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 - 20대 이후의 삶을 성장시키는 진짜 공부의 기술
김현정 지음 / 더숲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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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
 20대이후의 삶을 성장시키는 진짜 공부의 기술

김현정 / 더숲 / 219

 

전통시대 사회질서이자 종교로 오랫동안 기능해온 유학에서는 배움의 목적이 무척 명료하게 정의되어 있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이다. 그래서 유학자는 배운 바를 과거시험이나 기타의 방법으로 세간에 알리고 관직에 나아가 지닌 경륜을 펼쳐 경세제민해야 했다. 때문에 관직에 나가지 못한 유자들은 아직도 배움의 초입에 있다는 뜻으로 어릴 유자를 써서 유학幼學으로 자신을 표현했다. 스스로 관직에 나가지 않아도 마찬가지니 위패에는 직함대신 ‘현고學生부군’으로 표기했다. 조선중후기에 혼탁한 관직을 피해 산골에 묻혀살던 선비들은 스스로를 수기만하는 산림처사로 자처했다. 그러니 우리 조상들은 평생을 배움의 과정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처사들의 공부는 우주의 질서에 대한 것이었으니 지금의 순수학문개념이다.

 

이 책의 제목을 보고 그런 인문학적 공부의 일환이려나 생각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는데 앞부분을 조금 읽고나서 학문이 아닌 자기계발서임을 알았다. 그러나 다 읽고나니 옛선비들의 공부와 대동소이하다 해야되나.

 

러닝(Learning)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무엇 때문에 공부를 하는지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총체적인 학습론이다. 크게보면 학교공부까지도 포함하지만 주내용은 사회진출 이후에 맞닥뜨리는 모든 배움행위에 대한 지침이라고 하겠다. 서문에는 책의 대상을 이리 규정한다. “이 책은 보다 가치있고 실용적인 삶을 살고자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다. 근면성실보다 효율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기도 하다.”  조금 거슬리기는 하지만 무턱대고 방향없이 공부하는 행위를 지양하자는 의미일 것이다.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학문의 즐거움>도 떠오르는데 왜 공부가 아닌 러닝이라 제목을 택했는지 모르겠다. 표지의 소개글에는 Now Learning, Not Studying 이라 되어있다. 일반적으로 볼 때 런보다 스터디가 적극적 개념인데 그 양자에 대한 구분이나 개념화는 나타나있지 않다. 다만 러닝의 의미는, ‘현 상태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지식이나 경험을 습득한 후 그를 통해 깨달은 바를 미래의 행동에 적용시키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래서 암기,경험,공부를 포괄하는 큰 개념이라고 한다.

 

러닝은 다시 다음 세가지 개념으로 정리된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인식하는 메타인지, 자신이 하는 행위의 목표를 인식하는 시스템 사고, 과거현재미래의 연결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간의 연속성.


그래서 책 전체를 네가지 파트로 나누었다. 1편은 21세기의 키워드 러닝, 2편은 어떻게 러닝할 것인가, 3편은 무엇이 러닝을 가로막는가, 4편은 나를 만드는 러닝이다.  저자는 개인이나 부모, 기업에 모두 러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무엇을 배워야하는 것인지 총체적으로 판단할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학교나 암기, 평가 만이 학습의 다는 아니라고 한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데 전문가인 메지로우교수의 정의에 의하면  ‘러닝은 예전에 가지고있던 어떤 경험의 해석을 지금 일어나는 경험을 바탕으로 수정 보완하면서 미래의 행동지침으로 사용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즉 일상의 매순간이 학습이 될수도 있다.  이런 경우 과거 실패의 경험이 좋은 약이 되기도 하는데 저자는 그런 실패로부터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학습이 일어난다고 본다. 

 

책에는 개인 뿐 아니라 조직에 관한 학습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현대인의 생활에서 조직없이 이루어지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개인에게 국한될 때는 옛적 선비들의 경우와 비슷하겠지만 조직의 영역으로 확대되면 자기계발과 코칭이 된다. 저자는 코칭이 바로 학습을 도와주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자기계발서나 경영이론서 종류를 적지않게 읽었는데 가장 맘에 와닿지 않는게 외국인이 쓴 책이고 나머지도 크게 감동받을만한 내용은 없었던 듯 하다. 퍼플 카우만 좀 그럴 듯 하고 대개는 비슷한 내용으로 생각된다. 실행력에 집중하라가 좋은 책이다. 이 책은 관점을 달리해서 본 처세서고 경영서로 보인다.  이 정도 책이면 주위에 추천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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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희망, 사회주의
마이클 해링턴 지음, 김경락 옮김, 김민웅 감수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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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래된 희망 사회주의
마이클 해링턴 지음 / 김경락 옮김 / 409

 

뒷표지에 인용된 감수의 글에보면 “정치와 운동의 차원에서 진보가 궤멸하다시피한 한국의 현실에서 마이클 해링턴의 사회주의에 관한 논의는 우리가 어떻게 실패에서 배울 것인가에 눈뜨게 한다.” 라고 써있다.  진보의 눈으로 보면 그렇게 생각될지 몰라도 나처럼 보수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그렇지 않다. 국회에는 진보라는 이름을 단 정당이 들어가 활동하고 있고 민주당과 합쳐진 새정치연합에도 진보를 자처하는 의원들이 많이 소속되어 있다. 비록 현실정치에서는 진보주의가 큰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해도 사회문화 노동계를 보면 우리나라는 상당히 ‘진보’적인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여기서의 진보란 사회주의의 순화된 표현이다.

