얽힘의 시대 - 대화로 재구성한 20세기 양자 물리학의 역사
루이자 길더 지음, 노태복 옮김 / 부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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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근동의 자연철학자들은 이 세계의 존재와 본질에 대한 의문을 풀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중 데모크리토스는 더 이상 나눌수 없는 물질의 본질을 원자라고 이름지었다. 많은 세월이 지나 원자를 분석하게된 과학자들은 원자의 99.999%가 속이 텅비어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 원자의 세계를 탐구하던 과학자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자연법칙이 원자속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극미의 세계에서 적용할수 있는 분석틀은 양자역학이라 불렸고 과학자들은 다시 인간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의 세계로 돌아가야 했다.

 

대화로 재구성했다는 부제가 붙어있지만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표현이고 사실 이 책은 소설로 재구성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아니면 다큐멘터리라 해도 좋다. 소설적 표현을 가진 물리학역사! 그래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물리학자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대화가 간간이 이어질뿐 주요 개념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는 않는다. 때문에 독자가 물리학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이 없다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다. 소설의 형식이라 주를 거의 달지 않았고, 이점을 보완하기 위해 말미에 용어해설을 붙였다. 상당한 양의 미주는 대화의 전거나 보충설명으로 사용되었다.

 

양자역학은 책에 나오는 표현대로라면 물리학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론이다. 어느 시대에는 12명만 이해했다는 표현도 있다. 이책이 말하는 ‘얽힘현상’이란 무엇인가? 양자론에서는 물질과 빛의 이중성(파동이면서 입자), 양자도약, 불확정성 등 고전물리학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여러 현상이 나타난다. 그중 얽힘은, 멀리 떨어져있는 두 입자중 한쪽에 어떤 영향을 가하면 동시에 나머지 다른 입자에 같거나 다른 반응이 나타난다는 이론이다. 왜 그런지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두 입자의 반응은 동시에 일어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빛보다 빠른 물질은 없는데 얽힘은 동시에 발생한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끝까지 양자역학을 인정하지 않았다.

 

슈뢰딩거에 의하면 물질=파동=빛 이다. 두 개의 전자가 함께 있으면 단일한 6차원 파동이 된다. 이때 연결되었다고 한다. 슈뢰딩거는 파동방정식을 만들어 양자역학을 수학으로 증명했는데 언어로는 이렇게 한다. “보지 않을때는 파동이 존재하다가 볼때는 입자가 존재한다면 관찰자가 진리라고 여기고 싶어하는 취향에 따라 진리가 달라지게돼.”

 

하이젠베르크는 이렇게 말한다. “19세기의 세련된 과학이었던 인과적 결정론에 의하면 조건이 확정되면 미래를 예측할수 있다. 즉 P×Q = Q×P이다. 그러나 양자의 세계에서는 P×Q는 Q×P가 아니다. 또 P와 Q를 한꺼번에 보려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불확정성 원리다. 즉 입자와 파동은 함께 존재하며 인과성을 부정한다.”

 

과학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아는, 별처럼 빛나는 과학자들이 대거 등장한다. 아인슈타인 보어 플랑크 좀머펠트 보른 드브로이 파울리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디랙 오펜하이머 봄 파인만 그리고 현대의 과학자들 까지. 물리학의 스타들이다. 그러나 보스아인슈타인 응축, 슈테른 게를라흐 실험, 배타원리, 불확정성 원리, 얽힘, Ψ 등등 기본개념에 대한 손톱만큼의 이해도 없이 이 책을 읽기란 정말 힘들다. 어느 신문평을 보니 쉽게 읽을수 있다고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무슨 일이 있었는지만 알려면 글자만 읽어가면 된다.

 

양자도약 또는 전자스핀이란 뭔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기로는 전자는 원자의 바깥쪽을 돌고 있다. 타원궤도를 그린다고 한다. 그래서 흡사 태양계 행성배열처럼 상상하고 그런 식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는 전자궤도의 시각화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단지 우리의 이해를 위해 즉 고전물리학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모델을 찾다보니 행성배열 모델을 적용했을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태양을 돌던 지구가 갑자기 토성자리에서 돌고 있다. 이것이 양자도약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모른다. 공을 앞으로 던졌는데 내 뒤통수를 때릴수도 있고, 옆에서 다른 공이 나타나 두 개가 날아갈수도 있고, 뒤로도 똑같은 공이 날아갈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설명 불가능한 양자역학이다. 그러나 러더퍼드의 말처럼 “어떤 이론이건 술집여종업원에게 설명할 수 없다면 그건 불완전한 이론인 것”이다. 양자론의 세계는 고전물리학의 인과성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미시세계에서는 확실히 그렇다.

