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이 쓰는 글쓰기에 대한 책들은 대부분 재밌있다. 사실 재밌을 수 밖에 없다. 일단 이런 책을 썼다는 것부터 저자가 유명작가라는 방증이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나 '글쓰기에 관한 책을 쓸 정도의 유명한 작가'들은 대개 좋은 문장가이기 때문이다. 고로 어떤 논지의 글이든 대체로 재밌고 유익하며 대체로 이런 생각을 하게 한다. 창작자란 근본적으로 깊이 없는 자기혐오와 근거 없는 자기애 사이에서 널을 뛸 수 밖에 없다는 설득과 마법의 묘약은 없다고 저자가 말함에도 불구하고 눈에 불을 키고 그 책 안의 마법의 묘약을 찾는 내 자신에 대한 저열함, 어쨌든 그들은 삼십 말의 구슬을 꿰고 꿰어 훌륭한 진주목걸이를 만들었다는 걸 알기에 내가 그들에게 동질감을 가져봐야 삼성회장이나 나나 똑같은 갤럭시 폰을 쓴다는 것 정도의 위안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자괴감 말이다. 게다가 온갖 작법서를 뒤적여봐야 좋은 캐릭터를 만들어라, 첫 챕터를 잘 써라, 초고는 원래 10%밖에 남지 않는다 등등 모두가 알지만 아무나 흉내내기 힘든 맛집 같은 이야기를 하니 어째 좌절감만 심해지고 이렇다 할 도움은 되지 않는다.  


 

  먼저 두 종류의 스케치북이 필요하다큰 것작은 것큰 것은 댐 전체의 조감도마을지도도로와 주변 지형 등 큰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하다큰 그림이 완성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반복해서 그리면서 수정을 하고수정이 끝나면 그림 속 동네가 우리 동네처럼 익숙해져야 했기 때문이다. ‘마을 진료소를 생각하면그곳이 어디에 있는 어떤 건물인지 자동으로 떠올릴 수 있도록작은 스케치북은 세밀화를 그리는 데 쓴다집 안 구조나방 구조장면이나 상황인물의 동선 등소설을 끝낼 때까지 그려야 하는 그림이기도 하다예를 들어현수가 세령을 차로 친 후호수에 유기하는 장면을 쓴다고 하자주변 사물의 상태자동차의 깨진 유리창전조등의 각도 등을 하나하나 그려가며 세령과 현수의 동선을 순서대로 정리해둔다.


의도하건의도치 않건소설에는 작가의 일부가 녹아 있을 수 밖에 없다과거든현재든사고방식이든성격이든이는 독자가 알고 있고 독자가 안다는 걸 나도 안다때문에 주인공을 미화하거나 허세를 떨고 싶은 때가 있다나를 무식쟁이로 볼까봐폭력적인 성격으로 단정할까봐비겁한 찌질이로 여길까봐그럴 때마다 생각한다작가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성인이 아니라고세상 모든 것에 대해 답을 가지고 있는 진지한 존재도 아니고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일 뿐이다이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위선을 떨게 된다독자는 작가의 위선을 예민하게 알아차린다위선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차라리 악당을 좋아할지언정누구나 그렇지만특히 작가에게는 솔직함이 중요한 미덕이다.


단어 선택과 문단 구성에도 몇 가지 원칙이 있다. 동사는 수식어의 도움 없이 스스로 땅을 딛고 설 수 있을 만큼 튼튼한 걸 고른다. ‘뛰다보다 속도나 모양새의 속성을 담은 내닫다’‘치닫다’‘쇄도하다같은 동사를 선호한다. 이런 동사를 쓰면, ‘빨리뛰었다, 라고 쓰지 않아도 된다. 형용사는 아껴 써야 한다. 남용하면, 독자에게 작가가 원하는 느낌을 받도록 강요하는 꼴이 된다. 패션도 포인트가 지나치면 보는 이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나. ‘아름다운 꽃이라고 쓰는 대신 꽃의 모양이나 색깔, 주변과의 조화를 묘사하는게 낫다. 아름다움은 독자가 알아서 느끼도록 남겨두시고.(중략) 부사는 항생제 같은 거다. 한두 번은 확실한 효과가 있지만 자주 쓰면 내성이 생긴다. 가령 너무라는 부사를 습관처럼 쓰면 정말로 너무한 일에 썼음에도 전혀 안 너무한 일처럼 느껴진다. 문장이 야단스러워지는 면도 있고.


그런 면에서 정유정 작가의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는 꽤 현실적인 도움을 주는 책이다. 이 책을 근거로 추정컨대 작가는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해 별다른 과장을 하지 않는 편이다문학의 숭고함을 강요하지도 그것의 지난함을 과용하지도 않는다자신의 경험을 무용담처럼 늘어놓지도 않으면서도 은근한 웃음으로 영업비밀을 숨기는 맛집처럼 굴지도 않는다허황된 예를 늘어놓는 대신 본인의 작품 속 본인의 문장을 인용해서 말하기 때문에 다른 이를 경탄하거나 힐난할 필요도 없으며 막연한 예시가 아니라 사실적인 이해를 돕도록 한다.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어떤 곳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시치미를 떼는 대신 스티븐 킹요시다 슈이치켄 키지레이먼드 챈들러 등 감흥을 받은 작가들을 가리지 않는다자신이 썼던 책들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완성했는지를 샅샅이 밝히고 그러면서도 인칭이나 묘사문장의 구조 등 모든 작법서에 등장하는 부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소재를 얻는 방법, 소재를 얻은 후 플롯을 구성하는 방식, 인터뷰를 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 등에 대해서 대부분의 작가 혹은 작법서에서 -고의이든 아니든- 빠뜨리는 부분을 꼼꼼히 기록한다. 어쩌면 작가가 말하는 과정을 따라 봐야 동등한 글을 반드시 쓸 수 있지 않음을 알고 있는, 냉담하고 예리한 태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이 책의 위치는 좀 애매한 편이다. 작가 혼자 일방적으로 원고를 써낸 구조가 아니라 인터뷰 형식인지라 상대적으로 덜 지루하며 이야기의 논조를 바꾸긴 쉬운데 대신 진짜 이런 대화를 문어체로 주고받았나? 너무 작위적인 대화가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는 부분도 있다. 그 점에 대해선 내가 작가와 저자편집자가 아니니 뭐라 할 순 없지만 약간 불편한불안한 부분이 없잖아 있다. 하지만 어디서 이렇게 자세하고 세밀하게 글쓰기의 과정에 대해 들을 수가 있을까. 태반의 강의와 작법서, 작가들의 글쓰기 노트에선 볼 수 없었던 내용이 이 책 안에 담겨져있다. 그런 면에서 작가가 되거나 혹은 글을 더 잘 다루고 싶은 사람이라면 어느 부분이든 유효한 면이 있을테니 한 번쯤은 읽기를 권하는 바다. 