 

이 책을 보고는 잠시 얼마전에 세상을 떠난 영국의 사회주의 학자 스튜어트 콜의 부음기사를 떠올렸다. 영미권에 많지않은 사회주의 계열의 학자들이라 그만큼 반향이 있는 것이리라. 그런데 대체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책을 읽는 내내 사회주의에 대한 분명한 정의나 해석을 마주칠수 없었다. 저자 스스로도 광범하게 얽히고 변화되어 왔기 때문에 쉽게 정의할 수 없다고 까지 한다. 책에 등장하는 개념으로 보면 마르크스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 뉴레프트, 케인즈주의 복지국가가 모두 사회주의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런데 공산주의와 현실 사회주의 - 소련은 실패라하니 예외로 치더라도 중국과 북한의 경우 - 국가의 체제와 관련해서는 별 언급이 없다.

 

이 책은 주로 사회주의의 본령인 경제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원제는 Socialism : Past and Future 다. 이 제목은 여러 가지를 시사하고 있다 생각된다. 과거와 미래만 있고 현재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고 미래는 현재의 결과인데 저자는 미래를 너무 낙관하고 있는 것일까.

 

책은 모두 9개의 장으로 되어있다.  서두에서 저자는 사회주의에 대한 세가지 가설을 제시하고 다음으로 과거 사회주의가 겪어온 길을 반성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사회주의 여러 유형과 가짜 사회주의, 유토피아주의, 복지국가의 과제, 제3세계의 필요성. 그리고 말미에 사회주의의 구조적 논점을 살핀다. 즉 사회화, 시장이냐 계획이냐, 점진적 발전에 대한 논의 등.

 

사회주의의 정의가 아닌 저자가 생각하는 사회주의의 모습은 분명하고도 간결하다. “자유와 정의正義를 위한 희망” “연대와 자유, 사회정의를 위한 주장”
이것이 목표라면 이런 미래의 실현을 위해 동참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나는 다만 인간을 자본의 유무로 평가하는 방식이 싫을 뿐인데 한국사회의 후진적이고 교조적 사회주의자들이 모두 다 이 책을 꼼꼼히 읽고 무엇 때문에 사회주의운동을 하는건지 목표를 분명하게 자각했으면 좋겠다.

 

저자는 분명히 말한다.  아래로부터 사회를 바꿔나가는 세력이 노동계급은 아니며, 혁명적 연대를 통해 형성되는 동질적이고 단일한 노동계급은 현실세계에선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럼 사회주의는 완고하거나 변형불가능한 것 같지 않은데, 과거의 모습이 여러갈래인 것은 사회주의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저자의 사회주의와 가장 맥락이 같은 것은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인 듯 하다. 특히 저자는 책의 곳곳에 스웨덴식 사회주의에 대한 애정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독점과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변화 수정할수 있다면, 점진적 사회주의와 비슷해지는 것은 아닐까. 예를들어 공유개념의 확대와 사회적 기업, 인간의 얼굴을한 자본주의 등등의 개념이 자본주의의 변화를 가능케할 수는 없는걸까. 


     
사회주의의 출발을 다루면서 여러 유형의 사회주의를 소개하는데 마르크스가 정리한 초기 사회주의 개념은 무정부주의와 사뭇 흡사하다.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카우츠키도 힐퍼딩도 정작 사회주의 국가가 무엇인지 몰랐다고 한다.  이것은 매우 변명스럽게 보인다.  여러 방법으로 시도했지만 정작 성공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 미래가 답이다 라는? 그러나 한편으로 “사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핵심목적을 정의하는데는 실패했지만 인류역사에서 어떤 대중운동보다 더많은 성취를 이뤄냈다”는 모순적 사실도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부인할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과거의 사회주의를 다루면서 국유제 계획경제체제인 독재공산국가는 역사상 어떤 사건보다도 사회주의의 참뜻을 왜곡했다고 한다. 그는 공산주의 사회를 사회주의가 아닌 집산주의라고 이해한다. 소련의 경우다. 그는 이를 가짜 사회주의라고 부른다. 즉 “오늘날 자본주의적인 기술과 규칙을 갖고있지만 단지 마르크스주의자의 지배를 받는 공장사회”로 규정한다. 스탈린은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다는 사회주의 이름하에 거꾸로 유례없을 정도로 농민 노동자를 착취하여 국영산업화를 이루어낸 분명한 독재체제라고 한다.

