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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열린책들 세계문학 27
에드몽 로스탕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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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좋아하는 순간 100을 주고 점점 줄어들지만 여자는 0에서 만나 점점 키워간다."는 연애학개론(?) 명제가 정말 옳다고 가정한다면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이하 <시라노>)은 남자들의 연애를 다룬 사실적인 영화이며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이 봐야 하는 영화다. 실제로 이 영화를 본 후 남자들의 반응이 상당히 호의적이었다고 하니, 김현석 감독은 <광식이 동생 광태>에 이어 남자들의 심리를 짚어내는데 일가견이 있는 듯 싶다.   

영화 <시라노>는 사랑의 지속성에 대해 말하는 영화다. 혼자만의 연정에 빠졌다 상대를 획득하는 순간이 연애의 정점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끝은 창대하리라'라고 다짐 할 미미한 시작에 가깝다. 상대가 내 것이 아닐 때 우리는 상상하고 고민하고 예측하며 노력한 끝에 마침내 상대를 획득한다. 그러나 자신이 멋대로 상상한 상대방과 실제의 상대방의 간극 사이에서 당황하거나 실망하기도 하며, 이제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기에 방심하는 한편, 점점 노력이나 감정을 양보하는 걸 싫어하게 된다. 좋은 말로 해서 익숙해지고 나쁜 말로 해서 쉬워지고 객관적으로 말해 편해지는 것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시라노>는 우리가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를 기억해내게 하는 영화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지만 그 사랑을 지속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영화다.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무엇을 경계하고 무엇을 위해 노력해야하는지, 어떤 것을 비밀로 하고 어떤 것을 공개할지 말이다. 허나 희곡『시라노』는 사랑의 시작과 끝, 즉 인과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사랑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언제 끝났는지 기억해내는 사람이 있을까. 극소수의 독특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마 없을 것이라 감히 단언한다. 애초에 사랑은 '뛰어들다'나 '결심하다'등이 아닌 '빠지다'라는 동사와 함께 쓰이지 않는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지는 것, 아마 그것이 사랑의 가장 큰 매력이자 단점이 아닐까. 물론 자신이 유난히 좋아하는 상대방의 특징이나 매력을 짚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허나 그 또한 이미 시작되고 난 후에 일이다. 실제로 나는 (이상형이라는 것을 크게 믿지는 않지만) '어? 내 이상형이 옷을 입고 걸어다니네.'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지만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지는 않았다. 이상형이란 그저 본인이 기다리는 사람일 뿐 만나게 되는 사람이 아닐 수 있음을 배우는 동시에 스스로도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 나는 내 마음을 책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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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우연히 들었는데 권태기의 부부가 서로가 미워질 때는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인 것조차 거슬린다고 한다. 말한 사람은 꽤 심각하게 얘기했던 것 같은데 방송을 듣는 나는 혼자 폭소하고 말았다. 더하거나 뺄 것 없이 이것이 진실이 아닌가. 사랑에 빠졌을 때는 (어디까지나 예로서) 그 사람의 얇고 가는 눈, 하얀 피부, 호리호리한 체구나 유난히 까만 머리 등이 모두 예뻐 보이기 마련이다. 아 어쩜 저렇게 내 맘에 쏙 들 수가 있지 깜짝 놀랄 정도로. 마치 누군가가 날 위해 만들어 보내 준 완성품인 것 같이 느껴져 어쩐지 흐뭇하고 감동스러운 법이다. 허나 균열이 생길 때는 똑같은 점들이 모두 거슬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예로서) 얇고 가느다란 눈이라 인상이 선하지 않아, 맥없이 하얀 피부라니, 왜 이렇게 볼품없이 마른거야 등등을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자우림의 노래 <애인발견>을 떠올려보자) 그러다 라디오에 나온 사람처럼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인 것도 미워질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친구 한 명은 헤어진 연인을 얼마 전에 만났는데 굉장히 놀랐다고 말했다. 반짝거리게 느껴졌던 아우라도, 총명한 눈동자도 모두 사라졌다고. 자신은 너무도 담담했으며 내가 이 사람의 어떤 면을 좋아했지 라며 스스로를 의심했다고 말했다. 감정의 장난이란 이토록 짧고도 허망한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의 흐름이 모든 것을 소멸하거나 아름답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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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하면 일상이 촘촘하게 채워진다. 함께 가보기 위해 찾아봐야 할 것도 많고, 상대를 기쁘게 하기 위해 기억해야 할 것도, 알아봐야 할 것도 많아진다. 상대방에 대한 긍지를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에 어울리는 자신이 되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한다. 세상이 밝은 곳이라고 믿을 수 있던 소망과 자신 안에 존재하는 맑은 에너지에 놀라기도 한다. 이렇듯 사랑에 빠진 이들은 음악과 감각과 힘을 필요로 하지만 반대로 언어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적어도 자기 자신을 위한 언어는 무의미하다. 그들은 상대를 위해서만 단어를 욕망하며 바라보고 적어 내려간다. 리포트를 쓸 때, 서술 시험을 볼 때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나오지 않았던 필력이 날개를 달고 파닥거린다. 내게 이런 글재주가 있었던가, 정녕 이 글을 내가 쓴 것인가. 우리는 그러한 언어를 만들어낸 스스로에게 감동하고, 그 안의 담긴 자신의 마음에 또 한 번 반한다. 그렇게 사랑은 커져간다. 상대방과 내 마음, 두 가지가 만들어낸 화학작용이 일궈낸 사랑의 소네트. 그러므로 사랑에 빠지면 모두가 시인이 된다는 누군가의 말은 얼마나 적확한가. 연애의 힘이란 실로 놀랍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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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좋아하기 때문에 매력으로 느껴지는가, 매력이기 때문에 좋아하는가. 예쁘기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가,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예쁜 것인가. 언어의 위대함 앞에 감정이 탄복하는가, 아니면 감정이 언어를 감동시키는가(실상 사랑의 밀어들도 사랑이 깨지고 난 후에는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은가). 

록산은 시라노의 아름다운 언어를 말하는 잘생긴 크리스티앙을 사랑했는가, 잘생긴 크리스티앙이 말하는 시라노의 아름다운 언어를 사랑했는가. 그녀를 움직인 것은 열정에 빠진 눈과 부드러운 입술인가, 그 눈과 입술이 말하는 마음인가. 록산이 사랑하는 것은 아낌없는 언사를 던지는 크리스티앙인가, 달콤한 언사를 듣는 자기 자신인가. 

록산        당신을 사랑해요, 죽지 말아요! 

시라노     아니오! 옛이야기에 이르기를, 부끄러움으로 가득한 왕자에게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하면 그 햇살 같은 말에  그의 추함이 녹아 버리는 걸 느낀다고 했소. 하지만 당신은 내가 영원히 한결같다는 걸 알게 될 거요 

록산        내가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었어요! 내가! 내가! 

시라노     당신이? 천만에! 난 여성의 부드러움을 모르고 자랐소. 내 어머니는 날 예뻐하지 않았고, 나에겐 누이가 없었소. 커서는 비웃는 눈길을 가진 여자들이 두려웠소. 적어도 내가 여자친구를 가진 건 당신 덕이었소. 당신 덕분에 여자 드레스가 내 삶 속을 지나갔소.

르 브레    (가지들 사이에 내려오는 환한 보름달을 가리키며) 저기, 또 한 명의 여자 친구가 자네를 보러 내려오는군.

시라노     (달을 보고 웃으며) 그렇군.

록산        난 단 한 사람을 사랑했고, 그를 두 번씩이나 잃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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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당신 덕분에 여자 드레스가 내 삶 속을 지나갔소.'라고 말한다. 록산이 내가 사랑한 건 당신이었다고 깨닫고 고해하는 순간조차 언어라는 자신의 매력을 내려놓길 거부한다. 그는 대단한 유미주의자인가, 아니면 그녀의 말조차 쉽게 믿을 수 없는 극도의 패배주의자인가. 그녀가 그토록 아름답지 않아도 시라노는 그녀를 사랑했을까. 시라노가 사랑하는 것은 크리스티앙으로 인해 더욱 아름다워지는 록산인가, 자신의 언어로 깊어가는 그녀의 사랑인가.