자, 하지만 이렇게 친절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친절하기에 더더욱- 우리는 위축되고 주눅이 든다. 플롯을 다루고 내러티브를 구성하고 주어와 동사, 형용사와 부사와 목적어를 붙이는 방법을 알고 백 날 스티븐 킹의 글을 필사해봐야(심지어 그의 책들을 길다... 너무... 길다......) 작가는 커녕 의미있는 글조차 쓰지 못할거란 겁을 먹는다. 자기애나 자신감 대신 자기혐오와 자기비하에 시달리고 결국엔 쓰고 싶었던 내용조차, 주제나 문장은 커녕 소재의 끄트머리조차 붙잡기가 힘들다. 내가 쓴 글을 누군가 읽기나 할까? 읽히지 않을 글을 대체 무엇 때문에 쓰려고 하는가? 달음박질 친 영감을 따라잡긴커녕 제 자리에 서서도 밭은 숨을 쉬게 된다. 

 

 

  나는 당신이 글쓰기는 시간 낭비가 아니라고 확신하게 하고 싶다느낌과 상상력과 지성을 사용해야 하는 다른 창조적인 일도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다당신이 쓰는 문장 하나하나에서 당신은 무언가를 배운다글쓰기는 당신에게 유익함을 주고당신의 이해를 확장시킨다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설령 내 글이 앞으로 다시는 출판되지 않을 것이며그것으로 단돈 한 푼도 벌지 못하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나는 기꺼이 계속 글을 쓰겠다.


영감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영감은 매우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온다. 당신이 글쓰기를 시도한다고 해보자. 아마 첫날에는 그다지 많은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아무것도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신은 타자기나 종이 앞에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며, 한두 시간쯤 아무 생각 없이 머리카락만 쓸어 넘길 것이다. 전혀 걱정하지 말라. 그것은 좋은 일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다만 당신은 줄곧 타자기 앞에 앉아있어야 하며 공상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조만간 무언가를 이야기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기만 하면 된다. 또한 당신은 내일도 잠깐 틈을 낼 것이고, 또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 영원히 언제나 그렇게 앉아 있으리라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모든 사람은 재능이 있고 독창적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오랫동안 뚫고 나오지를 못한다. 사람들은 너무 겁을 내고 너무 자의식적이고 너무 자존심이 세며 너무 부끄러워한다. 그들을 구성, 줄거리, 통일성, 전체, 일관성 등에 관해 지나치게 많이 배운 것이다.

 

만약 당신이 스스로 쓴 글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좋은 징조이다. 그건 도달하기 어려운 먼 곳까지를 볼 수 있는 시야를 당신이 갖고 있다는 뜻이다.

 

앞서 말했듯 글을 쓰라고 다독이는 작가들은 대개 유명하고 성공했으며 대단한 문장가들이다. 마크 트웨인, 스티븐 킹, 레이먼드 챈들러, 조지 오웰, 무라카미 하루키 등이 쓴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를 읽어봐야 한숨밖에 터지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브렌다 유디트의 『글을 쓰고 싶다면』은 부담을 훨씬 덜어주는 책이다(그렇다고 저자가 덜 유명하거나 문장이 덜 훌륭하다고 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앞서 말한 작가들이 쓴 글들이 대개 '내가'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는지, 나는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지 등에 대해서 개인적인 관점에서 마치 회고록처럼 접근하는 것과 다르게 이 책은 나와 너, 얘와 쟤가 가진 모든 불안에 대해 보편적으로 접근한다. 영감을 얻을 수 없다고 믿는 잘못된 괴로움의 어리석음이나 내 문장이 읽히지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누군가 비웃을 수도 있다는 망설임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발씩 내딛는 용기를 이해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대부분은 실패자이며 앞으로도 실패자이니 그 실패가 모두 의미없는 것은 아니라는, 자기계발서에 나올 법한 뻔한 말들을 믿게 하는 묘한 진솔한 힘이 이 책 안에 있다. 물론 허황된 일반론적인 이야기만 하는게 아니라 실존인물과 주변인이 쓴 글과 본인의 글을 인용하는 등의 예시를 통해서 힘을 보태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읽다보면 이상하게도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 뭐라도 쓰고 싶고 느끼고 싶고 기록하고 싶다는 열망.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가장 중요한 그 소망을 충동질한다는 면에서 이 책은 꽤 소중하다.


물론 이 두 권의 책을 읽는다고 갑자기 놀라운 문장가가 될 수는 없다. 그런 기적은 이 두 권 뿐 아니라 어떤 책을 읽는다고 해도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책들을 읽고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길 바라고 그 마음이 실현으로 옮겨질 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Marjorie Prime, 마이클 알메레이다, 2017


그래도 넌 알아보네. 이모가 내게 던진 말에 할머니는 그럼, 예쁘잖아. 지금도 예쁘네. 라고 말하신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기억보다 강한 초기 치매환자에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엄마가 형제 중 첫째라 언니와 나는 할머니에게 제일 오래된 손주니까. 이야기를 나누다 맥락을 놓치고 모르는 사람을 아는 사람이라고 하다가 다시 또 언제 왔냐고 하고 또 어느 날엔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를 한다. 기억은 선행적이지도 않고,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난데없이 사라지거나 끊기고 다시 이어지길 반복한다. 연세를 생각한다면, 어찌보면 당연한 정도지만 그래도 볼 때마다 마음이 쓰린 것은 어쩔 수 없다. 안타깝고 안쓰럽지만 함께 하는 이에겐 자주 지치고 화를 만드는 병이다. 늙는다는 것, 쇠퇴해지고 몰락해가고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런 일이다. 


