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다독가에 가깝던 시절이 있었다. 다독가란 이런 사람이다 하는 정의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며 내 자신이 그 기준안에 부합하는지는 확신할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독가에 가깝다고 에측할 만한 시절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런 시절'일 뿐 절대 지금은 아니었다. 허무하고 조금 부끄러웠다. 책을 읽지 않아서 부끄럽다는 것이 아니라 책과 영화 정도는 평생을 걸쳐 좋아하게 될 거라는 믿음이 너무나 쉽게 허물어진 탓이었다. 4월에 쓴 포스트에서 말했듯이 한 생을 걸쳐 무언가에 열정을 가지는 삶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에 대한 생각도 해본다. 늘 그렇지만, 나는 늘 너무 내 자신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면이 있었다. 기록을 뒤져보니 2015년 후반부터 시작되어 2016년과 작년은 진정 암흑기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단지 권수의 문제가 아니라 영향력과 기억력에서도 형편이 없던 시기였다. 다행히도 영화만큼은 꾸준히 보았으나 그건 위로라고 할 게 못되었다. (주관적인 기준으로는)영화는 책보다는 수동적인 매체이며 영화를 적게 보는 건 책을 적게 보는 것보다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이 훨씬 적기 때문이었다. 즉, 나는 책을 읽지 않음으로써 잃어버린 것이 많다는 뜻이었다.


집중력과 인내심, 끈기가 사라졌다(아니, 사라졌다니? 내 안에 그것들이 있기는 했다는 게 우선 놀랍고 그 '있기는 했다는' 것들이 탈탈 털어 사라진 기분이 들어 암담하다). 친구의 생일을 잊어버리거나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고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만졌으며 자고 일어나도 피곤한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글을 쓰는 행위가 번거롭거나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가 많았고 쓰는 문장들은 하나같이 거지같았다. 단어가 생각이 안 나거나 표현력이 더 떨어졌으며 심지어 이전보다 더 관조적이고 회의적이었으며 그러면서도 무기력감이 심했다. (모두 다 이 영향은 아니겠지만서도)전형적인 디지털 중독이었다. 이 말을 입에 담는게, 인정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마찬가지로 부끄러웠기 때문이다(이건 그냥 순도 백퍼센트의 부끄러움이었다). 그나마, 정말 그나마 스마트폰을 들기 전에 읽어둔 책마저 없었다면 지금보다 더더 상황은 나빴을 거다. 

 

우리의 지능지수는 18세에서 25세 사이에 가장 높다뇌는 25세에 최대 크기가 되고이후에는 쪼그라들기 시작하여 무게가 줄고 빈 공간이 액체로 채워진다.

 

영국의 의학자 윌리엄 오슬러 경은 말했다. ‘세상의 모든 쓸모 있고감동적이고고무적인 업적은 25세 사이에서 40세 사이의 사람들이 이룬 것이다.’ 이 말은 사실이다창조성은 30대에 절정에 달한 뒤 급격히 쇠퇴한다사람들이 창조적인 성취를 해내는 것은 대부분 30대 때이다드가는 말했다. ‘25세에는 누구나 재능이 있다. 50세에도 재능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위안이 필요하다면 지식적인 면을 생각하자어휘력은 20세일 때보다 45세일 때 3배 풍성하다. 60세의 뇌는 20세 때보다 정보를 4배 더 많이 간직하고 있다.   - 데이비드 쉴즈,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우선 기억은 결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라기억은 나이가 든다고 굳어지는 것이 아니다나이가 들어서도 경험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상기한다면 그 기억들은 강화된다이때 일기와 시간이 아주 유용하다노화되는 두뇌는 기억의 보조도구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나이 든 사람들은 단어를 잘 외우지 못한다그리고 어제 혹은 일주일 전의 일을 즉석에서 기억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느낀다그에 반해 재인식을 하는 힘은 젊은 사람들만큼이나 뛰어나다어떤 단어를 기억에서 자유자재로 불러올 수는 없을지라도 단어를 본 뒤 그와 관련된 일은 금방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대니얼 삭터는 체험한 것들을 메모해두거나 사진으로 찍어두라고 권한다원천기억을 상기시키는 그런 수단들을 통해 지나간 시간을 되살리는 일이 훨씬 쉬워진다는 것이다다른 한편 회색세포의 능력을 유지하기 위한 훈련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두뇌가 얼마나 빨리 노화하는지는 두뇌를 얼마나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다훈련은 뉴런의 기능을 개선해 나이가 들어서까지 높은 사유능력을 갖게 한다이는 최근의 방대한 연구들을 통해 입증한 사실이다가령 규칙적으로 강의를 듣는 노인은 별로 머리를 쓰지 않는 동년배의 노인보다 기억력이 월등히 좋다낱말퍼즐만 맞춰도 효과가 있다게다가 정신 활동은 알츠하이머병도 예방해준다자극은 두뇌의 노화를 늦춰어준다두뇌를 쓰지 않으면 40세부터 그 능력이 감퇴하기 시작한다반면 일생 동안 두뇌를 사용한 사람은 나이 들어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시간이 질주한다는 느낌이 덜할 것이다그들에게는 중년의 세월이 더 느리게 간다  - 슈테판 클라인, 안녕하세요 시간입니다