록산은 크리스티앙의 언어로 이야기하자 그를 차갑게 대하다 시라노의 입을 빌리자 마침내 결혼을 승낙한다. 크리스티앙 역시 그녀의 사랑이 시라노의 언어 덕분이라고 확신한다. 게다가 록산 역시 자신을 기만한 시라노에게 당혹감을 느끼기는커녕 내가 사랑한 것은 당신이라고 외친다. 그렇다면 정말 록산의 사랑은 언어로 리본을 두른 감정을 향한 것이었을까. 글쎄, 마음의 행방은 길이 없고 확신이 없기에 여전히 의문스럽다.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것'이라고 어느 책에서도 말하지 않았는가.(아마 카마다 토시오의『29세의 크리스마스』였던 것 같다). 사랑의 시작과 끝, 혹은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일종의 인과관계를 누가 밝힐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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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문. 시작했기 때문에 끝이 나는가, 끝이 나기 때문에 시작하는가.

 

  

 

* <열린책들>카페에서 진행 된 '1월 테마 - 끝나지 않은 이야기' 리뷰대회 때 제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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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4
제임스 미치너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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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미치너와 그의 책 『소설』에 바치는 오마주 

 

 

일종의 경고이자 증언으로 시작하자면, 이 책은 절대로 대중소설이 아니다. 아마 편집자와 출판사가 고민깨나 하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실험적이고 파격적이다. 작가는 자신의 다른 책,『작가는 왜 쓰는가』에서 “소설의 처음 몇 장을 아주 어렵게 만들라. 그렇게 해 일부 독자들을 떨어져 나가게 하라(내가 쓴 소설을 읽으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며 실제로 자신의 신념을 실행했다. 그리고 원하던 결과를 얻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될 만큼 많은 이들이 이 책의 ‘작가’ 부분을 읽다가 하차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소설』은 꽤나 길고, 다분히 지루하거나 어렵게 느낄 수 있는 책이다. 게다가 ‘소설’이라는 장르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정통적인 담론을 말하는 지극히 교과서적인, 엘리트적인 글이다. 대신 그만큼 이 책을 호의적으로 바라볼 독자층을 비교적 명확하게 예상할 수 있다. 아마 이 책을 공감하거나 감탄하며 즐겁게 읽는 사람들은 문학에 적(籍)을 둔(과거에 그랬거나 여전히 미련을 갖는) 사람이거나 그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일게다. 문학, 소설, 글 때문에 인생을 어렵거나 무겁다고 느낀 적이 있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목숨을 바치고 싶다고 한 번이라고 생각한 적 있는 사람들만이 이 책을 끝까지 읽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 책은 아프고 동경하는 어떤 부분을 자극하도록 느낄 것이다. 그러니 탐욕적이고 유미적인, 호기심 충만한 독서가들에게는 필히 추천하고 싶다.

어떤 때는 글 쓰는 일이 마치 무슨 지고한 영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 웃기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 들기도 했다. 정말 글쓰기란 고된 노동인 것이다.

이 문단을 읽고 나는 난데없이 킬킬거리고 말았다. 아아, 정말 그러했다. 좀 더 어릴 적에는 작가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약간 괴짜이거나 괴팍할 것 같았고 시큰둥한 표정과 무뚝뚝한 말투를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자기 글에 놀랄만한 자부심을 갖고 있고, 편집자나 평론가를 무조건 싫어하고, 실상 독자에게 관심이 없을 것 같은 오만함이나 이상한 행동이나 게으름을 일삼다가 어느 순간 방에 틀어박혀 펜을 휘두르면 완성된 글이 쑤욱 탈고될 것 같은 그런 모습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글자를 마법처럼 퐁퐁 솟아내게 하는, 마치 판타지아(월트 디즈니의 만화)같은 장면을 상상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모두 내게 경외심을 일으키는 존재였고, 날 때부터 나와는 너무 다르고 먼 사람들 같았다. 모든 작가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고, 재능외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없다고 믿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 지금은 이것이 그저 환상에 가깝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작가들은 축복받기보다는 실상 지독한 저주에 걸린 사람들과 비슷하며, 때로는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써야만 하기에’ 쓰기도 한다는 것을. 뮤즈는 태반의 작가들에게 고결함이나 재능이 아닌 노동과 노력, 좌절을 요구한다. 작가들이 단어 하나하나에 머리를 싸매고 절망는 모습, 어깨와 손의 통증을 호소하는 모습, 마감을 앞두고 신경질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때로는 낄낄거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글쓰기란 “그러나 이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네루다의 시구처럼, 차라리 애증의 행위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글쓰기란 실상 추하고도 아름다운 것, 영롱하고 무시무시한 것, 다른 어떤 일보다도 체력과 인내를 요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이런 생각들은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을 읽으며 더욱이 확고해질 수 밖에 없다. 일종의 메타픽션인 이 책은 한 권의 소설이 ‘완성’되기까지, 그러니까 작가-편집자-평론가-독자에까지 닿는 화학작용에 대해 다루고 있다. 즉 작가의 열정과 고뇌, 편집자의 날카로운 눈과 감각, 평론가의 열등감과 환희, 독자의 카타르시스를 한 권에 담고 있는 셈인데 상당히 흥미롭고 독특한 소재는 물론 방식을 택하고 있다. 네 개의 챕터, 혹은 인물들은 각각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있고 자신을 변호하고 설명하는 동시에 서로를 묘사한다. 미치너는 각각의 인물의 고통과 딜레마와 기쁨을 마치 빙의라도 된 듯이 풀어내는 데 그 내용이 참으로 재밌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편집자’와 ‘평론가’ 부분을 빠져들어서 읽었는데 정말로 그들은 이런 고민을 할 것만 같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모든 원고들이 다 책으로 꾸며지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중견 편집자의 관심 범위 안에 드는 원고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보수도 많이 받는 전문 편집자들이 가망 없는 원고들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뺏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평균적으로 따지면 대체로 각 출판사마다 <채광창 넘어> 들어온 9백 편의 원고 중 단 한 편만이 책으로 발간되는 것이 일반적인 통계였다. 그러나 여러 출판사에서 퇴짜맞은 원고들이라 해서 베스트셀러가 되지 말라는 법은 물론 없었다. 또 사실 그런 경우가 많았다.

마멜스타인은 훌룡한 편집자로서 세 가지 자질을 가진 여자야. 첫째는, 독자들이 읽고 싶어 하는 멋진 소설을 찾아내는 능력. 둘째는, 시류에 적합한 주제들을 찾아내고 또 그것을 논픽션 책으로 엮어 낼 적절한 작가를 발굴하는 능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들이 15년이 지나고 읽고 싶어 하는 그런 책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지. 

앞서 말한 ‘작가에 대한 환상’에는 모든 글이 그들 머릿속에서 나온다고 믿었던 것도 포함되어 있다. 오탈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글의 완성은 작가에게 달려있다고, 평론은 진정한 창작이지만 창작물이 없다면 평론가라는 직업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타인의 창작을 비판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때문에 오랫동안 중간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귀중함을 정말 모르고 살았다. 예를 들면 기자, 편집자, 번역자, 전기 작가, 평론가 등과 같은 경우인데 정말 오랫동안 이야기는 순수하게 작가 개인의 것이라고만 믿어왔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닿아오면 그것은 독자의 것으로 변형된다고. 하지만 실상 그들이 없다면 어떨까. 제대로 번역된 -원서의 느낌을 살린- 글을 읽을 수나 있었을까. 실력 있는 신인작가는 누가 발굴하는가. 써주는 이가 없다면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 한들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전문적인 평론이 없다면 작가들은 무엇을 위해 글을 쓸까. 

이 책에 묘사된 인물들의 이야기를 모두 듣다보면 결국 모두 똑같이 어렵고 힘들고 그러나 보람 있는 일이구나 생각 하고 만다. 소설이란 결국 쓰는 자, 내는 자, 평가하는 자, 읽는 자 중 하나라도 없으면 제대로 작용할 수 없는 지극히 유기적인 행위체가 아니던가. 그들은 소설을 어떤 폭발적인 것, 즉 경이로움과 장엄한 계시적 광경으로 가득 차 있고, 평범한 행위에 대한 시적인 해석과 기묘하게 보이는 것에 대한 산문적 설명으로 꽉 들어차 있는 것으로 보았다. 라는 책 속의 문장은 사실이다. 결국 소설의 의미를 믿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탐하게 된다. 작가, 편집자, 평론가, 독자 중 누구라 하더라도. 

