다. 특히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쓴 혐의가 역력한 <장정일의 독서일기>와는 아예 달랐고, 한 예술가의 내적 고백이 담긴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나, 죽기 직전까지 책읽기에 집착한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와도 딴판이었습니다.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는 시시콜콜한 기록들이 주를 이루는 아주 사적인 일기였습니다.
이런 사적인 일기에 대해 어떻게 평가를 내리며 토를 달까요? 이 일기에는 친구의 동거녀를 사랑했다는 감정부터, 장난감에 집착하는 벤야민의 개인적인 취미생활까지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런 사생활을 벤야민이 진작부터 독자들에게 공개하려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런 글에 평가를 내리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평가불가인고로 ‘별 다섯’입니다. 일기는 일기일 뿐 따지지 말자는 거죠.
재미있는 건, 일기에 묘사된 모스크바의 혹한과 폭설이 독자가 최근 실생활에서 체감한 것과 매우 흡사하게 진행되었다는 겁니다. 올 겨울 강추위가 시작된 즈음 읽기 시작한 이 책은 폭설 이후 꽁꽁 얼어붙은 내내 읽었습니다.(초속 5센티미터의 책읽기!ㅋㅋ) 벤야민이 모스크바에서 체험한 혹한이 절묘하게 겹쳤죠. 그러다가 벤야민이 모스크바를 떠나 베를린에 돌아온 후 축축해진 베를린의 겨울을 묘사하는 대목은 날이 풀린 어제 오늘과 비슷하네요. 80년 전 모스크바의 겨울풍경이 낯설지 않았다는 겁니다.(조금 딴 이야기지만 최근 심심풀이로 키에슬로프스키의 <십계> 시리즈를 다시 봤는데, 전에는 낯설기만 하던 폴란드의 겨울도 익숙하더군요.)
벤야민은 문단을 나누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낯선 시대, 낯선 공간, 낯선 인물들이 설명 없이 마구 등장하는데 문단마저 나누지 않아 종종 흐름을 잃고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리 자기만을 위한 일기라지만 벤야민 씨 문단 좀 나눠주세요.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건 벤야민과 동료 라이히, 연인 야사 사이의 삼각관계입니다. 짧은 글들로 온전히 파악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관계는 참으로 복잡 미묘하기만 합니다. 이들의 삼각관계를 보며 트뤼포의 영화 <쥴 앤 짐>이 떠올랐습니다. 특히 야사는 두 남자 사이를 나비처럼 떠다니는 까트린느가 떠오릅니다. 물론 벤야민이 묘사한 야사는 까트린느와 달리 신경질적이고 불안정한 모습이지만요.
‘벤야민 씨의 일기’를 훔쳐 읽은 소감은, 언제 한번 벤야민 씨의 진짜 저작을 읽어봐야겠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