가뜩이나 완벽한 인도어indoor인간인데 이러다 이도저도 아니게 되는 건 아닐까. 이미 내 뇌는 줄어들기 시작했고 가장 창조적인 시기마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지나갈지도. 두려움이 가까스로 게으름과 권태를 밀어내기 시작했기에 힘을 돋우며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다시 시작한다. 어릴 적 추리소설로 글을 읽는 재미를 배운 것처럼, 일단은 가볍고 '재밌는' 글부터 읽고 있고 독서 자극하는데는 다독가들의 기록만한 게 없는지라 책에 대한 책도 읽고 있다. 닉 혼비의 글을 읽으니 자연스럽게 좀 더 많은 책을 읽고 싶고 읽어야겠다는 의욕이 생긴다. 천천히, 다시, 책 읽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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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8 0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에게는 죽음과 신에 관한 야바위나 천국이라는 낡은 공상이 통하지 않았다그저 우리 몸만 있을 뿐이었다태어나서 우리에 앞서 살다 죽어간 몸들이 결정한 조건에 따라 살고 죽는 몸그가 그 자신을 위한 철학적 틈새를 찾아냈다고 말할 수 있다면그것이 바로 틈새였다그는 일찌감치 직관적으로 그 철학과 마주쳤으며그것이 아무리 초보적이라 해도 그에게는 그게 전부였다만에 하나 자서전을 쓰는 일이 생긴다면그 제목은 남성 육체의 삶과 죽음이라고 부를 터였다그러나 그는 퇴직 후에 작가가 아니라 화가가 되려고 노력했고그래서 일련의 추상화에 그 제목을 붙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저지 턴파이크 바로 옆에 있는 황폐한 공동묘지의 어머니 곁에 묻히던 날에는 그가 무엇을 믿느냐 또는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다더 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싶었다그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덮고아버지가 생명을 빨아들이는 통로를 차단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나는 태어날 때부터 저 얼굴을 보아왔어내 아버지의 얼굴을 흙 속에 묻지마 그러나 그들은그 튼튼한 청년들은 리듬을 타고 있었다그들은 멈출 수도 없고멈추려 하지도 않았다설사 그가 묘혈 안에 몸을 던져 매장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해도 소용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1센티미터씩 사라지는 것을 다 지켜보았다맨 끝까지 그 과정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두 번째 죽음 같았다그렇다고 첫 번째 죽음보다 덜 끔찍하지도 않은 죽음그는 갑자기 밀려오는 감정에 실려 자신의 삶의 켜들을 뚫고 아래로저 아래로 내려갔다.                    - 필립 로스, 에브리맨