제임스 미치너는 -소위 말하는- 천재 작가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는 오랫동안 편집자로 일했고 마흔이 다 되어서 등단했으며 이 책만 해도 향년 84세에 써진 글이다(그 연세에 이렇게 방대하고 집요한 글을 쓰다니, 대단한 할아버지 아닌가!). 물론 퓰리처상도 받고 세계적 베스트셀러도 써냈지만 그는 전반적으로 상당히 늦된 편이다. 허나 단순히 그가 노장이기에 이런 책을 써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주제에 대한 하나의 담론만으로 이렇게 방대하고도 원론적인 이야기를 정력적으로 펼쳐갈 수 있는 단단함은 노장들에게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제임스 미치너는 분명 작가를 존중하고, 글 쓰는 행위를 사랑하며, 창작론을 가르치는 것을 즐기며, 소설이라는 장르를 존경하는 것이 분명하다. 『소설』을 읽다 보면 소설을 사랑하는 자신, 이 책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내 자신에게 불쑥 고마워진다. 그러니 이 글은 이런 나의 마음으로 접어 만든 한 송이의 장미다. 그리고 나는 이 장미를 제임스 미치너와 이 책 『소설』에 바치고 싶다.

 
 

 


 
* <열린책들>까페에서 진행 된 '12월 테마 - 오마주' 리뷰대회에 제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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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미인 1 블랙펜 클럽 10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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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답고 슬픈 입장(入場), 렛미인

 

<노스페라투>에 뱀파이어가 등장했을 때만 해도 그들은 돌연변이나 괴물에 가까운, 잔인하거나 두려운 존재였다. 하지만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뱀파이어라는 생물이 다소 환상적이지만 그럼에도 인간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인식을 갖게 했고 새로운 장르의 포문을 열었다. 그리고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와 그 연작)는 뱀파이어를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하기에 충분했다. 마침내 1994년, 이 소설이 영화로 탈바꿈 되었을 때, 사람들은 뱀파이어에게 현혹되었다. 톰 크루즈가 우아한 몸짓으로 욕정을 드러낼 때, 브래드 피트가 욕망과 도덕 사이에서 고뇌할 때, 꼬마 숙녀 커스틴 던스트의 모습은 천진한 잔혹함을 드러낼 때 그들은 아름답고 고독하고 매혹적인 '환상' 그 자체였다. 그렇게 뱀파이어들은 '섹시함과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위치를 선점하고 말았다.

 

확실히 흡혈귀라는 존재는 매혹적인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다. (다른 괴수나 유령들과 달리) 온전한 인간의 모습이고, 여자를 유혹 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고 노련하며, 밤에만 다니는 특성상 창백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가진 남자의 모습이라니. '밤 문화 즐기시는 남작청년' 정도로 인식되기 쉽지 않은가. '피' 가 지니는 원색적이고 오싹한 동시에 피학적인 쾌감, '목'이라는 가느다란 기관을 통해 이 '피를 빤다'는 -그것도 처녀의 피를 즐기는- 묘한 색정, 홀로 관에 들어가 수면을 얻는 연약함과 폐쇄성까지. 이토록 인간의 묘한 호기심과 본능을 자극하는 존재는 아마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소설과 영화에 '뱀파이어 열풍'이 부는 게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다.

 

그러나 뱀파이어를 향한 가장 음험한 시선, 즉 영생에 대한 인간의 무한한 갈망에 대해 회의와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뱀파이어의 불멸은 죄악이자 고독이요 그들의 형벌이건만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동경한다. 영원히 계속되는 게임을 맞출 필요가 있을까, 삶이 끝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간이 충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닐까. 나 역시 뱀파이어에 대한 환상을 품어본 적은 있지만, 그것은 그들이 받은 벌과 고독 때문이었지 동경 따위가 아니었다. 특히 점점 더 뱀파이어가 '유행'이 될수록 그에 대한 고민과 절망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팬시적이며 할리퀸 소설 같은 -특히 벨라 같은 캐릭터가 주인공인- <트와일라잇> 시리즈엔 역시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라고 입을 꾹 다문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치 '퇴색해버린 첫사랑'처럼 기억하고 있던 뱀파이어에 대해서 그야말로 무릎을 탁 치게 되는 영화 한 편이 쑥 나왔다. 차갑고 고독하고 아름답고 슬픈 영화, <렛미인>. 이 영화 한편이 이 리뷰를 쓰게 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이 글은 어느 겨울, 내가 사랑에 빠진 어느 작품에 대한 애정의 러브레터인 것이다.

 

영화를 보며 떠올린 것은 김지운 감독의 <장화홍련>이었다. 이야기의 토양이나 이미지의 근원이 비슷한 느낌을 준다고 할까.찰나적인 아름다움, 죄책감과 고독, 그림 같은 배경과 그래서 더욱 커지는 비극, 고대 그리스의 비극과도 비슷한 어딘가 원초적인 괴로움, 파르르 떨리는 듯한 연약함과 무연함. 양쪽 모두 아이들은 고독하고 어른들은 무심하다. 무엇보다 공포의 온도가 비슷하다. 비극은 무거워야 하고, 슬픔은 깨끗해야하며 아름다움은 의연해야한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미의식과 주관에도 들어맞는 영화였다. 세상에는 그런 작품들이 있는 것 같다. 아름다워서 슬프고, 슬퍼서 아프고, 아파서 무서운. 지금 떠오르는 것으로 예를 들자면 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향악』과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 영화 <블라인드>와 <판의 미로>, <가위손>과 <장화홍련> 같은 것들. 하얀 눈이 흩날리는 첫 장면, 그리고 오스카르와 눈의 나라를 본 순간 <렛미인> 역시 같은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을 어쩔 수 없이 알았다(소설의 서문에 작가가 <장화홍련>을 언급한 것을 읽고 꽤 놀랐다. 비슷한 온도감을 가진 사람이구나 싶어 왠지 모를 동질감까지 들었다, 그는 <렛미인>의 겨울 <장화홍련>의 여름이라는 계절이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영화에 이토록 반했으니 원작이 번역되길 기다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책의 출간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갔다. 기대와 불안감을 각자 절반씩 안고 말이다.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화 한 영화들은 대부분 실패로 평가받는다. 아마도 감독의 역량이나 배우의 연기문제라기보다는 글자의 이미지를 영상화 하는 것에 대한 오류가 아닐까. 이렇듯 타인의 상상력에 등을 기댄 대가로 처절한 비판을 받는 이들이 꽤 되는데도 끊임없이 영화가 제작되는 것을 보면 상상력의 빈곤 때문일까, 넘치는 오마주 때문인가. '이런 좋은 이야기가 영화라면' 하는 생각은 작가에게 무척 고마운 일이겠지만 좋은 소설이 좋은 영화로 직결되리라는 법은 없는 것 같다.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몇 개만 예로 들자면 <어톤먼트>(『속죄』가 원작이다)는 약간 실망스러웠다. 이언 맥큐언의 놀라운 이 글은 '언어로 읽혀야 했을' 종류였다. <박쥐>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을 거꾸로 간다>(전자는 『테레즈 라캥』이 원안, 후자는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이다)의 경우는 원작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 다소 당황스러웠고 <싱글맨>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기대 이상이었다(둘 모두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그리고 <더 리더>와 <렛미인>(이 리뷰에서 언급하는 영화 <렛미인>은 모두 스웨덴에서 제작된 작품을 가리킨다, 헐리우드의 리메이크는 아직 보지 못했다)은 '다르지만 틀리지 않은' 느낌을 잘 살린 영화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더 리더>(영화)는 두 사람의 사랑에 집중하며 그 외의 -가족관계나 직업이나 한나의 폭력성 등- 것들을 과감하게 삭제한 대신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소설)는 전후세대의 혼란과 죄책감의 본질에 대해 묻는다. 전쟁의 책임과 비극적 말로, 그리고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 너의 죄를 용인하는 것인가' 라고 되묻는 것이다. 소설은 언어라는 둔탁한 매체로, 영화는 영화적 기법에 기대 속도감 있게 조명하는 이 작품은 양쪽 모두가 꽤 완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글을 영화화(혹은 영상화) 할 때의 관건은 얼마나 ‘똑같이 재현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영화적 상상력과 가능성을 만족시켰느냐‘에 있는 게 아닐까.

 

<렛미인> 역시 <더 리더>와 비슷한 경우다. 영화 <렛미인>은 아름다움과 색채대비, 과감한 화면 분할 등을 통해 시각적 감각에 충실한 반면 다소 모호한 장면처리로 상징성에만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두 주인공 오스카르와 엘리에게만(책에 표기된 바를 존중, '오스카르'와 '엘리'로 통일한다) 집중하며 둘의 감정 곡선을 쫓는 것은 영화의 특징이다. 반면 소설 『렛미인』은 좀 더 다층적이며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등장인물이 더 많고, 그들 각각을 조명하는 시각도 개성적이다. 특히 스웨덴이라는 나라의 복지정책에 대한 의문과 사회에 만연한 불안과 불분명함과 고독을 관조하는 시선이 사실상 가장 중요한 축이 된다.