 

소설적 구성을 빌렸기 때문에 표현과 묘사에 멋진 글이 많고 학자들 간의 갈등관계나 고민 긴박한 상황의 묘사가 매우 뛰어나다. 원자의 발견과 1905년 상대성이론부터 최근에 이르가까지 물리학과 학자들의 동향을 시간의 흐름으로 서술했고 전반부는 유럽을 무대로 2차대전 이후는 미국을 무대로 학자들의 활동을 그렸다. 아인슈타인의 주사위론, 슈뢰딩거가 17세인 친구 딸을 임신시킨 애기며 보른과 슈바이처의 우연한 만남, 오펜하이머와 공산주의자로 몰려 고생한 봄 등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많다.

또한 이책은 양자론이 기술하는 이 세계의 어쩔 수 없는 기이함 때문에 철학적 논의를 빠뜨릴수 없음도 말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EPR 논문 제목은 <물리적 실재에 대한 양자역학적 설명을 완벽하다고 볼수 있는가>이고 봄의 경우 평생의 연구목표를 “실재를 일관된 전체로서 이해하는 것이며 마음을 전체의 한부분으로 이해하려고 했다”고 밝혔다. 물리학자들에게 객관적 실재란 철학자나 신학자 만큼이나 절박한 문제였던 것이다.

 

책속에는 너무나도 멋진 표현들이 많이나오는데 일일이 소개할 수가 없다. 그중 마음에 드는 한 문장은 이런 것이다. “저명한 물리학자들이 인간적으로도 아주훌륭하다는 건 물리학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네.”

 

이제까지 양자역학의 결론은 어찌보면 단순하다. 관찰하는 행위자의 의지가 입자들을 창조하거나 변형시킨다. 최소한 미시세계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모든 물질은 원자로 구성되었고 원자의 내부는 텅 비어있다. 원자 안에는 전자 중성자 양성자 등 소립자가 있다. 이들은 관찰자의 의지에 따라 변한다. 인간은 다시 태초의 마음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바꿀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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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잡는 자, 세상을 잡는다 - 사람답게 사는 사회를 꿈꾸었던 칭기즈칸 이야기
서정록 지음 / 학고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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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잡는자, 세상을 잡는다

-사람답게 사는 사회를 꿈꾸었던 칭기즈칸이야기

서정록 / 학고재 / 599

 

예스24에 들어가 칭기즈칸으로 검색을 하니 무려 194개의 검색결과가 뜬다. 어린이위인전부터 역사 경영 리더십에 이르기까지 무척이나 많은 종류의 칭기즈칸이 존재한다. 위인전이 아니라면 대개 칭기즈칸을 찾는 사람들은 대제국을 건설한 그의 성과주의 리더십을 기대하는게 일반적이리라. 혹시라도 그런 종류의 기대를 품고 이책을 찾은 이들은 실망을 금치못할 것이다. 저자인 서정록은 그런 분야와는 거리가 먼 분이다. 그럼 우리 고대문화와 인디언의 영성탐구를 주로해온 저자가 칭기즈칸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우리민족과 문화의 원류를 찾아 공부하는 과정에서 몽골에 주목하였고 그런중에 800년전 몽골고원의 변화가 어떤 것이었는지 의문을 갖게되었다고 한다. 즉 칭기즈칸이 어떻게 하층유목민의 변화요구를 받아들여 당대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모래알같은 몽골인들을 하나로 묶어 거대제국의 전초를 열었는지 알기위해 몽골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칭기즈칸의 발자취와 흔적을 따라 몽골전역을 답사한 기행문이자 칭기즈칸 연구라 할수 있다. 사진자료가 많고 간간이 그림지도를 첨부하여 이해를 도운다. 전체를 9개 장으로 구성했는데 그중 한 개 장은 고구려 부여와 바이칼의 관련성에 대해 지적한 것이다.