 

유토피아주의를 다룬 장에서는 케인즈주의를 자본주의를 도입한 사회주의정부라고 말한다. 그러나 유럽 사민주의와 마찬가지로 복지국가를 추구한 이런 움직임은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어 운용됨으로써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복지국가를 자본주의의 한 국면으로 이해한다면 사회주의의 재부상 가능성을 생각할수도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사회민주주의 실패와 생산성하락, 실업의 증가는 레이건과 대처의 집권을 가능케했다. 이를 중앙집권적 권위적 정부로 본다. 이를 통해 개인의 자유와  시장, 부유층을 위한 정책으로 회귀했다는 것이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하나 라는 장에서 그는 현재의 세계를 고려해야한다고 말한다. 즉 상호의존적 세계경제체제의 현실을 고려해서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의 국제화가 미국 또는 다국적기업의 세계지배를 불러왔으니 일국사회주의론 불가능하며 새로운 국제경제기구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역대표체제로 인구와 경제규모에 관계없이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체제가 필요하다고 한다.

 

계획이냐 시장이냐의 이분법에 관해서는 중요한 것은 시장이 존재하는지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시장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에 있다고 주장한다. 무능이나 비효율을 경계하고 시장원리 자체는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민주적이며 효율적인 방법으로 계획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시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말미에서 그는 단일계급에 의한 세계혁명론을 부정한다. 선진 자본주의국가와 복지국가 체제는 많은 새로운 계급을 만들어냈고 또 분화시켰다. 청소년과 여성도 그 일부다. 또 경제결정론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상부구조가 중요해지는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자체의 변화를 말한다. 지난 백년에서 교훈을 얻었느냐 못 얻었느냐가 앞으로의 갈림길이 된다고 말하며 책을 마친다.

 

공감과 아쉬움이 다 남는다. 그가 주장하는 새로운 세계, 연대와 자유와 사회정의가 숨쉬는 세상을 만들기위해 나부터라도 적극 노력할 것이다. 자본이 인간보다 중시되는 자본주의의 폐단을 없애려는 마음은 이념에 구애될수 없다. 인간이 모든 가치에 선행하는 최종 목적임은 누구에게나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다. 마르크스주의를 종교적 신념처럼 여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이 노선수정의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실제로 그는 구좌파와 신좌파 모두에게 공격을 받고있다고 한다.
문화분야에 대한 중시와 상부구조 등 마르크시즘 자체의 변화요구 또한 작은 충격이었다.

 

아쉬움은 경제철학과 정책에만 집중한 나머지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분석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특히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또는 그렇다고 주장하는 중국과 북한에 대한 언급이 너무 적었다. 북한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없다. 정치가 없는 마르크스주의가 존재할수 없다. 진보가 민족문제와 분리될수 없는 한국적 현실에서 북한에 대한 분석이 없는 점은 이책의 약점이기도 하다. 박정희시대 국가주도 집산적 경제계획이 당시 사회주의 국가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의문도 있다. 싱가폴을 사회주의 체제로 본다면 박정희시대도 비슷하지 않을까.

 

결국 우파니 좌파니 하는 구분이 철학과 경제정의 실현의 신념이 아니라 다분히 정치권력을 둘러싼 이익갈등 때문이라는 생각을 떨칠수 없다. 진정 소외된 약자를 위한다면 주사파가 아닌 한국의 PD들은 사회를 이끌어가는 한 축이 될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너무 두서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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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5
박규태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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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

- 종교로 읽는 일본인의 마음

 

박규태 / 책세상 / 201

 

 

일본의 정객들은 늘 한일관계의 어두운 부분을 건드려 보수세력으로부터 인기를 얻으려 했다. 그러나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일본 내 우경화는 이와는 달리 민족주의와 경제침체가 맞물려 근본적인 변화가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주며 지난 반세기 한일관계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특히 아베총리가 역점을 두고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문제는 이제 우리 한국사람들에게 익숙한 사안이 되었다. 일본은 왜 전범자들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집착하는가. 종교학자인 저자는 일본에서 옴진리교사건을 접하고 야스쿠니 신사와 이 사건을 <모노노케 히메> 속의 신앙관을 원용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다.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친절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들이 한일관계에서 표변하는 것을 보면 정치적 문제 외에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그 무엇이 있겠지만 대부분의 한국사람은 그게 뭔지 모르고 또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과거 일본영화시장을 개방할 때 많은 사람들이 문화적 예속화를 걱정하며 반대했지만 일본 영화나 가요는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한류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우리문화 수출은 일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 배우와 가수들은 지금도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고있으며 극성팬들은 우리나라로 건너와 연예인들의 행동 하나에 울고웃는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 역사도 문화도 그들의 속생각도 잘 알지 못한다. 과거사는 비단 과거에 그치지 않고 현재의 정치상황과 맞물리고 영토문제로도 불붙지만 개개인들까지 그러지는 않는다. 우리는 명동에 일본 관광객이 몰리길 기대하고 역으로 일본 지역경제에서도 한국인은 귀한 손님들이다.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하면 오랜 악연을 넘어 진정한 이웃이 될수도 있다. 일본 보다는 오히려 중국이 앞으로 적대적인 사이가 될 가능성이 더 크다. 역사적 지리적 이웃은 때론 갈등으로 때론 선린으로 지내왔는데 중국이건 일본이건 우리는 그들을 잘 모른다. 중국에 대해서는 막연한 호감을 갖는 이들이 많은 듯 한데 일본에 대해서는 그런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역사 문화를 이해하는 한 방편으로 박규태교수의 이 책은 나름 신선했다. 신화와 종교를 통해 일본인의 의식구조를 들여다보려는 시도는 매우 좋았다고 생각된다. 일본의 신도나 천황에 대해 미움보다는 이해가 먼저다.