마조리(로이스 스미스)역시 치매 환자다. 본인은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그녀의 기억도 나의 할머니와 비슷하다. 어떤 날은 놀랍도록 또렷하고 명료하지만 어느 순간엔 방금 하던 이야기도 맥락을 놓치고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다. 마조리는 그녀의 딸 테스(지나 데이비스)와 사위인 존(팀 로빈스)와 함꼐 산다. 그리고 최근엔 젊은 시절의 남편, 월터(존 햄)의 인공지능도. 월터는 시시때때 나타나 그녀와 대화를 나눈다. 대부분 오래전 이야기. 키우던 강아지나 프로포즈 날 함께 봤던 영화 같은. 월터는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가지만 사실 그의 대화의 바탕은 테스와 존, 대부분 존의 이야기에 있다. 그러니 애초에 이 '기억'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이야기는 마조리와 월터로부터 (아마도)테스에게로, 다시 존에게로 몇 번을 걸쳐 넘어온데다 진위 여부를 확인해줄 사람은 월터와 마조리 뿐인데 한 사람은 고인인 되었고 한 사람의 기억은 믿을 수가 없으니. 월터는 보통의 인공지능이 아니다. 그는 학습하고 판단한다. 존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마조리와 대화를 나누고 그녀가 원하는 바람이나 상상에 따라 기억을 수정해주기도 한다. 프로포즈 떄 함께 본 영화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이었지만 고전적인 극장에서 흑백으로 본 <카사블랑카>이면 좋았겠다는 그녀의 바람대로 그 다음번엔 프로포즈 때 <카사블랑카>를 봤다고 말한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든 기억에 대한 상기이든 아니면 그저 대화상대가 필요해서든 존은 월터의 존재가 마조리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하지만 테스는 그렇지 않다. 그는 아빠의 모습을 한 월터가 불편하다. 그것도 하필이면 돌아가실 적, 자신의 마지막 기억의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가 더 선명히 기억하는, 한참 젊은 시절의 모습이라는게 불만이다. 


William James had the idea, and it's been confirmed scientifically, that memory is not like a well that you dip into or a filing cabinet. When you remember something, you remember the memory. You remember the last time you remembered it, not the source. So it's always getting fuzzier, like a photocopy of a photocopy. It's never getting fresher or clearer. So even a very strong memory can be unreliable, because it's always in the process of dissolving.


인공지능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그러하나 시간이 흘러 마조리가 떠난 자리에 그녀 역시 엄마의 모습을 불러온다. 자신의 마지막 기억대로 노쇠한 어머니를. 다정하고 인내심 있는 마조리의 모습이 테스는 더욱 화가 난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받는 딸이 아니었다고 여긴다. 어머니의 마음엔 닫힌 문이 있었으며 마조리는 존을 반기지 않았고 자신에게 사랑한다 말해준 적이 없으니까. 어리석은 무의미한 행동이라고 여기면서도 기어코 그녀를 소환해 곁에 두고서는 당사자에겐 할 수 없던,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어그러진 진실이 밝혀진다. 월터 말고도 마조리에게 구애하던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프로 테니스 선수였고 세계랭킹 8위까지 올라간 전적이 있다는 대화를 한 적이 있는데 사실 그는 테니스 선수가 아니라 사업가였다. 하지만 존은 마조리와 월터에게 그렇게 말했고 어느새 마조리는 그것을 사실과 혼동해 자신의 기억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들이 키웠던 강아지는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였고 그들에겐 세상을 떠난, 자살한 아들이 있었다. 다음 장이 되면 비슷한 변주가 이어진다. 남겨진 건 존이고 그는 테스가 떠난 자리를 그리워한다. 이해할 수 없던 그녀의 마지막. 그 후의 삶. 기억과 기억은 중첩되고 중축된다. 그리고 마침내 추운 겨울이 되고 마지막 자리에 월터, 마조리, 테스가 모인 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그들의 진짜 기억에 대해 듣게 된다. 


네 명의 배우로 이뤄진 영화는 고요하고 정적이다. 처음엔 정적이고 고요하고 시간이 지나도 도통 모를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장에 다가오면 그제서야 알게 된다. 비단 치매 환자가 아니라도 기억은 누구에게든 완벽하거나 완전할 수 없음을. 어떤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아주 선명하게, 사진처럼 남지만 어떤 기억은 바람처럼 흩어지는다는 것을. 그렇다면 어쩌면 중요한 건 완전한 기억의 복원이 아니라 그 순간에 느꼈던 그 강렬한 감정의 상흔이나 기억을 해줄 상대를 갖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관계의 역사가 기억의 의미일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월터와 마조리, 마조리와 테스, 테스와 존으로 이어지는 관계도 속에서 누군가는 나를 기억하고 그 기억에 의존해 살아간다는 사실이 아연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제멋대로 추억을 쓴 사람이 또 있다. 얼마 전 읽은 책의 작가, 줄리언 반스의 가장 유명한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주인공 토니 웹스터다. 토니의 반에 전학 온 친구, 에이드리언을 만나면서 시작하는 이야기는 이내 그에 대한 매료로 바뀌며 동시에 베로니카라는 여자친구를 사귀는 것으로 이야기가 발전한다. 그녀의 초대를 받아 집에 가게 된 토니는 그녀의 집안과 자신 사이의 계층적 괴리감과 가족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과 불안, 베로니카 엄마의 이상한 말과 스킨십의 여부 등의 여건이 맞지 않아 결국 헤어지게 된다. 그러다 얼마 후 베로니카가 에이드리언과 사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두 사람에 대한 축하를 전하지만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에이드리언의 자살이었다. 그리고 40여 년이 흘러 재회하게 된 베로니카에게서 자신의 기억의 이면을 듣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개인적으론 굉장히 불쾌한 소설이었다. 커가는 딸을 질투하고 경계해 노골적으로 딸의 남자친구를 꼬여내려 하는 베로니카의 엄마(남은 사람들의 상처는 생각도 않는다, 책임의식도 없고)도 온갖 고고한 척은 다 했지만 결국 이기적이고 즉홍적이며 제 행동에 책임 하나 지지 못하는 에이드리언도, 좋을대로 기억을 왜곡해놓고 자신이 상처 준 상대와 재회하며 내심 로맨스를 기대하는 주인공 토니 또한. 좋은 것만을 쓰고 그리는 것만이 문학이고 예술은 아니라고 하지만 읽고 나서 이렇게까지 불쾌감을 느낄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짜증을 유발했던 글이었다(물론 이 불쾌감 역시 작가의 문학적 트릭이겠지만).


"언뜻 생각하기엔 단순한 질문으로 시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역사란 무엇인가, 라고 말이지. 뭐 생각나는 것 있나, 웹스터?"

"역사는 승자의 거짓말입니다." 내 대답은 좀 빠르다 싶게 튀어나왔다.

"그래, 안 그래도 자네가 그렇게 말할까봐 걱정을 좀 했는데, 그게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는 것 기억하고 있나, 심슨?"