 

이책의 주제는 역시 부제에 잘 나타나있다. “사람답게 사는 사회를 꿈꾸었던 칭기즈칸 이야기”. 저자에 따르면 칭기즈칸의 천호제만호제는 귀족 평민의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능력만큼 대접받는 세상을 연것이라 한다. 그렇게해서 몽골인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세상을 사람답게 사는 곳으로, 사람들이 서로믿고 신뢰하며 더불어 사는 곳으로 만들려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칭기즈칸의 꿈과 이상이며 동시대 몽골인들의 꿈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울란바토르공항에서부터 시작하여 초원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칭키즈칸의 흔적을 찾아나선다. 좀더 알고싶은 사람은 세계지도를 갖다놓고 세심히 보면 더 좋겠다. 몽골고원은 현재 남동부가 내몽골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예속되어있지만 고대 스키타이족부터 시작 흉노, 돌궐, 타타르, 몽골족 등 북방유목민이 활동한 아시아 유럽을 잇는 주요 교통로였다. 책에는 씨족명 부족명이 혼재되어 나오는데 이 지역을 기반으로 활약한 흉노 돌궐 타타르 몽골은 거의 비슷한 종족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몽골리안은 8세기이후에야 지역에 등장한다. 가장 늦게 나타난 몽골족은 13세기에 와서 하층유목민의 꿈과 이상을 공유했던 칭기즈칸이 활약하며 세계제국으로 변모한다. 칭기즈칸은 분배법을 평등하게 고치고 천호제만호제로 귀족과 평민 구분을 없앴으며 케식텐제를 실시해 개인의 능력과 전문성을 개발하도록 했다.

 

이런 저런 탐구과정에서 저자는 리더십이라는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기존에 칭기즈칸을 다루었던 책들에서 그 리더십의 원천을 포용이나 개방성, 과단성 등으로 규정한 것과 달리 저자 서정록은 칭기즈칸이 영적으로 매우 성숙한 사람이었으며 그래서 인간을 잘 이해할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가는곳마다 영적 존재와 교감하고 인간의 본성을 찾으려 한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어느곳에서는 스스로 샤먼적인 모습도 비춘다.

 

칭기즈칸의 탄생지를 빈데르 비장의 언덕으로 확신하고 몽골인의 시조인 알랑고아가 바이칼 부리야트족 버드나무샤먼이었다는 점을 밝혀 주몽의 모친 유화부인과의 관련성을 제기한다.칭기즈칸의 성지인 보르칸칼돈산을 찾아 원래 이산이 부리야트에 있음을 확인하고 한역음인 불함산이 부리야트, 몽골, 백두 세곳에 존재하므로 부리야트 몽골 한민족의 관련을 더욱 깊게 인식하는 계기를 삼기도 한다. 몽골역사박물관에는 동명왕 람촐로(석상)가 있는데 동몽골지역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이로보아 부여의 동명왕( 우리는 주몽을 동명왕으로 알고있지만 사실 동명왕은 부여의 시조이며 고주몽이 부여를 탈출해서 고구려를 건국하며 동명왕 설화를 차용하여 자신을 신성시했다는 것이 사학계의 정설이다)이 이곳과도 관련이 있다고 본다.

 

물론 책에는 이런 역사탐구 뿐만아니라 테무진의 어린시절부터의 행적을 소설처럼 그리고 있기도 하다.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인근 메르키트부족의 젊은귀족과 막 혼례를 마치고 시집으로 돌아가던 신혼부부행열을 공격하여 이미 남의 부인이 된 허엘룬을 약탈하여 자신의 부인으로 삼았다. 물론 허엘룬과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다. 그 아들인 테무진은 어머니부족의 처녀였던 버르테와 혼인했는데 과거 신부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했던 메르키트부족이 쳐들어와 버르테를 약탈해갔다. 테무진이 버르테를 되찾아왔을 때 버르테는 임신상태였고 그래서 테무진의 큰 아들은 원수의 씨였지만 테무진은 죽을때까지 큰아들을 차별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형제살해, 자모카와의 우정과 배신, 양부 옹칸과의 갈등 등 연속극에 나올만한 주제도 많이 나타나있다. 인내 끈기 계기 기회 같은 기존의 영웅 조건도 당연히 있다. 그러나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역시 인간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다. 이것이 칭기즈칸이 몽골인의 마음을 얻은 비결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인들의 꿈과 이상이 특히 하층민들의 꿈과 이상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몰락한 테무진의 가문인 보르지긴씨족이나 키야트부족이 다시 일어서는 것이 꿈인가? 사회적 신분편제에서 벗어나 귀족이 되는 것이 꿈인가? 초원지대의 춥고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고 단지 평화롭게 먹고살기를 바라는 것은 꿈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떤 지도자든 개인적인 호의호식에서 벗어나 잘먹고 잘살게 해주겠다면 그를 쫒았을 것이다. 칭기즈칸의 특별한 매력과 능력은 무엇인가?

