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 감정 오작동 사회에서 나를 지키는 실천 인문학
오찬호 지음 / 블랙피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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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K를 만났다. 그녀는 돌쟁이 아이가 한 명 있다. 그 날 그녀는 몇 시간이나마 아이와 떨어진 것도 오랜만이고 기혼자가 아닌 사람을 만난 것도, 아기가 주제가 아닌 이야기를 한 것도 정말 간만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어지는 갖가지 대화 속에서도 우리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적지 않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정체성에 엄마라는 위치가 추가된데다 현재 그녀가 아이를 위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너무나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어느 정돈 안다고 생각했다. 결코 자만하는 건 아니지만 정말 어느 정도는 말이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어서 보이는 세상은 여태까지 알던 것과는 달랐다. 그건 우리가 처음 마주하는 세상이다. 이 불가해하고 불평등하고 폭력적인 세상에 도덕은 과연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도 한참 나눴다. 우리가 터득한 처세를 아이에게 가르칠 순 없다. 하지만 우리 아이만 도덕적이길 바라는 건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 아닐까. 그래서 말을 아끼게 되고 나도 모르게 나쁜 어른이 되어 지름길 혹은 잘못된 길을 슬쩍 알려줄 때도 있다. 아이를 키우게 되는 건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환희와 기쁨, 이루 말할 수 없는 긍정적이고 거의 성스러운 무언가를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둠과 동시에 스스로 안에 잠들어있던 지독한 이기심과 저열함, 속물근성과 인내심 없는 괴물을 깨우는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사회의 일원인 어른으로써 더 큰 책임감과 수치를 통감하게 된다는 것 또한. 

 

아직 말도 못 할 아이를 두고 우리는 그 아이가 할 만한 질문과 그랬을 때 해야 할 답과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하고 사회의 치안에 대해 이제는 전보다 더 강력한 태도로 규탄했으며 보호와 억압은 어떻게 다른지 둘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보기도 했다우리가 아이였을 적과 어른이 되었을 때 그리고 부모가 되었을 때의 입장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그렇게 고심하고 고민하고 반려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스스로를 낮추고 또 낮추었다대화의 끝물에 그녀는 자신이 좋은 엄마가 아닌 것 같다며 사실 아이가 조금 버겁다고 했다언제가 내가 했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은 엄마가 되고 싶은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타입이 아닌 것 같다고도그 말을 하며 그녀는 목소리를 낮췄고 마치 부끄러운 것이나 잘못된 것을 말하듯 조금 고통스럽게 말을 이었다.


과연 태평양 건너의 이야기일까? 노예제처럼 인종차별의 역사가 선명한 나라에서만 다룰 주제일까? ‘여자의 생명은 소중하다는 피켓을 들고 여성 혐오 범죄에 항의하는 사람들 옆에서 남자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피켓을 든 한국사람들은 화성에서 왔던가? 경력단절의 태반이 여성인 현실에서 요즈음은 여자가 살기 좋아졌다고 하는 한국사람은 머나먼 행성에서 갑작스레 이주라도 했을까? 임대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과 어떻게든 섞이지 않으려고 철조망을 치고, 심지어 아이들의 놀이터 이용도 사적 재산권 운운하면서 통제하는 사람은 미국 사람인가? 흑인 분장을 한 코미디언이 등장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깔깔거렸던 사람은 누구였던가? 인종이 웃음의 소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비판하면 재밌자고 한 일인데 죽자 살자 달려든다면서 비아냥거렸던 사람은 평범한 우리의 이웃 아니었던가. 한국은 차별을 차별이 아니라고 하는 부끄러운 살마이 그냥 많다. 그냥 많다는 말은 사회의 시스템이 차별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곳에서 자연스럽게 살다 보면 누구나 차별에 둔감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차별은 피해자가 느끼는 것이지 가해자가 해명하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는 괜히 예민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가난에 대한 그릇된 사회적 고정관념과 이들에게 도움을 주려는 여러 복지 정책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이 응축되어 나타나는 부정적 시선을 어릴 때부터 마주하며 살아왔다. 이런 시선들은 대개 편견으로 변해 특정한 배경을 가진 사람을 괴롭힌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이 차별의 공기를 제공한 주범인 걸 부정한다. 차별받는 사람만 있고 차별하는 사람은 없는 이유다.


며칠 뒤 이 책을 읽었다.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페이지를 넘기며 비죽비죽 새어나오는 웃음은 때로는 비웃음이고 가끔은 통쾌함이고 이따금 부끄러움이나 자조이기도 했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가 여기 다 있네, 나만 예민한 게 아니었잖아,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러다가 마지막 즈음엔 나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부분을 지적받기도 하며 멋쩍은 탄식을 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늘 그랬다. 나는 늘 예민하고 까다롭고 어려운 사람이었다. 물론 대개는 그런 면을 숨기거나 드러내지 않고 살지만 조금만 깊이 이야기해보면 늘 '그런 쪽'의 사람이라고 분류되는 걸 스스로도 모르진 않았다. 그래서 말을 줄였고 좋아하는 것을 없앴으며 판단하고 충고하고 간섭하지 않으려 거리를 뒀고 믿는 것을 그만뒀다. 외로웠지만 후회하는 것보단 나았고 비열한 사람이 되느니 차라리 비겁함을 택하려는 차선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날이 좋아하는 것, 의지할 수 있는 것이나 가치를 둘 수 있는 것을 잃어간다. 명작이라 여겼던 영화는 누군가의 성폭행과 폭행과 사고로 얼룩진 고통의 흔적이었고 좋은 평가를 하던 인권운동가는 알고보니 여성혐오자였으며 젠더이슈에 대해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던 이는 인종차별자였다. 게다가 몰지각한 이들은 아둔하기까지 해 학살의 피가 묻은 그림을 몸에 그리고는 피해 국가에 뻔뻔한 입장을 취했다. 여지껏 사생활과 커리어는 별개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어쩌면 수많은 이들이 '바로 그런 이유'로 어떤 사람이 권력을 쥐도록 만들어준 게 아닌가 하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일개 관객이나 시청자나 아니면 독자에 불과한 나 역시 그것에 일조한 게 아닌가 싶어 잎새에 부는 바람에도 심히 괴로웠다. 


솔직히 말해 억울하기도 했고 화도 났다. 그깟 영화 한 편 맘대로 좋아할 수 없다니. 호감 가는 배우, 주목하는 감독조차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니. 음악 하나 듣는데도 이렇게 많은 자기검열을 해야한다니. 그냥 무시하고 싶었던 때가 없진 않았다. 인간이란 결코 선하지도 무결하지도 않기에. 그들도, 나도 그렇기에. 하지만 그럴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지도 않았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자를 상대하다 뉴스에 날 정도의 일생일대의 사건을 경험할 때 하는 말이 아니다. 스스로를 서민이자 심지어 민주 시민임을 자처하는 평범한 우리끼리의 일상에서 자신이 하는 말이자 듣는 말이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 때문에 내가 괜찮지 않고, 나의 무의식적인 생각과 행동 때문에 주변의 누군가가 괜찮지 않다.

 

평범한 게 죄는 아닌데, 이게 죽도록 노력한 대가라 생각하니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노력하면 할수록 나는 왜 이렇게 잘하는 게 없지?’라는 부끄러움만 생길 뿐이다.

