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연구 1 (반양장) - 아놀드 토인비 59클래식Book
아놀드 조셉 토인비 지음, D.C.서머벨 엮음, 김규태.조종상 옮김 / 더스타일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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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놀드 토인비
    역사의 연구 1
아놀드 토인비 지음 / 김규태,조종상 옮김 / D C 서머벨 편집
더스타일 / 307

 


아마도 이 책은 현대의 고전 정도가 아닐지 모르겠다. 서양사 전공자가 아니라서

이 책이 어느정도의 비중이나 가치를 지닌 책인지 분위기를 알수 없다. 그렇든 아니든

나는 일찍이  어린 나이에 -  예전에는 소시적少時的 이라는 말을 잘 썼는데...ㅋ -

이 책의 제목과 성가에 반해 역사학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어찌어찌 사학과에 갔으되....

고등학교때 동서문화사에 월드그레이트북스라는게 있었는데 방법서설이니

짜라투스트라와 함께 이 책도 있었다. 야심차게 두권으로 된 이 책을 사서 읽었으나

뭔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도전정신은 가득하고 넘쳤으나 그정도 책을 읽을 수준이 아니었다. 나는 수재가 아니었다.

중간에도 읽을 기회가 있었겠지만 다 읽지는 못했던 것 같다. 설사 읽었다해도 기억도

 안나고.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내앞에 이 책이 왔다. 말하자면 오늘의 나를 있게한

책이다. 눈은 구름 위만 바라보고 발은 땅에서 떨어진 채 동서를 분간 못하는 남산골

딸깍발이 신세로.


처음 역사학에 입문한 초보 학도들은 필독서의 하나로 대개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는다.

카는 토인비와 동시대를 살아간 학자인데 카나 토인비나 랑케 역사학을 한차원

발전시킨 사람들이다.  토인비가 읽히지 않는 이유는 내 생각엔 너무 길기 때문이다.

카는 역사학자라기 보다는 정치학자에 가까운데  전에 읽었던 <역사를 읽는 방법>의

저자도 역사학자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영국은 학제적 연구가 잘되어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역사의 연구>는 전체 12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이다. 전공자도 읽기 어려우니 누가 정리좀 해줘야할 터.  마침 서머벨이라는 사람이 이 거질을 두권으로 요약해서

내놓았는데  대개 우리가 보는 <역사의 연구>란 서머벨이 줄인 요약판이다. 우리나라에

원저 완역이 있는지 조차도 모르겠다. 아마 없을 것이다.  <로마제국 쇠망사>도 6권짜리

대작인데 대개는 한권짜리 축약본으로 읽는다. 간혹 말이 이어지지 않는 부분이 나오기도 한다. 이 쇠망사는 6권짜리 완역이 나와있다. 그러나 역사의 연구는 없는 것 같다.

(나중에 알아보니 전작 번역이 있다)

 

예전 동서문화사 <역사의 연구>는 두권이지만 작은 활자에 2단 편집으로 빽빽하게

채원진 책이었다.  이번 더스타일의 <역사의 연구>는 1권인데 연표를 뺀 본문만 보면

243페이지에 불과하다. 처음에 나는 이 책 역시 두권짜리인줄 알고 옛책을 책꽂이에서

꺼내 새로 닦고 여기저기를 비교해보았다. 그랬더니 말도 안되게 분량이 적었다.

 

책의 어디를 봐도,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속을 까뒤집어 봐도 이 시리즈가 전체 몇권인지

나와있지 않다. 뭐 이런 책이 있나.  인터넷을 뒤져보고야 더스타일의 Old Fashioned

Classic 중의 하나로 8권까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옛 두권을 여덟권으로 늘린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떤 독자는 이 시리즈가 토인비 원전을 다 번역한 것인줄 아는 사람도

있었다.

