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제주도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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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7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유홍준 / 창비 / 469

 

신혼여행이라면 대개들 처음으로 비행기타고 제주도를 가던 시절이 있었다. 나도 당시에 한다리를 걸치고 제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그때 제주도의 인상은, 좋은 건 별로 없고 온 도민이 육지사람 벗겨먹으려고 하는 모양이다... 그런 느낌 정도. 육지에 대한 형체없는 적대감이 있다고 해야할까. 한동안 다시 가고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니 제주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지식도 없었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을 보는 눈에 여유가 생기자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비로소 제주에 크게 관심이 갔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지난후에 제주를 다시 갔었다. 내동생은 대여섯번을 넘게 다녀온 뒤에야.

 

유홍준의 답사기 7권은 제주의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렌트카를 끌고 누구나 갈수있게 제주허씨를 위한 안내서라는 농담같은 별칭도 붙어있다. 제주도를 위한 여행안내서가 꽤 있고 제주의 문화를 소개하는 책자도 꽤 있겠지만 유홍준교수의 책이 나오면서 일반을 위한 역사문화 안내서로는 가장 적합한 책이 된 것 같다. 대부분 알다시피 제주도에는 볼만한 문화재가 별로 없다. 대신 제주에만 있는 문화와 민속과 자연유산, 그리고 역사가 있다. 탐라이래 육지와 떨어진채 오랜세월 지내왔던 제주의 독특함과 역사적으로 유배지와 특수공물 진상처로 취급되었던 서러움, 그리고 부정할수 없는 제주인의 한 4.3이 모두 이 책에 녹아있다.

 

육지역사라고 해서 특별히 더 잘아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 책을 통해 제주와 관련된 여러 생생한 지식들을 접할수 있었다.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 유교수다. 삼성혈이나 관덕정,성읍마을이나 알았지 산천단이며 와흘 본향당의 여러 신은 들어본 기억이 없다. 신혼여행 당시 그래도 사학과라고 민속박물관에 가서 진성기선생의 책을 한권 사기는 했지만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 생각도 안난다. 다랑쉬오름도 못가봤다. 해녀가 일본에도 있다는 사실은 들어봤지만 조선시대때 남녀가 나체로 조업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한라산 높이가 1950m라는 것은 좀 똑똑한 초등생정도면 아는데 단지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측량했다고만 알았는데 1901년 독일사람 겐테박사가 잰 것이라는 점도 이번에 알게되었다. 돌하르방이 1971년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여러 이름중 통합적으로 선정되었다는 점도.

 

제주의 4.3사건을 대체로 객관적으로 설명한 점이 돋보인다. 처음에는 충혼탑만 보면 피가 끓는다고 표현했던 사람인데 정부기관의 장을 지내고나니 부드러워졌나보다. 4.3은 대통령이 공식사과하고 아직도 보상신청을 받고있는 중이지만 사실을 밝힌다는 점이 참으로 어려운 듯 하다. 사실이라는게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수 있는 것이라면 사실이 곧 진실일수는 없고 그렇게 따지면 진실조차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영화 라쇼몽처럼.

 

이런 부분은 문학에서 그 이쪽과 저쪽의 이야기를 때론 처연하게 때론 한가롭게 풀어나가야 하는데 오랜동안을 일방적인 이야기만 들어온 터니 반대쪽 이야기가 진실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사를 공부하며 느낀 것은 어디 한쪽이 일방적으로 옳은 경우가 있었던가 하는 점이니 좌파든 우파든 서로 목소리가 줄어들 턱이 없는 것이다. 사실 서로 줄어들어야 맞는 것인데... 대표적인 진보인사의 하나인 유홍준교수 자신이 분명히 밝혔듯이 4.3의 출발은 좌익의 정부에 대한 무력 도발이었다. 그런데 당시는 정부가 미군정이었으니 이걸 어떻게 봐야할지. 더 따지면 역시 이념으로 돌아가겠지만 오해가 증오를 낳고 증오가 폭력을 낳은 악순환이 결국 무고한 양민학살로 이어진 결과가 되었다.