 

저자는 이전에도 차별과 차등에 차이에 대해 짚어간 적이 있다. 『진격의 대학교』에서는 대학교를 토대로 한 우리 사회의 무가치함과 무의미함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차별과 차등을 헷갈려하며 연민과 공감이 사라지며 점차 몰이해의 괴물로 향해가는 현세대에 대해서 지적을 했다. 모든 것을 노력으로 치환하는 -이른바- 꼰대질을 싫어하면서도 제가 가진 것은 노력의 대가라고 자위하는 이들에 대한 통찰이 인상적이었다. 대기업이 하는 것만 갑질인 줄 알았더니 결국 우리는 우리보다 약자라고 생각하는 누군가에게 또 다른 갑질을 하고 있고 그럼에도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일말의 정당성을 부여하며 계급화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으며 스스로도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나 반성하는 기회도 되었다.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에선 어떤가. 여성이 했다면 분명 욕먹었을 이야기를 남성인 그가 했다는 점은 이상하게 통쾌하고 그래서 씁쓸하다. 그가 이 책에서도 말했듯 자신이 하는 행동은 좋은 남편이고 좋은 아빠이지만 부인이 하는 것은 엄마로서 당연한 일들이라는 이야기처럼, 남자라서 인신공격을 덜 받았다고 스스로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의 다루는 이야기는 오래된 담론이지만 동시에 신선하고 무척 생동감있는 뜨거운 감자가 대부분이었다. 차별과 차등, 무배려와 무지함, 젠더이슈와 세대론까지. 누군가는 그가 답을 제시하기보단 현상만을 언급하기에 훌륭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는 답은 개개인의 촉구이자 시스템의 변화인데 그것이 쉬운 방법이 아니기에 결과적으로는 탁상공론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가 이야기한 것들조차 "이딴게 대체 무슨 문제냐? 세상엔 더 중요한 문제가 많다. 북핵이라던가 대미관계, 경제, 최저임금..."하는 식으로 논지를 흐리는 이들이 대부분이기에 그가 제기한 이야기들은 언급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나날이 좋아하는 것을 잃어가고 의지할 수 있는 것조차 사라져간다. 누군가에겐 까탈스럽고 예민한 사람, 유머가 통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깔아뭉개서 할 수 있는게 유머라면 그딴 건 필요없다고 그렇게 대답하고 싶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괴팍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래서 말을 아끼고 점차 내 의견을 진지하게 나눌 상대를 줄여간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서럽고 답답한 찰나 저자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그들'은 알까. 


하루한 주한 해가 지날수록 일상으로 돌아가자고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채근하는 사람들은 많아졌다틀린 말은 아니다일상에서 우리는 살아야 한다문제는 어떻게’ 사느냐는 거다이건 효율의 문제이기도 하다표현이 속되지만 누군가의 슬픔에 최대한 공감하기 위해 오랫동안 함께 슬퍼할수록 자신은 정말로 잘 살 수 있다공감의 깊이가 깊을수록 문제적 원인이 정확하게 보여 실질적인 재발 방지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세상은 언제나 그래왔다. 괜찮은 사람들만 괜찮지 않은 사회를 염려했고 정상적인 사람들만 정상적이지 않은 사랑메게 상처받는다. 성실한 사람들이 성실하지 못한 이들에 의해 다쳤고 아팠고 억울했고 힘들었다. 심지어 '예민하거나', '사회생활을 할 줄 모르거나', '그러니까 그런 일을 당한다'는 식으로 아픈데를 또 아프게 했다. 우습지 않은가. 정작 이 책을 읽어야 할 사람들은 읽지 않을테고 굳이 읽지 않아도 될 이들만 이 책을 찾아 읽으며 위안과 공감을 하며 일말의 안도를 느낀다는 것이. 짐작컨대 이 책을 찾아 읽은 이들도 아마 지극히 괜찮은, 정상적인, 적어도 뭔가가 잘못됐다는 정도는 아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란 사실이 아득하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변하지는 않을 거다. 악기를 배워도 지겹도록 기초 과정을 반복하고, 수학 문제에도 단계가 있는데, 하물며 얽혀 있는 나와 사회의 실타래가 책 한 권 읽고 풀리겠는가. 고정관념은 오랜 시간의 결과물이다. 고정관념을 깨는 것도 그만큼의 시간 동안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야 한다. 


대충 살면 된다고, 내가 무슨 성인군자라고 나 혼자 이렇게 어렵게 사냐고 스스로에게 짜증을 내면서도 내 안에서 움트는 죄책감과 수치심이 늘 길을 막았다. 착하게 살 순 없어도, 착한 게 늘 옳을 순 없어도 그래도 적어도 나쁜 짓은 하지 말자고. 쉽게 살려하면 안 된다고 어딘가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아니, 들리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외로움이냐 천박함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고 쇼펜하우어가 한 말이었던가. 이 괴로움이, 만만찮음이, 고민이, 스스로가 그렇게까지 잘못 살고 있지 않다는 일종의 척도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조금씩은 견딜만해졌다. 


얼마 전 K의 아이 생일을 축하하며 메시지를 보냈다. 좋은 부모나 엄마에 대해 감히 안다고 말할 순 없지만 내 생각엔 어떤 사람이 되어야하는지, 아이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무엇은 하면 안 되는지, 아이가 할 수 있는 무수한 질문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해보고 옳바른 시선과 정직과 도덕에 대해 고민하는, 네가 하고 있는 일들이 이미 그 요건에 포함되는 것 같다고 썼다. 차별과 차등, 옳고 그름, 도덕과 권리와 가치에 대해 생각하고 함께 성장하려는 부모가 있다는 건 그 아이에겐 좋은 일일테고 그러니 너는 지금도 열심히, 잘 하고 있는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그리고 메시지를 보낸 후 문득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슬픔과 절망과 답답함이 그래도 잘못 살고 있지 않다는 일종의 안도라면, 아직은 잘 지내고 있다는 희망도 조금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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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0 03: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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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1 07: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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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3 17: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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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5 18: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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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글이 읽고 싶어졌다. 아니, 생각이 났다. 지금 머릿속을 부유하는 책은 뭘까. 절대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것은 『달의 궁전』이고 가장 자주 떠올리는 것은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였으니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뉴욕 삼부작』일 가능성도 있다. 발밑에 뽀득뽀득 밟히는 눈과 넘어지지 않으려 펭귄처럼 걸어야 하는 겨울날에 읽기에 폴 오스터는 적합하지 않을지 모른다. 적어도 현재의 기준에선 그렇다. 날씨 때문이라면 러시아의 대문호들의 것을 읽어야 할 것이고 이 우울하고 파괴적인 감정에 걸맞으려면 이언 맥큐언을 읽는게 좋을지도 모른다. 따뜻한 곳에 배를 깔고 누워 코지 미스터리를 읽어도 좋고 정반대의 날씨를 경험하고자 남미의 작가들을 읽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어찌됐건 읽고 싶은 글이 있고 생각나는 책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거기에 읽어 온 기억 때문에 머릿속에서 글귀를 헤집어야 한다는 것 또한. 어찌됐건 읽어온 책들이 머릿속 안에, 마음 어딘가에 숨어있든 감춰있든 하기에 떠올랐을테니. 시작은 폴 오스터였지만 끝은 그러니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퍽 새해에 어울리는 다짐이었다. 