 

번역서는, 특히 고전에 속하는 번역서는 저본소개와 역자의 해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아니면 출판사의 소개라도 있어야 한다. 그점에서 이 책은 독자서비스가 태부족하다.

마지막권에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내용은 첫머리에 올려야한다.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대개는 들어봐서 알겠지만 토인비의 주장은 대체로 다음

네가지 정도로 요약할수 있다. 역사는, 문명은 성주괴공의 원칙에 따라 순환한다.

문명은 창조력이 있는 지배적 소수와 그를 따르는 민중에 의해 만들어진다.

문명은 도전과 응전이 있어야 창조된다.

이는 거친 환경조건을 극복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노력이다.

 

수긍하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토인비가 이런 결론을 이끌어내기까지는

수십년이 걸렸다. 그는 그리스문명과 서양문명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다 예전에 번성했던 문명이 왜 지금은 사라졌을까 하는 점에 착안하여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문명의

리스트를 만들고 이들의 공통점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역사가의 조건은 호기심이다. 단순한 호기심만 가져서는 목표없는 지식의 추구가

될수도 있다. 의의가 있으려면 ‘이것이 어떻게 거기에서 생겼는가’하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역사가의 기본적 질문이다.”
역사가가 가져야할 기본중의 기본이지만 그간 내가 보아본 경험에 의하면 이런 기본조차 안된 역사가가 꽤 있다.

 

그는 영국 역사가 액튼의 말을 인용하여, 역사는 본질적으로 한 민족이 아니라 좀더

광범위한 원인을 기반으로 하는 힘의 작용으로 움직인다고 말한다. 즉 “역사연구의

단위는 민족국가도 아니고 정반대인 인류도 아니며 우리가 사회라고 이름붙인 어떤

종류의 인간집단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문명’이다.

‘문명의 비교연구’라는 챕터에서는 각 문명의 부모자식관계를 거론하는데 헬라스

사회는 현재의 서구 기독교사회를 낳았고...하는 식이다. 다만 이집트사회는 부모자식이

없는 독특한 문명으로 보았다. 이렇게해서 관련된 사회 19개를 파악했는데 극동사회를

중국뿐만이 아닌 중국사회와 한국사회, 일본사회로 나눈다면 인류의 문명은 21개로

파악할수 있다고 한다.
이 21개 문명을 비교연구한 것이 바로 <역사의 연구>인 것이다.

 

19세기 당시까지 서구사회에 알려진 극동, 즉 동양문명은 중국과 일본이었다.

그가 한국을 중국의 위성, 일본의 아류로 본 것은 토인비만의 잘못은 아니다. 조선은

존재가 없는 나라였다. 그러나 그는 후에 재고찰을 써내면서 한국을 일본과 같은

중국의 위성문명으로 분류하여 한국을 일본과 동등하게 보았다.

 

토인비는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듯 하다. 한자에 대해서도 적지않은 지식이 있고

중국에 대한 이해와 호감도 높아보인다. 그의 순환사관은 슈펭글러 이전에 중국의

전통사관을 받아들인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개별 문명에 대한 분석과 결론은

나머지 책들을 보고 이야기해야겠지만 서구제일주의를 비판한 것이라든가 문명이

성쇠를 겪는다는 주장은 지금 보아도 맞는 이야기다. 호불호를 말하기전 이 책을

한번쯤은 읽어야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인류의 문명 전체를 놓고 본 분석이기 때문이다. 역사학도와 역사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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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 정혜윤이 만난 매혹적인 독서가들
정혜윤 지음 / 푸른숲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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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는 <침대와 책>이 없나보다.  검색이 되지 않는다.  엉뚱한 책들만 올라와서 할수없이 정혜윤의 책 아무거나 선택해서 서평제목으로 삼는다.

 

 

침대와 책
정혜윤
웅진지식하우스 / 237

 


나는 침대에서 책을 읽지 않는다. 그러나 관능적인 독서기라는 수사에 끌렸다.
정혜윤이라는 이름은 독자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했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나보다. 