에이드리언이 줄곧 인용했던 말이 무엇이었나?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하지만 불쾌함과는 별개로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임은 분명하다. 처음에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상반된 기억을 할 수 있을까, (정확히는) 어떻게 이만큼의 자기합리화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뜨악함이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점차 -어느 정도든- 수긍하게 된다. 정도의 차이가 다를 뿐 누구나 자신의 기억을 조작하고 곡해하고 해석하며 살아가는 면이 있으니까. 덜 사랑하거나 많이 사랑받는 사람,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더 많이 사랑하고 덜 받고 잃을 게 많은 사람에 비해 고집스럽고 오만하다. 일방적인 상처를 단순히 추억으로 승화하기도 하고 나에게만 좋았던 시절을 상대 역시 그랬으리라 자위하기도 한다. 처음엔 합리화였고 자기기만이었으나 이내는 자기주문을 자기 기억으로 바꾸는 식이다. 토니처럼 사실과 기억의 간극이 어마어마하지 않을 뿐 누구나 크고 작은, 잘못된 기억을 안고 산다. 


다시 영화의 이야기로 돌아가볼까. 잘못된 기억과 증언은 테니스 선수에게만 있지 않았다. 월터가 마조리에게 프로포즈 한 날 본 영화가 <카사블랑카>가 아니라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이란 것은 관객들도 알지만 사실은, 영화관도 아닌 모텔 방에서 방영된 TV속 영화였다는 것은 마지막에서야 알게 된다. 마조리는 프로포즈의 순간이 벌거벗은, 정사의 후의 모텔 방이라는 것이 속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장소를 영화관으로 바꿨지만 어느새 본인조차 진심으로 믿게 되었으며 치매를 앓는 노년이 되어서는 영화조차 바꾸고 싶었다. 두 사람이 데미안을 잃은 후 벤치에 앉아 퍼레이드를 지켜봤다고 했지만 사실 그 일은 실외조차 실내에서, TV의 자료화면을 봤을 뿐이었다. 하지만 흩날리는 사프란 색은 맞았다. 


하긴 기억이란 원래 그런 면이 있다. 어떤 것은 평생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허무하게 흩어지기도 하고 어떤 기억은 별 것 아님에도 평생동안 기억하게 된다(예컨대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수업시간의 일부를 지금도 기억한다. 맛은 좋지만 금세 변해버려서 에이 이 신숙주 같은! 이라고 부르다보니 숙주나물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선생님의 억양과 초록 칠판을(숙주나물의 어원이 진짜 이런지는 따로 찾아보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기억하고 싶어서), '금세'란 '금시에'란 말이 줄어들어 된 말이라는 고등학교 2학년 국어선생님의 글씨체를 이상하게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제는 만나지 않는 사람의 생일을 지금도 기억하지만 그 사람의 생김새는 이제 흐릿해졌고 내겐 그렇게나 행복했던 시간이 누군가에겐 지옥의 동시간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기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명곡으로 뽑는 이소라의 <바람의 분다>에도 이런 가사가 나오지 않는가. 

 

사랑은 비극이어라그대는 내가 아니다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오래 전부터 한 생각이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쓴 편지를 받은 모든 사람을 찾아가 그것을 회수해오고 싶다. 그 순간의 감정들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아니다, 얼마쯤은 그렇다). 하지만 그 감정을 표출하는 방식, 그 날 것 그래도의 열정이 지금에 와선 뜨겁고 과하다고 생각해 가끔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생각이 나 이불 속을 파고들 때가 있다. 그래서였나. 없애달라고 부탁했던 책이 출간된 카프카를 동정한 적이 있고 때론 (그럴리도 없지만)유명인이 아니라서 다행이란 생각도 한다. 그러면 편지, 일기, 낙서 등이 모두 공개가 될테니. 점점 더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삶을 지향하게 된다. 무엇 하나 뚜렷하게 정해진 것도 없고, 불멸도 없는 삶이라면 지나고 나면 타버릴 감정들로 기억을 만들고 싶지 않게 된다. 기억한다는 것은 아름답고 숭고하고 찬란하지만 그 기억이 확실하지도, 진실되지도 않는다면 또한 참담하고 비참하리라는 생각에. 비극은 사랑 뿐만이 아니다. 기억이 다르게 적힌다는 것. 그게 기억을 잃는 것만큼 큰 비극일수도 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18-11-04 0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떤 일을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일이 있기도 하겠지요 누군가는 별로였는데 그걸 아주 좋게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다 자신한테 좋게 기억하는 건지... 누군가와 기억을 맞춰본 적이 별로 없어서 다른지 잘 모르기도 합니다 저는 좋은 것보다 안 좋은 게 더 많은 듯해요 좋은 일도 있었을 테지만, 안 좋은 것들이 그런 걸 다 덮어버린 건 아닐지... 자신이 보는 것과 다른 사람이 보는 게 달라서 기억에 차이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차이가 있을지라도 자신한테만 좋게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저는 그렇게 했는지, 그러지 못했을지도...

좋은 기억을 만들려고 하는 건 어떨지, 그건 억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팻 캐바나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일들은 연속적으로 일어남으로써 마치 필연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중첩된 우연이 특정한 정조나 감흥을 더 깊은 수렁 속에 밀어넣는다. 예컨대 일어난 순서는 이러하다.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을 봤다. 치매를 앓고 있는 마조리에겐 하나뿐인 딸 테스와 사위인 존, 그리고 남편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한 인공지능 월터가 있다. 월터는 인공지능인 만큼- 테스와 존의 이야기로부터 마조리의 추억을 마치 월터 자신의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 하지만 그라고 늘 완벽한 건 아니다. 때문에 그는 마조리가 그 대신 ~했으면 좋았을텐데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다음번엔 마치 그녀와 그의 기억처럼 바꿔 말하기도 한다. 인공지능 월터는 전적으로 마조리를 수반하기 위해 존재할뿐더러 그에게 정보를 주는 존 역시 사위인지라 애초 존의 진술조차 완벽하진 않기 때문이다. 월터와 마조리에게 있었던 진짜 일들은 두 사람의 기억속에만 남아 있으므로. 연극을 원작으로 했다는 영화는 마치 연극처럼 막과 장으로 구분한 구성을 갖고 있는데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며 인공지능의 모습은 월터에서 마조리, 다시 테스의 모습을 갖는다. 진짜월터와 마조리, 테스가 죽은 후 남겨진 사람들은 또 다시 그들의 모습을 갖고 대화를 하고 기억을 완전하게 나누는 식이다. 노쇠한 존의 모습과 그리고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야 우리(관객)는 비단 치매를 앓는 마조리 뿐 아니라 그들의 모든 기억이 조금씩은 어긋나 있음을 깨닫게 된다. 프로포즈의 그 날 본 영화가 <카사블랑>카 아니라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인줄은 알았으나 그게 극장도 아닌, 모텔에서 TV로 본 영화라는 것은 몰랐다. 마찬가지로 마조리가 확신하며 말하던, 사프란색 행진은 벤치에서 본 것이 아니라 TV 속 화면이었다. 때문에 기억이란, 결코 완전하지도 완벽하지도 않은 것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그렇다면 관건은 기억의 온전함이 아닌 그 기억을 둘러싼 환경과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억이 달라져도, 기억의 디테일이 사라졌다 해서 그 감정마저 거짓이라고 부르긴 어렵다. 기억이란, 사랑이고 관계며 상처와 원망이란 그렇게 깊고 깊고 어려웠다.