지난 달에는 오랜 티켓을 정리했다. 인쇄된 글자가 날아가 몇 개는 아예 보이지 않았고 3년 전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실은 5년 전 일임을 알게 되었다. 이 경우엔 기억이 생생한건지 아니면 내가 매일을 그저 그런 날로 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추위 속에 찾아간 미술관도 비를 홀딱 맞고 들어간 서점도 땡볕을 걸어 보고야 만 영화도, 그 구질구질한 날씨들은 예상보다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남은 것은 미술관에서 본 그림의 파장과 그 날 서점에서 만난 책이 집에 있다는 사실과 땡볕 속에서 보고 나온 영화가 (이른바) 인생 영화가 되었다는 것 뿐이다. 많이 보고 열심히 읽고 꾸준히 쓰고 잊지 말고 기록해야 하는구나. 아, 그래서였나보다. 매일 찍는 사진의 파노라마, 그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었던걸까. 하긴 <패터슨>을 보며 늘 같은 루틴을 사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성실인가, 성실이란 얼마만큼 놀라운 재능인가에 대한 생각을 했었으니 그래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가 분명하다. 


어찌됐건 폴 오스터가 읽고 싶은 오후다(그러나 발췌한 문단은 『달의 궁전』이다. 단언컨대 이 장면 때문에 이 책을 좋아하게 됐다). 




그 아파트에서 나는 1천 권이 넘는 책들과 함께 살았다.

 

내가 빅터 삼촌의 책들을 읽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장례식을 치른 지 두 주일 뒤나는 되는 대로 책 상자를 하나 들어내어 칼로 조심스럽게 테이프를 찢고 그 안에 있는 책들을 모두 다 읽었다그 책들은 어떤 순서나 목적이라고는 없이 마구잡이로 한데 섞여 든 것들이었다거기에는 소설과 희곡역사책과 여행기체스 입문서와 탐정 소설공상 과학 소설과 철학 서적이 뒤섞여 있어서 한마디로 출판물의 완벽한 혼돈이었다하지만 그렇더라도 내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나는 하나하나의 책을 끝까지 다 읽었을 뿐 거기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나에게 있어 하나하나의 책은 다른 모든 책들과 똑같았고하나하나의 단어는 정확히 있어야 할 곳에 있었다그것이 내가 외삼촌을 애도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하나씩하나씩 나는 모든 상자를 열어 한권씩 한권씩 모든 책을 다 읽었다그것이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설정한 과업이었고맨 마지막까지 나는 그 일에 매달렸다.


각각의 상자는 첫 번째 것과 비슷하게 뒤범벅이어서 격이 높은 것과 낮은 것이 뒤죽박죽 섞여 있고클래식 작품들 사이에 한번 읽고 버릴 책들이 흩어져 있고양장본들 사이에 너덜너덜한 페이퍼백들이 끼여 있고던과 톨스토이 같은 작가들의 예술적인 작품들이 잔뜩 채워져 있었다빅터 삼촌은 자기의 서재를 체계적인 방법으로 정리한 적이 없었다그는 책을 새로 살 때마다 그 책을 전번에 샀던 책 옆에다 세워 놓았고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조금씩 장서가 늘어 점점 더 많은 공간을 채우게 되었다책들이 상자 속으로 들어간 순서도 정확히 그런 식이었다다른 것은 몰라도 연대순 배열은 깨어지지 않고 원래의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이상적인 배열 같았다하나하나의 상자를 열 때마다 나는 외삼촌이 살았던 삶의 또 다른 부분어떤 정해진 날이나 주일 또는 달이라는 기간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한때 외삼촌이 차지했던 것과 똑같은 정신적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같은 글을 읽고같은 이야기 속에서 살고어쩌면 그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위안을 받았다.             폴 오스터달의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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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8-01-11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달의 궁전을 다시 읽어야겠어요!!!!

Shining 2018-01-12 22:25   좋아요 0 | URL
와.. 정말 설레는 말이네요. 이 글을 읽고 책을 읽고 싶어졌다는 마음이요(흐뭇) :)
 


 

현재 헐리웃은 하비 와인스틴의 성폭력 파문으로 매일매일이 시끄럽다. 그는 커리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여자들만을 상대로 이런 일을 자행했으며 자신의 주변인들, 특히 권력을 가진 사람이나 그 중에서도 남자에게는 아주 좋은 사람으로 행동해왔다. 그의 폭력을 고발하려는 여자들은 꽃뱀 취급을 받았고 커리어가 끊겼으며 취재를 한 로난 패로우의 용기는 어머니의 지지를 등에 업은 금수저의 치기처럼 치부되었으며 로난 패로우가 소속된 NBC는 이 일을 덮으려고 했던 증거가 있다 그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은 헐리웃 내에 든든한 연줄이 있는 기네스 펠트로나 안젤리나 졸리, 로잔나 아퀘트, 케이트 베킨세일 등도 그 타깃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이른바 쟁쟁한 금수저라고 불리는 카라 텔레빈과 레아 세이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많은 피해자들은 힘이 없고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고 돈이 적은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더 쉽게 타깃이 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 또한 얼마나 무력하고 수치스러운데 심지어, 하물며 그것조차 아니었다. 여자들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폭력의 대상이 된다. 하다못해 재력과 지위와 유명세조차 젠더폭력 아래의 있다는 것은 허망하고 두려운 일이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이 만행은 와인스틴 집안의 경영권 싸움의 영향으로부터 번졌을 거라는 사실과 그의 공고한 카르텔을 유지했을 수많은 프로듀서들, 감독들은 몸을 사리고 있다는 점이다(레아 세이두의 지지문으로 짐작컨대 결코 적지 않은 남성들은 이 문제를 몰랐을리 없을 것이다. 명명백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지키겠다고 말한 올리버 스톤은 벌써 세 건의 성희롱으로 고발되었으며 지지발언을 한 벤 애플렉과 로버트 로드리게즈 역시 성폭력 가해자로 추가 고발이 들어오고 있다. 제인 폰다의 증언으로는 장 뤽 고다르를, 레아 세이두의 발언을 토대로 압델라티프 케시시 역시 영화를 이유로 희롱과 착취를 하는 행동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쯤 되면 헐리웃의 관행이라고 보일 정도로 줄줄이 이야기가 들려오는 중이다). 남배우들 역시 다수가 침묵하고 있음에도 화살은 여배우들에게 향한다. 당신은 정말 몰랐느냐, 당신 정도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몰랐을리가 있냐, 그 당시에 짐작하는 부분이 있다면 왜 말하지 않았나 등등. 침묵한 언론과 음험한 방관자들과 직접적인 가해자들을 두고 엉뚱한 사람들에게 사상검증을 행하고 있다. 심지어 남배우들을 간단한 지지발언에도 "멋있다"고 찬양하면서 여배우들은 비겁자라는 낙인을 찍어 연대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대체 왜 피해자의 행실을, 옷차림을, 연기력과 커리어를 따지는지 피해 젠더인 여성배우들에게만 촉각을 곤두세우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비상식과 불평등과 폭력적인 세상의 장관을 보고 있으니 점차 내가 비정상인건지 의심하게 될 정도다. 