그만큼 내 책읽기의 스펙트럼이 얇거나 독서분량 자체가 태부족한 때문이기도 한

것이겠지.  그래서 올 초에 정혜윤의 책 두권을 주문해서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책

<침대와 책>을  손에 든지 얼마 안되어  후회가 한가득 몰려왔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있는 건지.


이제까지 읽어왔던 책과는 너무나 확연히 다른 문체, 감성적이고 감상적인 화법,

구어체와 문어체가 뒤섞이고 주체와 객체가 불분명한 서술. 그랬다. 이 책은 머리로 읽는

책이 아니었다. 가슴으로 읽어야하는 책이었다. 되도록 천천히, 커피를 마시든 침대에

눕든 글귀 하나하나를 음미하고 인용된 문장을 머릿속에 상상하면서 저자와 대화하듯

읽어야 하는 책이었다. 이 책은 작가와 주변세상의 관계에 대한 문학적 풀이로서의

미셀러니?


문학을 가까이했던 때가 언제던가. 10대후반에서 20대 초반. 그리고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점점 더 멀어져간 문학. 이 책은 개인 신상수필에 가깝지만 정혜윤의 문학적 소양은 소설가나 평론가라 해도 따라잡기 힘들만큼 대단하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순간순간에

섬세한 관찰력과 심상으로 문득 의미를 부여하고 그에 맞춰 수없이 인용하는 작가와

작품들은 정말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다.  인간이 컴퓨터란 말인가.


그런데 왜 나는 이 책이 이해가 안되고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듣지를 못하는걸까.
내가 이토록 문학외적인 인간이었나. 그렇게 상상력이 없었나. 섬세하게 세상을 관찰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던가. 그런데 왜 저자는 유명하고 그의 책들은 베스트셀러란 말인가.

자조했다. 내게 무슨 문제가 있음이 틀림없다. 소통이 안되거나 독선에 빠지거나  나 밖에

 모르고 살아가는 중인가보다.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같다. 문학이란 결국 인간에 대한

관심인데 인간보다는 우주에 대한 관심이 더 큰 것인지.   
아님 마음이 상당히 메말라있던지...


이 정혜윤작가는 문학에 치우친 독서만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니체나 벤야민, 다치바나

다카시 같은 철학자나 평론가의 책들도 인용하고 무엇보다 영화와 팝송도 전문가수준인

듯 했다.  본 영화도 없고 들어본 노래도 없으니...


책날개에 붙은 정혜윤의 자기소개는 이렇다.  “엄마는 나의 검은 피부를 싫어했고  나는

나의 갈색 피부를 좋아했으며, 엄마는 나의 헝클어진 머리를 싫어했고 나는 나의 부스스한

 머리를 좋아했다. 엄마는 레슬링과 가요와 관광버스를 좋아했으며 나는 레슬링과

관광버스를 싫어했다. 우리는 많은 부분 통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엄마는 내가 책을

읽을때면 항상 자기를 닮아서 애가 이렇게 책을 좋아한다고 칭찬하고 인정해줬다.

칭찬받을 일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그 뒤로도 쭉 책읽는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사랑받았다. ......”


책속에는 자신의 명함을 트레이싱지로 만들었다는 내용도 나온다. 다른 명함을 읽을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름과 직책을 적는 대신 꼭 알아줬으면 싶은 내용을 적어넣는

상상을 한다고 써있다. 이를테면, 아마추어 여행작가, 고기요리를 싫어함, 귀를 뚫지

않았음, 스타킹수집가, 증명사진 싫어함, 옆얼굴에 더 자신있음, 자고나서 푸석푸석할 때

가장 예쁨, 출신대학과 직책을 말하는 것을 싫어함, 어쩔수 없다 라는 말을 싫어함, ....