 

영화를 본 다음날에 친구를 만났다. 아주 오랜만이었고 그녀가 멀리서 오느라 기다리는 동안 카페에서 책을 읽었다. 절반쯤 읽었을 때 그녀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너무 오랜만이라 혹시라도 어색하지 않을까 내심은 염려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대화는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그 날 밤의 공기처럼, 앤틱한 가게에서 흐르던 재즈팝처럼. 하지만 안녕을 고하고 손을 흔들고 헤어지자 설명하기 힘든 공허감을 느꼈다. 버스 유리창에 기대서 우리가 나이를 들었다는, 당연하지만 잊고 싶은 사실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과거와 같이 냉소적이었으나 좀 더 어릴 때 가졌던 뜨겁고 열정적인 비관이 아닌 노인의 한숨 같은 체념을 품고 있었고 올 초에 힘든 일이 많아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는 그녀는 이제 흘러간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10대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 그녀의 뜨거움과 질척거림이 신기하고 대견하고 불편했는데 이제 그녀는 내일 출근할 이야기와 돌아올 휴가에 대한 기대 외엔 지난한 관계에 대한 고민과 미련은커녕 자기 자신에 대한 언급도 잘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서야 그 날에 품었던, 그 광막한 외로움이 뭔지를 알 것 같았다.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보라. 그러면 세상은 변한다. 사람들이 그 순간을 미처 깨닫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세상은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보라. 때로는 합쳐질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원제 Levels of Life)는 지극한 러브 스토리다. 물론 줄리언 반스의 여타 다른 책들이 그랬듯 이 책 역시 처음부터 그 맥락을 드러내진 않는다. 엄청나게 거시적인, 달리 말해 전혀 상관도 없는 것 같은 이야기를 줄곧 꺼낸다. 두 번씩이나. 나다르와 베르나르의 이야기는 나름대로의 맥락이 있지만 그게 이 책의 주된 이야기인지 알 수 없어 갸우뚱해질 무렵, 세 번째 변주가 등장한다.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곧바로 나오는 게 아니라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린 사람처럼 천천히 수면 위로 올라온다. 땅에 있는 기구가 땅을 밀어내고 하늘 위로 오르듯이, 그도 아니면 반대로 하늘에 있던 열기구가 천천히 하강하듯이, 삶의 층위라는 제목처럼 세 개의 이야기는 각각의 위치가 필요했나보다. 쓰라는 독후감 대신 영화와 친구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 글의 본심처럼 말이다(그렇다고 감히 나와 작가를 동일시함은 절대 아니다).

 

전에는 함께였던 적이 없는 두 사람은 하나가 되게 해보라. 어떤 때는 최초로 수소 기구와 열기구를 견인줄로 함께 묶었던 것과 비슷한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추락한 다음 불에 타는 거소가, 불에 탄 다음 추락하는 것, 당신은 둘 중 어느 쪽이 낫겠는가? 그러나 어떤 때는 일이 잘 돌아가서 새로운 뭔가가 이루어지고, 그렇게 세상은 변한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머지않아 이런저런 이유로 그들 중 하나가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사라진 빈자리는 애초에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의 총합보다 크다. 이는 수학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정적으로는 가능하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의 구성처럼, 마치 연극처럼 장과 막이 나뉜 글 역시 뒤로 넘기다보면 본의를 알게 된다. 초반에 난해해보이는 난삽해보이는 것과 다르게 하고자 하는 말은 의외로 단순하고 명료하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는 사별한 아내에게 보내는 연서이자 상실에 대한 지긋한 상처의 기록이며 상실 이후에도 살아가야 하는 삶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는 30년을 함께했다.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서른 두 살이었고, 그녀가 죽었을 때는 쉰여섯 살이었다. 그녀는 내 삶의 심장이었다. 내 심장의 생명이었다. 그녀는 늙는다는 개념을 증오했다. 이십대부터 자신이 마흔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 둘이 함께 이어나갈 삶을 기쁜 마음으로 고대했다. 모든 것이 느려지고 고요해지기를, 함께하는 옛 추억들이 늘어나기를 고대했다.

 

친구와 대화를 하던 중 주제가 결혼으로 흘러갔을 때, 이마저도 우리가 나이를 먹었구나 실감했다. 더 이상 비장하거나 불안한 투가 아닌 덤덤하고 여상한 어투로 관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보편적인 이야기, 대체로 유아적인 남편과 뜻대로 되지 않는 육아와 험난한 세상과 가족의 굴레와 무게에 대해서도 말을 나눴지만 결정적으로누군가와 함께 삶을 꾸려간다는 사실이 낯설고 불편하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공간을 나눠 쓰고, 생활방식을 타협하고, 배려하고 배워가고 이해하고 양보하는 것들. 가족과도 오랜 시간을 들여 타협했고, 여전히 맞지 않은 부분이 산재해있는데 갑자기 새로운 사람과 함께 집을, 방과 침대를 나눠 쓰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일인가에 대한 탄식을 나란히 뱉었고 때문에 결혼이란 무모한게 아니라 용감한 일이라며 입을 모았다.