 

대체 그들은 왜 그러는 걸까? 내가 최근 내린 답은 이렇다. 그래도 되니까. 그렇게 행동해도 되니까.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폭력을 저지르곤, 쉽게 잊고 산다. 가해자는 자신이 한 일을 몰라도 되는 입장이다. 그래서 항상 피해자가 폭력을 증언해야 한다.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피해자의 목소리를 온전히 들을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 특히 남녀 구도의 폭력 사건이 있을 때면 대다수 사람은 개인적인 일을 일반화하지 말라고 한다. “여자가 그럴 만했겠지.”“그러게 왜 그런 놈을 만나서. 남자 보는 눈이 그러니...” “여자가 처신을 잘 했어야지.” 이러한 시선을 매일같이 반복되는 젠더 폭력을 여전히 사적인 일로만 치부하게끔 한다.

 

카라 텔레빈은 그의 추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노래를 불렀고 자신이 배역을 따낸 후에도 근거가 그 날의 시간 때문일까봐 수치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레아 세이두는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고 했고, 제인 폰다 정도 되는 유명세가 있는 사람조차 두려워서 지지 발언을 할 수 없었다는것에 죄책감을 느껴왔다고 인터뷰했다. 왜 항상 피해자는, 여성을 자기 검열을 해야 할까. 성적 추행은 물론 성폭력을 당한 후에도 여성은 자신의 처세를 돌이켜본다. 내가 여지를 주지는 않았는지, 오해를 하는 행동을 한 게 아닌지,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 증인이나 증거가 있는지, 내 옷차림이 단정했는지, 술에 취하지 않았는지, 새벽에 가까운 늦은 시간이 아니었는지, 상대방의 차나 집 근처가 아니었는지, 어둡고 낯선 곳에서 일어난 일인지 등등. 그 모든 것을 고려하는 사람은 피해자다. 용기를 내 고발을 하거나 고소를 하면 '꽃뱀'으로 취급받고 반대로 고발이나 고소를 하지 않으면 그것이 추행이나 희롱이 아닌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고, 심지어 강간이 아니라 화간이나 합의된 성관계를 한 '싼 년'이 된다. 상처를 치유하기는 커녕 그것을 내놓은 것조차 사회의 이해가 필요한데 당연히 사회는 그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동등하게 소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고분고분한 대상을 찾는 심리는 ‘내 뜻을 거스를 때 혼낼 수 있다’는 당위를 전제한다. 상대가 여성일 경우 으레 가르치려고 드는 남성의 특성을 일컫는 ‘맨스플레인’은 그래서 중요하다. 단지 ‘가르침’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가르칠 수 있다는 불평등한 구도 자체가 폭력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맨스플레인이 대중적인 언어가 돼서 대화를 하다가 “아, 내가 또 맨스플레인했네”라고 말하는 남자가 많아졌다. 문제는 ‘말’만 그렇게 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인식을 성찰하고 변화하려는 노력 없이 “내가 또 맨스플레인 했네. 이렇게 말하면 또 맨스플레인으로 보이나?”라는 손쉬운 반응은, 결국 자신의 상황을 희화시키며 권력관계는 그대로 가겠다는 굳은 의지를 반영한다.

 

택시를 탈 때 남녀가 느끼는 온도 차에 관한 글이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됐다. 택시에서 카드로 요금을 지불할 때 택시기사에게 욕을 듣는 경우가 많아서 카드를 내밀 때마다 눈치 봐야 했다는 여자들과 달리, 남자들은 그런 불편함을 별로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에 남녀 모두가 놀랐다. 나도 항상 택시를 타고 카드를 내밀 때면 “죄송하지만 제가 카드밖에 없어서요...”라며 미안해했다. “아, 가뜩이나 손님도 없는데 카드야. 아휴. 현금 없어요?”라고 따지던 기사들을 많이 만나왔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고개를 조아렸던 거다. 어쩌다가 “아니, 그게 왜 죄송한 일이에요. 당연히 카드도 되죠.”라고 말하는 기사를 만나면 오늘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자들은 ‘당연히 카드 결제가 가능한 세계’에 살고 있었다니?

여기에서 의심 없이 ‘우리’라고 믿어왔던 집단 사이에 균열이 생긴다. 이 사안에 대해 남자들은 카드로 지불하는 건 손님의 ‘권리’가 아니냐고 말했다. 누군가는 ‘권리’로 당연히 누려왔던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는 걸, 그전까지 서로 몰랐다.

 

뉴스에선 곧잘 여성상위시대라며 떠든다. 근거는 공무원 임용 비율이나 의,약학대 합격률이나 사관학교 수석 등이다. 인류의 성별sex는 현재까진 두 가지다. 여성 아니면 남성. 세계가 만들어지고 지금까지, 예수의 탄생부터만 따져도 2017년동안 남성이 늘 앞서왔다. 이제와 몇 해 여성이 앞서면, 그게 무슨 대단한 거라고 자꾸만 떠들어대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여성이 남성보다 성적이 우수한 사람이 많다면 그게 어떤가. 여성도 남성과 같은 대한민국 국민인데. 그게 무슨 국가적 위기라도 되는 것처럼, 요즘 여자애들은 기가 세서 아들들 기가 죽을까봐 걱정이라는지 참 예민들도 하시다. 적어도 상위시대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과반이 넘는 비율을 차지한다던가 한 시대decade 정도는 내리 독점한다거나 아니면 암묵적인 가산점을 받거나 해야 하는게 아닐까. 여전히 기업은 같은 성적임에도 남성을 여성보다 선호하고 여성들에게 결혼을 할 건지 말 건지와 아기는 안 낳아야 너의 커리어가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암암리에 각인시킨다(남성의 경우엔 기혼이 될 것을 기본값으로 두거나 아이가 생기면 오히려 퇴직하거나 이직할 가능성이 적게 점쳐지므로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할 때도 있단다).

 

살림살이가 지저분한 남성은 결혼할 때가 된건데 요리도 잘 하고 깔끔한 여성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방송에서조차 이야기한다. 아이를 안 낳는 게 이기적이라고 표현하며 내가 낳은 아이가 무슨 세금 대신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말한다. 아기를 낳기 전에는 그렇게나 관심이 있는 사회는 아기를 낳은 후에 나의 처지에는 관심이 없다. 아이를 낙태한 여자는 악마보다 못한 년이 되는데 같이 아이를 만든 남자는 도망가고 없어도 처벌받지 않는다(그래놓고 자신의 여자친구가 낙태를 하면 신고를 하는 남자가 적지 않단다). 아이를 낳고 주부가 되면 남편 등골 휘게 하는 게으른 여자가 되고 맞벌이를 하면 아기를 남의 손에 키우는 모성애 없는 여자가 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남편이 된 남자와는 상관이 없다.