 

몇십년만에 다시찾은 지난번 제주여행은 풍광위주의 여행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혼자 다시 간다면 이책에서 소개해준 문화포인트에 조금 더 가까이 다녀볼수 있을 것도 같다. 아마도, 답사기따라 제주여행, 이런 타이틀을 내건 제주여전문여행사가 있지 않을까.

 

제주와 관련있는 역사인물이 너무 많은데 이름난 조선조 문인들만도 김상헌, 정온, 송시열, 이형상, 김정희, 임제 등등 여럿이다. 제주도에는 구석기유적지도 있으니 마치 강화도처럼 제주 역시 고대부터 현대까지 모든 역사를 품고있는 섬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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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읽는 방법 - 텍스트를 어떻게 읽고 해석할 것인가
퀜틴 스키너 지음, 황정아.김용수 옮김 / 돌베개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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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읽는 방법

Visions of Politics Volume 1. Regarding Method

켄틴 스키너 / 돌베개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을수 없다. 나는 한국사를 전공했지만 역사이론에도 관심많아서

역사철학, 지성사, 서양사상 등에도 많은 양은 아니지만 꾸준히 독서를 해왔다그런데

이 책 <역사를 읽는 방법>은 내게는 벅찬 책이었다. 내용이 딱히 어렵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이해할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는 저작이라 본다. 서양근현대사에 약간의 지식이 있거나 서양철학에 어느정도의 소양이 있다면 도전할만 하다. 애초 역사에 관한 내용인줄 알고

달려들었지만 역사라기 보다는 소개글 그대로 텍스트 읽기와 해석에 관한책이다.

더불어 이 책을 수월하게 이해하려면 철학적, 언어학적 지식이 필요할 듯 하고 무엇보다

비트겐슈타인과 데리다를 알고 있다면 편하게 읽을수 있겠다.

 

그래서 서평을 쓰고 싶었지만   이건 독후감도 못되는 글이 되고 말았다 

가장 난해했던 점은 문장의 서술에 대한 것이다. 이책의 번역자가 허투루 번역을 했다든가

번역자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전문번역자와 전공자 사이에서 이책은 누구에게

맡겼으면 더 쉬운 번역이 될수 있을까 한참을 생각했다.

 

예를들면

이 시도는, 익숙하기 때문에 역사가에게는 본질적으로 과거에 적용될수 없다는 점이

은폐되는 패러다임들의 무의식적인 적용이 윤리적,정치적,종교적,혹은 그 외의 유사한

사유방식에 대한 현재의 역사적 연구를 어디까지 오염시키고 있는지 밝히는 과정이 될 것이다.”

 

행위자의 행동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이 행위자에게는 가능하지 않았던 묘사와 분류기준의

이용에 의존한다는 것이 드러나고도 게속해서 납득할만한 것으로 성립할 가능성은 배제한다.”

 

이렇게 중문과 복문이 섞인 문장이 많은데 조금만 흐름을 놓쳐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분석과

정리를 통하지 않고는 이해가 어려웠다. 그래서 집중을 못하고 끙끙대고 있노라 쉽사리

책속으로 빠져들지 못했다. 아무튼 내가 대강 이해한 내용으로 독후감을 써본다면:

 

 

이 책은 세권으로 이루어진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들> 시리즈중 첫 번째인 <Regrding Method><역사를 읽는 방법>으로 번역한 것이다. 책의 구성은 서문과 10개의 장으로 되었으며 몇몇

장은 처음 출판된 것이지만 대개는 이미 발표된 논고들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방법을 논하는데 기존의 관점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관점을 주장하고 있다. 저자가

서문에 밝힌 대로라면 텍스트를 지적인 맥락과 담론의 틀 속에 위치시켜 저자가 실제로 어떤

일을 행한 것인지알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스키너는 화행, 통약불가능, 발화수반

행위등등 언어학적 개념들을 주로 사용한다. 개별 챕터에서는 동서고금이 아닌 서양 근현대의

주요 저작들과 인물을 동원해서 역사해석이나 텍스트 독해의 오류를 하나하나 집어낸다.

1장에서는 전체적인 논지와 각각의 장에 나오는 개념들을 소개한다.