일 년의 나머지 절반이 머무는 6월이다. 그것도 벌써 유월의 사흘이 지나갔다. 지난 달은 행사도 많고 연휴도 있는 날이라 그런지 다른 때보다도 훨씬 더 쏜살같이 지나간 기분이다. 필립 로스의 타계 소식을 들은 지 열 흘도 훌쩍 지났지만 미처 인사를 하지 못했다. 그의 책은 대여섯 권 읽었고 대부분은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새 책이 나오길 기대하고 기다리곤 했는데. 더 이상은 '새 책'으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헛헛하다. 그 동안 고마웠어요, 필립 로스. 보내는 구절은 그의 소설 중 단연코 제일 좋아하는, 그리고 모든 소설을 통틀어 아마도 손꼽아 좋아하는 책인 『에브리맨』에서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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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늙은 여자 - 알래스카 인디언이 들려주는 생존에 대한 이야기
벨마 월리스 지음, 짐 그랜트 그림, 김남주 옮김 / 이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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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나는 왜 네가 아니고 너인가의 영향 때문일까. 아니면 자라면서 들은, 읽은, 때로는 출처가 불분명한 인디언들의 일화나 명언 때문인가. 언제부터인가 인디언(정확히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지혜와 현명함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두 늙은 여자의 책 소개를 읽고서도 여타 다른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의 내용을 짐작했다. 과묵하고 인내심 있고 끈기 있는 인디언들이 들려주는 뭉클하면서도 교훈적인 아포리즘 말이다. 보라, 책 띠지에도 쓰여 있지 않은가. 생존에 관한, 성장 소설이라고. 하지만 막상 책장을 펴서 접하게 되는 내용은 예상과는 달랐다.

 

사와 칙디야크는 여든 개의, 일흔 다섯 해의 여름과 겨울을 보낸 노인들이다. 그러니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그들은 부족 전체에 큰 도움은 되지 못한다. 대개는 젊은 여자들이 그들을 보살피는데 그들은 그것을 당연히 여겼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젊은 시절에는 다른 노인들을 보살폈고, 그들에게 공동부양은 당연한 의무이나 책임이었느니 말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 자신의 몫은 해내고 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기아와 추위와 이동은 사람들로부터 온정을 앗아가는 대신 실리적인 계산을 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부족 전체의 손해일 뿐 결코 인력이나 노동력이 될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기에 사와 칙디야크는 결국 버려지게 되었다. 그나마 그들이 갖고 있는 것들을 빼앗지 않는 것, 그들을 직접 죽이지 않는 것(과연 이쪽이 더 잔인한 선택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이 부족과 족장이 베풀 수 있는 남은 정이었다. 하지만 이 결정은 당연히도 사와 칙디야크에겐 큰 슬픔과 두려움, 분노와 배신감을 느끼게 한다. 스스로 거동도 쉽지 않은 이들을 놓고 떠나는 것은 말 그대로 사형선고나 다름없지 않은가. 게다가 가족이 없는 사와 다르게 칙디야크에겐 딸과 손자까지 있었으나 그들 역시 집단을 등지게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녀의 곁에 서지 못한다.

 

이제 부족은 떠났고 그들은 죽음을 맞이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 절망의 순간, 사와 칙디야크에겐 무언가, 거기에 있는지도 몰랐던 무언가가 피어올랐다. 어쩌면 복수심이나 반골기질, 아니면 차라리 치기에 가까운 오기였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생존을 향한 투지가 사와 칙디야크에게 생겼다는 것이다. 이전과는 다르게, 정말로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를 의지가 솟아났다. 게다가 그들은 둘이었다. 비록 상대도 나만큼이나 지치고 낡고 늙은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혼자인 것 보다야 나을 터였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뭐라도 해보고 죽자고.”

 

그들은 남은 짐을 꾸려 여정을 떠난다. 자신의 부족과 마주치지 않도록, 또 다른 포식자 즉 다른 생존자들과 싸우지 않아도 되는 곳을 찾아. 그 곳은 어릴 때 그들(정확히는 그들의 부족)이 살던 곳이었다. 자신들처럼 늙은 이가 그 곳을 기억해내지 않는다면, 그 곳이 그들 기억에서와 일치하다면, 고향은 안식이 되어줄 것이다. 그들은 그 일념으로 얼어붙은 강 위를, 마찬가지로 얼어붙은 무릎과 다리를 이용해 살을 에는 추위를 뚫고 이동하고 또 이동한다.