너무 재밌지 않은가.  나 역시 적을게 많아서 명함을 책받침만큼 크게 만들어야 겠다는

상상은 해본적 있지만 이런 유쾌하고 명확한 자기소개 명함은 전혀 생각해본적 없다.

문학적 상상력이다.


책의 맨 마지막 챕터는 베트남여성이 결혼해서 한국에 왔다가 전과6범인 남편에게 맞아서 늑골 18개가 부러져 죽은채 발견됐다는 신문기사에 대한 단상을 쓴 것이다.  내가 여태

읽어온 책들이나 나라면, 이 문제에 대해 원인을 분석하고 대한민국의 현 상황에 분개하고

 마땅히 해야할 조치가 취해지지 않은데 더욱 분노하거나 대책을 촉구하면서 글을 마무리

할 것이다.  나라면 덧붙여, 죽은 베트남 새댁의 영혼에 슬퍼하고 베트남 사람에 미안해

하고 악을 증오할 것이다.  그러나 정혜윤은 그렇지 않다. 여전히 그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는 백가흠의 소설을 인용한다.
“백가흠소설속의 하잘것 없고 우스꽝스러운 주인공들이 우리 곁에 온다면 우리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단박에 알게될 것이며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만 사랑하려는 경향이 얼마나 편리한 경향인지 알게될 것이다. 어쩌면

‘네 이웃을 사랑하라’란 말을 실천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은 그 이웃이 좀 떨어져있을

때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그녀는 시 몇편을 인용하고 조용히 글을 마무리한다.


정혜윤은 정혜윤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소통한다.  육중한 이미지나 이마에 내 천

자를 그린 표정도 아니다. 그럴필요도 없다.  어차피 세상에 자기는 한 명뿐이니까. 

그러니 내가 이 책을 잘 읽어나가지 못한 것도 작가나 다른 독자완 상관없는 일이다.

침대에서 책을 읽지 않아도 이책을 재미있게 볼수 있고 침대에서 책을 읽어도 공감을

못할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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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것을 얻는 힘 집중력
세론 Q. 듀몬 외 지음, 권지은 옮김 / 코너스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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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원하는 것을 얻는 힘
집중력

테론 Q. 듀몬트 / 권지은, 윤정희
코너스톤 / 206

 

원제는 The Power of Concentration이다. 정신의 힘을 한군데로 모으는 집중의

놀라운 능력을 말해주는 책이다. 지금까지 이와 비슷한 종류의 책을 몇권 읽은 것

같다. 노먼 V 필의 신념의 마력을 비롯해서 나폴레온 힐이나 <강하게 마음에

그리면 그대로 된다>,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된다>, <마인드 파워>,

최근의 <시크릿>, 국내의 <왓칭> 까지 대개 비슷한 내용이다. 읽었지만 아직

후기를 작성하지 않은 <리얼리티 트랜서핑>을 포함해서 이런 책들을 다 읽고도

아직 성공을 못했으니 아마도 나는 이런 책들을 겉핥기로 읽은게 틀림없다.

 

자기계발서로 분류되는 이 책은 명상서의 흐름과도 비슷한 내면의 마음의 성찰을

유도하는 책이다. 그런데 다른 책들과 구별된다고 생각되는 점은 이 책이 1918년에

 나왔다는 것이다. 여타의 책들과 내용이 중첩되는걸 보면 이 책이 자기계발서의

효시쯤되는 책이 아닌가 여겨진다.

 

유학에서 말하는 안빈낙도의 가르침에 너무 빠져서인지 선비연하는 위선의

찌꺼기가 남아서인지 내가 정의하는 성공이 이들 책에서 말하는 성공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아직도 분명치 않다. 그러나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가 말해주듯

성공의 결과는 부와 여유이고 그것이 바로 하고싶은 것을 할수있게 해주는 힘이라면

성공의 정의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겠다. 어차피 인간세상에서는 결과가 남는

것이고 결과물이 중요한 것이 틀림없다.