 

역사학의 기본적 개념이자 명제인 사실(facts)의 개념과 실제성의 여부논쟁은 우리에게도 너무

익숙한 실증사학의 태두 랑케를 연상시킨다. 우리는 실증주의와 실증사학을 혼동하고 있지만

철학으로서의 실증주의는 조금 다르다. 그런데 여기서 사실을 지시하는 것은 언어이므로 언어에 있어서, 의미가 아닌 주장의 진실성을 찾자는 학파도 있다. 여기서 스키너가 강조하는 것이

화행(speech act)이다. 언어를 사용할때는 항상 무엇인가 행동한다는 뜻이라고 한다따라서

언술은 곧 행동이라 말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을 중시하고 장기지속의 개념을 사용한다. 뒤에가면

이 책에서 개념에 대한 개념을 논하므로 함부로 개념이란 용어를 쓰기도 꺼려지지만 어쨌든

장기지속이란 프랑스 아날학파의 이론이므로 스키너의 주장을 알려면 광범한 기본지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수 없다.

 

그는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 제프리 엘턴의 경우를 예로들어 역사가와 사실(객관적 사실)

관계를 밝힌다.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현실적이고 유용한 질문으로 생각되는 역사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세계에 도움을 줄수 있는가에 대해 엘턴은 어떤 답변을 했을까. 답은

 그런식의 열망을 완전히 버리고 포기하라.”. 내 생각에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대개

정형화되어있다. 우리나라라면 당연히, 역사학은 현재를 위해 복무한다. 역사를 보면 현재와

미래를 알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미래예측이나 역사적 결정론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정점이다. 그런데 엘턴이 추구하는 역사의 답은 과거는 현재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정도 이다. 스키너가 보기에 역사학자들은 대개 같은 생각을 하고있나보다.

우리만 다른가?

 

스키너는 해석의 문제를 중시한다. 마키아벨리 <로마사논고>의 예를 들면서 공화정의 자유와

왕정 하의 자유를 동시에 말하는 모순된 논지에 대해 다수학자들은 마키아벨리가 혼란에

빠졌다고 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스키너에 따르면 repubblica라는 어휘는 법이 공익을

보장한다는 뜻으로 군주정하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국정운영의 사례라고 한다. 그러므로

로마 초기 왕정에서 repubblica의 사례가 틀림없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역사해석의 문제인가? 이건 사학도가 제일 먼저 배우는 사료비판의 기본 아닌가?

라틴어의 용례나 어원만 조사해도 알수 있는 사실이 아닐까?

 

관념사 이해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일어난다. 대부분 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고전텍스트에 대해서는 그 논의에 초점을 두고 영속적인 사안이 가리키는 바를 조사하는게

핵심이다. 만일 그것이 나온 사회적 조건이나 지적 맥락을 살펴보는 곁길로 빠진다면 고전이

가진 지혜를 놓치고 가치를 잃게될 것이다.”

대체 말이되는 주장인가? 혹시 고전에 대한 독서와 연구는 달라야한다는 주장일까? 무엇이 되었든 논지를 헤아릴때는 조건과 맥락을 따지는게 당연한 순서 아닌가. 이건 비단 스키너의 비판을

기다리지 않고도 사학도 차원에서 반박할수 있는 사안으로 보인다.

 

잉글랜드 관습법이 때로 성문법보다 우위에 있다는 에드워드 쿡의 보넘판결에 대한 견해에서

근대 미국의 연구자들은 (몇백년후에나 등장하는)위헌법률심사권의 원칙이 여기서 나온다고

보았고 전문가들도 크게 반대하지는 않는 분위기라고 한다. 이걸 텍스트 방법론의 문제로 보아야 하는지. 이건 연구자의 수준이나 오독에 관한 내용이라해야 더 적절하게 보인다. 아니면 신념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일관성의 신화라는 부분에서,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읽고 또 읽어

홉스는 이런 일관성이 있다는, 자신이 찾는 견해를 발견해내는 학자들의 예를 들었는데 이런

경우가 우리나라에도 없지 않다.