 

그룹 내 절반의 인원이 나머지 절반을 차별하고 폭행하고 착취한다고 말하면 대부분이 화를 내겠지만 그것이 남성이고 여성이라면 '아니'라고 한다. 난 내 여자친구를 사랑하고 그녀를 때린 적이 없으니까. 엄마가 있고 여동생도 있으니까. 딸을 낳고서야 여성 인권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말은 그전까진, 자기가 본 모든 여자들의 인권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나 진배 없다.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염산을 붓고 때리고 죽였다고 해도 여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라고 '이유'룰 찾으려 든다. 여자를 강간하고 성희롱하는 건 '일부 남자들'인데 나를 '일부 남자들'에 포함시키는 건 내게 모멸감을 주는 행위라고 펄쩍 뛴다. 레베카 솔닛의 말처럼 그래서 어쩌라는 걸까. 당신이 여자를 안 때리고 안 죽인 걸 칭찬이라도 해줘야 하는건가.

 

이 책의 이야기는 사적이고 또한 정치적이다. 저자는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이지만 그것을 진폭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당신의 경험의 차이다. 정말 운이 좋게도 성차별이나 희롱에서 꽤 벗어나서 살아왔던 나 자신조차 '아, 그런 분위기 알지.'라거나 '그런 순간들이 있지.' 라는 생각을 했으니 당신에게 아픔이 있다면 이 책은 어쩌면 상처위에 뿌려진 소금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어쩌면 눈물이 찔끔 날 수도 있다. 분노와 좌절과 무력감에 우울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포근하고 따뜻한 이불을 덮은 것처럼 느낄지도 모른다. 나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 아픔을 우리가 함께 공유하고 있으며 동시에 극복할 수 있음에 대한 먼지 같은 희망과 연대 같은 것 말이다. 읽으면서 무척이나 마음이 아팠고 슬퍼씅며 이것을 '여자들끼리는 다 안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서 한밤중에 씩씩대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인류의 절반이다. 우리도 사회의 구성원이며 같은 국민이며 똑같이 세금을 내고 의무를 지고 권리마저 갖고 있다. 그런데 왜 늘 우리만 다치고 무서워하고 설명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하며 우리끼리만 웅크려서 연대해야 하는걸까.

 

“페미니즘이 대체 뭐예요?” 우리 카페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종종 묻는 말이다. 얼핏 페미니즘을 알고 싶어서 묻는건가 싶지만, 뒤에 붙는 말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페미니즘이 대체 뭐기에 남녀 간 대립을 조장해요? 나 보고 (여성)혐오한다고 할까 봐 요즘은 말 한 마디도 편하게 못 하겠어요. 혐오라는 말은 마치 벌레같이 느낀다는 건데, 저는 정말 여자친구 사랑하거든요. 성희롱이나 성차별도 남자,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문제잖아요. 약자의 문제, 권력의 문제. 근데 꼭 성별을 부각하는 건 남녀 갈등만 조장하는 거 아닌가요? 직장 상사 여자에게 성희롱당하는 남자도 있잖아요. 남자도 강간당해요. 그런데 왜 여자만 피해자라고 생각하지요? 여자는 약자가 아니에요.”

이쯤 되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진다. ‘여성혐오’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여자를 싫어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애초에 ‘갈등’을 절대 악으로 여기는 전제까지. 듣다 보면 상대방이 페미니즘은 물론, 요즘 핫하다는 여성혐오에 대한 개념도 공부하지 않고 나에게 모든 문제에 답하길 요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세 가지 정도다. 기초부터 하나하나 알려주거나, 좋은 책을 소개해주거나, 바쁜 척하거나. 에너지가 가장 많이 쓰이는 건 물론 첫 번째 방법. 하지만 막상 여성혐오가 뭐고 어떤 게 문제인지 이야기를 시작하면, 상대방은 으레 “여자도 남자 몸 쳐다보잖아요”“여자도 남자 혐오하잖아요”라며 몇몇 예시를 들면서 모든 것을 해명하길 요구한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본적인 책을 소개해주겠다고 하면, “페미니스트들이 공부하라면서 가르치려고만 드니까 나 같은 일반인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거예요”라며 역정을 낸다. “바빠서 책 읽을 시간 없어요”라는 대답도 자주 돌아오는 멘트다. 더 이상 말이 안 통할 것 같아 대화를 그만두려 하면 이러니까 페미니즘이 반감을 산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지난 일주일 동안만 무려 네 번, 일방적인 해명을 요구하는 손님이 찾아왔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스스로 페미니즘이라는 공적 문제에 관심을 두고 질문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무척 당당하다는 점이다. 페미니즘을 모르는 건 ‘일반인’인 자신에게 당연한 일이고, 알기 위해 찾아온 것만으로도 자신은 충분히 노력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하지만 배우려는 자세 없이 따지듯 묻는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한정적이다. 그러면서도 내게 요구하는 태도는 한결같다. ‘외면하지 말고 하나하나 친절하게 알려달라.’            - 홍승은,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꽤 긴 발췌문이었지만 정말 너무너무 공감이 가는 문장들뿐이라 인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매너가 있다는 사람들조차 굉장히 시혜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로 어디 한 번 말해봐라, 라는 식으로 굴 때가 있다. 그게 '그나마' 나은 사람들이라는게 씁쓸하다. 앞서 이야기했듯 나는 우리의 대부분이 돈이 적어서, 집안이 평범해서, 그들보다 지위가 낮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할 더 큰 가능성에 놓여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미국의 헐리웃의 그녀들조차 자신들만의 폭력에 갇혀 살아가고 있었다. 내 자신이 뭐라고, 나보다 훨씬 좋은 처지에 있을 그들을 동정하려는게 아니라 그저, 예상 외의 무력감과 환멸을 느끼게 했을 뿐이다. 능력과 재력과 지위와 위치와 무관하게 여성은 늘 젠더폭력에 약자라는 것을. 그저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사는 한은 늘 끝없이 두려워하고 경계하며 수치와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막막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끝으로 문유석 판사의 칼럼 중 인상적인 꼭지를 하나 첨부한다(http://news.joins.com/article/20737388). 그의 이야기처럼 앞으로 더 불편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단지' 불편하다는 마음만을 느낀다는 것이, 그 어리석은 순진함이 솔직히 부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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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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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팠다. 붉은 반점이 사정없이 몸을 덮었다. 처음엔 손등이었고 그 다음에는 팔, 어깨, 상체에서 하체로 빠르다면 빠르게 느리다면 느리게 퍼져갔다. 처음 며칠은 발병 원인을 찾기 어려웠고 병명도 쉬이 진단받지 못했다. 일주일 후에야 수포가 생기듯 작은 물방울이 드러났고 그제야 의사는 적상건선, 이른바 물방울 건선이라고 이름을 알려주었다. 원인은 그 전에 앓았던 심한 인후염이었다. 심한 목감기를 앓았을 때 발생한 열이 미처 몸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해 피부로 분출되는 식의 병이라 했다. 퍼져가는 속도는 빠르고 범위가 넓어 겁에 질렸으나 의사는 프로페셔널한, 그래서 조금은 인위적이고 귀찮은 듯한 어조로 가렵지 않고 옮지도 않는 것이며 시간이 좀 걸리긴 하지만 흉터없이 깨끗히 나을테니 걱정말라고 말했다. 그렇게 꼬박 한 달 간 발병과 진단, 치료에 전념했다. 피부과 약은 몹시 독해서 거의 매일 밤 꿈없이 잠 세계를 헤맸고 아침이 되면 몸은 무겁고 정신은 몽롱했다.