 

성공하고 싶다면, 자기가 하고싶은 것을 마음껏 하면서 살고싶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집중의 능력을 배워야한다는 것이다. 이 정신의

능력은 육체를 통제하고 주위 환경에 영향을 미치며 결국에 자신이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게 만든다. 비즈니스나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책에서는 집중을 이렇게 말한다. “집중은 하나의 생각만 선택해서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잘 안된다. 역으로 이게 잘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이다.  책은 이를위해 Lesson 1부터 Lesson 20까지 2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의 제목은 자기통제력을 길러라, 원하는 바를 얻는다,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전능한 힘을 일깨워라, 강하게 바라면 이루어진다, 용기에 집중하라,

이상에 집중하라 등등이고 이를위해 집중력을 높이는 훈련, 기억력을 높이는 훈련,

 의지력을 높이는 훈련이 제시되어 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반드시 해낼수 있다. 이는 영혼의 법칙이다.”
쉽게 들을수 있는 말이다. 집중해서 마음을 하나로 모으면 어떤 존재를 깨닫게

되고 이 존재가 정신에 긷들여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해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책뿐만 아니라 다른 책들에도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부분은 믿고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강하게 믿는다는 것은 굳은 신념과 의지를 말하는 것인데

비즈니스에 국한시켜 본다해도 신념과 의심은 별개다. 오히려 비즈니스에서는

여러 가지 위험요소를 무시하고 독불장군으로 밀고 나갈 때 더 큰 실패가 찾아올수

있다. 그러니 신념과 고집을 구별해야 할 일이다. 어떻게 구별하는가.

이 책에서는 적시해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명상을 강조한다. 깊은 명상은 곧

완전한 집중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때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그것이 신념의 힘이된다. 그렇게 의심없이 신념을 따라 노력하면 -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의지력이 필요하다 - 성공이 주어진다.

 

강한 의지를 갖고있는 사람이 신념을 고수해서 끝내 성공하는 경우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수 있다. 속담에도 ‘뜻있는 곳에 길이 있다’거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이게 문제다. 신념을 고수하고 의심을 버리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 오죽하면 성경에도 예수님이 밀알만큼 신념이 있으면 산을 옯길수

있다고 했을까. 구하라 주어질 것이고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라는 말이 이책과 딱

들어맞는 말이다.  조선소도 짓지 못한 후진국이 해운 강국 그리스에서 선박을

수주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걸 가능케 한 것이 정주영의 의지와

신념이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불신과 의심 때문에 처음부터 사업추진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의심을 없애기 힘들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나는 그렇다.

그동안 너무 의심많은 인생을 살아온 것일까? 사람에 관해서는 쉽게 잘 믿으면서도

 막상 일에 관한 부분은, 잘 될까? 실패하면 어떡하지? 란 의심을 없애지 못했다.

나 자신이 신념과 의지로 인생을 잘 헤쳐왔으면 이럴 때 주저없이,

“여러분 믿으세요. 다 잘 풀립니다.” 외쳤겠지만 그러지 못해 정말 유감이다.

그러나, ‘나는 바담 풍해도 너는 바람 풍해라’는 말이 꼭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나 역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여러분 의지와 신념을 갖고 추진하세요.

믿는만큼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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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생각 - 과학자들이 알고 싶어하는
이고르 보그다노프 & 그리슈카 보그다노프 지음, 허보미 옮김 / 푸르메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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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자들이 알고 싶어하는
신의 생각

 

이고르 보그다노프,그리슈카 보그다노프 / 허보미 옮김
푸르메 / 284

 


1920년 어느날 저녁 아인슈타인은 제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신이 세싱을 어떻게 창조했는지라네. 현상이나 원리 따위는 내 관심사가 아니지. 나는 그저 신의 생각이 알고싶은 거라네.” 이 말은 곧 과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과 토론을 불러일으킨 촉매가 되었다.