이 책은 일본 고대신화와 천황, 신도와 종교, 신종교와 옴진리교를 통해 일본인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뿌리깊은 간극을 넘어서고자 하는 이야기다.

 

 

저자는 모노노케 히메 이야기를 들어 책을 끝맺는다. 타자와의 동화가 아닌 타자들의 각자도생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상생이 있음을 말한다. 저자는 일본에 대해 우리가 갖고있는 여러 전제들, 즉 일본신화는 정치신화다, 절대악도 절대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는 원칙보다는 현실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 신불습합의 부정은 파괴적 에너지로 나타났다... 등등을 넘어야할 전제라고 말한다. 굳어진 기정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 극복으로 열린 결론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주요내용

 

 

<고사기>古事記 에는 일본의 건국신인 이자나기와 이자나미가 나온다. 이자나기는 물로 부정을 씻는 의례를 통해 아마테라스(신들의 하늘 다카마 가하라高天原 주재), 쓰쿠요미(밤의 세계 주재), 스사노오(바다의 세계 주재)를 낳는다. 스사노오는 다카마가하라에서 추방되어 이즈모出雲로 가서 산신의 딸과 결혼하고 그 후손인 오오쿠니누시가 일본땅을 통치하는 지배자가 된다. - 다카마가하라의 위치는 설이 분분한데 우리나라 고령에 있었다는 믿기힘든 주장도 있다. - 그러나 신들은 아마테라스의 후손이 통치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결국 통치권 이양을 받아내 아마테라스의 후손인 니니기가 3종의 신기(구슬 거울 칼)를 가지고 히무카日向 다카치호에 강림하여 그 후손이 일본을 통치한다. 곧 천황가의 시조다. 이는 천황가의 신성한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8세기에 쓰여진 건국신화다. “이 일본신화에는 신화일반에서 엿볼수 있는 보편적 테마들을 적지않게 내포하고 있다. 숨은 신, 근친상간, 세계축, 저승세계로의 하강, 금기와 위반, 단성생식, 신의 살해와 곡물의 기원, 카오스의 살해, 입문적 시련, 죽음의 기원, 부활의 모티프 등.”

 

 

아마테라스는 메이지 이후 천황제국가가 형성되면서 여성성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이 일본신화는 우주의 기원이나 인간의 기원을 설명하지 않고 대신 국토의 기원에 대한 서술만 나온다. 또 성적 상징과 몸에 관한 담론이 많다. 저자는 형이상학적 표현 대신 눈에 보이는 결과를 우선한 일본신화에서 상상력의 자유를 본다.

 

 

일본의 독특한 종교인 神道는 문헌상 <일본서기>日本書紀31대 요메이천황의 즉위전기에 처음 나타난다. 즉 일본의 고유종교가 불교를 만나면서 비로소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몇차례 전환기가 있었지만 대체로 천년에 걸친 신도의 체계화를 신불습합 神佛習合이라 부른다. 신도와 불교가 일체화되는 과정이다.

 

 

13,14세기부터 신도 중시관념이 나타나고 임진난이후 주자학이 들어오면서 야마자키 안사이가 스이카신도를 창시하여 주자학, 음양도, 기학을 합해 신도를 정리하고 아마테라스의 도라 규정한다. 즉 그 후손인 천황에 대한 숭배를 강조한 것이다. 17세기들어 일체의 외래사상을 배제한 채 순수한 신도만 내세우는 사조가 나타났는데 이것이 국학이다. 모토오리 노리나가(1730~1801)에 의해 집대성된 국학은 에도후기 근왕지사들에게 강한 영향을 주어 순수하게 일본적인 것을 강조하게 되고 결국 메이지유신이후 신불분리정책으로 귀결되어 폐불훼석운동이 나타났다.

 

 

저자는 신도와 불교라는 이질적 종교가 공존하고 융합해 신불이라는 신관념을 만들어낸 현상을 용광로에 비유한다. 궁극적 절대자나 교조도 경전도 없는 신도의 관용성이 불교를 받아들여 공존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이를 일본인의 관용정신으로 보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때 그것을 이전의 것과 동화시켜 현재화하고 과거부정 대신에 과거에 첨가시켜 축적하는 공존의 논리로 보았는데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런 타자의 포용을 정신적 잡거성이라 비판했다고 한다.