 

칙디야크는 몸속 깊은 곳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달빛이 사의 미소 짓는 얼굴을 비추었다. 사는 자부심에 찬 동시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에 수없이 했던 일이지만, 내가 또다시 해낼 줄은 몰랐어.”

 

칙디야크는 오랫동안 친구를 물끄러미 응시하고는 그녀의 말이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살아남으려 애쓰지 않는다면, 죽음은 반드시 닥쳐올 터였다. 그녀는 자신들 두 사람이 과연 이 엄혹한 계절을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강한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친구의 목소리 속에 깃든 열정이 그녀의 기분을 좀 나아지게 해주었다.(중략) 그러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어떤 힘이 자신을 채우는 것을 느끼며 사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두 여인은 너무 늦지 않게 스스로를 추슬러 어린 시절부터 배워온 지식과 기술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사는 오랫동안 사냥을 한 적이 없었고 오랜 시간 더는 사냥을 할 수 없다고 여겨왔기에 먹잇감을 발견하고 집중을 해 정확한 위치를 겨냥해 손도끼를 던져 해낸 첫 번째 성공은 의미가 깊었다. 비록 작은 다람쥐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이 일로 인해 자신들이 어쩌면더 큰 사냥을 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생존을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노마지도老馬知途라고 하던가. 마침내 터를 잡고 물고기를 잡고 작은 동물들을 사냥하고 땔감을 주워 불을 피우면서 그녀들은 오래 전 가졌던, 이제는 잊혔다고 생각했던 지식과 기술을 발휘한다. 낮에는 사냥을 하거나 덫을 설치하는데 전념하고 밤에는 옷가지나 담요를 만들었다. 행동에 패턴이 생기고 몇 가지 요령과 기술이 붙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오지 않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이동을 하고 사냥을 하고 심지어 식량을 비축하기까지 한다. 가끔씩 치받는 두려움과 설움을 묻어두고 내일을 위해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최대한 깊게 잠을 자던 그들은 점차 서로를 좀 더 깊이 알아가며 지난 날을 떠올린다. 

 

그들의 부족은 이런 한가한 대화에 귀중한 시간을 쓰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교제를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정보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두 여인은 긴 저녁나절 동안 예외를 만들었다. 그들은 이야기를 했다. 그들이 상대의 힘겨운 과거에 대해 알게 되자 서로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 커져갔다.