고전의 저자에 대해 자신이 찾는 주제나 개념을 덧씌워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는 의외로 많이

발견된다. 나는 언젠가 이사야 벌린의 책을 신청하는 인터넷 댓글에서 이사야 벌린을 신자유주의의 대부라고 쓴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마치 율곡 이이가 실학의 대부라고 한것과 똑같다. 이는

다시 이책에서 스키너가 비판하는 플라톤을 전체주의자로 보는 학자들과 같은 것이다.

 

스키너는 이렇게말한다. “텍스트를 이해하려면 말해진 것의 의미에 대한 설명만이 아니라 해당

저자가 그런 말을 함으로써 담아낸 의미에 대한 설명도 제시할수 있어야 한다.” “요컨대 홉스와

벨의 텍스트는 이해했다고 믿을수 있을때까지 거듭거듭 읽는다고 해서 절대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제시한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즉 사람들이 말하는 것 뿐 아니라 그렇게 말함으로써 행하는 것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들이 말한 것의 의미를 파악할뿐 아니라 그렇게 말함으로써

의도한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이렇게 정리되어 표현된다.

따라서 그런 텍스트를 연구할 때 직면해야할 문제는 특정 독자를 염두에 두고 그것을 쓸 당시에 저자가 그와 같은 발언들을 내놓음으로써 실제로 어떤 것을 전달하려고 의도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건 마치 <조의제문>이나 <춘추>를 들어 말하는 듯 하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정말 의제를

조문하려 쓴글이겠는가. 춘추필법은 예컨대 이런식으로 쓴다. “ 전두환과 최규하는 1979,1980

사이에 많은 사람을 죽였다.”  최규하를 포함시키는 것이 춘추필법의 의미다.  이 역시 사학도

들에게는 너무 당연한 연구태도 아닐까?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텍스트의 정확한 해석이고 이를 위해서는 말의 의미뿐 아니라 말속에

담긴 행동 즉 화행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는 또 발화수반과 의도의 발견으로 나타난다.

사례를 통해보면, 겨울 연못에서 스케이트타는 사람에게 경찰관이  그쪽의 얼음은 매우

얇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우리는 이 단어들의 의미는 물론 말하면서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를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그 화행은 얼음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경고다. 발화결과로 나타난

경찰관의 의도는 무엇인가? 바로 이점이 스키너가 공들여 써내려간 책의 주제다.

의도를 알기위해 텍스트의 맥락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10장에서는 개념의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개념은 계속 변해왔으므로 동일한 대상을

말하는 두사람이라도 변화된 개념을 일치시키지 않으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 나무만 보느라 숲은 볼 생각도 못했다. 나무도 제대로 못봤는데 어찌 숲을 보았을까.

다만 스키너의 이런 주장이 내게는 새롭게 다가오지 않고 평이하게 들릴 뿐이다. 어쩌면 이책이

역사가 아니라 정치사상에 대한 것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잘 모르는 내용을 억지로 읽어나간

기분이다.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책일텐데. 맥락을 찾고 저자의 의도를 알면

보물단지일수도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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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화가들 - 조선시대 궁중회화 3 돌베개 왕실문화총서 6
박정혜 외 지음 / 돌베개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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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화가들

한국학중앙연구원/박정혜 황정연 윤진영 강민기

돌베개 / 407

 

정신문화연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 연구와 함께 도서간행사업도 활발하게 벌이고 있는데 2011년부터 왕실문화총서 시리즈의 하나로 조선시대궁중회화 연작을 간행하고 있다. 이번 <왕의 화가들><왕과 국가의 회화> <조선궁궐의 그림>에 이은 세 번째 책으로 연작의 완성본이다. 책은 407쪽 이지만 본문은 360쪽이고 많은 양의 주석과 전거가 덧붙여져 있다. 1권의 왕, 2권의 궁궐에 이어 화가를 조명했으니 그림을 통해본 조선왕조가 아니라 조선왕조의 그림이야기고 그 3권은 도화서 화원을 다룬 책이다.

 

이책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단연 상당량의 컬러도판이다. 이 사진들을 보고있노라니 작년 리움의 <조선화원전>과 올여름 포스코미술관 <천재화인열전>이 생각났다. 이 책을 먼저 보고 전시회를 봤으면 좀더 이해가 쉬웠을텐데.