 

 

신도에서는 절대적인 악이나 절대적인 선이 없고 생명력의 고갈을 악으로 본다. 고대 일본어에도 현대적 개념의 도덕적 선악개념이 없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신도의 신 가미는 어디에나 있는 모든 은덕있고 두려운 존재인데 도덕을 초월한다. <고사기>를 정리하여 신도를 집대성한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사상은 일본정신을 대변한다고도 할수 있는데 그는 고사기 해석에서 실증주의적 태도와 배타적 국수주의적 태도를 동시에 나타내 양면적이란 평을 듣는다고 한다. 일본적 사고란 바로 이 양면성을 말한다. 즉 노리나가 선악의 기준은 가미의 마음(신들의 마음), 의 원리(고귀함은 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혈통에 의한 것), 모노노아하레(사물의 마음을 헤아려 아는 정조), 즉 윤리적 판단이 아닌 미를 기준한 선악의 판단이다. 옳고 그름을 분명히 나누지 않는 노리나가의 선악관이 곧 일본의 선악관이라니 다른 나라 사람들이 천황을 신으로 섬기고 카미카제를 찬양하는 이유를 쉽사리 알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노리나가는 이에 더하여 외국풍의 침투 특히 중국적 사상이나 문화를 악으로 규정하고 철저히 비판했다. 그는 국학을 통해 외국풍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여 맹목적으로 모든 중국풍을 거부하여 국수주의의 원조가 되었다.

 

 

선과 악을 뚜렷이 구별되는 객체로 보지않고 상대주의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은 일본 사상사의 한 특징이다.(신의 뜻에 합일하고 자기를 아는 것이 참된 선, 악이란 다만 본질의 결핍일 뿐:니시다 기타로)

 

 

일본의 신사는 어디가나 있고 대부분 가정에도 신단을 모시고 있다. 신사는 일본인의 생활전반에 없어서는 안될 신앙의 대상이자 생활관습이다. 사적인 영역 뿐만아니라 공적으로도 신사는 중요한 의례의 하나다. 일본인은 일생을 그리고 하루하루를 신사와 함께한다. 그런 측면에서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심정적 동의는 정치적 문제라기 보다는 원령을 위로한다는 일본의 전통적 신앙에 가깝다.

 

 

서기 538년 백제에서 전래된 불교는 곧 호국불교로 정착하여 고쿠분지國分寺 계획의 일환으로 나라에 도다이지가 세워지고 전국에 중점 사찰이 건립된다. 헤이안 후기를 지나며 민중불교가 성장하여 가마쿠라 신불교운동이 일어난다. 호넨의 정토종은 칭명염불을 통해 극락왕생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오늘날까지 일본인이 가장 많이 믿는다는 정토진종을 창시한 신란은 호넨의 제자로 박해를 피해 환속하여 속인으로 지냈다. 신란의 사상은 매우 특이하다. 신란은 인간을 어리석은 존재로 보아 신심과 노력, 능력도 없다고 보았다. 오직 반성과 인간의 죄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 있어야 한다 했는데, 인간의 죄란 기독교의 원죄 같은 것이 아니라 범부로서의 인간에 대한 자의식, 번뇌 등에 대한 절망을 말한다. 그래서 구원에는 절대타력(염불에 의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선한 사람도 왕생할 수 있는데 하물며 악한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악인도 왕생하는데 선인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라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자력으로 선을 행함이 아닌 타력에 의지한 칭명염불만이 아미타불의 본뜻이다.” 신란 당대의 악인이란 살기위해 어쩔수 없이 계율을 범하고 죄악을 끊기 어려운자,. 직업 때문에 사회에서 소외된 비천한 피차별민을 가리킨다. 이렇게 악인이라야 구원받는다는 믿음을 악인정기설惡人正機說 이라한다. 신란의 주장은 도덕적 선악의 문제를 넘어 사회경제적 함의를 담고있는 개념인데 여기서 더 나아가 선이든 악이든 모든 것을 아미타불의 서원에 맡기고 다른 선을 일체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천명쯤 죽이면 반드시 정토에 왕생한다는 역설의 성립도 가능하게 된다. 이는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비유였지만 현대 일본사회에서 이 역설은 옴진리교 사건으로 현실화되었다.

 

 

니치렌은 법화경을 절대적으로 신봉하여 가마쿠라 막부에 염불을 금지하고 법화경을 신봉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인해 박해를 받았지만 니치렌 일련종의 특징은 개인구제보다도 법화경을 통한 사회와 국가 개조로 이상국가를 실현한다는 국가주의다. 이는 또 후대에 창가학회와 입정교성회 등의 신종교로 나타났다.

 

 

선종은 에이사이의 임제종, 도겐의 조동종으로 발전했는데 공안 중심의 한국불교와 달리 조동종은 좌선과 수행을 중시한다. 도겐의 저서 <정법안장>正法眼藏은 일본인이 쓴 최고의 철학서라는 평을 받는데 이 안에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는 장이 있다. 이는 구마라집이 번역한 용어인데 여러 현상들의 참된 모습을 말한다. 諸法實相은 대립개념인데 일본에서는 이를 제법은 실상이다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도겐은 더 나아가 실상은 제법이다라고 풀었다. 그러니까 희로애락으로 가득찬 이 세계가 곧 실상(실재)이라는 것이다.

 

 

이런 현실긍정 태도는 중세 일본 불교 곳곳에서 나타나는데 요컨대 일본인에게는 주어진 환경세계와 현실 및 모든 객관적 조건을 그대로 긍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일본불교는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는 태도로 이어지고 따라서 육식,음주,여색에 관한 계율을 일찌감치 파기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대부분의 일본 불교종파는 계율에 구애받지 않는다. 이것이 진정한 불교인지는 논란거리인데 현대 일본불교는 신앙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의례나 전통생활의 일부로 사람들 사이에 남아있다.