사실 사와 칙디야크 모두 같이 지내기에 썩 좋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둘은 불평이 많았고 쓸모없는 잡담을 하길 좋아하고 자신들의 나약함을 과시하거나 동정받으려는 태도를 취하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지팡이는 커녕 사냥을 하고 생산적인 행위를 하고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하고 건전하고 영민하다. 게다가 서로를 잘 아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저처럼 늙고 보잘 것 없고 성가신 상대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꽤 오랜 시절을 함께 했음에도 말이다. 사와 칙디야크는 기본적으로 각자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스스로 다스려야 한다고 믿었지만 이제는 종종 대화를 나눴다. 서로의 삶과 그들이 어릴 적 보고 듣고 느꼈던 것, 한 때는 가족을 이루고 살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 등. 대화를 나눌수록 사와 칙디야크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서로를 존중하면서 연민하게 되고 지난 시절 자신들이 얼마나 짜증나는 사람들이었는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두 늙은 여자』의 재밌는 점은 이 부분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은 '인디언의 지혜'라는 교훈으로 묶이는 결코 훈훈한 글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와 칙디야크는 버려졌고 부족들은 그들을 버렸고 심지어 버림받은 이들의 태도 역시 끈기 있고 현명한 사람들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그렇기에 더 흥미롭고 설득력이 있다. '인디언'이란 이름 하에 무작정 현자가 들려주는 훈화로 묶이지는 않되 그녀들이 절망하고 희망을 갖고 변화하는 과정을 보면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지점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과장해서 표현하면 반면교사를 통한 성장 이야기라고 할까. 사와 칙디야크는 힘이 없고 나약하고 의지 또한 없었지만 오히려 버려졌기에 자신들의 삶을 바꿀 기회를 얻었다. 스스로가 강하고 현명하고 부지런하며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는 기세를 몰아 큰사슴을 쫓아갔다. 그녀는 젊은 때처럼 힘차게 달릴 수 없었다. 달리기라기보다는 절뚝거리는 경보에 가깝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그 커다란 짐승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중략) 그녀는 자신이 그 큰사슴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고집스럽게 추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 즈음 그들은 살아남은 자신의 부족민들과 만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건강하게 살아남은 노인들을 보며 경탄을 하며 용서를 구한다. 사와 칙디야크는 여전히 배신감과 복수심을 잊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못 본 척 할 수는 없었고 또한 딸과 손자가 보고 싶었기에 그들을 용서한다. 대신 자신들의 공간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독립적인 객체로서 그들과 대등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레버넌트>가 떠올랐다. 버림받은 이가 대륙을 횡단하며 이동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살을 에는 추위와 배신감이라는 감정과 결국엔 수천 킬로를 가로질러 생존했다는 이력도 그렇지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들처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 마지막에는 사와 칙디야크가 실제로 이동한 경로가 지도로 수록되어 있는데 그 독하디 독한 겨울동안 일흔 다섯, 여든의 노인이 이러한 길을 이동하며 생존했다는 사실은 기적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레버넌트>의 실제 인물인 휴 글래스도 4,000km를 이동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등을 다친 후에, 기어서 말이다). 인간이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생각하는 동시에 인간이란 때론 또 얼마나 약하고 보잘 것 없는가 깨닫는다(예를 들어 휴 글래스가 결국 다른 부족의 공격으로 죽었다는 점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이 글의 초반에 썼던 말을 정정해야 할 것 같다. 『두 늙은 여자』는 과묵하고 인내심 있고 끈기 있는 인디언들이 들려주는 뭉클하면서도 교훈적인 아포리즘이 맞다. 책 띠지에도 써있지 않은가. 생존에 관한 성장 소설이라고. 옳다, 이 이야기는 생존에 관한 성장소설이자 지혜로운 삶에 대한 지침서이기도 하다. 예감은 틀린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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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네치를 위하여 - 제2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조남주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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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한 작가가 말하길 요새의 문학은 위악적인 인물만 등장한다고 한다(팟캐스트였나 라디오였던가 아니면 지면 인터뷰였나. 분명 그 말은 또렷한데 이상하게 출처는 기억나지 않는다). 과거에는 위선적인 인물들이 주인공이거나 주요 인물이었다면 요새는 저마다 위악을 자랑한다는 것이다. 두 개의 차이가 뭘까 어느 쪽이 더 나은 예술의 화자일까 생각해보았다. 결국 뭔가를 꾸미거나 위장한다는 의미에서 비슷한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으나 요새는 희미하게나마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고마네치를 위하여는 꽤 올드한 소설이다. 이른바 달동네라고 불리는 S동에 사는 주인공 고마니는 재개발이 몇 번씩 좌절된 지어진 지 40년이 되어가는 주택에 산다. 실패와 부진한 소득을 이유로 몇 번을 전업한 분식집 사장님인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말에 의하면)모자란, 하지만 사실 자신은 지나치게 생각이 많아서라고 주장하는 어머니와 함께. 어릴 적 친구들과 어울려 체조를 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만 체조를 배우는 학생이 되어있었고 꿈은 고마네치처럼 뛰어난 체조선수가 되는 것이었지만 어느새 고만고만해진 삶을 살고 있는 현재는 실업자이기까지한 평범하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한 주인공이다. 그녀가 천천히 회고하는 자신의 지난 삶은 특별할 것이 없다. 시작점이 평균보다 낮고 진폭이 클 뿐 가계의 부채라던가 재개발에서도 채택되지 못한 버려진 공간에 대한 남다른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비록 가난하고 별 볼 일 없긴 해도 부모님이 서로를 증오하고 혐오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것도 아니다. 아, 다른 게 하나 있다면 그녀는 어릴 적 체조선수가 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 열망만으로 체조를 배웠고 꽤 오랫동안은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을 믿기도 했었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이 고마니라는 것은 제2의 고마네치가 되기 위한 운명이라고 느끼기도 했다. 