 

줄리언 반스는 (우리가 생각한) 용감한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가 즐거워했던 것은 스스로가 앞서 말한, 생활공간을 나눠 쓰는 등의- 결혼생활 자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성격이거나 아니면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아내와 하는 결혼생활을 아꼈고 거기서 활력과 안정을 얻었다. 때문에 상실 이후는 더더욱 힘겹다. 그를 위로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일을 해보라며 권하기도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나 여태까지의 일상을 사는 문제가 아니라 그 일들을 아내와 함께 하는 것, 혹은 혼자 해야만 하는 것들을 아내에게 설명하고 조언 받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서 의미를 찾기 때문이다. 그녀가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녀가 없이 하는 일을 즐겁지 않거나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

 

사별의 고통은 죽음과 마찬가지로 진부하며 유일무이하다. 그런 의미에서 진부한 비교 하나를 들어보자. 차를 다른 브랜드로 바꾸고 나면 갑자기 길 위에서 같은 브랜드의 차들이 수도 없이 눈에 들어온다. 전에 없던 방식으로 그 차들이 의식에 각인된다. 아내를 잃게 되면, 갑자기 남편을 잃고 아내를 잃은 모든 사람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전까지 그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다른 운전자들, 배우자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눈에 그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는 사별의 아픔, 상실을 이렇게 이성적으로, 자신의 슬픔의 단계와 감정을 분석해서 쓴 글을 보며 신기하다고 생각하거나 대단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허나 놀랍게도 세상에는 자신의 슬픔도 분석을 하는 사람도 있고 그들에겐 단계와 층위와 해부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작가가 그렇다고 단정지으려는게 아니라 내가 그랬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성을 잃지 않았다 해서 더 괜찮은 건 아니다. 작가는 중간중간 자살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했단 이야기를 한다. 어조가 담담해서 마치 농담처럼 들리지만 분명 진심일 거다. 하지만 자신이 그러지 않았던 것은 떠나간 아내를 가장 많이 담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며 자신마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아내의 기억도 소실한다는 것이 두렵다고 한다. 죽음 자체나 죽음에 이르는 고통보다 유실된 기억과 사라지는 존재감이 두려워서 죽음을 거두는 마음이라니, 상상하기가 어렵다전날 본 영화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친구와의 만남과 그날의 분위기, 대화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기억은 아름답고 숭고하고 대단한 축복이지만 동시에 잔인한 거짓의 파편이기도하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하나씩 드러났던 선의의 거짓말과 어긋난 기억을 듣다 보면, 아내를 담고 있는 자신마저 떠나는 것이 두렵다는 작가의 말이 과장만은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게 한다.

 

진단이 내려진 후 죽음이 찾아오기까지는 37일이 걸렸다. 나는 그 사실을 추호도 회피하는 법 없이 늘 직시하려고 애썼다. 그러자 미친 사람의 지혜 비슷한 것이 찾아왔다. 거의 매일 밤 병원을 나서면, 그냥 하루 일과를 끝내고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사람들을 내가 분한 마음으로 노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저들은 어쩌면 저렇게 게으르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자기들의 무심한 옆얼굴을 여보란 듯 보여주고 있단 말인가. 세상이 이제 이렇게 변하려는 참인데.

 

이건 그냥 우주가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야.”


바로 이것’, 이토록 거대하고 강렬한 이것모든 것의 이유일 뿐이었다. 그 말엔 어떤 위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 말은 가짜 위안에 저항하는 대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주가 다만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라면 우주 자신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을 터이니, 우주 따윈 될 대로 되라지. 세상이 그녀를 구할 수도 없도 구하려 하지도 않는다면, 도대체 내가 뭣 때문에 세상을 살리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사별의 고통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이렇게 처참하게 부서져 있는데 아무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바닥에서부터 냉기가 올라와 천천히 썩어가고 있는 모습조차 사람들은 요즘 좋아 보인다며 인사를 건넸고 옛말에 남의 말도 석 달이란 말이 맞긴 한지, 있었던 일을 잊고 같이 여행을 가자며 조르는 사람이 신기했다. 머릿속 한 편으론 유아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이란 것을 이해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론 어째서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것인지, 영화에선 툭하면 행성이 부딪히고 외계인이 불시착하던데,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마 돌아오는 길에 그리도 우울했었나보다. 있는 힘껏 아끼거나 사랑하고 그리워하지도 열정을 다해 미워하거나 원망하지도 않는 상태가 평화로운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세상을 살리는 일, 달이 차고 저무는 일에는 관심도 없는 분노에 찬 상실감을 겪는 작가보다 내 자신이 더 노인이 된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화를 내거나 슬픔을 느낀다는 일들도 기실 얼마나 생산적인 일인가.

 

젊은 시절, 세상은 노골적이게도 섹스를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나중에는 사랑을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그 후에도 여전히 마찬가지로 적어도 우리가 운이 좋다면(혹은 반대로 운이 나쁘다 해도)- 세상은 슬픔을 견뎌낸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 이런 분류는 절대적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가로지르는 회귀선이다.

 

집에 거의 다 와서 택시기사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는 즐겁고 뻔했다. 그러다 마침내 치고 들어오는 경쾌한 질문.

아내 분은 주무시고 있겠네요?”

말없이 감정을 억누른 끝에 나는 가까스로 찾아낸 유일한 말로 답했다.

그러면 좋겠네요.”

 

이제껏 하나였던 적이 없었던 둘을 하나로 합치는 것그리고 하나였던 것을 둘로 쪼개는 것.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둘의 공통점은 용감하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땅을 박차고 하늘을 날아오르려고 했던 것처럼, 열기구를 타고 정확하지 않은 하늘의 틈을 헤치며 날아오르듯, 두 사람이 결합하는 과정과 서로를 잃는 것, 그 후에도 계속 묵묵히 살아가는 것 역시 내게는 똑같이 지극히 용감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 용감한 사람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사랑을 안고 살아가는 모두의 밤과 낮이 오늘도 평안하길 바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10-27 0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30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정영목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미 오백 번 정도 한 이야기지만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의 개인사를 듣는 것이 불편해졌다. 솔직히 말해 어느 정도는 재밌지만 즐겁지는 않다. 인간적인 부분에 대한 접근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는 애정에 눈이 가려지기 마련이고 헌데 인간이란 본디 얼마정도는 서로를 실망시키니. 혼자만의 믿음이 깨지거나 바닥없이 아스라한 배신감에 시달리다보면 가능한 한 사적인 부분을 눈에 두지 않으려 노력하게 된다. 물론, 언제나 잘 되진 않지만 꾸준히 시도한다. 배우는 캐릭터로, 작가는 오로지 완성한 글로 판단한다는 원칙 아닌 원칙을.