 

 

기독교도 한국보다 먼저 일본에 전래되었지만 뿌리내리지 못하고 결혼식을 위한 로맨틱한 종교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 그 이유중 하나는 근세일본의 철저한 기독교탄압이 있었고 국가 신도체제에서 천황의 종교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루야마 마사오가 말했듯 일본의 관용적 사상전통 및 정신적 잡거성을 기독교와 마르크시즘은 전적으로 부인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그리고 그런 신앙의 빈자리는 신종교가 메우고 있다.

 

 

일본에는 여래교, 흑주교, 천리교, 금광교 등 여러 가지 신종교가 나타나 활약하고 있으며 최근 그중 하나인 옴진리교는 여타 신종교와 마찬가지로 선과 악에 대한 구체적 개념이 없는데다가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적극적 폭력까지도 용인하는 비현실적 교리로 인해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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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난 300일의 마음수업
이창재 지음 / 북라이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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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이창재 / 북라이프 / 279

 

책을 읽으면서 눈물이 나는 경우가 간혹 있었는데 슬픈 소설도 아니고 처량한 이야기도 아닌 이 책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구도의 길이란 무엇이고 인간의 길이란 무엇일까.

영화가 먼저고 책이 나중이다. 경상북도 팔공산 자락의 비구니도량 백흥암과 그 안에서 수행에 정진하는 스님들을 담은 영화 <길 위에서>가 개봉되고, 미처 못다한 이야기를 글로 풀어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둘 다 보지 못했는데 비슷한 성격의 영화로 수도원의 일상을 담아낸 프랑스 영화 <위대한 침묵>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감독이자 작가인 이창재는 구도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젊은 시절 한때 출가를 생각한 적도 있다한다. 삶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여러 가지 추구가 이제야 어떤 형태든 결과물을 낳은듯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랬듯 나역시 그런 고민이 잠시 있었다. 감히 속세를 떠나지는 못했지만 스님들의 일상을, 그것도 비구니스님의 처절하고 철저한 수행의 모습을 책을 통해 엿보면서 대리득도 아닌 대리체험을 맛보고 싶었다.

 

 

 

 

 

현재 조계종의 템플스테이는 참된 나를 찾아 떠나는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그만큼 현대인은 자기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지낸다는 뜻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는 어쩌면 진부한 물음이지만 인류의 이지가 발전해온 이래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 삶에 대한 명제다. 종교적, 특히 불교적 질문처럼 생각되지만 사실 철학적 명제이고 근대의 사상적 지평을 연 데카르트는, 생각하기에 존재한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근본적 질문이 불교의 템플스테이에 적용되는 것은 그만큼 현대인들이 자아를 찾기 어려운 생활을 하고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묻는다는 것은 마음이나 몸의 주체를 궁구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생각이나 의지의 주체가 나인듯도 하지만 근간의 연구를 보면 무의식이 실질적 에 근접한 것 같기도 하고 뇌나 몸 자체, 혹은 내몸속의 미생물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불교란 본래 무아(無我), ‘가 없는 종교다. 제행무상 제법무아라 했으니 객체나 실체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종교가 바로 불교다. 구도에 나선 스님들은 이런 진리를 깨닫기위해 일생을 바쳐 탐구한다.

 

 

 

신문에 간혹 나오는 일부 승려들의 이해할수 없는 일탈행동이 불교를 대중과 멀어지게 하고 내게도 크나큰 실망을 주었지만 이 책에 나오는 스님들의 수행생활은 승려의 근본이란게 무엇인지에 대한 확실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첫페이지에 나오는 절의 사진은 문틈으로 비춘 전각의 일부인데 잠시 몸을 드러낸다는 인상을 준다. 안과 밖이 다르지만 문턱을 들어서는 순간 보이고 안다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다음에 나오는 백흥암의 전경은 잘 정돈된 절간의 모습인데 돈이 많은 절인가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읽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사실상 1980년대부터 시작된 백흥암의 살림살이는 당장 내일 먹을 쌀이 없어 걱정했던 과거를 안고있었고 일반 신도를 받지않는 선방의 특성상 지금도 절약과 근검과 운력으로 수행에 매진하는 진짜 절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어찌 무욕 무아의 선원이 되었을까. 신도도 안받고 연등도 안다는 절이라니 대단하고 신선하다. 무소유를 실천하는 진정한 수행도량이다. 일주문을 빛나는 황금으로 장식하고 반짝이는 기와를 얹어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절이 태반이고 교회도 역시 그러한데 이러한 절이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법력이다.