 

책은 4부로 구성되었다. 1부 조선시대화원과 궁중회화, 2부 왕의 초상을 그린 화가들, 3부 제국의 황실화가들 화가에서 시대인으로, 4부 궁중회화에 담긴 길상의 시대.

얼핏 목차를보았을 때 화원을 다룬 책인데 4부의 궁중회화 길상은 부조화스런 느낌이 있었는데 서문에 원래의 4부가 아니지만 궁중화가와 길상표현은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포함시켰다는 설명이 있다.

 

조선시대의 그림은 화원화와 문인화로 나눌수있는데 선비들이 그리는 문인화가 규격을 벗어난 자유로운 예술이라면 화원화는 일단 기록을 위한 주문그림이라고 하겠다. 마치 오늘날 사진의 기능을 하고있었던 셈이다. 어진이라 부르는 왕의 초상화, 진행기록화나 행사도, 건축물의 밑그림에서 조감도까지, 병영도와 지도 등 군사용 그림, 경관이나 생활상 등등 국왕의 눈 구실을 해준 것이 화원화가들이다. 또 이외에 감상용 그림이나 진상용 예술품을 그리기도 하였다. 우리가 근래에 많이 들어본 의궤란 주요 행사의 전과정을 그림으로 남겨둔 것이다.

 

그러므로 한두번이상 이름을 들어본 화원들이 많이 등장한다. 김득신 김홍도 이인문 변상벽 이상좌 등등. 고려의 도화원이 조선에 들어와 도화서가 되고 정조때 차비대령화원을 거쳐 대한제국기에 규장원 소속으로 바뀌었다가 없어지는 미술담당관청의 약사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를 다루고있어서 전시기를 조망하지는 않았는데 불과 얼마전에 나온 미술사학자 안휘준선생의 신간에서 통일신라의 솔거(황룡사 노송도로 유명한)는 귀화한 중국인도 아니고 승려도 아닌, 통일신라의 도화서격인 전채서 소속 화원이었다는 사실을 논증했다.

도화서 화원은 관리이기는 하지만 기능공인 탓에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어진을 그린 화원이라도 6품이상 오르기 힘들었다. 간혹 국왕이 마음에 들어해서 3품직으로 올려줄라치면 벌떼같은 상소와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중앙의 도화서 화원 외에 지방으로 파견간 화사군관제도 있었고 도화서 소속이 아닌 방외화사도 있었으며 지역에서 활동한 직업적 지방화사도 존재했다고 한다.

 

화원은 실력이 뛰어난 화가도 많이 있었지만 행사에 동원되어 그린 화원화는

공적인 특성상 개성적인 화풍을 드러낼수 없고 기존의 패턴을 따라 반복한 것이 특징이어서 시각적으로 화려하게만 보일수 있다. 그러나 그속에 숨겨진 작업공정과 회화적인 가치, 화원이 흘린 땀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간과된 경향이 있다. 적게는 3~4, 많게는 수십명이 참여하여 하나의 작품을 함께 완성한 단결성, 색채와 문양에 있어 정제된 물감과 먹선을 사용한 집중력 등이 집결된 노력의 결실이라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왕의 얼굴을 그리는 어진화사가 되는 것은 화가에게 큰 영광이었고 그만큼 선발도 어려웟다고 한다. 화원이 결정되면 세 파트로 나눠 얼굴등 주요부위를 그리는 주관화사, 옷과 배경을 그리는 동참화사, 보조작업을 하는 수종화사로 어진화사를 구성했다고 한다. 어려서 부친을 잃고 생각지 않게 왕이 된 성종은 부왕(의경세자)의 얼굴을 그려준 화원 최경을 고위직에 임명하여 언관과 마찰을 빚었다고도 한다.

 

근대에 들어와 사진이 도입되면서 화원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화원들은 근대화단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소멸하고 말았다. 그런중에 서양문물을 접하고 외교활동을 하거나 사진술을 배워 사진관을 연 화원들도 있었다.

