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신작 <박쥐>를 본 소감을 묻는다면, 지루하고 따분하다, 라고 대답할 겁니다.
감독이 매너리즘에 빠진 것인지 아니면 관객의 변덕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암튼 <친절한 금자씨> 이후 박찬욱 감독의 작품은 신선함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구질도 익숙한데다가 수싸움마저 밀린 투수의 볼배합처럼 다음 공이 무엇을 날아들지 예상이 가능하니 밋밋하고 싱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화면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오고, 뼈가 부러지고, 목이 꺾이고, 여배우의 젖가슴이 심심치 않게 보이고, 남자 배우의 성기가 노출되는데도 말입니다.
<박쥐>를 보면 떠오른 레퍼런스는 비스콘티의 <강박관념>(혹은 케인의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 번 울린다>)과 여러 뱀파이어물, 70년대 한국영화(혹은 <여죄수 사소리> 시리즈 같은 일본영화), 크리스티의 소설 등이 박찬욱 감독 식으로 ‘우스꽝스럽게’ 뒤섞여 있습니다.
문제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각 작품에서 빌려 온 아이디어가 그냥저냥 조화를 이루는 수준에 머무릅니다.
솔직히 기대했던 뱀파이어와 팜므파탈의 캐릭터는 평범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뱀파이어의 고뇌를 더욱 흥미롭게 맛보려거든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를 읽는 것이, 악녀를 만나려거든 케인의 소설을 보는 것이 훨씬 즐거울 겁니다. 그러니까 <박쥐>는 어느 것도 기대에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야기는 허약하기만 합니다. 애초에 박찬욱 감독에게 잘 짜인 플롯을 기대하는 것이 현명치 못한 짓이겠지만 최소한 작품을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은 존재해야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야기가 거칠다보니 감독의 스타일이 더욱 눈에 잘 들어오기는 하더군요.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건 스타일의 과잉이었습니다.
국적 불명의 의상과 세트, 배우들의 과장된 연기, 문어체식 대사, 과도한 카메라 이동, 반복되는 엇박자 편집, 고상함과 천박함을 오가는 음악, 태어나서 한번도 해본적 없는 마작, 붉은 핏빛 바다에 헤엄치는 고래의 이미지... 솔직히 지겨웠고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영화 속의 배우들만 울고, 웃고, 떠들고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드보이>가 성공할 수 있었고 관객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던 건 바로 이야기의 힘이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탄탄한 힘이 감독의 스타일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던 거니까요. 참 이야기의 힘이란 게 ‘반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란 건 부연할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박찬욱 감독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창조적인 연출을 하는 감독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관습을 이용하고, 벗어날 줄 아는 감독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감독이 매너리즘에 빠져 겉멋부리기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박쥐>는 익사 직전의 조짐이 보였기에 지루했고 아쉬웠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오는데 뒤에 따라오던 여자가 남자친구에게 민망해하며 이러더군요. "미안해~". 미안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감독이라면 이런 상황이 민망하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