 

이 책은 아인슈타인의 이 말에서 시작한다. 책에 등장하는 학자들은 수학이 물리법칙을 관장하고, 물리법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관장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평생 그 근원을 탐구했다. 학자들은 우리가 사는 이 우주가 왜 존재하는지 알고 싶어했다. 지금은 우주팽창이나 빅뱅이론이 어느정도 대중화되었지만 100년전만 해도 우주란 고정된 불변의 존재였다.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 우주라고 믿었다. 그러나 힉스입자의 존재를 발견해낸 실험이 뉴스가 되고  이를 예측한 힉스가 금년의 노벨상 주인공이 된 요즘, 무(無)에서 어느 한순간 우주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 보다는 훨씬 많을 것이다.

이 우주를 만든 이는 누구일까. 세상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이는 철학의 오래된 주제이지만 또한 과학의 탐구대상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제일원인(first cause)이 바로 신(神,god)이지만 이 신은 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아니라고들 말한다. - 하지만 양자가 같으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는가.-  분명히 철학적 주제이고 과학에서도 물리학의 배타적 연구대상일 것 같은 신에 관한 논의가  이 책에서는 수학자들 사이에서 펼쳐진다. 즉 이 책은 수학자들이 보는 세상(우주)의 근원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우주의 탄생에 관해 전제조건을 내세우고 있다. 우선 이 우주는 우연한 탄생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중우주, 평행우주란 매우 비과학적이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물리법칙에 의해 형성된 단일우주만이 존재한다. 이런 전제하에 다음의 과정이 나온다.
“최근까지 과학자의 임무는 주로 물리법칙의 속성을 찾아내거나 물리법칙이 적용된 결과들을 탐구하는데 국한되어왔다.... 과학이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면서 빅뱅의 순간에 물리법칙이 별다른 이유없이 그저 우발적으로 물질의 구조를 만들어냈다는 견해는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비로소 과학자들이 ‘왜’물리법칙이 존재하는지 자문하거나 그런 법칙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는지 정당하게 의문을 품을수 있게 된 것이다.”


책에서는 우주를 수학적 존재라고 한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의하면 우리 우주는 우주의 바깥에 있는 다른 무엇인가에의해 지배되고 있다한다. 그것은 우리 우주와는 속성이 전혀 다른 무엇, 비물질적인 무엇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대체 그게 무엇인가? “우주의 탄생과정은 너무도 질서정연해서 무질서가 아닌 어떤 구성원리가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 왜 무(無)가 아닌 무엇인가가 존재했는지 신은 설명해준다.” 그 무엇은 바로 수학적 질서라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책에는 상대성이론이나 양자론 등 물리학의 용어들이 더러 나오지만 대개는 수학이론이고 물리법칙은 수학의 지배를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수학은 자연의 언어라는 표현도 나온다. 지독히 수학을 싫어했고 숫자라면 고개를 돌리는 나같은 문외한에게는 어려운 용어들이 차고도 넘친다. 그러나 서술 자체는 평이하고 다소간 문학적이다. 형제간인 저자들은 수학자고 물리학자이면서 책과 강연을 통해 과학대중화에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체제는 마치 <얽힘의 시대>를 보는 듯 했다. 23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장이 하나의 에피소드로 시작하고 장마다 또다른 사건과 인물의 전개가 꼬리를 문다. 매끄러운 문체나 썩 잘된 구성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앞으로 여러분은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보게될 것이다’라는 식의 표현이 한두번도 아니고 너무 자주 나온다. 문외한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지 어떤지도 잘 모르겠다. 우주가 수학으로 구성되어있다는 전제부터 상상초월인데 뭘 더 이상 상상할수 있다는 말인가. 존재에 대한 연구의 시작과 끝이 철학도 물리학도 아니고 수학이라니 그점은 사실 상상초월이 맞다. 