 

이책은 가볍게 보는 책이라기 보다는 관심있는 사람들이 참고 또는 소장용으로 구입하면 좋겠다. 글의 체제나 구성, 서술이 전형적인 논문투라 대중용 역사문화 개설서로는 조금 미진해보인다. 또 역사를 전공한 분들이 아니라서인지 한일합방 등의 용어는 거슬린다. 그러나 오랜 공동연구 끝에 궁중화에 대한 거질의 연구성과를 내놓은 네분의 저자에게 독자로서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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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 일에서든, 사랑에서든, 인간관계에서든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관계 심리학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1
배르벨 바르데츠키 지음, 두행숙 옮김 / 걷는나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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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수 없다

 

배르델 바르데츠키 지음 두행숙 옮김

걷는나무 / 259

 

살아가면서 마음에 상처 안 받고 지내는 사람이 몇이나 있으려나. 고만고만한 심리치유서중의 하나인가 했는데 나도 많은 위로를 받은 듯 하다. 더구나 요새 지인들중 몇이 평소와 다른 언행을 보였는데 이 책에 대입해 보니 비로소 그들을 이해할수 있었다. 말하자면 강건너 상관없는 남 이야기가 아닌 실제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비교해 너무 잘 들어맞는 경우로 생각해 매우 흥미롭게 읽을수 있었다.

 

누구나 상처받고 가끔 상처를 주면서 갈아간다. 나는 전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누군가 나 때문에 상처받고 있는지 모른다. 이 책은 그런 이들을 위해 독일의 임상심리학자가 펴낸 상처에 영향받지 않는 방법론이다.

 

상처란 무엇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마음의 상처는 대부분 마음 상함에서 비롯되는데 마음상함이란 어떤 말이나 행동 때문에 자존감에 상처받았다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아주 사소한 일들. 나보다 늦게 온 손님에게 음식이 먼저 나올 때, 회식이 있다는데 오라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 때, 데이트 신청을 했는데 단칼에 거절 당했을 때 등등 저자는 우리와 유럽의 경우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말해준다. 상처 받았을 때 사람들은 분노하거나 좌절하고 때론 복수심을 갖는데 그래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는 여러번을 이렇게 강조한다. 상처가 되는지 아닌지는 전적으로 내게 달려있다고!

상대의 말과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상처가 아니라 상처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존감에 달려있는데 자존감은 이렇게 표현한다. “자존감이란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고 열심히 노력하면 꿈을 이룰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

 

즉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자신을 사랑하기란 쉬운가? 아니다. 자기를 사랑할줄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애,나르시즘과 구별되는 것이다.

 

내 주변의 어떤이는 객관적으로 보아도 참 잘난 사람이다. 대기업 중역에 인물도 훤하고 뭐하나 빠질 것 없는 사람인데도 늘 남을 비방하고 늘 남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한다. 이 사람은 자존감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잘난 맛에 빠진 사람이다. 또 한 사람은 잘생기고 능력많은 여자인데 늘 남탓을 하고 자기잘못을 인정할줄 모른다. 완벽주의자다. 화려하게 치장하고 은근히 주목받길 원한다. 누구 하나라도 잘못을 지적하면 히스테리 상태가 된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존감이 없고 기준을 남에게 맞춘다는 점이다. 남을 비방하면서도 자신을 인정해줄 남이 있어야만 살아가는 의미가 있다. 이 책이 말하는 바와 똑같다. 그 근원은 열등감이다. 어떤 열등감인지 나는 모른다. 그걸 감추려고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점을 늘 강조하니까.

 

이런 상태를 이 책에서는 거짓 자아 뒤에 숨은 잃어버린 나 라고 한다. 좋은 옷과 물건으로 치장하고 능력을 과시하며 어려운 업무를 떠맡아 완성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일도 한다. 바로 사랑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으려는 욕구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에게 상처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답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기준을 남에게 맞추지 말고 무슨일이 생기면 내문제와 남의 문제를 구분해서 생각하라는 것이다. 분노 좌절 편견 복수심은 해결방법이 아니라고 한다. 여행 대화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이 이런 관계 해소에 크게 도움을 준다고 한다.