 

가장 인상적인 변화는 -소설에서 오스카르는 그리 빼어난 외모가 아니건만- 영화에 등장하는 오스카르의 아름다움이다. 오스카르와 엘리는 남녀의 구분이 모호하다. 오스카르의 아름다움과 나이는 중성적이며 체구가 작은 외면과 연약한 내면을 함께 부각시킨다.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동시에 가학성을 자극하는 묘한 특징이 혼합된 이 아이는 너무도 눈에 띈다. 엘리 역시 다르지 않다. 예쁘고 직선적인 아이는 또렷한 눈매와 강인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오스카르보다 저돌적이며 냉정하고 애정은 일직선이다. 그렇기에 이 아이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을 때에도 엘리는 보통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쩌면 둘이 아직 성별 구분이 불분명한 (겉모습의) 나이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얼핏 둘은 전통적인 남녀 역할이 뒤바뀐 아이들 같다. 그리고 왠지 비현실적인 아이들의 외모는 아이가 깨끗하고 아름다울수록 참혹성과 냉정함도 배가 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는 감독의 의도처럼 느껴진다.

 

감독은 두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아름답고 숭고한 두 아이를 다소 냉철하지만 근근이 숭배에 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서로 거의 반대편에 선 두 아이를 하나로 잇는다. 오스카르의 창백한 피부를 엘리의 차가운 손끝과 잇고, 오스카르의 상아색 블론드와 엘리의 검은머리를 대비시킨다. 하얀 눈과 시린 입김과 붉은 피를 대조시키며, 아름다운 소년소녀와 잔혹성을 연결한다. 오스카르와 엘리는 외면과 내면의 간극을 지닌 아이들이지만 그 아이들의 점과 점이 선으로 연결되며 영화는 몽환적이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게다가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영화는 성적인 모호함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오스카르의 아버지는 어쩐지 동성애자처럼 보였고, 오스카르를 괴롭히는 아이들도 왠지 '좋아하는 여자애를 괴롭히는 초등학생 꼬마들' 처럼 느껴졌다. 오스카르의 예쁜 얼굴과 연약한 체구, 위태로워 보이는 분위기는 눈 속에 파묻힌 붉은 피처럼 묘한 선정성과 독특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렇게 영화가 두 소년 소녀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에 의지하고 있다면 소설 쪽은 좀 더 직접적이다. 책에는 고양이에 대한 설명이 있고, 오스카르의 엄마와 교제중인 아저씨가 등장한다. 그 외에도 제3의 인물들이 다수 등장하는데, 그들 대부분이 기묘하게 비뚤어져있는데다 어둡고 불안한 성격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영화에서의 호칸은 근친상간의 느낌이 더 강한 아가폐적인 사랑을 표현하는데 반해, 원작에서는 탐욕적이고 소아성애자로서의 욕망과 죄책감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작가가 직접 시나리오를 각색했기 때문일까. 독특하게도 이 작품은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고 있다. 그러니 한쪽만 읽거나 본다 해도 특별히 불만스러운 점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소설을 읽고 싶고, 소설을 읽고 나면 영화가 보고 싶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불분명했던 부분을 소설은 명확히 설명해주고, 소설에서는 불편했던 부분을 영화는 제법 감각적으로 그려낸다. 둘 중 한쪽만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취향에 따라 선호가 갈리게 되겠지만, 양쪽 모두를 보게 되면 왼쪽과 오른쪽 손 중 한쪽만 더듬던 것이 서로 깍지를 껴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영화적 상상과 문학적 탐미의 간극은 이렇게나 멀고도 가깝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기형도, <빈 집>

 

 

내가 스무살 즈음엔 누군가 '내 언어'를 설명 없이 알아듣기만 해도 기뻤다. '이해할 수 있어'라는 친구를 와락 안기도 했고, '네가 믿는 것을 나도 믿어'라는 말을 듣고는 세상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하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이 서로 다른 영역임을 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는 말이 의심스럽고, 사랑이 있으면 사람은 외롭지 않다는 말도 믿기 어렵다. 외로움과 외로움이 만나 그것이 반이 된다는 말도, 타인의 고통이나 절망을 공감한다는 사람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딱히 내 자신이 -물론 좀 더 냉소주의자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망가졌다거나 훼손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다만 알게 된 것 뿐이다. 믿는 것과 바라는 것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고. 기형도의 詩 <빈 집>을 읽을 때마다 나는 이것이 사랑의 진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내 마음 안에서의 사랑은 현실의 '너'와는 무관하다. 그래서 사랑은 -그 상대가 그것을 받거나 아니거나를 떠나- 다소 일방적이고 이해불가하며 폐쇄적인 것 같다. 어느 정도의 광기와 망상을 안고 있고, 그래서 늘 누군가의 빈 집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는 것.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로 느껴진다.

 

더욱이 타인의 외로움이나 감정은 절대로 나누거나 함께 짊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내가 생각하는 '외로움'은 일상적으로 쓰는 그런 것이 아니다. 지루함이나 관계의 느슨함이나 초조함 따위를 대변하는 말이 아니다. 가족이 내 맘을 알아주지 않는다거나 애인이 자신에게 소홀하다거나 친구가 내 얘기에 관심이 없는 그런 것이 아니다. 외로움이란 감정이 아닌 차라리 상태의 언어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지구에서 몇 억 광년이 떨어진 머나먼 우주에 진공상태로 떠서 다른 행성을 무작정 바라보는 것이랄까. 만질 수도, 만져질 수도, 교감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것. 이해할 수도, 구제받을 수도, 헤어 나올 수도 없는 자기 절망과 비슷한 것. 그것을 '느낄 때'가 아니라 '인정할 때' 나는 겨우 외롭다는 생각에 잠긴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다른 이의 고통이 공감되거나 재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사랑은 다를까. 내가 사랑하는 이는 나를 이해할까. 나는 끊임없이 자문하고 의심하는 한편 어딘가 그것과는 다른 것이 있다는 소식을 기다린다.

 

 

제발, 제발, 제발 날 무서워하지 말아줘.

오늘 밤 만나지 않을래? 그럴 생각이 있으면 이 쪽지에 답을 남겨줘.

싫어, 라고 쓰면 오늘 밤에 떠날게. 그렇지 않아도 곧 떠나야 할 것 같긴 해. 하지만 그래, 라고 하면 한동안 더 여기 있을게. 뭘 써야할지 모르겠다. 난 외로워.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할 거야. 아니, 너도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중략)

……오스카르는 쪽지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었다. ……오스카르는 엘리의 이름 밑 여백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펜을 기울여 여백이 꽉 찰 만큼 크게 썼다.

그래.

 

 

『렛미인』을 읽으면서 아주 오랜만에, 아니 마치 처음으로 발음하는 것처럼 "그래, 외로웠겠구나."라는 말이 새어나왔다. 소녀는 늘 입장(入場)을 질문한 후 대답이 나오기도 전 그렇게 해달라고 말한다. 거부당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선택할 수 없는 자신이 소년에게 밀어내어질까봐 소녀는 두려워한다. 그리고 이렇게 절망스러운 마음을 안고 고백한다. "난 외로워.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할 거야."라고 엘리가 말했을 때 내 가슴 한쪽이 시큰했고, "아니, 너도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라는 '이해'를 구하는 것이 애정의 갈구로 들렸고, "그래"라고 여백이 꽉 찰 만큼 크게 쓴 오스카르의 글씨에 가슴이 떨렸다.