 

칭기즈칸이 몽골을 통일하고 각 지역을 정복하는 과정, 그 무력이나 전략전술, 무자비하고 잔인한 처리 등은 이 책에 나오지 않는다. 칭기즈칸 리더십의 정체나 군사 정치적 패권장악과정을 알고싶은 이들은 이책을 보면 안된다. 어찌보면 한계점이라고도 말할수 있다. 무엇보다 참고자료나 찾아보기가 없는 것이 매우 아쉽다.

그러나 다른 눈으로 역사를 보고픈 사람, 한국과 몽골의 역사적 관련을 알고싶은 사람, 서정록의 영성탐구에 동참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책은 보다많은 것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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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돌베개 석학인문강좌 12
김호동 지음 / 돌베개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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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인문학에서 역사 말고 역사학이 어떤 것인지 궁금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가볍게 훑어보려고 집었다가 금방 빠져들었다.

 

이 책은 한국연구재단 주최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2009)에서 4회에 걸쳐 강연한 내용을 바탕으로 저술된 것인데 학술적 입문서라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재미있게 서술되지 못한 단점은 있겠지만 인문서를 자처하는 여타의 책들이 주는 가벼움과는 차원이 다르다. 저자 김호동은 하버드에서 내륙아시아와 알타이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에 재직중인 유목국가 전문가이다.

 

책은 네부분으로 구성되어 각기 /실크로드와 유목제국/세계를 제패한 몽골제국/팍스 몽골리카/세계사의 탄생/ 의 제목을 달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세계사란 고등학교 교과서로 등장하는 세계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문명의 형성 발전 전파라는 큰주제와 관련해서 지구상의 여러 지역과 문명들이 공간적으로 연관성을 맺고 시간적으로 계기적 발전을 이룩하는 총체적 과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동아시아나 유럽 등의 소지역 단위가 아닌 동아시아에서 유럽, 아프리카북부까지 아우르는, 아프로유라시아의 문명전개를 유목민을 키워드로 분석하고 있다.

 

몽골제국은 13세기 초에 건국되어 정복전쟁을 이어나가 인도 중동을 포함하는 아시아대륙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교통통신 네트워크를 만들어 유럽과 아프리카를 포함하는 문물교류의 장을 마련해주었다. 그러한 팍스 몽골리카를 배경으로 대여행의 시대가 시작되어 사신,종교인,상인들이 원거리여행을 가능하게 했고 동시에 아프리카대륙을 포함한 상세한 세계지도가 처음 제작되어 비로소 사람이 사는 전대륙이 하나의 온전한 실체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가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사의 탄생’이라 부를수 있는 시대였다. 그 직후 이어진 대항해시대와 유럽의 발전은 팍스 몽골리카로 인해 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유목민 유목국가가 미친 거대한 영향력을 지금까지는 너무 경시해왔다는 것이다. 스카타이 흉노 돌궐 위그르 타타르 거란 몽골 등등 북방유목민족의 실상은 많이 왜곡되어왔다. 그중 이책은 몽골이 세계제국으로 성장하면서 유목민과 농경민의 대립구조를 성공적으로 융합하였음을 보여준다.

 

이책을 통해 알게된 사실이 여러 가지지만 그중 하나는 최초의 세계사가 현 이란인 일칸국의 재상 라시드 앗딘이 저술한 방대한 책 <집사集史>라는 것이다. 이름도 처음 들어본 이책은 김호동의 번역으로 출간되어 있다.