 

이 책은 그런 원칙의 면에서 적합하다. 번역가가 이야기해주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그 속에는 어느 정도의 개인사가 들어있지만 어디까지나 작품을 써내려간 의도나 의중에 대해서일뿐 그들의 성격이나 인간관계 등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다시 말해 번역가가 자신이 만난 작가들에 대해서 써낸 에세이로 분류되긴 하나 예상 이상으로 평론적이며 다소 학술적인 접근법을 갖춘 책이다. 일부 발췌한 문단을 빌려오면 이러하다.

 

그는 1959년 첫 장편 구빈원 축제로 미국 예술원 로즌솔상을 수상했고, 이십대 후반인 1960년에 달려라, 토끼를 출간하여 그 세대의 대표 작가 자리에 올라섰다. 그리고 삼십대 초반인 1963년에는 켄타우로스로 전미도서상을 받고, 1964년에는 최연소 미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렇게 업다이크는 화려하게 조명을 받으며 작가생활을 시작했다. 그렇다고 업다이크가 젊은 시절에 반짝 빛을 발하고, 그 빛을 평생 우려먹는 작가였다는 뜻은 아니다(업다이크 자신은 불가리아 여자 시인에서 베크의 입을 빌려 그런 자화상을 슬쩍 그려내기도 하지만). 상이 작가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오십대에 들어선 1981년에는 토끼는 부자다로 퓰리처상, 육십대에 들어선 1991년에는 토끼 잠들다로 다시 퓰리처상을 받았다(소설 부문에서 퓰리처상을 두 번 이상 수상한 작가는 업다이크를 포함하여 미국에서 세 명 뿐이다). 토끼는 부자다를 발표한 직후인 1982년에 타임은 업다이크를 두 번째로 커버스토리로 다루었는데, 이때 표제가 오십 세에 위대해지다였다.

 

(중략) 업다이크는 상복도 많았지만, 상업적인 면에서도 꽤 성공을 거두었다. 예를 들어 1968년에 발표한 커플스는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일 년 동안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또 젊은 시절 잠깐 시민권 운동 시위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그 이후 국가기구와도 대체로 사이가 나쁘지 않아, 젊은 시절에는 국무부에서 파견한 미소 문화교류 문화사절로 동구를 순회하기도 했고, 말년에는 부시 대통령 부자에게 각각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소설에 영화적 요소들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나보코프가 영화화를 의식하고 이 소설을 썼다는 점일 것이다. 가령 앞이 보이지 않는 알비누스의 관점에서 진행되어, 영화로 본다면 스크린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마지막 장면도 이 소설을 쓰던 시점에서는 최신 기술이었던, 영화와 소리의 결합(1929년에 최초로 도입되었다)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지금은 상투적 수법이 된 지 오래지만, 오나전한 암흑 속에서 소리만 들려줄 때 오히려 극적인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소설에서 알바누스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순간 다시 눈앞에 드러나는 현장을 나보코프가 무대 지시 사항이라는 말을 앞세워 묘사하는 것을 보면 그러 해석도 설득력이 있는 듯하다.

 

영화를 의식하고 이 소설을 썼다는 점은 플롯의 전개 속도, 또 등장인물의 대사에도 반영되어 있다. 딱 영화로 만들기 좋게 짜인 플롯과 대사이고, 그런 면에서는 오늘날의 대중소설과 흡사한 면이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귀를 기울일 만한 대목은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영화적이라는 평이다.

 

앞서 밴빌이 조이스에게 받은 영향을 이야기했지만, 밴빌은 가디언과 이야기하면서 모든 아일랜드 작가는 조이스 추종자와 베케트 추종자로 나뉘는데, 자신은 베케트 진영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특히 아일랜드 내에서 밴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제 그가 능력으로 보나 성취로 보나 베케트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존 업다이크의 수상경력과 이력, 상업적 성취에 대한 정보와 나보코프의 어둠 속의 웃음소리를 향한 대략적인 중평, 밴빌 자신의 발언과 밴빌을 향한 발언을 인용하는 와중에 자신이 가진 태도나 의견은 숨기는 편이다(물론 이런 에 대해서 언급했다는 자체가 저자가 그러한 논조에 동조한다는 것인지도 모르나). 가능한 한 독자에게 사실만을 전해주기 위해 노력하는 면이 인상적이다. 때문에 어쩌면 이 책을 꺼내든 독자들의 호와 불호는 나뉠 수도 있겠다. 재밌는 건 출판사 역시 이 점을 의식한 것 같다는 짐작이다. 번역서 외에는 책을 내지 않은 저자가 이 책과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두 권을 동시에 발표했다. 물론 같은 출판사다. 공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은 독자는 이 책을, 가벼운 에세이나 일상의 에피소드, 저자의 번역 원칙 등이 궁금하다면 다른 한 권을 찾아가면 된다는 안내 같다. 

 

그렇다고 이 책이 딱딱하거나 재미가 없다는 건 절대 아니다. 작가들의 이야기가 끝나면 저자의 이야기도 겻들어 등장하는데 이런 부분에서 번역과 관련된 그의 생각 일부를 읽을 수 있는데다 작가들의 이야기 중에도 문득 자신의 의견이 새어나올 때도 있다. 이런 식이다.  

 

억측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 독자들은 이창래 같은 작가 영어를 사용하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를 다른 외국의 작가들보다 더 거북해하는 것 같다. 아주 얕은 수준에서 보자면, 미국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한국과 관련된 사항 상황이든 등장인물이든 간판이든- 이 나왔을 때 받는 왠지 편치 않은 느낌(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다르게 느낄 수도 있지만)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번역된 외국소설에서 기대하는 상황(척하는 삶에서 끝애와 하타가 기대하던 상황)과는 다른 상황이 벌어지는 것에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설사 준비가 되어 있다 해도, 외국 언론에서 한국 상황을 보도하는 기사를 읽을 때처럼 그 묘한 객관성이 가지는 시원치 않은 느낌, 남이 머리를 감겨주는 것 같은 느낌에 대한 우려가 남을 수도 있겠다.

 

사십대로 들어선 알랭 드 보통은 공항에서 일주일을로 한 바퀴 원을 그리듯이 다시 히스로 공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내부보다는 외부를 관찰한다. 공항에서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연인을 관찰하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갑고 날카롭지만, 왠지 노스탤지어도 묻어나는 듯하다. 노스탤지어를 느낀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뜻이다(중략) 사실 나 자신은 알랭 드 보통의 사랑 이야기들이 너무 자신의 내부에 몰입해 있는 것 같아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아마 이런 느낌은 알랭 드 보통과 나의 나이 차이, 즉 서로 속해 있는 인생의 단계가 다르기 때문이p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불안에 와서 좀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점차 외부로 시선을 돌려, 행복의 건축을 거쳐 일의 기쁨과 슬픔이나 공항에서 일주일을에서는 외부에 대한 관찰이 글의 출발점이 되는 지점에 이른 듯하다.