 

 

 

 

 

 

 

 

어째서 스님이 되었을까. 더구나 비구니가.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옛노래를 인용했는데 속세에 두고온 님생각에 여승이 흐느껴운다는 노랫말이다. 과거에는 그런 경우가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런식으로 속업을 잊기위해 스님이 되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스님의 말씀으로는 세파에 찌들어서 오면 초발심을 내기 어렵고 도피성 출가는 스스로 견디기 어려워 짐을 싸고 만다고 한다. 스님들의 출가사유는 다양하지만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번듯한 직장에 잘나가던 여자들이 어느날 갑자기 불현듯 다른 삶, 진리의 욕구에 세속의 인연을 단칼에 끊고 출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해가 되고 그 용기가 대단하다. 그렇게 승려가 되고자 입문했으면 먼저 행자라 불리는 기초 수행과정을 거쳐야 한다. 꽉 짜여진 일과와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행자 수행기간이 1,2년 정도다. 그 과정을 하심(下心)이라 부르는데 마음을 내려놓는다 비운다는 뜻이다. 채우기위해서는 비움이 먼저다. 이 기간을 이기지 못하고 힘들다거나 자존심을 상한다거나 하면 스님이 될수 없다. 고난의 기간이 있어야 스님이 될수 있고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백흥암은 일을 많이 시킨다고 전국에 소문나 아는 사람은 백흥암에 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행자수련기간도 타 사찰보다 길다고한다.

 

 

 

명문대 졸업후 미국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임용 최종면접을 앞두고 이길이 아닌 것 같다며 출가해 백흥암에서 행자생활을 하고 있는 상욱행자는, 맞다 그르다가 아닌 선택의 문제라고 말한다. 진정 원하는 무엇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칠수 있을까? 그러기위해 자신이 가진 전부를 버릴수 있을까?

 

 

 

살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많이 들어본 평범한 어구이건만 이 책에서 보니 정말 가슴에 지긋이 와 닿는 느낌이다.

밥하는 것도 다 수행입니다. 뭘 해야할 때 딴 생각을 하지않고 집중하는 거지요. 밥할때는 밥만 생각하면 돼요. 다른 생각을 하다보면 밥을 태우거나 뜸을 잘 못들이게 돼요. 내가 하고있는 행동, 거기에만 온전히 마음을 쏟으면 됩니다....”이 역시 너무 평범한 말이다. 누구나 다 아는 말인데 실제로 행하기는 어려운 그것, 그것이 도인가...

백흥암의 해우소 청소는 법랍이 높은 스님이 맡는다. 군대로 치면 화장실 청소나 보일러 담당을 말년 병장이 담당하는 격이다. 왜 그런가. 아직 세상과 인연의 고리가 남은 행자나 초보스님이 맡으면 더러운 곳이라는 선입견 즉 분별심이 생긴다는 것이고 또 사용자 입장에서도 큰 스님이 청소하는 곳이므로 깨끗이 쓰고자하는 마음가짐을 가질수 있다는 것이다. 사찰의 오랜 지혜중 하나다.

 

 

 

속세의 친구사이에 해당하는, 도반이라 불리는 스님들과의 우정과 교류에 대한 글도 있고 한번 들어가면 쉽게 나올수 없는 무문관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고시원같은 세평 쪽방에서 하루 한끼밥만 먹고 종일토록 참선수행만 하는 곳. 의지만 신심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생활이다. 300일에 걸쳐 스님들을 따라가며 촬영하고 그 이야기를 남긴 <길 위에서>는 단지 보기만 하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인간과 진리에 관한 한편의 체험 보고서다.

 

 

 

“...내가 발을 딛고 서있는 이곳이 바로 수행을 위한 최적의 공간이니 여기서 목적지를 향해 꾸준히 가면 된다... 결국 지금 아닌 언젠가여기가 아닌 어딘가는 없다는 말이다...‘이곳 이 자리 여기서 잘하는 게 제일 중요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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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의 역사 1 - 풍속과 사회
에두아르트 푹스 지음, 이기웅 외 옮김 / 까치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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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의 역사1 풍속과 사회 (개역판)

에두아르드 푹스 / 이기웅 박종만 옮김

까치 / 404

 

오래전에 누군가 내게 이 풍속의 역사 시리즈를 선물했다.(4)

그때는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고 그저 한 유행인 미시사의 하나쯤인 줄로 알았다.

군데군데 삽화가 색정적이어서 마치 선데이서울의 독일판인가 싶기도 했는데

아마도 그림에만 집중하느라 내용을 보지 못했나보다. 시간이 흘러 내앞에 또다시 이 책이 나타났다. 4권중의 제 1권이긴 하지만 반가웠다.

그리고 읽었다. 이런 책인줄 몰랐다.

 

한마디로 이 책을 정리하자면 사회주의 역사가의 눈으로본 성과 성풍속의 사회사다.

저자인 에두아르드 푹스는 캐리커쳐전문가로 유명하다고 한다. 역자인 이기웅은

열화당의 대표인 그 이기웅이다. 맨뒤에 역자후기가 있는데 번역서의 저본으로

야스다 도쿠타로의 일본번역서를 이용했음을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과거에는

대개 서양서를 번역하면서 일본역서를 원전삼아 번역하는 일이 많았다.

어떤 이는 서양원전과 참고본인 일어판을 함께 소개하기도 했지만 많은 번역자들이 일본어판을 원전삼아 번역했다. 그 이유는 원서번역에 필요한 실력이 부족해서

일수도 있고 번잡해서 일수도 있지만 일본번역서가 원전에 가깝게 훌륭한 번역을

해냈고 일본어가 번역하기에 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처럼 솔직하게 일본어판을 대본삼았노라 고백하기란 쉽지않은 일이다.