 

가난하고 볼품없는 나라로 전락한 몽골. 그러나 그 선조의 나라는 역사상 최대의 육상 제국으로 존재했고 강력한 정치적 지배뿐만 아니라 경제적 문화적으로 전세계와 교류한 진정한 세계제국이었다. 각장마다 상세한 미주를 달았고 참고문헌이 수백편인 읽을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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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너머의 역사담론 1
오항녕 지음 / 너머북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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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오항녕 너머북스 371

 

책에 대하여

오항녕교수가 <광해군>을 펴냈을 때 영화 <광해>의 열풍을 예상하지는 못했겠지만 마치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소재의 책과 영화가 나와 서로간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나보다. 이 책에 나오듯 정상적인 중고교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광해군에 대해 명청 교체기에 중립외교를 펼치다가 안타깝게 왕위에서 쫒겨난 비운의 국왕 정도로 이해하는게 보통이다. 그러나 오항녕의 <광해군>은 그런 일반적인 인식에 경종을 울리는 정도가 아니라 대포를 쏘고 있다. 이 책의 논지는 너무 분명하다. 광해군은 폭군 또는 혼군이 맞으며 쫒겨날만 해서 쫒겨난 왕이다. 고로 인조반정은 광해군의 실정을 바로잡은 정당한 행위고 백성들이 비로소 삶의 자리를 되찾은 계기다. 이러한 논지를 증명하기위해 책을 전체 7장으로 나누어 시대순이 아닌 사안별로 챕터를 설정했고 앞뒤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덧붙였다. 대중역사서이기는 하지만 문체가 대화체 비슷하고 간혹 질문과 복습, 강조와 주의도 등장해 마치 선생이 학생에게 강의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본인이 듣기싫어할지 모르지만 김용옥을 본딴 듯 하다는 생각도 든다. 오항녕교수는 한문을 제대로 공부한 조선시대전공자로 그가 학위를 받았던 실록연구를 통해 광해군의 실정을 비판하고 있다. 몇 년전 율곡의 십만양병설문제로 역사평론가 이덕일씨와 논쟁을 벌여 주목을 받았다.

 

내용에 대하여

책을 읽다보니 그토록 무능하고 백성을 외면한 광해군을 지금은 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과연 광해군은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나? 광해군에 대한 연구가 많지는 않지만 책에서 밝혔듯 최초로 긍정적 관점에서 본 것은 일본학자였다. 본격적인 국내학자들에 의한 연구에서는 긍정이냐 부정이냐를 논하지 않고 당대의 실상을 밝히는 작업이 주였다. 오항녕이 콩쥐팥쥐 프레임이라고 부르는 역사인물 평가는 일반대중이 하지 역사학자들이 내리는 것은 아니다. 광해군에 대한 대중의 긍정적 동정적 이미지는 식민사관의 광해군 찬양이후 이병도박사를 거쳐 교과서에 외교업적이 부각되면서였다. 그것은 조선왕조 내내 폭군으로 푸대접을 받아왔던 불운한 왕에 대한 동정이지 복권은 아니었다. 게다가 강대국 사이에 낀 한국의 현재적 상황이 광해군대와 비슷하다는 느낌에 위정자들도 광해군을 언급하기도 했다. 학자들에 의한 연구에서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면 그런 격하의 세월에서 그나마 연산군보단 낫다는 무의식이 외교차원의 업적으로 나타난게 아닐까. 광해군이 내치를 잘했다는 연구결과는 들어본 적이 없다.

저자는 정확한 전거와 사실관계를 통해 광해군을 비판하고 있다. 대동법이 정상적으로 시행되거나 확대실시되지 못한 점, 계속되는 역모사건과 친국, 궁궐건축에 집착하여 백성을 괴롭히고 재정을 탕진한 잘못, 준비도 원칙도 없는 기회주의 외교, 그리고 저자가 가장 강조하는 경연미실시 등이다. 개설서에 의하면 광해군대의 치적으로 대동법시행과 중립외교를 드는데 저자는 오히려 그 두가지가 다 엉터리라는 것이다. 대동법의 확대시행을 건의한 신료들에 맞서 가장 반대를 한 것은 다름아닌 광해군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기에 시범실시된 선혜지법도 나중엔 흐지부지되었다고 한다. 살제폐모로 대표되는 역모사건은 후일 인조반정에서 광해군의 폐위사유 1호가 되었다. 업적으로 불리는 중립외교의 실상은 사실 기회주의 외교이며 아무런 준비나 대책도 없이 떠밀려 파병한 결과 참패로 나타났다고 한다. 특히 저자는 기존의 학자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두가지 문제를 특별히 자세하게 살펴 광해군이 폐위될만한 불량군주임을 밝힌다. 첫째가 지나친 궁궐건축사업이다. 임진왜란때 다 불타버린 궁궐을 새로 짓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지만 창덕궁이 완공되고 나서도 창경궁 인경궁 경덕궁을 계속 짓느라 재정은 텅비고 민력이 고갈되어 원성이 높아지고 급기야 군량미까지 전용했다고 한다. 또하나는 경연회피다. 경연이란 신하들이 치국에 필요한 유교경전을 왕에게 강론하는 수업시간을 말하는데 경전의 수업만이 아닌 국가의 주요대사나 왕과 신하들의 공적 사적 문제까지 함께 의논하는 자리였다. 이런 경연을 광해군대에는 불과 십수회만 열었다는 것이다. 경연은 매일 여는 것이고 원칙은 1일3강이었다.