 

나야 애니까 암것도 몰랐지. 근데 엄마는 어른이었잖아. 진짜 내가 체조 선수 돼서 메달 따 오고 그러는 거 기대했던 거야?”

그런 것도 있고, 그냥 너한테 체조 가르치는 게 좋았어. 엄마 노릇 하는 것 같아서. 생각해보면 내가 엄마 노릇 한 거라고는 그거밖에 없었던 것 같아.”

엄마는 그 이후로도 계속 먹여주고, 입혀주고, 꾸준한 잔소리로 나를 닦달하며 충실하게 엄마 노릇을 해왔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엄마가 생각하는 엄마 노릇의 기준은 좀 다른 모양이다. 나는 왠지 씁쓸해 보이는 엄마를 위로하고 싶었다.


진짜 부끄러운 것은 체조 선수를 꿈꾸며 에어로빅 학원에 다니던 열 살의 내가 아니라 그 시간들을 부끄럽게만 기억하는 스물다섯의 나였다


내가 아는 모든 어른은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원장도 그렇고코치도 그런 것 같고자세히 얘기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엄마와 아버지도 아마 다른 꿈이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나도 꿈을 이루지 못한 어른 중 한 명이 되었다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실패 이후의 삶을 살아낸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나디아 고마네치의 삶 역시 녹록하진 않았다. 어려운 시기에 가난한 나라에 태어난 사실은 시대 뿐 아니라 그녀 자신의 인생까지도 좀먹었으니. 하지만 그녀는 결국 미국으로 망명을 했고 그곳에서도 적지 않은 고생을 했겠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 굳건히 제 삶을 지키며 살아가지 않은가. 게다가 그녀가 세운 기록과 이름 역시 불멸하지 않으며. 그에 반해 고마니, 아니 우리 대부분의 삶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서일까 고마니가 하는 생각들을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재능 부족에 대한 한탄과 게으름에 대한 수치, 비겁함에 대한 자기혐오, 그러나 나 역시도 이 정도는 치열하게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자기연민까지. 실패 이후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어른이 된다는 것이라는 그녀의 말은 퍽 공감간다. 


, 무슨 애들이 입이 저렇게 거칠어. 화장은 또 저게 뭐고.”

아버지는 피식 웃었다.

착한 애들이야.”

에휴, 우리 아버지, 요즘 애들이 얼마나 무서운 줄도 모르고.

내가 가게 잠깐 비워도 오뎅 하나 꺼내 먹는 법이 없는 애들이야. 음식 남기면 안 된다고 꼭 싹싹 깨끗하게 먹고 가고.”

그것만 보고 착한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너는 그럼 말하는 것 조금 듣고 쟤들이 어떤 애들인지 어떻게 아니?”

할 말이 없어졌다.


받아 적는지 잠시 조용하더니 경력이 십 년이나 되시네, 라는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허허 웃었다. 경력, 경력이라. 십 년의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었구나 싶어 취직 여부와 상관없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그렇다면 위악과 위선은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본다. 악을 흉내내는 것과 선을 꾸며내는 것은 왜 다른걸까. 짐작컨대 위악이란 악, 혹은 나쁜 것을 연기하기 때문에 그 내면에 의식 속에선 스스로가 '적어도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다고 가정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위선은 스스로를 그리 훌륭하지 않게 평가하는 와중에 선을 추구하지 않음을 부끄럽게 여기는, 확대 해석하자면 일종의 겸양도 포함되어 있을지 모른다. 