 

한때 근무했던 직장 상사가 도무지 이해할수 없는 성격이었다. 당시 나도 마음의 상처가 깊고 컸다. 직장을 그만두는 가장 큰 이유가 돈이나 업무가 아닌 상사 동료와의 관계 때문이라는데 정말 힘든 나날이었다. 한참 후에 그 입장을 이해하고 보니 감정의 응어리가 풀어졌는데 나도 그랬으니 남들은 어떻게 지냈을까 싶었다. 그후 종교와 명상 일을 하며 더 이상 상처받는 경우는 많지 않았는데 종교나 명상에서 말하는 바와 이 책의 주장이 똑같다. 나를 사랑하고 기준을 내게 맞추라는 것이다. 우주에서 나는 하나다. 내가 곧 우주고 우주가 내 일부다. 신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면 된다. 남의 말에 휩쓸려 아파하지 말고 저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구나 왜 저런 말을 할까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기란 쉽지 않다. 누구나 이민호 김태희같은 미남미녀는 아니니 뚱뚱하고 못생긴 나를 어찌 사랑할수 있을까. 그게 관건이다.

숱한 결점과 단점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래야 소중한 나를 외부의 관점으로부터 보호할수 있다. 이는 이기적 자기애나 독불장군과는 다른 얘기다.

 

상처받은 경험이 있고 아직도 힘들어한다면 이 책을 통해 많은 부분 도움을 받을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이 책은 반 정도는 남녀간 사랑에서 오는 상처를 다루고 있다. 또 삐뚤어진 성격의 원인을 유아기의 부모관계에서 찾는다. 오랜 임상 상담의 결과겠지만 유아기의 사랑부족이 아니라도 남에게 상처주는 사람은 여러 부분에서 문제가 있다.

 

한때 가톨릭에서 내탓이오 내탓이오를 외친 적 있는데 이 역시 바람직한 해결방법은 아니다. 이 책 말고도 적지않은 심리학 책들이 문제를 내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주장을 편다. 자기계발서라면 내겐 문제가 많으니 고치자 할수 있겠지만 종교적으로 내 탓을 외치면 심지가 굳지 못한 사람은 모든 문제를 정말 내탓으로 돌리고 절망할수 있다. 남편이 잘못돼도 아이가 삐뚤어져도 사업이 망해도 내탓이면 살 수가 없다. 오직 신께 매달리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무턱대고 남의 탓을 하는 것도 나쁘지만 무조건 내탓은 더 나쁘다. 조용하게 상황을 관조하고 해결책을 찾는 육체적 정신적 거리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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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말하여질 수 없다 - 미래 인류를 위한 담론, 도덕경
차경남 지음 / 글라이더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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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말하여질수 없다(도덕경)

차경남

글라이더 / 319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중에서 <논어>를 다룬 책은 수십종이 넘는다. 논어만 못하겠지만 <노자> 역시 상당히 많을 것이다. 그중 김용옥의 노자 해설서는 내게도 있다.

차경남의 이 책 <진리는 말하여질수 없다>도 노자를 다룬 해설서다. <노자>는 다른 이름으로 <도덕경>이라고도 하는데 81편 5000자의 간략한 책으로 유명하다. 지은이인 차경남은 변호사이고 장애인관련 일을 하고있으며 동양철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 이 방면에 몇권의 저서를 낸 사람이다. 처음에는 이 책이 노자 전체를 번역한 줄 알았는데 읽어보니 그게 아니고 81편중 20편만 번역한 책이다.

 

이른바 아마추어 고전연구자들이 많다. 이 노자만 해도 몇 년전 김용옥교수에게 반론을 던지며 책을 낸 여성독서인이 화제가 된적 있다. 작년에 읽은 <신도림역에서 공자를 만나다>는 신분도 불분명한 중국인 아마추어가 쓴 책이다. <신도림...>을 읽고는 상당한 실망을 했기 때문에 이 <진리는...>도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좀 다른 해석이 있겠지 정도로만.

 

그런데 읽어보니 썩 괜찮다 이책. 바로 직전에 너무 난해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알기 어려운 책과 씨름한 뒤라 그런지 몰라도 대단히 간결하고 쉽다. 쉬운 책을 어렵게 만든 현학(衒學)적인 현학(玄學)도 아니다. 비근 - 낮고 가까운 예를 들어서 이해와 수긍이 가게 해설한 책이다.