 

이런 왕이니 폐위되는 것이 당연할까? 그보다도 오항녕교수가 지적한 이유는 광해군은 조선이 존속가능케한 원동력인 문치주의 원칙을 저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제도, 왕과 함께 토론하는 경연제도, 국정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언관제도. 이 셋이 조선 문치주의의 근간인데 이를 뒤흔든 것이 광해군이므로 폐위가 당연하다는 것이다.

 

의문 또는 비판

이 책에는 전제가 있다. “조선이 일제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인조반정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 엉터리 명제가 신봉되는 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근대주의의 함정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근대주의란 역사진행과정에서 근대를 도달해야할 목표나 이상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주의는 서유럽중심의 사관이고 아무런 준거도 없는 경제주의일 뿐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맑스적 진보사관이나 자유주의 발전사관이 모두 잘못이다. 그런데 우리가 식민사관을 비판하는 근거가 바로 근대주의이므로 잘못된 틀로 잘못된 틀을 깨려는 오류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인조반정이 없었으면 청의 침입을 받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후일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되도 않는 가정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가?

 

저자의 견해에 비판을 붙이기 시작하면 한이 없을 듯 하여 또다른 논문이 하나 나와야할 것 같다. 그러나 능력이 미치지 못하니 여기서 의문스런 소재 몇가지만 들어보고자 한다.

 

▲‘근대’가 역사학이 또는 시민사회가 도달해야할 최후의 가치가 아니라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현재적 관점에서 최선의 상태가 ‘근대(현대)’이기 때문에 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자력인지 타력인지는 탐구해보자는 것이다. 근대를 경제주의 관점이 아닌 다양한 가치관의 집합 즉 민주나 인권, 자유 등 보편적 인간의 발견으로 보아야 한다.

 

▲조선 문치주의 트로이카라는 경연관 언관 사관의 의미부여는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조선 500년을 유지시킨 왕도정치라고 하기에는 좀. 조선을 유지시킨 문치주의라면 언관이 대신을 견제하고 이조전랑이 언관을 통솔하고 대신이 전랑을 부하로 삼는 삼각체제가 더 적절한 메커니즘일 것이다.

 

▲저자는 실록기사에 대해 큰 신뢰성을 보이며 승자의 기록 따위는 없다고까지 표현하는데 실록의 재편찬 자체가 기록주체에 따른 사실관계 왜곡을 의미한다. 선조수정실록이나 현종개수실록, 숙종실록, 경종실록 등 집권당에 따라 실록이 재편찬되는 것이 가장 큰 반증 아닌가. 그리고 실록이 그리도 믿을수 있다면 광해군이 아프다는 기사는 왜 믿을수 없다고 하는지.

 

▲경연에 대단히 큰 의미를 부여하고 옥사와 친국 때문에 경연이 열리지 않은 것을 비판했는데 조선의 문치주의가 경연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전까진 경연을 안 열었다고 폭군이며 폐위될만 하다는 논리는 지나친 비약으로 보인다. 오히려 정치사적 접근이라면 광해군은 왜 그토록 옥사에 매달렸는지 분석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한명기교수는 대동법실시와 동의보감 편찬이야말로 민중대책의 첫번째라 해서 큰의미를 두는데 오교수는 전혀 아니다. 공안개정이나 양전을 못했다고 광해군을 비난한다. 그런데 그 두가지가 그리도 중요한 일이었다면 연산군이후 중종대는 왜 못했으며 사림세력이 전면에 등장한 선조대는 그 오랜 기간동안 왜 공안을 못고쳤는지.