배 위의 반점이 분홍색일 때는 그냥 두드러기쯤으로 보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색과 모양이 좀 끔찍해졌다. 처음에는 분홍빛이다 과일처럼 발갛게 무르익은 뒤 검붉어졌다. 그러다 나중에 연한 갈색으로 변하며 비늘처럼 반질거렸다. 크기가 다양한 반점들은 테두리 쪽 색이 유독 진해 타다 만 종이나 화려한 꽃처럼 보였다. 며칠 동안 같은 자리에 허물이 내려앉고 벗어지길 반복했다. 그 위에 다시 '인설'이라 불리는 살비듬이 내려앉아 흉하게 파들거렸다. 몇몇 부위에 벌레 물린 자국이 생긴 게 아니라 나 자신이 벌레가 된 기분이었다.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잃기 전에는 그것이 있는 줄도 몰랐던, 그런 것들이 있다. 그것을 구태여 소홀히 하려는게 아니라, 정말로, 진심의 무구함으로 내게 그것이 있는 줄도 차마 몰랐던, 그런 것들이 있다. 제법 하얀 편이고 점 하나 없고 아무 화장품이나 써도 어디서 자도 '피부가 뒤집어진다'는 체감을 해본적이 없는데다 체모까지 옅어 건강하고 깨끗한 피부에 속한다는 것을 아주 모르진 않았다. 다만 그 모든 것들이 매일 보는 거울 속 지겨운 얼굴처럼 익숙하고 뻔한 것이라 그것이 소중하다는, 소중해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붉은 반점이 돋아나는 피부에 거부감이 느껴졌다. 낫는거라고, 시간이 필요한 거라고 생각하려 해도 초조함과 불안감이 해일처럼 밀려와 한번씩 사람을 오롯이 적시고 떠나갔다. 인터넷을 헤매며 정보를 찾으려 애썼다. 의사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의사는 나만큼 내 병에 대해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절실하지 않다는 불만과 불안 때문이었다. 온갖 좋다는 영양제를 알아보고 생활 습관을 고치려 애쓰고 비타민을 종류별로 비교했다. 당연히 술은 안 마셨고 커피를 대폭 줄이고 케일과 시금치를 사다 야채주스를 만들어 먹었다. 붉은 반점보다 두려운 건, 더딘 회복 속도였고 그보다 절망스러운 건 깨끗했던 피부가 어떘는지 자꾸만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픔의 본질은 외로움인지라, 자꾸만 처지를 잊고 술을 권하는 사람들에게 웃는 얼굴로 거절하는 것이 짜증스러웠고 밤을 누리고 싶어도 쫓아오듯 잡아채는 수면이 서글펐고 커피마저 마음대로 마시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울적했다. 정확히 6주가 지나자 반점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췄다. 이제 제 볼 일이 끝났다는 듯한 가볍고 미련없는 실종이었다. 사람의 기억력이란 우스운 것이라 막상 그렇게 되니 이제는 반점이 있던 위치가 생각나지 않았다. 누군가는 3개월이 걸렸다고 했고 누군가는 꼬박 반년이 걸렸다더니. 참으로 다행이라고, 조금은 느슨해졌을 때였다. 갑자기 오돌토돌 두드러기가 올라오며 온몸이 가려워졌다. 피부과에선 여러 원인을 짚어주었지만 그 중 어떤 것도 해당되지 않았다. 원인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젠 증세가 바뀌어서 또 이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 아득했다. 무엇보다 앞으로 이런 식으로 재발에 재발을 할 거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멍했다.


이틀 뒤였다. 밤중에 가려움을 참지 못해 잠결에 다리를 긁었나보다. 아침에 일어나니 온 다리가 온통 시꺼멓게 물들어있었다. 폭행 피해자의 사진을 찍어놓은 것처럼 온 다리와 팔뚝에 피멍이 들었다. 아직 파랑색인 것도 있었고 보랏빛으로 바뀌는 것도 점상출혈처럼 생긴 자국도 있어다. 심지어 군데군데 피딱지가 앉은 곳도 있었다. 그저 어이가 없었다. 이젠 화를 내기에도 지쳤었다. 그러고 나서 열흘쯤 지난 후, 기억이 나지 않을만큼 아주 오랜만에 참 원없이 울었다. 


- 나는 행복해요.

인간의 복잡한 감정이랄까 거짓말을 분간 못하는 기계를 시험하듯 건넨 말이었다. 시리는 건전하고 또박또박한 말투로 침착하게 답했다.

- 덕분에 저도 행복해지는 것 같아요.

- .......

그저 매뉴얼대로 답하는 걸 알면서도 예상치 못한 답변에 약간 반감이 일었다.

- 아니에요, 슬퍼요.

나는 앞의 말을 정확히 반대로 뒤집어보았다. 어린아이 입에 고기 넣어주듯, 시리가 인간의 언어를 잘 알아들을 수 있게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말한 거였다.

- 제가 이해하는 삶이란 슬픔과 아름다움 사이의 모든 것이랍니다.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책이 그만큼 '감동적'이었다고 말하진 않겠다. '내 인생의 책'이라고 쓰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쉽게 설명할 수도 없고 뻔한 수사를 쓰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이 책에 대한, 이 순간에 나 자신의 감정에 대한,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그저, 그저 아프고 기뻤고, 슬펐고 그러다 눈물이 났다. 책 때문만은 아니었다. 병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도 아니면 내가 양파를 써야만 울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이 이유였고 아무것도 이유일 수 없었다. 


에반의 젖은 속눈썹이 미세하게 파들거렸다. 찬성이 에반의 입매, 수염, 콧방울, 눈썹 하나하나를 공들여 바라봤다. 그러자 그 위로 살아, 무척, 버티는, 고통 같은 말들이 어지럽게 포개졌다.

- 있잖아, 에반. 나는 늘 궁금했어.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아픈 건 도대체 얼마나 아픈걸까?

- .......

- 에반, 많이 아프니? 내가 잘 몰라서 미안해.

- .......