이 책 속 인물들은 밋밋하지만 수수하고, 정직하지 못한 순간조차 솔직하다. 타인에 대한 섣부른 판단이나 혐오를 하지 않거니와 에둘러 변명하지도 않지만 나서서 변호하지도 않는, 어찌보면 비겁하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무심하고 조심스러운 태도가 차라리 믿음직스럽다. 한국문학이 뻔하다는 담론에서 곧잘 등장하는 타자에 대한 경멸과 약자에 대한 혐오는 찾아보기 어려우며 불륜이나 불손함 혹은 폭력이나 욕설 없이도 충분히 귀기울만한 이야기를 해간다. 그렇게 그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다보면 어쩌면 실패 후의 어른으로 살아간다는 것도 생각만큼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실패 이후의 어른이 된 나 자신도 지금처럼 성실히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묘한 희망마저 갖게 하는 것이다. 참으로 작고 보잘것 없는 희망이었지만 이상하게 기운이 나고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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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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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상상하길 2020년 즈음에는 영양제 몇 알로 삼시 세끼를 대체하거나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타고 다니거나 아니면 로봇들의 지배하에 숨죽여 살거나 하다못해 바다왕국이나 개미들의 세계에 살 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2020년이 2년 남은 지금도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지를 진지하고 고민하고(심지어 삼시 세끼 밥만 해먹는 TV프로그램까지 있다) 어찌보면 이전보다 더 먹는 것을 통해 기쁨을 느끼며 하늘을 날기는 커녕 전기자동차도 충분히 상용화되지 않았고 로봇에게 지배를 당하지 않은 대신 스마트폰 중독이 되었고 여전히 바다나 땅속에선 몇 분도 숨을 쉴 수 없다. 한 친구는 집에 있는 로봇청소기는 없는 것보다야 편하긴 하지만 사람의 손을 따라올 수는 없다고 말하며 그게 우리가 인간의 손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할 많은 근거 중 하나라고 말했었다. 하긴 여전히 종이를 넘겨 책을 읽고 그 책을 직접 타자를 쳐서 발췌하며 이렇게 타이핑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어쩌면 세상은 많이 변했고 동시에 그리 변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고 싶음과 하고 싶지 않음이 난무하자 은결의 사고 회로는 그것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바삐 움직인다. 아무리 방대한 지식을 저장하고 매순간 새로운 학습을 진행한들, 감정의 문제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로봇의 미답지는 수면 아래 잠긴 빙하와 마찬가지임을 시호는 모르지 않는다. 발설되지 않은 의도를 은결이 미루어 짐작하기란 어렵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 팔이 아프니 짐을 들어달라는 요청과는 차원이 다르며, 상대가 로봇 아닌 사람이었다한들 의미의 확장에 익숙지 않은 자라면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람이란 때로는 상대방을 향해, 자신조차 그 독법을 알지 못하는 행간을 읽어내달라는 부당한 호소를 거리낌 없이 하는 존재 아닌가.

 

은결은 로봇이다. 모델명은 ROBO-a1318b. 아내가 지병으로 세상을 뜨고 하나 있는 아들마저 앞세운 명정은 오래 전, 아내와 이야기하며 우리에게 둘째가 생기면 짓자던 이름을 로봇에게 붙여준다. 명정이 세탁소를 운영하기 때문에 함께 지내는 은결은 그곳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세탁물을 거두고 계산을 하고 때로는 배달을 하고 훗날에는 다림질을 하고 세탁을 하는 일들을 배우게 된다. 은결은 누군가에겐 호기심이고 누구에겐 불쾌함이나 불편함으로 여겨지나 명정에겐 하나뿐인 말동무이자 뒤늦게 생긴 아들같은 녀석이고 초등학생이었던 시호와 준교에겐 낯설지만 신기한 오빠 혹은 형과 같은 존재다.

 

인간의 외형을 재현해낸 로봇의 이야기는 결국엔 크게 '인간을 뛰어넘는 로봇에게 위협과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쪽이거나 인간보다도 인간적인 로봇에 대한 연민과 사람에 대한 자기 반성으로 완결될 가능성이 높다. 허나한 스푼의 시간은 어느 쪽도 아니다. 소설은 어떤 대단한 교훈이나 각성의 의도를 지니기보단 로봇이지만 사람과 같고 사람이지만 결국 로봇일 수 밖에 없는 은결이 살아가는 삶, 일테면 시간의 더께에 대한 이야기다.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또 갈아입고 대학생이 되고 군대에 갈 때까지의 시간. 명정이 세상을 떠나고 세주가 아이를 안고 돌아오고 시호와 준교가 선택과 책임에서 다치며 어른이 되는 동안의 시간은 은결의 메모리에 켜켜이 쌓여 그는 인간과 로봇의 어딘가에 머문 존재가 된다. 그 안에서 은결은 배우고 이해하고 적응하고 적용하며 발전하고 진화한다. 냄새와 색깔, 세탁물의 분류와 옷감과 이물질에 따라 바뀌는 세탁법과 인간의 감정과 삶에 대해, 관계와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 성장과 퇴화와 쇠락에 대하여. 상실과 상처와 연민과 죄책감에 대해서도. 그렇게 사람처럼 나이를 먹어간다. 