 

▲한명기교수는 탁월한 중립외교라 하는데 오교수는 원칙없는 기회주의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인조는 그 기회주의도 못해서 나라와 백성을 두 번이나 욕보이지 않았던가. 강홍립의 원병이 출전해서 한번 전투에 9000명이 죽었다고 하지만 병자호란시 죽거나 포로로 끌려간 수만명의 생명은 어떻게 보아야하는지. 혼군을 내쫒고 권력을 얻은 서인들은 대가로 나라를 내주었는데 이는 어찌 평가해야 하는지.

 

▲광해군의 형제살해를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 국왕중에서 친척이 역모에 등장하지 않은 경우가 몇 번이나 있을까. 더구나 그런 살해행위를 비난하고 등장한 인조역시 숙부를 처형하고 나중에는 친아들과 며느리와 친손자까지 죽인 왕이다.

 

결론적으로, 광해군은 명군이나 현군이 아니다. 어떤 사서에서도 그렇게 보지 않는다. 다만 대명의리만 외치던 당시 분위기에서 원수였던 일본과 외교를 재개하고 오랑캐인 후금의 실상을 파악하여 적대관계를 피하려했던 그 의지만은 인정할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기존에 중시하지 않던 사료를 발굴하거나 의미를 부여해서 광해군이 왜 폭군으로 불렸는지 실증적인 사유를 추론해갔다. 백성들을 돌보지 않는 왕은 더 이상 왕으로서의 존재의미가 없다. 그런측면에서 인조의 쿠데타는 정당성을 가질수 있다. 그러나 광해군을 비난하려면 인조대에 이전의 실정이 바로잡혀 문자그대로 반정反正이 이루어졌어야 한다. 오항녕교수의 신작은 광해군비판에만 치중하여 정작 주인공인 백성들의 반향을 미처 살피지 못한 점이 없지나않은지 염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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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리더십 - KBS스페셜, 나를 행복하게 할 리더는 누구인가?
이재혁.KBS 스페셜 제작팀 지음, 서승범 정리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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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리더십

이재혁,KBS스페셜제작팀 지음 / 서승범 정리

RHK. 351

 

서점에 가보면 무수히 많은 리더십관련 책들이 있다. 리더십이란게 정의하기에 따라 여러개념이 나올수도 있거니와 어떤 때는 모든사람이 리더십을 가지면 팔로워십은 대체 누구에게 필요한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이 <행복의 리더십>은 저자의 말처럼 감성과 논리가 섞이고 추상성과 구체성이 비벼져있어 일견 명확한 개념이 잡히지 않는다.

 

2012년초 KBS에서는 “행복의 리더십”이란 제목으로 신년특집 다큐를 방송했다고 한다. 나는 못봤는데 이 책은 그 특집을 다시 책으로 엮은 것이라 한다. 그러니 이미 많은 사람으로부터 확인과 동의를 거쳤다는 얘기다. 주제는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리더를 찾는다.”이다.

 

이를 위해 전세계 여러 리더를 찾아 면담과 취재를 하여 행복 리더십의 개념을 제시하고 다가올 대통령선거에서 바람직한 리더를 고를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한다. 서두에서는 설문조사를 통해 이시대 우리나라사람이 원하는 리더의 조선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소통과 솔선수범, 비전과 변화주도, 포용’ 등이다. 그동안 우리 지도자들에게 이런 덕목이 얼마나 부족했으면 이처럼 평범하고 당연한 가치를 제시했는지 너무나 공감이 간다. 차기 대통령의 유형을 묻는 설문에서도 1위는 ‘국민소통형’이었다. 이제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한 리더의 유형은 정치권이건 경제계건 카리스마있는 탱크주의 리더였다. 흡사 군인 지휘관같은 이 리더십은 제왕적 대통령과 오너 회장님으로 대표된다. 그러나 이 책에 의하면 이제는 시대와 환경이 변했다. 이제 시민들이 원하는 리더의 조건은 다음 여섯가지 키워드로 대변할수 있다. 즉 ‘소통과 공감, 정의와 책임, 혁신과 미션’이다.

 

이러한 조건을 맞춰 여러 리더를 찾아나서는데 브라질의 룰라, 이집트의 시민리더십, 처칠의 공감, 구글 시스코등 기업, 후쿠시마와 히틀러의 불통사례, 월가의 비극, 기업의 공유가치, 이나모리 가즈오, 공자리더십, 빌리브란트와 이태석신부의 서번트리더십, 핀란드 할로넨대통령, 그라민은행 유누스총재, 슘페터의 혁신, 리콴유, 시몬페레스 등 리더와 리더십의 현장을 살핀다.