- 있잖아, 에반. 만약에 못 참겠으면....... 나중에 정말 너무너무 힘들면 형한테 꼭 말해. 알았지?  - 노찬성과 에반


그제서야 도화는 어제 오후, 주인아주머리를 만난 뒤 자신이 느낀 게 배신가이 아니라 안도감이었다는 걸 꺠달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수 쪽에서 먼저 큰 잘못을 저질러주길 바라왔던 것마냥.    - 건너편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일한 나이대의 작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감사한다. 같은 사건에 대해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고 내가 중하게 느끼는 것이 상대에게도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예상보다 훨씬, 안도가 되는 일이다. 김애란을 처음 읽은 것이 2005년이었으니 그럭저럭 12년이 지난 셈이다. 12년. 한 아이가 잉태되고 태어나 자라서 기고 걷고 뛰고 유치원을 지나 학교를 들어가 원통의 부피나 방정식을 배우는 시간이자 열두 마리의 동물이 달리기를 한 순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한 바퀴를 회귀回歸하는 주기다. 그녀는 작가로, 나는 독자로 우리는 부득이하게 함께 자랐다. 첫 소설집에서는 섬뜩할만큼 고시원의 눅눅한 삶에 대해 묘사했던 그녀가 5년 전 소설집에서는 사회생활과 여행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크리스마스 날 거리를 배회하는 연인 대신(「건너편」) 집은 있으나 그것이 내 것이 아닌, 낡고 지리한 삶(「입동」)에 대해 쓴다. 부모의 죽음(「가리는 손」)을 담고 배우자의 죽음(「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을 가정해보고, 아이를 키우는 삶의 변화와 그 뿌듯한 경외감과 속된 희생정신(「입동」,「가리는 손)」)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자꾸만 상실을 되짚는다(「노찬성과 에반」). 아주 천천히, 나이 들고 있고 삶의 양상이 변해가는 것을 느낀다. 내가 이제는 학점과 학과와 고시원에서의 삶보다는 갚아야 할 빚과 건강과 부모님의 죽음과 아이를 키우는 삶에 대해 엿보고 그것을 더 큰 삶의 층위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처음엔 가난한 학생이었던 그녀는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제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는 삶과 시부모와 내 부모와 배우자의 사라짐에 대해서 생각한다(김애란 작가에게 아이가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우연히 어디선가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는 읽은 것 같다). 나는 감히 그녀의 실망과 권태와 환멸과 체념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는 나의 불안과 불만과 음울과 슬픔을 위로한다. 그렇게 그녀와 나는 함께 서서히 나이 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제와 같은 하루, 아주 긴 하루, 아내 말대로라면 '다 엉망이 되어버린' 하루를. 가끔은 사람들이 '시간'이라 부르는 뭔가가 '빨리 감기'한 필름마냥 스쳐가는 기분이 들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 점점 그 폭을 좁혀 소용돌이를 만든 뒤 우리 가족을 삼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이유도, 눈이 녹고 새순이 돋는 까닭도 모두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시간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편드는 듯했다.    - 입동


익숙한 것과 헤어지는 건 어른들도 잘 못하는 일 중 하나이니까. 긴 시간이 지난 뒤, 자식에게 애정을 베푸는 일 못지않게 거절과 상실의 경험을 주는 것도 중요한 의무란 걸 배웠다. 앞으로 아이가 맞이할 세상은 이곳과 비교도 안 되게 냉혹할 테니까. 이 세계가 그 차가움을 견디려 눅누가를 뜨겁게 미워하는 방식을 택하는 곳이 되리라는 것 역시 아직 알지 못할 테니까.  - 가리는 손 


문학은, 글은 너무나 비효율적인 예술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예컨대 음악은, 노래는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폭발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반면 글은 그렇지 않으니까. 140자의로도 감동을 줄 수 있다 해도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내 기준에선 140자는 감정이나 사유를 담아내긴 너무나 빈곤한 그릇이었으니. 춤이나 연극이나 발레처럼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없는데다 글자 사용률이 아무리 늘어도 책을 읽는 사람은 자꾸만 줄어드니까. 그러면서도 내 자신이 품을 들이고 시간을 소비하는 식으로 능동적으로 움직여야만 향유할 수 있으니까 등등.


때때로 자기혐오와 자기연민 사이에서 길을 잃곤 한다. 자기 자신의 빈껍데기까지 적나라하게 안다는 이유로 마음껏 자기혐오를 하다 나마저 나를 너무 싫어한다면 그건 조금 가여운 일이 아닐까 생각하며 스스로를 연민한다. 그리고는 자기연민의 껍질을 입은 비겁함에 또 다시 스스로가 싫어지는 식이었다. 줄에 매달린 자석의 추처럼, 둘 사이를 왔다갔다,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비겁하고 저열하고 비참하고 졸렬해서 마지막엔 늘 도망치게 된다. 가끔씩, 도피와 도망의 끝에서 어떤 것을 만난다. 예를 들면 글과 같은 것들.  


우리가 글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있다. 우리가 글을 문학이라 부르고 문학이 예술로 포섭되는 이유가 있다. 글이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든다거나, 나 자신을 구원한다거나 그런 거창한 이유는 아니라 하더라도 맥이 탁 풀려 차라리 울어버리게 만드는, 그래서 또 다시 나아가게 만드는 순간들이 책 속에 존재한다. 위안인지 위로인지 아니면 체념인지 그도 아니면 동지의식일지는 모르나 어찌됐건 글을 읽어서 다행이라고, 이런 글을 만날 수 있으니 앞으로도 책을 읽겠다고 스스로에게 탄식하는 순간들이 분명 있다. 그 모든 감정의 스펙트럼이, 이 책을 읽을 때 일어났다.


두드러기는 눈에 보이지 않게 줄어가고 간지러움도 한결 나아졌다. 나 자신과 의사의 진료 기록 외에는 누구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병은 느릿하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어제의 진료시간에 의사는 여름은 자외선이 많은 계절이라 회복이 빠른거라는, 위로인지 격려인지 아니면 그저 사실을 말하는 것인지 모를 말을 해주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여름을 좋아해본 적 없는데 바깥이 여름이라 다행이라는 말을 듣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그래서 그냥,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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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7-07-22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괜찮아요, shining님?😁

Shining 2017-07-24 22:17   좋아요 0 | URL
이제 괜찮아요. 아직도 여분의 약이 남긴 했지만 증세는 모두 사라진 것 같아요. 정확히 두 달쯤 걸렸네요. 여름, 너무 덥고 힘드네요. 저도 이런데 아이리시스님은 몸이 더 무겁고 그만큼 힘들 것 같아 걱정이 돼요 :( 건강한거죠?

2017-07-24 23: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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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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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실상부 추리소설의 여왕이라 불리긴 해도 현재에 이르러 애거서 크리스티는 과소평가된 부분이 있다. 이해는 간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탐정은 코난 도일의 것처럼 괴팍하고 뛰어나지만 그보단 정중하며 앨러리 퀸처럼 복잡한 트릭을 사용하지 않는다. 에드거 앨런 포만큼 공포스럽거나 음울하지 않으며 반 다인처럼 자신의 교양과 지식을 드러내는 타입도 아니다. 모리스 르블랑처럼 화려한 볼거리가 많은 것도 아니며 존 딕슨 카가 그러했듯 기과한 사건을 다루지도 않는다. 추리소설 계에 드문 여류소설가임에도 각별히 -이른바- 여성적인 시각으로 글을 쓰는 타입도 아니다. 에르큘 포와로 탐정은 다소 우스꽝스러운 외모와 비非 영미권 출신이라는 특성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신뢰보다는 불신과 의아함을 품게 하며 마플 여사는 안락의자에 앉아 사건을 해결하는 카우치형 탐정인 할머니다. 거기에 사건의 주무대가 저택이라던가 선상, 별장 등이며 대개는 계층보다는 계급별로 나뉜 인물에 대해 다루기 있기 때문에 현재의 시각으로는 그야말로 고루하고 케케묵은 소설로 읽히기 쉽다. 때문에 혹자는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 제인 오스틴 소설'이라거나 전형적인 코지 미스터리라는 식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모두 이해할만한 반박이고 어느 부분에선 맞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애거서 크리스티를 경애하고 지지해왔다고 말한다면 '왜'냐고 물을 것이다. 그때를 대비하여 내게는 몇 개의 리스트가 있다. 우선 첫만남에 기선 제압(?)을 하기엔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만한게 없다. 화려하면서도 연극적이고 동시에 반전이 대단하다. 스포일러를 밟지 않았다면 이 글을 읽고 당신은 아마 반드시 놀라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ABC 살인사건』이 있다. old but gold라고 하지 않던가. 클래식은 클래식이다. 이 세 권은 언제나 실패하지 않았다. 반전이 중요한, 스릴러적 요소를 중요시한다면 『애크로이드 살인사건』과 『누명』, 『장례식을 마치고』등이 준비되어 있다. 블록버스터식 스케일을 읽고 싶다면 『빅 포』가 포와로 탐정을 사랑하게 된 이에게는 『커튼』을 슬쩍 놓고 간다. 코지 미스터리처럼 소소하고 일상적인, 잔인하지 않은 이야기가 끌린다면 『다섯 마리 아기 돼지』와 『코끼리는 기억한다』에 만족할지 모른다. 