 

억겁의 시간처럼 세월을 보냈을 아이의 외로움을 짐작해본다. 이 애처로운 소녀는 오래토록 혼자서 질문했을지도 모른다.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까. 그 사람, 너는 나를 구원할 수 있을까, 라고. ‘외롭다’라는 것은 아마 이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닐까. 연약한 손가락으로 벽을 톡톡 쳐주길, 누군가 자신을 ‘초대’해주길 소녀는 기다려왔을 것이다. 엄마도 엄마의 애인도 아빠도 친구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소년은 ‘자신의 것’이 되어줄 누군가를 꿈꿨을 것이다. 소녀의 고독과 소년의 외로움이 만나 나를 조용히 짚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빛이 존재하는 동안은 서로 교감할 수 없는 소녀와 소년은 서로에게 빛이 되어준다. 너희는 외로웠겠구나.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이자 구원처럼 느껴졌겠구나. 그래, 그런 만남은 피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없는 거지. 나는 마치 내 자신이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낡은 목마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시라도 내가 되어 봐.”라는 엘리의 말. 내가 상대에게 그토록 바라던 것이 아니었는가. 그래서였을까. 나는 한 번도 이것이 사랑이냐고 되묻지 않았다. 포식자가 다른 피지배자를 찾아낸 것은 아닌지, 누군가는 한번쯤 물었을 질문을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영화 속에서 엘리가 오스카르를 수영장에서 꺼냈을 때, 소년은 희미하지만 아름답게 웃는다. 녹색 눈의 소녀는 그 웃음을 마주하며 조심스럽게 웃는다. 그 때 두 아이는 공범자가 되었고 서로를 사랑 안에 밀어 넣었고 결국 상대방을 구원했다고 믿는다. 오스카르의 미소를 마주한 엘리의 녹색 눈동자는 분명한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소녀의 그 웃음이 사랑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닐 수 없는 눈빛이었다. 소녀와 소년의 사랑은 빈 집에 갇히지 않기를. 떠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다만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 알라딘과 교보문고에 동시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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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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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 활동 중인 일본 작가 중 가장 유명하고 많은 팬층을 거느린 작가. 실제로 국내에서도 수많은 이들이 그를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뽑기를 서슴치 않는다. 그는 대개 풀네임이 아닌 ‘하루키’라고 불린다. 그는 유명한 작가이고(출판계의) 흥행보증수표이며 하나의 아이콘이다. 그러니 하루키를 읽는다, 는 것은 단순히 한 작가를 선호한다는 것과 조금 다르다. 그것은 젊고 이질적이고 쿨하고 세련된 문화나 문학을 향유 한다는 혹은 그 정도의 안목을 갖추고 있다는 말과 유사하다. 그가 매일 달리기를 하고 스파게티와 맥주, 와인을 좋아하며 재즈광이자 철인 삼종 경기에 출전한 경험과 재즈바를 운영했던 적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도 많다. 종종 하루키로 인해 달리기나 재즈에 몰두하게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이들은 하루키를 경애하고 사랑하고 몰래 짝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밝히듯 쑥스럽게 그러나 자식 자랑을 하듯 자랑스럽게 그의 이름을 말한다. 하루키와 재즈, 하루키 에세이, 하루키 여행집, 하루키 문학 연구, 그에 대한 책들도 참으로 방대하다. 아아, 모두가 하루키를 사랑한다.

 

나 역시 그를 좋아한다, 아마도. 하지만 한 번도 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적이 없다. 왜였을까. 다른 이들처럼 그에 대해 제법 잘 알고 있고 그가 쓴 거의 모든 책을 읽었는데. 내가 읽기도 전, 미처 존재를 알기 전, 판단하기도 전 그가 ‘이미’ 유명했다는 것에 대한 묘한 배신감과 억울함 혹은 내가 그저 스테디셀러를 읽고 있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일까. 나의 이전 시대의 상징이었던 그는 내 것이 될 수 없다고 느끼는 허탈함 때문일까. 어쨌든 나는 그를 늘 보류 상태에 놓아두고는 했다. 그런데도 나는 『상실의 시대』를 아마 열 번쯤 읽었다.

 

『상실의 시대』에는 언제나 지나가버린 것의 냄새, 청춘의 쓸쓸함이 묻어있다. 책이 쓰여진 일본의 시대,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된 국내 첫 출간해, 그리고 현재까지의 유행. 배경과 시대는 달라도 이십대의 젊은이들은 이 책에 끊임없이 열광한다. 아마도 언제 쓰여졌든 언제 읽혀졌든과는 무관하게 이 책에는 젊음의 어딘가를 자극하는 뭔가가 담겨 있나보다. 어쩌면 청춘을 지나고 있는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이 책을 기억할 어떤 세포가 심어져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 만큼.

 

사실 나는 『상실의 시대』를 한 번도 잘 써진 소설,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다만 친하지는 않았지만 또렷이 기억이 나는 동창생처럼, 버스에 놓고 내린 우산처럼, 기억이 날듯 말듯 입에서 맴도는 노래가사처럼 이상하게도 마음이나 머릿속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마치 와인 병 밑바닥에 가라앉은 포도주의 침전물처럼 말이다.

 

그의 다른 글들도 비슷했다. 그에게선 ‘어떻게’ 보다는 ‘무엇을’ 을 읽을 수 있었고, 단 한 문장과 문단만으로도 반하게 되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고, 독특한 설정과 다분한 실험 정신으로도 보편적인 감정을 끌어내게 했다. 젊고 생생하고 의도하지 않은 (소위 말하는) 쿨함을 지닌 문체 또한 인상적이며 무엇보다 글을 잘 쓰기보다도 기억에 남게 쓰는 작가였다. 그런 그에 대한 인상이 바뀌었다. 1 여 년 전쯤의 이야기이다.

 

1Q84

 

간헐적인 스테디셀러와 일부의 베스트셀러. 그 가운데 출판계에 돌풍을 일으킨 『1Q84』의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일본에서의 판매 부수, 국내에 출간되자마자 팔리는 경향, 2권의 예약판매 부수, 수많은 리뷰와 특집 기사. 어떤 ‘책’이 이토록 다양한 화제와 서브컬처를 양산했던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 언젠가부터 책의 위치는 영화, 연극, 뮤지컬 등의 다양한 문화로 대체되었고 책은 간신히 그 자리를 버티고 있었는데. 실제 어느 잡지 에디터가 말하길 어느 날 지하철 한 칸에 이 책을 들고 있는 사람이 네, 다섯이 되더라고 썼던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약간의 경악 반, 감탄 반으로 읽은 책이었는데 과연 소문은 과장이 아니었다.

 

첫째로 나는 이 책의 놀라운 흡입력에 감탄했다. 짧지 않은 페이지,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차근한 묘사, 평범하지 않은 환경과 인물들을 안고도 엄청난 몰입도를 자랑했다. 실제로 책을 좋아하지 않는 남동생과 친구 한 명도 이 책을 이틀 만에 깔끔하게 독파했다고 했고, 내 경우엔 밤에 읽기 시작해서 2권을 모두 읽어내고 몇 시간 후 아침을 맞이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다음에는 여전히 매력적인 캐릭터가 즐거웠다. 군살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 깔끔하고 매끈한 아오마메, (해를 입히지 않을 것 같은) 덩치는 크지만 온순한 동물과 같은 덴고, 상냥하고 선한 웃음을 가진 아유미, 강하고 단단하게 그야말로 나이스하게 나이가 든 노부인, 뫼비우스의 띠처럼 어딘가 뒤틀려있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후카다 에리코 등. 모든 인물들은 각각 분명한 개성과 매력이 있었지만, 묘하게도 조금씩 닮아있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단단하고 상처받았고 뭔가 중요한 부품이 하나씩 결여된 사람들 같았다. 특히 (주인공 두 명 외에) 개인적으로 가장 반했던 캐릭터는 노부인의 경호원을 맡고 있는 다마루였다. 공기와 말의 밀도를 변화시키지 않는 말, 다양한 이야기와 해학,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구별하는 냉철함, 탄탄한 몸과 군더더기 없는 동작, 그의 말투, 건네져오는 목소리, 느껴지는 성향 모든 것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하루키라는 사람이 나도 몰랐던 취향을 꼭 맞춰서 만들어내기라도 한 듯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그는 정말로 내가 선망하는 거의 모든 습성을 갖고 있었다.

 

