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부둣가에 수상한 통 하나가 하역됩니다. 운반 도중 파손된 통의 틈이 사이로 여자의 손이 비어져 나오죠. 시체가 담겨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놀란 인부들은 재빨리 경찰에 연락합니다. 그런데 경찰이 현장에 당도하기도 전에 통은 사라지고 맙니다. 정체불명의 남자가 나타나 통을 가로챈 거죠.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의 전설적인 데뷔작 <통>의 시작은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통의 등장도 그렇거니와 이야기의 시작과 함께 통이 사라지는 설정도 재미있어요. 통 속에 담긴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가 밝혀지는 데도 꽤나 시간이 걸리는 편인데 그 과정이 워낙 흥미로운 지라 지루함 없이 따라갑니다. 이 작품은 끊임없이 변모하며 꼬리를 감추는 도마뱀같은 작품입니다. 통의 정체가 드러나는 과정도 그렇고, 범인을 추적하고, 사건의 실체가 밝혀지는 양상도 그렇습니다. 통을 둘러싼 진실이 손에 들어오는가 싶더니 슬며시 모습을 감춥니다. 진범이 밝혀지기 직전까지도 통을 둘러싼 미스테리는 해결을 미루며 독자들의 관심을 끕니다. 비밀이 밝혀지기까지 참으로 오랫동안 힘을 발휘합니다. 크로프츠의 데뷔작은 무엇보다 사건을 둘러싼 치밀한 구성이 돋보입니다. 사건을 수사하는 탐정들의 오해도 나름 탄탄한 논리 속에 이뤄지고, 베일을 벗겨내는 추리 역시 논리적입니다. 작가가 밑그림을 탄탄하게 그려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죠. 솔직히 사건을 둘러싼 트릭이 그리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사하는 방식도 매우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며 공감할 만합니다. 천재적인 직관으로 단박에 사건을 해결하기보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진실에 다가가죠. 그래서 이 작품은 긴 편입니다. 무려 450여 페이지! 이 작품은 뾰족한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런던의 번리 경감, 파리의 르빠르쥬 경감, 탐정 라 튀슈가 차례로 범인을 추적합니다. 어찌보면 참으로 특이한 구성입니다. 작품의 초반 맹활약을 하던 번리 경감과 르빠르쥬 경감은 후반부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작품의 후반부에 등장한 라 튀슈라는 탐정이 범인을 밝혀내죠. 마치 이어달리기 같아요. 그들이 손에 쥔 바통이 바로 ‘통’이고요. 이 작품의 아쉬운 대목은 캐릭터입니다. 자기 몫의 구간을 완주하고 슬며시 사라진 주자들이 전혀 매력이 없어요. 그냥 열심히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전부입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완벽한 팀웍을 보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번리 경감과 르빠르쥬가 잠시 공동수사를 벌이기는 하지만 사건을 완벽하게 해결하지는 못하고 퇴장합니다. 이후 등장하는 탐정 라 튀슈는 그야말로 난 데 없는 낙하산이고요. 독자들에게는 천재이든, 바보이든, 성실하든, 괴팍하든 한 사람(혹은 팀)이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이 익숙하죠. 이점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야기의 흡입력을 떨어뜨리기도 했습니다. 왜냐면 사건 해결의 논리성보다 캐릭터에 더 큰 호감을 느끼는 편이거든요. 여러 탐정들이 들고 나는 산만한 상황에도 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것은 통 때문입니다. 이른바 ‘통 미스테리’가 꼬치구이의 꼬챙이처럼 여러 탐정과 용의자들을 꿰어내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고 보니 <통>의 주인공은 탐정도 범인도 아닌 것 같습니다. 주인공은 바로 통이죠. 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