 

눈송이는 모두 6각기둥의 형태를 띠고 있다. 5각이나 7각이 아니다. 그 모양 또한 모두 다르다. 모든 꽃잎은 5장 8장 13장이다.- 이를 피보나치수열이라고 한다. 사물의 질서는 어떻게 이리 정확하게 제어되는가. 빅뱅이 일어난 순간은 눈 깜짝할 새 라는 식상한 표현으로는 절대로 설명할수 없다. 10초 사이에 우주상수에 의해 정밀하게 제어되었다고 한다. 책에는 이런식의 수학적 설명이 가득하다. 즉 수는 물질에 선행한다. 물리적 조건에 영향받지 않는 수학이 물리법칙을 형성하고 극도로 정밀한 계획에 따라 현실세계에 크기와 형태와 방향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이책에는 우주의 원리를 알아내려는 숱한 수학자를 하나로 관통하는 한 개의 지표가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라이프니츠가 말한 예정조화설이다. 예정조화란 신의 생각을 나타내며 이는 물질세계를 관장하는 그 너머의 질서가 수학법칙의 형태로 나타낸 것을 말한다. 
 

아주 오래전 존재의 본질을 알아내고자하는 인간의 노력이 철학과 물리학을 탄생시켰다. 20세기들어 철학이 너무 복잡다기하게 갈라졌으나 철학의 본령은 모든 존재하는 것의 본질, 궁극적인 무한을 찾는 것이다. 그것을 신이라 부를수도 있다. 현대철학과는 반대로 20세기 이후의 물리학은 오히려 존재의 근원에 점점 다가가는 듯 보인다. 양자역학은 그 과정의 하나일 것이다. 이 책을 보니 수학자들도 나름의 자신감과 성과를 가지고 우주의 근원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우주는 시공간적으로 무한하지 않고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데 이 질서는 시공을 초월한 우주 밖에서 기원한다는 주장, 현실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실체, 근원적인 토대는 물질이 아니라 정신적인 실체라는 주장, 등은 수학논문이 아니라 철학교과서에 실려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주장이다. 수학이 궁극의 질서를 추구한다는 전혀 몰랐던 사실을 알게되어 즐겁다.


책의 말미에 보면 이 책에서 말하는 신은 종교적인 신과는 다른 의미라는 설명이 있는데 아마도 인간이 추구하는 인격신을 의식한 설명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신과 수학의 신이 다를 바가 뭐 있을까. 어차피 빅뱅이전이나 우주의 끝으로 가려면 137억 광년을 지나야 하는데.


비슷한 시기에 <종교와 과학>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가 출간되었는데 함께 보면 매우흥미로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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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양자역학
Daniel F. Styer 지음, 조길호 옮김 / 북스힐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이상한 나라의 양자역학 The Strange World of Quantum Mechanics
Daniel F.Styer 지음 조길호역
북스힐 / 290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에 가서  그 나라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까?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이책을 읽었다고 표현해야 하나? 아 이건 무슨 양자론적 수수께끼가 아니지만  마치

양자론적  진술이 되고 말았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나는 이 책을 읽은게 아니라 본 것이

맞다. 그런데 양자론에 따르면 정확한 것은 없다. 단지 확률적으로 예측만 할수 있을

뿐이다.


고전물리학에 따라 분석해보면  이 책을 한장한장 넘기면서 눈으로 글과 그림을 확인했기 때문에 읽었다고 할수 있는데 양자론적으로 따지면 읽으면서 마음에 콩밭에 가있거나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 마음이 떠나있었으니 안 읽은 것이다.

 

물리학자가 쓰고 물리학자가 번역한 책이라 자신들은 알기쉽게 설명했다고 하지만 보는

문외한은 여전히 목불식정이다. 역자에 따르면 양자역학은 물리학자들도 어려워한다고

한다. 그래서 양자역학에 관한 교양서가 나왔다해도 그 안에 있는 중심개념을 이해

못할텐데 양자론을 알수 있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을 발견하여

번역했다는 것이다.

