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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난 300일의 마음수업
이창재 지음 / 북라이프 / 2013년 12월
평점 :
길 위에서
이창재 / 북라이프 / 279
책을 읽으면서 눈물이 나는 경우가 간혹 있었는데 슬픈 소설도 아니고 처량한 이야기도 아닌 이 책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구도의 길이란 무엇이고 인간의 길이란 무엇일까.
영화가 먼저고 책이 나중이다. 경상북도 팔공산 자락의 비구니도량 백흥암과 그 안에서 수행에 정진하는 스님들을 담은 영화 <길 위에서>가 개봉되고, 미처 못다한 이야기를 글로 풀어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둘 다 보지 못했는데 비슷한 성격의 영화로 수도원의 일상을 담아낸 프랑스 영화 <위대한 침묵>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감독이자 작가인 이창재는 구도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젊은 시절 한때 출가를 생각한 적도 있다한다. 삶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여러 가지 추구가 이제야 어떤 형태든 결과물을 낳은듯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랬듯 나역시 그런 고민이 잠시 있었다. 감히 속세를 떠나지는 못했지만 스님들의 일상을, 그것도 비구니스님의 처절하고 철저한 수행의 모습을 책을 통해 엿보면서 대리득도 아닌 대리체험을 맛보고 싶었다.
현재 조계종의 템플스테이는 ‘참된 나를 찾아 떠나는’ 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그만큼 현대인은 자기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지낸다는 뜻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는 어쩌면 진부한 물음이지만 인류의 이지가 발전해온 이래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 삶에 대한 명제다. 종교적, 특히 불교적 질문처럼 생각되지만 사실 철학적 명제이고 근대의 사상적 지평을 연 데카르트는, 생각하기에 존재한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근본적 질문이 불교의 템플스테이에 적용되는 것은 그만큼 현대인들이 자아를 찾기 어려운 생활을 하고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묻는다는 것은 마음이나 몸의 주체를 궁구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생각이나 의지의 주체가 나인듯도 하지만 근간의 연구를 보면 무의식이 실질적 ‘나’에 근접한 것 같기도 하고 뇌나 몸 자체, 혹은 내몸속의 미생물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불교란 본래 무아(無我), ‘내’가 없는 종교다. 제행무상 제법무아라 했으니 객체나 실체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종교가 바로 불교다. 구도에 나선 스님들은 이런 진리를 깨닫기위해 일생을 바쳐 탐구한다.
신문에 간혹 나오는 일부 승려들의 이해할수 없는 일탈행동이 불교를 대중과 멀어지게 하고 내게도 크나큰 실망을 주었지만 이 책에 나오는 스님들의 수행생활은 승려의 근본이란게 무엇인지에 대한 확실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첫페이지에 나오는 절의 사진은 문틈으로 비춘 전각의 일부인데 잠시 몸을 드러낸다는 인상을 준다. 안과 밖이 다르지만 문턱을 들어서는 순간 보이고 안다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다음에 나오는 백흥암의 전경은 잘 정돈된 절간의 모습인데 돈이 많은 절인가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읽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사실상 1980년대부터 시작된 백흥암의 살림살이는 당장 내일 먹을 쌀이 없어 걱정했던 과거를 안고있었고 일반 신도를 받지않는 선방의 특성상 지금도 절약과 근검과 운력으로 수행에 매진하는 진짜 절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어찌 무욕 무아의 선원이 되었을까. 신도도 안받고 연등도 안다는 절이라니 대단하고 신선하다. 무소유를 실천하는 진정한 수행도량이다. 일주문을 빛나는 황금으로 장식하고 반짝이는 기와를 얹어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절이 태반이고 교회도 역시 그러한데 이러한 절이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법력이다.
어째서 스님이 되었을까. 더구나 비구니가.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옛노래를 인용했는데 속세에 두고온 님생각에 여승이 흐느껴운다는 노랫말이다. 과거에는 그런 경우가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런식으로 속업을 잊기위해 스님이 되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스님의 말씀으로는 세파에 찌들어서 오면 초발심을 내기 어렵고 도피성 출가는 스스로 견디기 어려워 짐을 싸고 만다고 한다. 스님들의 출가사유는 다양하지만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번듯한 직장에 잘나가던 여자들이 어느날 갑자기 불현듯 다른 삶, 진리의 욕구에 세속의 인연을 단칼에 끊고 출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해가 되고 그 용기가 대단하다. 그렇게 승려가 되고자 입문했으면 먼저 행자라 불리는 기초 수행과정을 거쳐야 한다. 꽉 짜여진 일과와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행자 수행기간이 1,2년 정도다. 그 과정을 하심(下心)이라 부르는데 마음을 내려놓는다 비운다는 뜻이다. 채우기위해서는 비움이 먼저다. 이 기간을 이기지 못하고 힘들다거나 자존심을 상한다거나 하면 스님이 될수 없다. 고난의 기간이 있어야 스님이 될수 있고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백흥암은 일을 많이 시킨다고 전국에 소문나 아는 사람은 백흥암에 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행자수련기간도 타 사찰보다 길다고한다.
명문대 졸업후 미국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임용 최종면접을 앞두고 이길이 아닌 것 같다며 출가해 백흥암에서 행자생활을 하고 있는 상욱행자는, 맞다 그르다가 아닌 선택의 문제라고 말한다. 진정 원하는 무엇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칠수 있을까? 그러기위해 자신이 가진 전부를 버릴수 있을까?
“살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많이 들어본 평범한 어구이건만 이 책에서 보니 정말 가슴에 지긋이 와 닿는 느낌이다.
“밥하는 것도 다 수행입니다. 뭘 해야할 때 딴 생각을 하지않고 집중하는 거지요. 밥할때는 밥만 생각하면 돼요. 다른 생각을 하다보면 밥을 태우거나 뜸을 잘 못들이게 돼요. 내가 하고있는 행동, 거기에만 온전히 마음을 쏟으면 됩니다....”이 역시 너무 평범한 말이다. 누구나 다 아는 말인데 실제로 행하기는 어려운 그것, 그것이 도인가...
백흥암의 해우소 청소는 법랍이 높은 스님이 맡는다. 군대로 치면 화장실 청소나 보일러 담당을 말년 병장이 담당하는 격이다. 왜 그런가. 아직 세상과 인연의 고리가 남은 행자나 초보스님이 맡으면 더러운 곳이라는 선입견 즉 분별심이 생긴다는 것이고 또 사용자 입장에서도 큰 스님이 청소하는 곳이므로 깨끗이 쓰고자하는 마음가짐을 가질수 있다는 것이다. 사찰의 오랜 지혜중 하나다.
속세의 친구사이에 해당하는, 도반이라 불리는 스님들과의 우정과 교류에 대한 글도 있고 한번 들어가면 쉽게 나올수 없는 무문관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고시원같은 세평 쪽방에서 하루 한끼밥만 먹고 종일토록 참선수행만 하는 곳. 의지만 신심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생활이다. 약 300일에 걸쳐 스님들을 따라가며 촬영하고 그 이야기를 남긴 <길 위에서>는 단지 보기만 하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인간과 진리에 관한 한편의 체험 보고서다.
“...내가 발을 딛고 서있는 이곳이 바로 수행을 위한 최적의 공간이니 여기서 목적지를 향해 꾸준히 가면 된다... 결국 ‘지금 아닌 언젠가’나 ‘여기가 아닌 어딘가’는 없다는 말이다...‘이곳 이 자리 여기서 잘하는 게 제일 중요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