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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성 ㅣ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3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마침내 진짜 뤼팽 시리즈가 시작되었습니다. <기암성>에 이르러 익히 알고 있던 뤼팽이 드디어 등장하더군요. 물론 뤼팽의 정체 혹은 풍모가 낫낫이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제대로 된 뤼팽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제 진짜 시리즈가 시작되었고, 괴도신사 뤼팽의 본모습이 하나씩 공개될 거라고 믿습니다.
단지 뤼팽다운 모습이 만족할 만큼 드러났다고 해서 진짜 뤼팽 시리즈의 시작을 운운한 것은 아닙니다. 앞선 두 편의 뤼팽 시리즈(<괴도신사 아르센 뤼팽>과 <뤼팽 대 홈스의 대결>)가 캐릭터를 소개하는 파일럿 형식의 이야기였다면, <기암성>은 뤼팽 시리즈의 서막과 같은 작품입니다.
<기암성>의 엔딩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영화 <다크나이트>가 떠오르더군요. 뤼팽은 사랑하는 사람과 새 삶을 살겠다고 결심합니다. 하지만 운명은 뤼팽의 결심을 무참히 짓밟습니다. 어둠의 기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배트맨과 운명의 장난으로 범죄자 투페이스가 된 하비 덴트처럼 말입니다. <다크 나이트>는 부상을 당한 배트맨이 경찰과 경찰견에 쫓겨 고담시의 어두운 뒷골목으로 도망치는 장면으로 끝나죠.
<기암성>은 뤼팽이 “너무도 소중하면서, 또한 끔찍한 짐을 온몸으로 짊어지고, ...(중략), 그렇게 그는 해안 쪽으로 걸어가, 곧장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p289)진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뤼팽은 단순한 신출귀몰 도적이 아니라 도적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처 입은 안티 히어로로 거듭난 것입니다.
불운이 뤼팽에게 휘몰아치기 전 뤼팽이 천재 소년탐정 보틀르레에게 늘어놓는 일장연설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스스로 낭만적인 협객을 자처하는 뤼팽의 허영심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죠. 잘난 척 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스스로 천재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동시에, 진짜 천재형 도적인 뤼팽의 유쾌한 수다는 얄밉기는 했지만 재미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작품의 시점이 뤼팽이 아닌 뤼팽과 대결을 벌이는 소년탐정에게 맞춰져 있으니 얄미울 수밖에요. 하지만 이어 걷잡을 수 없는 불운이 몰아닥치는 지라 뤼팽의 허세가 이전과 달리 가슴 아프게 느껴집니다.
<기암성>은 작품의 완성도와 재미 면에서도 앞선 두 작품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뜻밖의 살인사건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대일로를 걷더니 종국에는 예상치 못한 거대한 비밀이 드러납니다. 그 과정은, 진부한 표현이지만, 시종일관 박진감 넘칩니다. 이야기의 짜임새는 둘 째 치더라도 작가 르블랑이 뛰어난 이야기꾼임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아참, 많은 사람들, 특히 셜록 홈즈의 팬들이 진노한 것처럼, <기암성>에 등장하는 셜록 홈즈는 진짜 셜록 홈즈가 아닙니다. 비중도 비중이거니와 행동 하나 하나가 셜록 홈즈 답지 못합니다. <뤼팽 대 홈스의 대결>에 등장한 홈즈에 비해 훨씬 더 찌질하게 그려지는데, 이런 홈즈를 등장시킨 르블랑의 저의는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