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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루
니시카와 미와 지음, 오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솔직히 온전한 의미의 소설로서 신뢰가 가지 않았습니다. 프로필을 보아하니 저자는 작가라기보다 영화감독이라는 직함이 더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같은 이름으로 제작된 영화가 해외 영화제에 호평을 받았다니 성공한 영화에 기대어 출간된 ‘기획물’이라는 의심을 지워버리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흥미로운 책이나 이야기를 제게 소개해주는 ‘친구’가 영화 <유레루>를 칭찬하는 걸 들었고, 우연히 영화가 아닌 소설을 먼저 접하게 되었습니다.
총망 받는 신인 감독으로서의 프로필이 준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니시카와 미와가 연출한 영화를 본적이 없으니 감독으로서 그녀의 역량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릅니다. 그리고 영화가 먼저인지, 소설이 먼저인지 둘 사이에 어떤 차이와 유사점이 있는지 모릅니다. 다만 작가로서 니시카와 미와의 역량은 소설 <유레루>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설 <유레루>는 살인사건을 둘러싼 관련자들의 진술 혹은 독백으로 이뤄진 작품입니다. 살인사건의 용의자는 주인공의 형이고, 동생은 목격자입니다. 피해자는 묘한 지점에서 둘 사이를 부유하던 여자이죠. 이야기는 마치 영화 <라쇼몽>처럼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이 번갈아가며 사건에 대해 진술하거나 독백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들은 살인사건과 용의자인 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독자에게 읽히는 것은 마음 깊숙이 자리한 그들의 상처입니다.
책표지를 감싼 노란색 광고용 띠지를 보면 재미있는 문구가 눈에 들어옵니다. ‘한국영상응용연구소 선정 2006 힐링 시네마 Best 10’이라는 문구죠. ‘한국영상응용연구소’가 뭐하는 단체인지 ‘힐링 시네마’란 용어가 실제로 쓰이는 용어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난 후 그 문구를 새겨 넣은 의미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소설 <유레루>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상처 입은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세상과 맞서 뻔뻔스럽게 살아갈 배짱도 용기도 없는 인물입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힘겹게 연기하거나, 아니면 무책임하게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사람들뿐입니다. 남아있는 사람이나 떠난 사람이나 서로의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는 겁쟁이들뿐이죠. 그들이 겁을 내는 것은 상처 입은 자신의 내면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난데없이 일어난 뜻하지 않은 살인사건은 이들의 상처가 터져 나오는 계기가 됩니다.
소설 <유레루>를 즐겁게 읽었던 것은 지극히 소설적이기 때문입니다. 노골적으로 영화로 제작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쓴 소설이나, 영화를 소설로 다시 각색한 이른바 ‘영상소설’에서 종종 느낄 수 있는 불순한 의도가 느껴지지 않는 작품입니다. 소설 <유레루>는 영화와 별개로 온전한 한 편의 소설이고 존중받아 마땅한 작품입니다.
간결한 문체로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는 작가의 솜씨는 발군입니다. 짧은 분량임에도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빼먹지 않고 다 한 듯한 인상입니다. 그럼에도 짧은 분량은 불만입니다. 조금만 더 나아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조그만 더 징하게 등장인물이나 독자의 마음을 짓밟았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긴 이건 <유레루>만의 아쉬움은 아닌 듯 합니다. 언젠가부터 이른바 ‘괜찮다’는 일본 소설이 한결같이 ‘2% 부족함’을 의도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래서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거기도 하겠지만, 아쉬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이 소설처럼 장르소설이 아닐 경우는 말이죠. 이럴 때마다 ‘1/2’짜리 별점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 개는 어쩐지 부족하고, 네 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