일어번역자인 야스다 도쿠타로는 이 책의 번역에 35년이 걸렸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열정과 집념이다. 한문 또는 동양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거의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한자자전에 <대한화사전>이라는게 있는데 당시에 우리는 그걸 제교철차라고 불렀다. 모로하시 데쓰지라는 이 사전편찬자의 열정은 과거에 한문공부를

조금이라도 한 사람이면 다 아는 얘기다. 그것 다음에 <사해> <사원>

이야기했다.

이 책의 일본역자도 그런 정열을 불태워 번역을 해냈고 그책을 번역한 책이 까치

풍속의 역사라면 엉터리번역은 아니란 뜻이다.

 

저자는 성풍속이야말로 인간의 역사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라고 한다.

왜 아니겠는가. 성과 사랑은 본능중에서고 가장 강력한 본능이고 쾌락중에서

가장 큰 쾌락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성생활이 시대의 특징을 가장 잘 반영할 뿐만 아니라 시대,민족,계급의 본질이 그속에 가장 잘 나타난다고 한다.   성행동은

도덕관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는데 시대에 따라 변하고 도덕관 역시 항상

새롭게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책을 통해 저자가 밝히려는 것은 과거 모습의 정확한 재구성, 그리고 그안에

담긴 도덕과 성의 계급적 본질이다. 그러면서 이론적 분석이 목표가 아니라

과거사실을 생생하게 밝히는 것이 목표라고 밝힌다. 그래서 이 1권은 네가지의

주제로 분류되었는데

모럴의 기원과 본질, 르네상스의 본질, 색의 시대(절대주의시대), 부르주아의

시대 라는 목차로 구성되었다. 원서는 세권인데 역자들이 각권의 서두에있는

이론적 분석을 모아 따로 한권으로 만들어 그것을 1권으로 편성하여 전체 네권의

구성을 만들었다.

 

저자가 밝히는 성과 도덕의 관계나 성행동의 여러 가지 변화 등은 모두 개인적인

사랑 따위가 아니고 경제적 조건, 경제적 이익에서 나온 결과에 불과하다.

일부일처제는 사유재산제도에서 나온 남자의 지배 여자의 억압의 결과이며

부자연스러운 질서다. 따라서 자연스러운 질서의 복수가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사회구조로서의 간통과 매춘이다. 여자의 복장이나 혼외관계, 매춘과 간통,

연애와 방탕 등 모든 성행동의 기저에는 각 시대를 관통하는 경제조건이

강고하게 존재하고 있다.

 

저자가 중세이전을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는데 이 책은 르네상스 이후를 그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봉건귀족과 신흥부르주아 자본가의 출현, 절대주의 왕정과 부르주아의 관계, 자본주의 성립이후 현대의 문제까지(저자는 1900년대초에 저작을 완성했다) 모든 도덕과 성은 경제문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사회주의자 답게 저자는 이를 토대라고 부른다. 토대는 관념을 지배하므로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연애 감정 또한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는 난잡한 교제가 용인되고

어느 시대는 여자의 다리를 언급하지도 못하는 도덕율의 원천 또한 경제적 토대에서 기인한다.

 

요컨대 경제조직이 변화해감에 따라서 계급이익과 사회적 요구와 더불어

계급구성도 변해가기 때문에 각 시대는 다른 도덕율을 받아들이고 또 다른 도덕의 표준을 요구한다. 바꾸어말하면 사회의 변화는 성모럴의 규칙을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내가 어릴때는 다큰 남녀가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기도 힘들었는데 지금은 길거리에서 스스럼 없이 키스하는 젊은 연인들을 보기 어렵지 않다. 이런 도덕관념의 변화가 저절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경제조건이 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절대주의 시대는 왕권이 강화되면서 사회전반적으로 위엄과 화려함이 강조되고

그에따라 위선과 잘난척이 판쳤다. 여자숭배가 유행하여 모든 여자들은 남자에게

쾌락을 주기위해 노력했고 향락이 인생의 가장 큰 목표가 되었다.

 

부르주아 자본주의 시대는 겉으로는 풍기를 단속하고 방정한 품행을 강요했지만

남성우위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았고 곧 상류층이나 하류층을 가리지 않고 돈으로 여자를 사는, 즉 여성의 상품화가 시작되었다.

 

보는이의 관점에 따라 역사는 다르게 서술되겠지만 반대로 참신한 면이 부각될

수도 있다. 저자의 주장대로 여자는 인류역사에서 항상 약자고 남자의 부속물로

취급되었으므로 성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의 장점이라면

많은 양의 자료를 가지고 근대이후 성의 역사를 사실대로 표현하다보니

상류귀족층의 성행태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성행동을 많이 다루어 결국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가 민중이라는 점을 나름대로 설명했다는 것이리라.

 

나머지 2,3,4권은 각 시대별 구체적인 현실을 다룬 내용이라 속물적인 흥미로움도 있겠지만 저자가 말하는 본질이 경제적 토대와 이해관계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왜 어째서 그랬는가를 충분히 알아가며 읽을수 있을 듯 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성풍속의 역사가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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