 

이렇게 내용에서 나타나듯이 이 책은 일반적인 리더십에 관한, 혹은 성공을 이끌어낸 리더에 대한 비법 탐구가 전혀 아니다. 리더십이란 용어가 없어도 이책은 변화와 혁신에 대한 책으로 알맞다. 다시말하면 변화에 더해 공감과 정의라는 가치를 포함한 일체의 창조행위를 리더십이라 이름한다. ‘닥치고 나를 따르라’거나 ‘안되면 되게하라’에 익숙해진 우리 눈에는 상당히 참신하다. 그래서 내용을 읽어보면 개인적 리더십 뿐만 아니라 시민전체가 리더인 경우도 나오고 정치와 사회조직, 기업과 기업가 정신이 등장한다. 어찌보면 화합으로 이룬 성공사례와 그 반대인 독선으로 망친 사례를 리더십으로 풀어본 책이라 할수 있다.

 

리더의 일반적 필요조건이 소통과 공감이라면 충분조건은 정의와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대 우리나라에 얼마나 정의열풍이 불었던가. 그 이후 조금 정의로와졌던가? 이 책에서 말하는 정의란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할 일을 구분하고, 해야할 일은 하고 하지 말아야할 일은 하지 않는 것”이다. 즉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니고 실천하지 않는 것이다. 책은 월가의 예를 든다. “세계를 뒤흔든 금융사고가 일어났는데 누군가가 분명 잘못된 판단을 했고 피해자와 피해액은 엄청난데, 잘못은 했지만 책임은 지울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면죄부와도 같은 법과 제도에 따라 성과급을 받았다.”(p.138) 그리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가치를 말하고 이를 실천한 인물로 교세라 이나모리 가즈오회장의 예를 들었다.

 

한편 서번트리더십을 말하면서는 빌리브란트와 이태석신부를 예로 들었다. 서번트리더란 무슨 뜻인가. 구성원사이에 소통의 허브가 되어 구성원들이 각자의 입장과 능력에 맞는 최고의 결과물을 뽑아내게 한다는 것이다. “리더가 지위가 높거나 거느린 사람이 많은 이를 뜻한다면 이태석 신부는 리더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변화시켜 지금보다 더 나은 곳으로 이끄는 이를 리더라 한다면 이태석신부는 분명 위대한 리더다.”(p.184)

 

그다음 불합리한 현실을 변화시키고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은 혁신이며 왜 혁신해야 하는지

그 사명과 이유를 말해주는 것이 미션이다. 이 여섯가지가 이 시대에 필요한 리더의 조건이다. 그러나 책은 리더를 찾는 것 외에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강조한다. 즉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 바로 당신들이 모두 팔로워인 동시에 리더라는 것이다. 개인은 누군가에게 분명히 리더이며 사회는 개인의 조합이다. 그리고 지금 사회는 1인 리더십의 시대가 아닌 집단으로 실시간 연결되는 웹3.0의 시대다. 따라서 이제는 거창하게 나라와 민족을 구할 리더가 아닌 당신 개인을 행복하게 해주는 리더를 찾으라는 것이다. 물론 이책에서는 행복의 조건이 돈이 아닌 다양한 가치에 있음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얼핏 이책은 조직과 경영에 관한 이론해설서로 보이기도 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성공학개론으로 읽힐수도 있다. 차라리 내용에 따라 리더십을 분류하지 말고 성과의 현장에 따라 분류해서 공통의 속성을 찾아내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 더 낫지 않나 생각도 든다. 또 리더십에 광범한 해석과 적용을 가하다 보니 행동의 원칙과 정의에 대한 논술로 변질되는 듯한 모습도 약간 보인다.

서문에는 해외를 돌면서 김정운교수가 많은 수고를 했다고 나왔는데 책에서는 전혀 나와있지 않고 공동저자도 아니다. 무슨 역할을 했는지? 또 국내의 리더에 대한 분석이 전혀 없는 것도 보완할 점이 아닌가 한다. 이태석이나 반기문은 국내에서 활동하는 인물이 아니다.

 

앞으로 5년간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대통령을 뽑는 시점이 다가왔다. 누구를 뽑을 것인지 정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책은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밥에 그나물이라는 냉소주의를 극복해야 현실이 변한다. 모두가 리더로서 자각할 때 소통과 정의가 빛날 수 있을 것으로 가대하면서 이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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