 

노자를 안 읽어본 사람이라도 자주 들어본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현묘지도 玄妙之道” “천지불인 天地不仁” “천장지구 天長地久” “상선약수 上善若水” “금옥만당 金玉滿堂” 등 익숙한 어귀를 볼수 있다. 아주 오래전 어릴 때(少時的) 외국영화가 개봉되면서 퀴즈가 붙었다. 영화제목이 Straw Dog인데 기억나는게 “이 제목은 노자에서 따왔다 원문에서 straw dog을 한자로 뭐라고 부르는가” 뭐 대충 그런 퀴즈였다. 막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을때인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수 없었다. 나중에 발표된 정답이 추구였는데 더 알수 없었다. 오래도록 기억되는 이 에피소드의 의문은 한참 후 노자를 보고서야 비로소 풀렸지만 영화제목이 왜 추구인지는 작년인가 재작년에 리메이크된 <어둠의 표적>을 또 봤는데도 이해를 못했다.

유덕화 주연 영화 천장지구 역시 틀림없이 봤는데 내용은 기억이 안난다. 여주인공이 예뻤다는 정도. 그저 제목을 어찌 철학적으로 붙였나 생각한 정도.

 

1장과 2장은 김용옥의 책과 원문번역을 비교하면서 읽었다. 전공학자라 그런지 김용옥의 책은 고증과 훈고가 정확하고 근래에 발견된 <노자> 죽간과 백서 까지 검토해서 노자도덕경의 본뜻을 전달하려 애쓴 점이 돋보인다. 원문번역도 김용옥이 치밀하다. 그러나 차경남의 이 책도 정밀하지는 못해도 해설은 위에서 밝힌 것처럼 쉽게 쉽게 머리에 들어갔다.

 

저자에 따르면 도란 달을 의미하는데 달을 본 사람이 없으니 쓸데없이 문자와 언어에 매달린다는 것. 진리와 언어의 문제는 서양에선 비트겐슈타인에 와서 문제제기되지만 동양권에선 노자가 맨처음 지적하고 우리도 원효의 <대승기신론>에서 이 문제를 검토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즉 진리란 결코 언어로 설명될수 없다는 것이다.

 

학문적으로 노자에 접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한다. 노자를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노자를 통해 인식의 변화를 겪는다는 것인데 노자를 읽고 유식해졌다면 그건 노자를 잘못 읽은 것이라 한다.

 

무위(無爲)를 설명하는 대목은 이렇다. - 너의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라. 삶에 있어서의 온갖 억지와 인위의 배제, 그리고 자연스러움에 대한 찬미, 이것이 바로 무위이다. 인간의 행위중에서 가장 창조적인 것들은 사실 무위에서 나온다.

 

간결하지 못하고 만연체 문장으로 써진 글을 경계하라는 말도 나온다.

 

이름(名) - 경계와 구획, 이것이 다름아닌 노자가 말하는 이름이다. 노자는 이미 1장에서 이름이 지닌 허상을 지적하며 그 위험을 경고했다. 14장은 1장과 내용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노자의 도를 체득한 이의 모습은 확실히 유교에서 말하는 군자의 모습과는 달라보인다. 유교의 군자는 어딘지 잘나보이고 씩씩해보이며 아는 것도 많고 나서기 좋아하는데 반해 도가의 인물은 어딘지 못나보이고 우물쭈물해 보이며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앞에 나서기를 별로 안 좋아한다.

그러나 유심히 살펴보면 그 안에 새로운 리더십의 특질이 고스란히 들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미래형 리더십의 근본이념은 소통이다.... 신중과 경청, 남을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궁극의 진리는 이성적으로 파악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위와 허정(虛靜)을 아는 것인데 호흡법이나 만트라나 명상비법도 좋지만 그 어떤 것도 허와 정을 벗어나면 안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노자 장자를 ‘연구’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저 노자 장자를 훑어보고 확인할 뿐이라고 한다. 궁극의 경지에 도달한 자만이 말할수 있는 지혜가 들어있는지를.

 

인용하고 싶은 보석같은 말들이 너무많다. 그러니 직접 보시라 할 수밖에 없다. 진리는 말해질수 없다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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