세 번째로는 이 책이 하루키 소설의 핵심이자 완결, 혹은 옴니버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흥미로웠다. 『1Q84』는 분명 새로운 책이었지만 그가 여태껏 써온 소설과 약간의 교집합 또는 합집합을 모두 갖고 있었다. 판타지적인 설정, 독특한 인물들,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접목시키는 방식, 다마루가 말한 ‘쥐’, 여태껏 그가 써온 어떤 이야기보다 현실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냉철한 세계, 문장의 호흡과 농도 등 모든 것들이 ‘하루키 식’이었다. 그가 말하려던 모든 것이 간헐적으로 합해진 짝패 혹은 가장 핵심 된 맥락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하루키가 그런 나이였던가, 자신이 가진 모든 카드를 함께 조합해서 내놓아야하는? 왈칵 서글픈 생각까지 들 정도로 이 책은 하루키 문학 그 자체였다. 마치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이 언젠가는 바위를 뚫게 되듯이 그는 이 한 권을 위해 여태껏 모든 글을 써왔던 걸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허나 내가 말하고 싶었던 『1Q84』의 놀라운 점은 이 세 가지만이 아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하루키를 ‘매력적인’ 작가라고 생각했지 ‘문장력이 좋은’ 작가라고 판단하지 않았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내용 자체에는 손을 대지 말고 문장만 철저히 수정해나간다. 아파트 리모델링 공사와 마찬가지다. 기본적인 구조는 그대로 둔다. 구조 자체에는 문제가 없으므로. 수도 설비의 위치도 변경하지 않는다. 그 외의의 교환 가능한 것 - 마룻바닥과 천장, 벽이나 칸막이- 을 뜯어내고 새로운 것으로 바꿔나간다. 나는 모든 것을 위임받은 솜씨 좋은 목수다, 라고 덴고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정해진 설계도 같은 건 없다. 그 자리 그 자리에서 직감과 경험을 구사해 고쳐나가는 수밖에 없다. (중략) 늘릴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늘리기 위한 시간대가 설정되고, 그 다음에는 깎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깎아내기 위한 시간대가 설정된다. 그 같은 작업을 번갈아가며 집요하게 거듭하는 사이에 진폭이 점점 작아져서 글의 분량은 자연스럽게 적정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더 이상 늘릴 수 없고 더 이상 깎아낼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다. 자아가 지우지고 쓸데없는 수식이 떨어져나가고, 빤히 보이는 논리는 깊숙한 뒷방으로 물러난다. 그런 작업은 덴고의 천성적인 특기였다. 타고나기를 기술자로 타고난 것이다. 먹잇감을 찾아 하늘을 나는 새처럼 날카로운 집중력을 가졌고, 물을 운반하는 당나귀처럼 참을성이 강하며, 게임의 룰에는 한없이 충실했다. (1권)

 

하루키가 문체를 바꾼것일까? 감수와 교열 과정에서 움직인걸까? 아니면 번역에서? 미묘하고도 조심스럽게 뭔가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모르게 단절 된 문장, 냉철하지만 상냥한 말투, 독특하고 굴절된 표현들이 그의 특징 아니었던가. 하루키 문장에서의 ‘논리’와 '해설'은 -그가 자신의 소설에서 표현했듯- 나비에게 뼈대를 부여하는 일이 아닌가 싶어 잠시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뭔가가 변했든 아니든, 바뀌었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뀌었든 결국 상관 없어지고 말았다. 『1Q84』의 문장은 마치 공부도 운동도 잘하고 좋은 가정에서 교육을 잘 받고 자란, 심지어 매력까지 있는 그야말로 얄미운 사람 같았다.

 

아주 작은 단어로도 문장은 크게 변한다. 마찬가지로 생기 있는 문장 하나로도 문단의 숨도 바뀐다. 차근차근한 시선과 일정한 호흡, 마치 하루에 쓴 것과 같이 변하지 않은 마음의 상태, 쉽고도 적확한 표현. 아아, 쉽고도 적확한 표현이라니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였을까. 2권까지 하룻밤에 모두 읽어낸 후 지금까지 총 열 번 정도 이 책을 읽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눈으로 각인하려는 듯, 마음의 정화나 배설을 위한 듯, 조금씩 핥아가는 심정으로 문장을 먹고 음미하고 따라하고 경배했다. 모든 장점들을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이 책의 문장으로 좌절하고 경외하고 사랑에 빠졌다.

 

1Q84 3

 

아오마메는 자신의 입안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그렇게 2권은 끝이 난다, 하나의 끝이자 다른 하나의 시작을 알리며. 한 이야기가 끝나고 다른 내러티브가 시작하려 한다, 결말은 가시적이지만 함의는 깊고 길다. 소설이라는 오브제의 가장 완벽하고 모범적인 결말은 어쩌면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모양이 아닐까. 그렇다면 <1Q84>의 결말은 최선이다, 라고 책을 덮으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나는 3권을 기다리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마음과 이것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는 완결되었다는 완전함이 양쪽에서 같은 밀도로 나를 밀어왔다.

 

그렇게 복잡하고 벅차는 마음으로 읽은 3편은 (1, 2편에서 인물들의 성격과 배경, 사건의 발단과 전개가 이미 이루어졌기에) 비교적 담백했다. 새로운 인물의 시각이 추가되었고, 분명 수레는 굴러가고 있지만 다소 밋밋할 수도 있는 은근하고 더딘 진행이다. 허나 그것은 문장의 농도가 일정하지 않거나 기복이 물결치는 상태는 아니었다. 오히려 부지런한 등산이 진행 된 후 어느 임계선을 통과한 끝에 걷는 부드럽고 유연한 걸음에 가깝다. 게다가 그 와중에도 계속되는 추적과 엇갈리는 덴고와 아오마메 덕에 나는 TV 추리극장이라도 보는 사람처럼 두 손을 꼭 쥐며 읽었다.

 

실제로 지난 두 권에서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마치 둘을 연결하지 못해 안달이 난 오지랖 넓은 중매쟁이 같았다. 아오마메를 기억에 묻어둔 채 살아가는 덴고를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고, 아오마메에게서 아유미까지 뺏어가는 작가를 잠시 원망하기도 했다. 정말이지 진심으로 아오마메가 행복해지길 바란다. 어서 덴고가 그녀를 찾아 그녀와 그녀 안의 ‘작은 것’ 부드럽고 따뜻하게 안아주길 원했다. 나는, 그리고 (확신컨대) 아마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은 왜 그렇게도 두 사람의 해피엔딩을 원할까. 아마도 이 책은 근본적으로 사랑과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단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인생에는 구원이 있어. 그 사람과 함께하지 못한다 해도.” (1권)

 

아오마메는 말했다. “티베트의 번뇌의 수레바퀴와 같아. 수레바퀴가 회전하면 바퀴 테두리 쪽에 있는 가치나 감정은 오르락내리락해. 빛나기도 하고 어둠에 잠기기도 하고. 하지만 참된 사랑은 바퀴 축에 붙어서 항상 그 자리 그대로야.” (1권)

 

작가는 『상실의 시대』서문에서도 ‘이 책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쓴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 아마 『1Q84』도 같지 않을까. 가벼운 만남 혹은 신파, 타산과 이기, 고결한 척 굴거나 애써 아프게 구는 모습, 호의나 호감을 애정으로 착각하는 현재에 덴고와 아오마메의 교감이란 얼마나 깊고 길고 촉촉한가.

 

확인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고, 둘 다 굳이 입 밖에 내어 그것을 말할 필요는 없다. 아오마메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덴고도 거의 동시에 똑같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본다. 두 사람은 하늘에서 달을 찾는다. (중략)

 

이윽고 구름이 끊기고, 달이 하늘에 모습을 드러낸다.

 

달은 하나뿐이다. 항상 익숙하게 보던 그 노랗고 고고한 달이다. 억새 들판 위에 말없이 떠오르고, 온화한 호수면에 희고 둥근 접시가 되어 떠돌고, 조용히 잠든 집의 지붕을 조용히 비추는 그 달이다. 만조의 물결을 한결같이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밀어 보내고, 짐승들의 털을 부드럽게 빛나게 하고, 밤의 여행자를 감싸 안아 보호해주는 그 달이다. 때로는 예리한 그믐달이 되어 영혼의 살갗을 깎아내고, 초승달이 되어 어두운 고절의 물방울을 지표면에 소리도 없이 떨구는, 늘 보던 그 달이다. (3권)

 

그들의 사랑은 억지로 열거나 밀어오는게 아니라 조용히 닿아온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바칠 수 있는 순정, 감내할 수 있는 고통과 인내, 누군가를 구원으로도 절망으로도 여겨줄 마음, 그리고 서로가 같을 것이라는 의심 없는 확신. 두 사람이 미끄럼틀 위에서 만나 겨우 상대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을 때, 나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뚝 흘렀다. 의미나 감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 눈물이었다. 아마 진심에 공명했던 투명한 눈물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약간 붉어진 눈시울로 ‘덴고’와 ‘아오마메’의 이름으로 있던 챕터가 ‘덴고와 아오마메’가 되었을 때의 안도감과 벅참이라니.'덴고와 아오마메'로 바뀐 일곱글자를 언 땅 위에 피어난 꽃을 바라본 것처럼 기쁘고 안쓰럽고 고마운 마음으로 눈으로 좇고 있었다.