 

주된 내용은,  양자역학의 중심사상인  확률론적 세계관과,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양자간섭현상, 그 사상에 대한 철학적 논의 그리고 단연 이 책의 가장 크고 주요한 특징인 연습문제다.  연습문제!  교양서적에 연습문제라니. 그것도 나는 도저히 풀수 없는! 

게다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건 이 책이 청소년도 볼 수 있는 수준으로

저술 혹은 번역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책은 본문이 있고 여러 그림과 도표가 있다. 주요 용어에 대한 각주가 나오고  주요

개념이 있으면 부연설명이 뒤따른다. 15개장과 부록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장의 끝마다

연습문제가 있다. 부록에는 해답이 나온다. 이거 무슨 수능 물리 참고서냐. 심오하고

광대무변한!

양자론이란 무엇인가.  물리학자도 어렵다고 했다. 일반인은 오히려 쉬울수 있다.

단순하게 알면 되니까...


뉴튼으로 대변되는 고전역학은  인과법칙을 따르고 우연성을 배제한다. 그래서

결정론이라 한다.  즉 자동차가 시속 100km의 속력으로 달리고 있다면  현재시점에서

1시간뒤 이 차가 어디에 있을지 정확히 예측할수 있다.  철학적으로는 인간의 인식세계와

별도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實在:objective reality)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양자역학은 고전역학과 달리 결정론이 아니라  확률적 입장을 따진다. 고전역학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한 양자역학적 간섭을 인정한다. 자연현상을 확률론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조건이 일정해도 앞으로의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한계는

거시적 대상에 적용하면 고전역학과 똑같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 즉 미시의 세계에서만

작용한다.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는가? 그렇다는 것이 고전역학, 원인 없는 결과도 있다는 것이

양자역학이다. 더구나 공간상으로 멀리 떨어진 두 계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측정값을

 알면 동시에 다른 계의 측정값도 알수 있다는 것이 양자역학이다. 이를 반대한

아인슈타인은 국소성의 원리를 주장했다.(EPR 패러독스)


양자간섭이란 일반적 상식으로는 말이 안된다. 원자가 지나가는 어떤 통로가 있는데

중간에 이 통로가 둘로 나눠졌다가 끝에가서 다시 하나로 합쳐진다. 한쪽 입구에서

원자를 쏘아보내면 반대쪽 출구로 나오는데 중간에 길이 두갈래니 둘 중 어느 한쪽길을

통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양자간섭현상에 의하면 한 원자는 동시에 두 통로를 지나간다.  

 

양자론은 인간의 이해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이해와 무관하게 존재하며 진행되기 때문이다. 마치 고대에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이해못했던 선조들처럼.

그래서 양자역학을 적용하면 여러 가지 문제점이 해결되기도 한다는것인데 물질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단위는 원자나 핵이 아니라 진동하는 미세한 끈이라는 초끈이론의

탄생에 기여하기도 했다.  보통 일반인들이 아는 유일한 양자역학은 아마도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일 것이다. 책에서는 이를 일러 “전자는 확정된 위치를 가질수 있거나

확정된 속력을 가질수는 있다. 그러나 확정된 두 값을 동시에 가질수는 없다.” 이렇게

표현했다. 바로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양자역학을 기술(記述)할

수는 있다. 해석할 수는 있을까? 물리학자라면 가능하다. 그러나 물리학자도 이해할 수는

없다. 우리는 어떤 현상을 이해하고 기술하고 해석한다. 이 셋은 모두 다른 개념이다.

자연현상이 신의 뜻이라면 인간은 이를 해석할 수는 있다. 양자물리학자는 확률적으로

이를 이해한다. 양자론의 발견에 공헌했으면서도 양자론을 부정한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현대에 와서 양자역학은 여러 분야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단다. 그중 양자컴퓨터나

양자암호는 일반인들도  생소한 이름은 아닐거라고...
양자론은 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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