단, 주의할 점이 있다. 당신에게 만약 클래식이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이 이미 크리스티의 영향권 아래 있기 떄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현재의 시각으로 소급해서 바라보면 안 된다. 이미 수많은 책과 영화가 이 소설들의 모티프나 트릭 등을 따왔기 때문에 당신에겐 '생각보단 심심하거나 뻔하게' 보일수도 있지만 그건 그만큼 크리스티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이지 그녀의 것이 각별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예를 들어 거의 모든 장르 영화는 히치콕에게 빚을 졌기 때문에 이제는 히치콕이 조금은 평범해보이는 마법처럼 말이다). 그리고 당신은 한 번 더 묻는다. 그럼 애거서 크리스티의 장점은 다양함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살아 생전 대략 100권의 책을 쓴 작가다. 게다가 40년이 넘는 시간동안 글을 썼으니 그녀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의 변화만큼 책이 가진 성격 역시 바뀔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녀의 다양성 역시 장점이 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그녀의 진짜 정수는 바로 이런 소설들을 통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비뚤어진 집』,『끝없는 밤』그리고『봄에 나는 없었다』와 같은 글 말이다. 


앞선 두 소설은 애거서 크리스티 이름으로 발표된 본격 추리소설의 성격을 띠고 있고 『봄에 나는 없었다』는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책으로 한 사람의 심리를 집요하게 써내려간 마치 에세이같은 서스펜스물이다. 앞선 두 글에서 애거서 크리스티는 인간이라는 우물을 가만히 관찰하는 것처럼 한 사람에게 다가간다. 호들갑스러운 살인사건이나 마루바닥을 적시는 흥건한 피나 잔인한 살인수법, 기묘한 트릭이나 수상한 용의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이상하고 불안한, 불온하고 기묘한 사람과 그것에 조금씩 숨통이 조여지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이유를 모르고 손톱을 까득까득 깨물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마지막 순간 맥이 탁 풀리면서 어디선가 차갑고 무기질적인 시선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특정한 사람이 아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 즉 보편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한순간 멍해진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글을 읽고 나면 범죄나 잔인한 수법이나 사람의 잔인성에 놀라기보단 그저 사람이라는게 이토록 무섭고 무겁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아름답고 평온하게 살아가는 조앤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잉여의 시간동안 그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일, 즉 자기 자신과의 대면을 하게 된다. 다정하고 온순한 남편, 사랑스러운 아이들, 그리고 아름답게 나이들어가는 자기 자신. 그녀는 자기 삶에 만족하고 있으며 몇 가지 크고 작은 문제들은 잘 해결될거라 믿는 낙천주의를 갖고 있다. 하지만 남편도 아이들도 없는 그 시간, 읽을 책도 없고 특별히 해야 하는 일도 없는 여행의 시간에 조앤은 자신이 믿고 있던 것들이 실은 기만이나 위선으로 이루어진 것일 수도 있음을, 자신이 얼마나 가혹하고 못된 사람인지를 자각하게 된다. 


“엄마는 아빠가 사무실에서 노예처럼 일만 하게 내버려뒀어요. 뻔히 알았으면서도요. 아빠는 오랫동안 일을 너무 많이 하셨다고요.”

“나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었겠니?”

“진작 거기서 아빠를 빼냈어야죠. 아빠가 그 일을 싫어하는 걸 모르셨어요? 엄마는 아빠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이제 그만해라, 토니. 당연히 나는 네 아빠를 잘 알아. 너보다 훨씬 많이 안다.”

“글쎄요, 아닌 것 같은데요. 가끔 난 엄마가 그 누구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로드니는 성급하게 대꾸했다. “지금 그는 제정신이 아니란 말이야. 조앤, 사랑에 대해 그렇게 아무것도 몰라?”

이렇게 이상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 있을까! 그녀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건 사랑 아니에요. 난 이런 말을 할 수 있어 다행이지만......”

그러자 로드니는 아주 뜻밖에도 조앤에게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불쌍한 우리 조앤.“ 그러더니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조용히 나갔다.


“이제 특별히 한마디만 더 하겠다. 나태한 사고는 금물이야, 조앤! 사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게 가장 쉬운 길이라고 해도, 또 그게 고통을 면하는 길이라 해도 그래선 안 돼! 인생은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거란다. 그리고 자기만족에 빠지면 안 돼!”


수없이 반추되는 기억들을 곱씹으며 그녀는 자신의 이기적임과 저열함과 속물근성을 깨닫고 몸소리치며 참회한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그녀의 이타심과 관대함과 공명정대함은 사라지고 그녀는 다시끔 보통의, 원래의 그녀로 돌아온다. 이제 독자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우리는 그녀를 쉽게 비난한다. 그녀 자신이 느낀 자신의 부족함, 저열함, 비겁함과 졸렬함, 이기심 등에 같이 혀를 찬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그녀를 한심하게도 바라보면서 사람이란 이토록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인간은 그리 많은 변화나 변혁을 하지 않기에 우리는 누군가의 변화에 대한 글이 각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조앤 주변의 인물들을 동정하거나 연민해도 된다. 그렇게 제 3자가 되어 누군가를 쉽게 비난하고 비판한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가 만약 타인의 것이라면, 오롯이 순수하게 타인의 것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의 이야기고 또 다른 당신의 것이고 내 것이라면. 진짜 이야기가 되는 시간은 너의 이야기가 내 것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는 순간이 아닐까. 애거서 크리스티는 마지막 단락을 넣음으로써 이 이야기가, 이 저열함과 비겁함과 이기심이 오롯이 조앤의 것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조앤과 로드니와 에이버릴, 바버라을 비롯해 종국에는 우리 모두를 끌어들인다. 어둠 속에서 앉아 쉽게 타인을 평가하고 비판하고 마치 제 것이 아닌 것처럼 킬킬대고 고고한 척 하던 우리에게 갑자기 스포트라이트가 돌아서며 조명이 떨어진다. 


나는 조앤과 같은 사람이 아닌가. 정말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함부로 타인의 안위와 행과 불행을 단정짓고 값싼 연민과 자기 변호, 자기 연민과 합리화 등으로 나이테를 만들고 사는 이가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봄에 없었던 것만은 조앤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모든 계절에 없었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그렇게 조앤을 향한 거부감을 우리 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바꾼다. 그리고 그 혐오감은 섬뜩함을 선사한다. 그것도 아주 점잖은 방식으로 말이다. 바로 이게 추리소설의 여왕이라 불리는 그녀의 저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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