 

나는 둘을 걱정하지 않는다. "이 네 사람은 각자의 심산을 품고 이 계획에 임했을 뿐, 딱히 똑같은 방향을 지향했던 건 아니었어. 말을 바꾸자면, 모두가 같은 리듬에 같은 각도로 노를 저었던 건 아니라는 얘기야."(3권) 라는 고마쓰의 이야기를 빌려 말하자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모두 같은 마음, 방향, 리듬과 각도를 노를 젓고 있으니까. 그들이 사랑할 수 있도록, 그 사랑을 지키도록. 어떤 의미에서 덴고와 아오마메는 우리가 지켜야 할 애정의 상징이자 이상이고 꿈이기도 할테니. 4권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든 두 사람은 헤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나는 예전에 작가란 -이른바 하늘이 내려준- 일부의 선택받은 천재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엉뚱한 일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 그야말로 섬광 같은 계시를 받고 갑자기 책상에 앉아 글을 휘갈기고, 그들의 광기 어린 붓끝은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것이며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는 그 움직임을 뒤로 하고 짠! 하고 책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엉뚱하고 예민하고 재능을 타고 난,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들이라고. 퇴고로 머리를 썩이거나 열패감에 시달리거나 밤새 눈을 퀭한 채 밤을 새는 일들은 없을 거라고. 많은 작가들 중에서도 특히나 하루키는 ‘그런 작가’ 라고 넘겨짚었다. 왜 그런지 그는 언제나 무연하고 대담하고 쿨하고 솔직한 천재라고만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작가란 축복 받았다기보단 사실 저주에 걸린 사람들과 같다는 것을. 그들은 재능을 뽐내는 쪽이 아니라 열등감에 시달리는 쪽에 가깝다는 것도. 쓰고 싶은 것들을 저절로 술술 풀어내는 게 아니라 때로는 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써왔다는 것 또한. 퇴고에 퇴고를 거듭해 만성적인 어깨결림 따위를 안고 살고, 가끔은 한 단어 때문에 머리를 감싸며 좌절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끊임없이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의 체력을 단련한다는 것을 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일정한 페이지를 써내고, 헤밍웨이의 말처럼 오늘 더 쓰고 싶을 때 내일을 위해 멈추는 사람이라는 것 또한. 하루키는『먼 북소리』에서 소설을 쓸 때는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강렬하게 한다고 했다. 걸작이 되지 않다손쳐도,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기억하지 않는다 해도 소설을 끝맺음 할 때까지는 죽고 싶지 않다고. 만약 그 안에 죽는다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만큼 분하다고도 말했다. 아아, 이제 나는 그를 천재 작가라고 상상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나 고요한 새벽을 필력의 위엄으로 채워가고 있을 것이다. 같은 시간에 일정한 운동량을 달성하고 (앞서 인용한) 덴고의 경우처럼 끈질기고 빈틈없는 퇴고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분명 단단하고 아름다운 등을 한 채 『1Q84』의 4권을 써가고 있을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니 괜시리 가슴이 뻐근하고 그와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워진다.

 

이제는 나도 하루키가 좋다고 솔직하게 수긍한다. 게다가 사실 옛날보다 지금, 그리고 점점 더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사람이 좋아진다. 그는 여전히 젊고, 담백하고, 뜨거운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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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2010-10-02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Q84를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책의 분위기나 하루키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게 되었네요. 올해가 가기 전에 읽어봐야겠습니다.
8기 서평단 안내 글을 따라 무심코 들어왔는데 하루키도 좋았지만 [Talk to]님의 글이 더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Shining 2010-10-03 14:49   좋아요 0 | URL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있겠지만; 매력적인 책이라는 것과 흡입력면에서는 대부분 동의를 하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리뷰도 많지 않고, 미욱한 글솜씨로 서평단 하게 되어 걱정도 됩니다. 과분한 칭찬을 들었으니 더 분발해야겠어요+_+ 감사합니다.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
헤르타 뮐러 지음, 윤시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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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잡한 지하실에서 곧 고요가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3페이지로 넘어갔을 때 리젤을 제외한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리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겁에 질린 눈이 자신에게 매달려있다는 것을 느꼈다. 리젤은 단어들을 잡아당겼다가 숨으로 뱉어냈다. 목소리 하나가 그녀 안에서 음들을 연주했다. 그 목소리가 말했다. 이것이 네 아코디언이야.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사람들을 두 토막으로 베어버렸다.

 

다시 소녀가 말을 했을 때, 소녀의 입에서는 질문들이 비틀거리며 걸어나왔다. 뜨거운 눈물들이 눈에서 자리를 찾으려고 싸웠지만 소녀는 그것들이 나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단호하고 당당하게 서 있는 것이 나았다. 말이 모든 일을 하게 하자. “정말 오신 거에요?” 소녀가 말했다. “내가 당신 뺨에서 씨앗을 가져온 게 맞나요?” - 마커스 주삭, 『책도둑』 

 

헤르타 뮐러의 글이 숨 쉴 때는 마커스 주삭의 소설이 퍼뜩 떠오른다. 마커스 주삭은 명료한 문장과 담담하지만 따뜻한 휴머니즘, 단어의 의인화로서 자신만의 문체를 구축한 호주 출신의 젊은 작가다. 『책도둑』은 그의 두 번째 작품으로 리젤이라는 어린 소녀의 눈으로 바라본 2차 대전 당시의 독일의 이야기인데 신인답지 않은 스토리텔링과 시선도 놀랍지만 무엇보다도 -위의 문단처럼- 문장이 백미다.

 

단어와 사물들의 의인화, 비참한 현실과 그에 대조되는 청아한 문장, 참혹하고 불온한 시대상,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한 사람의 결단에 휘말리는 집단의 공포, 무엇보다 단어에 온기를 불어넣고 숨을 쉬게 하며 맘껏 움직이게 하는 문체라는 특징의 유사성 때문일까. 헤르타 뮐러와 마커스 주삭의 『책도둑』은 어느 면에서 닿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세상에는 읽으면서 즐거운 글이 있고 반대로 읽기조차 괴로운 글이 있다. 마찬가지로 즐겁기 위해 읽는 책도 있고 괴로울 줄 알면서도 읽게 되는 책도 있다. 내게 헤르타 뮐러의 책은 단연 후자이다. 나는 늘 그녀의 글을 읽으며 괴롭고 참혹해하며 이따금 후회스럽기까지 하다. 헤르타 뮐러의 글은 마치 어떤 고통 어린 순간들을 조심스럽고 서글프게 펴서 보여주는 것 같다. 아코디언처럼 자글자글 접힌 그 안에는 절망과 향수의 언어, 박제가 되어 버린 시간들이 아로새겨져있다. 그녀의 글을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종종 나는 그것을 '당해본 자의 것'이라고 부른다. 역사의 한 자락이 되어 거대한 십자가를 짊어져본 자, 인간이 악마로 변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자, 응축된 절망과 두려움을 심장 근처에 두고 살아본 자, 전쟁과 망명, 기아와 핍박,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것. 그들의 언어. 알베르 까뮈의 말을 인용하자면 "경험은 실험해보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얻으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냥 당하는 것이다. 경험이라기보다는 인내가 옳겠다. 우리는 견딘다."에 해당하는 삶이랄까.

 

그래서인지 그녀의 글을 읽을 때는 시원한 곳, 찬 음료와 햇살조차 꺼림칙할 때가 있다. 그녀는 그런 삶을 살아낸 사람이다. 끈질긴 생의 집념을 목도한 사람이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남아야 했을까 싶은 상황 앞에서 그녀는 차라리 생에 대한 복수에 가까운 의지로써 살아남았다. 그녀의 언어는 비통하게도 아름답다. 어째서 언어를 이토록 슬프도록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 이 매끈한 공예품과 같은 아름다움이 현실을 더욱 통탄하게 만드는 것인가. 아름다움의 본질은 슬픔인가. 늘 그녀의 글 앞에선 비슷한 의문과 혼란, 벅찬 감정들이 알알이 흩어져 마치 은하수와 같은 길을 이루는 것을 느낀다.

 

게다가 뮐러의 글은 상당히 어렵다. 주어와 목적어는 각각 주장을 하고 문장의 흐름은 뚝뚝 끊어지는데다, 사물·자연·사실의 의인화, 한 편의 서사시와 같은 길고 구비진 흐름. 설상가상으로 내용은 음험하고 무참하다. 그래서 나는 늘 그녀의 글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해 두 번, 세 번씩 반복해서 읽는다. 아니, 읽는다기보다 입안에 넣고 혀와 입천장 사이에서 뱅뱅 굴린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이렇게 활자의 움직임과 냄새에 집중하고 몇 번 비슷한 경험을 하다보면 어느새 나 역시 그녀가 증축한 미지의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세계는 마치 크로스워드나 스도쿠와 같아서 집중력과 호기심이 부족하거나 끈기가 없으면 결국 글에서 손을 거두게 된다. 쉽게 읽고 빠르게 잊는 세상에, 그녀의 글은 어렵게 읽히고 깊고 길게 기억된다. 헤르타 뮐러는 모든 글자들이 쉽게 글이 되는 현재, 활자가 과도하게 난무하는 세대에게 주어지는 경건한 서사이자 경고이며 끈기 있는 자만이 열 수 있는 마법의 문이다. 분명 많은 이들이 그 문 앞에서 열쇠를 쥐었다 폈다만 반복한 후 돌아가지 않았을까. 그러나 조금만 인내를 갖자. 그녀는 생(生)과 싸워서 이겨낸, 삶의 끝을 목격한 사람이다. 그런 그녀에게 접근하기 위해 우리는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이다. 무엇보다 문 안쪽에는 놀라운 언어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그 세계를 마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해보지 못할 이유가 어딨겠는가.