 

비유법은 익혔지만 그 비유가 매번 적절한지는 제가 모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따뜻하면서 조금 어른스럽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좀...... 고독한 냄새, 슬픈 냄새입니다.”

언어체계가 엉킨다. 고독한 냄새가 인간 세계 어디에 질감과 형태를 갖추고 있는지, 슬픈 냄새란 또 무엇인가. 일상의 시공간을 벗어난 어딘가의 좌표에 위치한 냄새를 표현할 언어가 그에게는 부족하다. 그렇다고 슬프다니, 그에게도 정신이 있다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게 딱 이런 상황일 것이다. 기계 안에 정신이 기거할 곳이란 없는데 이와 같은 착각은 어눈 사디에서 비롯하는가.

 

은결의 메모리 위에 인간 군상의 삶을 나열하는 구병모의 언어는 여느 때처럼 놀랍다. 의지와 실현 가능성을 구분할 줄 아는 은결처럼, 의지는 현재를 어떻게 꺾어갈 수 없는지 깨닫는 시호처럼, 어느 순간에는 형편없이 삶이 구겨져 버릴 수도 있는 것을 배웠던 세주처럼 그녀의 언어는 친절하고 꼼꼼하면서도 대담하고 서사는 고요히 흘러가며 정서는 슬프고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늘 약간의 슬픔을 동반한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그녀의 문장은 항상 슬프고 노상 아름답다.

 

그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은결은 아직 작동을 멈추지 않았으며, 그는 이토록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인간이 말하는 행복이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이제 소모될 대로 소모된 내장 배터리가 태양열로는 더 이상 충전되지 않더라도, 플러그를 꽂은 채로 예전보다 전원 대기 모드가 턱없이 길어지더라도, 감사란 어떤 것인지 또한 알 것만 같다.

 

일전에 읽은 신문기사에서 향후 20년 안에 사라질 것이라 전망하는 직업 중 하나로 번역가를 뽑은 것이 기억난다. 요샌 구글을 비록 각종 어플들도 음성인식을 잘하는데다 번역기 또한 성능이 좋은 편이라 그런 기사가 나온 맥락도 이해는 가지만 개인적으로는 번역이야말로 사람이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단지 의미를 번역하는 것에 그치는게 아니라 발화자 혹은 저자의 저의를 읽어내는 것, 이를테면 모멸과 수치 사이나 경멸과 혐오의 간극, 자기연민이 자기혐오로 뻗어가는 사이클을 기계도 읽어낼 수 있을까. 웃는 것처럼 보이는 입과 웃음기 없는 눈의 표정에서 나오는 언어를 기계는 무엇으로 해석할까. 온갖 것들이 혼재된 시장의 냄새와 사춘기 아이의 미묘한 심경과 선과 악에서 차악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부끄러움과 그 모든 것을 듣고 기록하는 로봇이었던 은결이 성장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로봇도 할 수 있을까. 세주를 쫓아온 전남편과 피가 나도록 시호를 때렸던 남자친구와 그녀의 불행을 충분히 연민하지 못하거나 경멸했던 가족들보다 은결이 더 사람같지 않다고, 말할 수 없듯이. 어쩌면 언젠가, 아주 훗날에는 그런 미묘한 차이조차 읽어낼 수 있는 기계가 발전할 지 몰라도 적어도 향후 20년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작가와 내가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또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누군가의 손길을 빌리지 않고 오독하는 두려움을 갖지 않고도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정확히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세상은 많이 변했고 동시에 그리 변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한 겻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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