 

때때론 어쩌면 그녀의 글이 이토록 난해한 것은 독재정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을까도 잠시 생각해본다.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을 쓸 수 있었고 『1984』로 미래를 예견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직접적이고 명료한 언어를 사용할 수 없었기에. 헤르타 뮐러의 글은 엉키고 섞이고 도치되는 것이 아닐까.

 

그 중에서도 특히『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는 굼뜨고 미묘한 움직임만을 포착한 글이다. 책에는 거시적인 행동이나 직접적인 대화나 지칭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몸을 웅크린 채 조심스럽고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훑는 듯한 동물의 시선 같달까. 그녀가 포착하는 세계에는 독재 정권 치하에서의 공포와 광기 어린 -마치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처럼- 목숨만이 존재한다. 그들의 공포는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몇 배는 크다. 사방에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입이 있고, 그들은 반대로 점점 더 눈이 멀고 귀가 어둡고 입을 닫게 되는 세상. 언행은 물론 생각과 약간의 가능성과 꿈조차 함부로 누릴 수 없던 세상. 아디나와 클라라, 그리고 그녀들을 둘러싼 모든 인물들은 절망적일만큼 무겁다. 그들에겐 이미 희망의 빛은 커녕 빛을 지필 촛대조차 남아있지 않다. 다만 생존을 꿈꿀 뿐.

 

8월의 그런 어느날, 일리예는 가스레인지 옆에 서서 바퀴벌레를 으깨어 죽였다. 어쩌면 그가 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의 머릿속에 있던 열기의 무자비함이 그런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중략) 그는 구역질을 했고 식은땀을 흘렸다. 도나우 강이 있어서 세상은 행복해, 라고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의 혀를 삼키며 딸꾹질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방 벽에 콘센트가 잔뜩 있다. 콘센트에는 입이 있다. 램프대에는 재물조사 목력번호인 노란 숫자들이 쓰여 있다.

 

노인의 노래가 그친다. 세상에, 그가 잎이 없는 황량한 아카시아 앞에서 말한다.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린 먹을 빵도 없어. 경찰관 한 명과 개 한 마리가 그에게 다가오고, 또 한 경찰관이 온다. 그러자 그는 양팔을 치켜들고 하늘을 향해 소리친다. 하느님, 우리를 용서하소서. 우리가 루마니아인이라는 것을. 그의 눈은 이리저리 흔들리는 불빛에 번쩍이고, 눈 속에서 광채가 번뜩인다. 개가 짖으며 그의 목으로 뛰어오른다. 두 명, 세 명, 다섯 명의 경찰이 그를 끌고 간다. (중략) 노인의 머리가 제일 아래쪽에 걸려 있다.

 

일견 냉담해 보일 만큼 쉬이 감상적인 발언을 하지 않는 치밀함은 지금까지도 그녀가 그때의 악몽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을 은연중에 전달한다. 치열하고 아름다운 글은 묵묵한 속도로 그저 이들을 ‘비춘’ 다음 조심스러운 눈으로 바깥의 시선을 오래토록 던진다. 대체 지금 내가 발을 디디는 곳이 어디인지, 이 불온한 공기는 어떻게 해체될 것인지, 지독하게 상징적인 이 제목의 의미는 언제쯤 알게 될 수 있을지, 독자가 조금씩 조바심을 낼 때쯤 겨우 여우 이야기를 꺼낸다.

 

아디나에게는 여우 모피가 있다. 반짝이는 갈색 발톱을 가진, 턱 아래에서 묶을 수 있는 발을 가진 여우 모피. 그런데 여우는 그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잘리고 있다. 방 안에 다른 물건은 모두 미세한 배치조차 바뀌지 않았는데. 그녀를 주시하고 있다는, 그리고 언젠간 그녀를 해칠 것이라는 무언의 압력. 그녀는 문득 열 살이 되기 전 일을 떠올리며 클라라에게 이야기한다. 여우를 사러갔을 때의 일, 매끄러운 털을 가진 여우, 그리고 사냥꾼의 얼굴.

 

너 긴장했구나, 아디나가 말한다. 죽은 사람처럼 보이는 걸. 그러자 클라라는 깜짝 놀란다. 그녀의 시선은 거리낌 없고 단호하다. 클라라는 떠나간 한 얼굴을 본다. 그 얼굴은 위장된 얼굴이다. 양 뺨과 입술이 제각각 따로 놀고, 생기 없고 동시에 탐욕적이다. 앞과 옆의 한 얼굴이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그림처럼 텅 빈다. (중략)

아디나는 그 사냥꿈이 되고 싶어해, 클라라는 생각한다.

   

넌 나보다 더 많이 불안해해, 아디나가 말한다. 여우를 보지 마, 더 이상 여우를 쳐다보지 마.

 

밤사이에 여우의 발이 모두 붙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되려 조금씩 없어지는 여우의 모피를 바라보며 그녀는 어떤 밤들을 지새웠을까. 여우가 마치 자신을 잡아먹는 늑대처럼 여겨지지 않았을까. 하나씩 사라지는 여우의 분신을 바라볼 때 그녀는 억겁의 시간을 지나온 것 같은 두려움과 절망에 떨지 않았을까.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그녀는 머리가 잘리기 전 클라라의 쪽지를 받고 아파트를 도망 나온다. 그렇게 찰나의 차로 그녀가 피신을 하게 된 얼마 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독재정권이 마침내 종식된다. 아디나(아마 그녀를 비롯한 모두)는 마치 백일몽을 꾸는 듯한 기분으로 TV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이 뒤졌을 게 분명한, 그러나 아무도 없는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온다. 모든 게 끝났다. 하녀의 딸은 교장이 되었고, 교장은 체육 교사가, 체육 교사는 노동조합장이, 물리 교사는 개혁과 민주주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런데도 세상의 불온한 빛은 미처 거둬지지가 않았다.

 

고양이는 수염이 있어, 아이가 말한다. 그 애의 손끝 아래로 여우의 머리가 목에서 떨어져 밀린다. 아이가 여우의 머리를 탁자 위에 놓는다. 

 

아디나는 두 번째로 머릿속에서, 큰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것 같지만, 그것과는 다른 소음을 느낀다.

 

클라라는 이방인이고 일리예는 떠나며 아디나는 여우가 더 이상 붙지도 잘리지도 않을 것을 안다. 노래는 침묵하고 빵가게의 줄은 길고, 타오를 것 같았던 희망과 삶의 빛도 결국엔 비루해졌다는 것 또한 알게 될 것이다. 결국 여우는 사냥꾼인 채로 남게 된다. 아아, 나는 이 책 끝에 자그만 희망을 소망했던가. 씁쓸한 마음으로 마지막 장을 덮으며 문득, 이 책의 제목이『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미'와 '-었다'의 과거의 언어는 바뀔 수 없는 세상을 만들었다. 단 한 번, 몇 명의 독단과 아집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잿빛 초상화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새겼다. 비록 독재정권은 무너졌지만 아마도 희망의 빛은 쉬이 켜지지 않을 것만 같아 괜시리 목이 매캐해진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자들은 승리자일까. 운명의 수레바퀴 앞에서 나는 끊임없이 비슷한 의문을 품는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생과 사를 나눈다 해도, 설사 역사가 이긴 자들의 것들이라 한들, 어떤 때는 죽어버린 자들이 ‘차라리’ 운이 좋았던 게 아닐까.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살아남았다는 부채감 중 어떤 게 더 클까. 헤르타 뮐러는 어떤 생각을 하며 글을 쓸까. 어쩌면 그녀의 글쓰기는 살아남은 자의 부채로서, 혹은 생에 대한 완벽한 복수를 위해, 그것도 아니라면 써야만 했기에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던 산물이 아닐까. 오로지 살아남은 자들만이 악몽에 시달린다. 살아남은 자들만이 무소의 뿔처럼 걸어갈 수 있다. 살아남은 자들만이 슬픔을 느낀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책을 덮으며 브레히트의 시를 떠올린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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