 

매카시가 긴 은둔 기간을 그렇게 유유자적하게 보냈던 것 같지는 않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지 않았다고 하니 궁핍도 대단히 심각했던 모양이다, 언젠가는 거의 팔 년 동안 헛간 같은 곳에서 살며 목욕은 호수에 나가서 했다 한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대학에 와서 그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면 상당한 액수의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매카시는 자시가 하고 싶은 말은 책에 다 있다고 하면서 거절했다. 물론 그뒤로 일주일 동안은 또 콩만 먹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 곤궁한 생활에서도 죽으란 법은 없더라는 것이 매카시의 말이다. 정말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면 꼭 어딘가에서 살 방도가 나타나곤 했다(한번은 코카콜라가 지원금을 주었다고 하는데,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고유명사가 사라진 로드의 흑백의 세계에 빨간 코카콜라 캔이 도드라지게 등장하는 것이 그런 인연의 소산이 아니겠느냐고 한마디하기도 한다).

 

물론 이 역시 일화 중심이고 의견을 표명할 때 마저 꽤 조심스러운 태도다(알랭 드 보통에 대한 이야기가 그나마 저자의 생각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부분 같다). 일각에선 남의 이야기를 빌어온 것처럼 신중하다못해 모호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어쩔 수 없이 개인적으로는 저자로서, 특히 자신이 만난 작가들을 향한 존중과 애정이 깃든 번역가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가 아닐까. 게다가 앞서 말했듯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나 작가의 사생활과 작품을 별개로 만나고 싶은 독자에겐 일종의 길티플레져 역할을 할 수 있다. 궁금한데 알고 싶지는 않고 재밌지만 즐겁지는 않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정도로 작품과 작가 개인을 연결하고 있으니. 

 

저자가 워낙 유명한 번역가인데다 걸출한 작가들의 번역을 맡았기 때문에 책에 인용된 작가의 목록만 봐도 설레고 두근거리는 독자도 많을 거다. 책을 좋아한다면 아마 이 중 적어도 한 명쯤은 좋아할 게 분명하고 작가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읽어본 책이 한 권 이상은 될 가능성도 높다. 아니, 그게 아니라도 그저 '책'을 좋아한다면 이 책이 흥미롭지 않기 어렵다. 이 책을 읽고나면 필연적으로 이 안에 들어있는 작가들, 그들의 책을 더 만나고 싶어진다. 그러니 짓궂게 표현한다면 이보다 더 큰 자기홍보 수단이 어딨으랴(작가와 독자 사이의 연결을 돈독히 하고 있다는 점에선 번역의 본질과도 비슷한 책이니 흥미롭다). 무엇보다 저자가 -번역책으로 만났을 때도 느꼈듯이- 글을 잘 쓰는 문장가다.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커스 나이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생각해보면 한 때는 질리지도 않고 많이, 열심히 읽었다. 재밌는 것은 재밌는 대로, 재미가 없다 해도 없는 만큼, 좋은 것은 좋되 별로인 것도 어쩔 수 없다는 자세였던 것 같다. 지금보다 어렸고 또 여리고 유연했던 시기여서 가능했을지 모른다. 이제는 더는 그런 식으로책을 읽지 않는다. 읽을 수 없는 것인지 않는 것인지는 몰라도. 때때로 그 날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일테면 사람의 일생에 그런 시기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나의 생애서 그런 시절은 이미 지나간 셈이다.

 

내게 다수의 일본 소설들은 그런 시기가 되어 과거가 되어버렸다. 한 때는 그런 정서들을 쿨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서로의 날것을 보이지 않고 보지 않아도 되고, 생활력이 결여된, 그림처럼 아름다운 관계들. 헤어진 연인 사이에도 더없이 무던하고 가족끼리 상처를 주지 않고 친구라도 와나타베와 미도리처럼(노르웨이의 숲의 주인공들) 지낼 수 있고,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무연하고 미니멀한 삶을 바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삶에 할퀴어지고 나니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쿨한 관계란 생각해보면 거기까지인 사이일 수도 있다는 것, 헤어진 연인은 결코 쿨할 수 없고 가족이란 본디 애와 증사이에서 줄다리를 타기 마련이며 와나타베와 미도리는 결국 친구가 아니었고 에쿠니 가오리의 주인공들은 불륜마저 쿨하다고 여기며 상대가 나를 돌아봐주길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남에게 상처를 줘놓고 자기연민으로 칭얼거리며 그 와중에도 일은 안 하고 고양이나 껴안고 사는 삶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삶은 대체로 그런 식인 것 같다. 좋으니까 싫어지고 좋은 점이 견딜 수 없어지며 더없이 미워지기도 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을 앞두니 감회가 새로워 서두가 길었다. 가느다랗고 숱이 많지 않은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옆으로 땋아서 묶고 에스닉한 셔츠와 펠트로 만들어진 가방을 들고 카우보이 부츠를 신고 낡은 버스 맨 뒷자리에 앉은 소녀. 요시모토 바나나를 떠올리면 이런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책을 열었는데 기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아 쓴 웃음이 난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주 조금은 반가웠다.

 

나는 지금도 놀이를 하는 기분이다. 다만 장난으로 하는 놀이가 아니다. 높은 벼랑 위에서 물을 향해 뛰어내리는 아이처럼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목숨을 걸고 푹 빠진 놀이다.

 

주인공 이름은 사야카. 남편인 사토루가 세상을 떠난 후 딸인 미치루와 함께 지낸다. 1층에는 시어머니와 시아버지가 사신다. 어느 날 이전에 이 곳에 살던 사람으로부터 온 편지를 받는데 이야기인즉슨 오래 전 이곳에 살았던 시절 자신의 어머니가 지금의 히비스커스 나무 아래- 마당에 소중한 뭔가를 묻었다는 말을 들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한 말이라 마음에 걸려서 그러는데 혹 괜찮다면 방문을 해서 그 곳의 땅을 파도 되겠냐는 부탁이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독특한 일이 생기네 하고 말겠지만 편지의 발신인이 오래전, 사야카가 스무살에 사귀었던 남자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야카는 산사인 그의 집에서 함께 산 적도 있고 가족들도 모두 알았다. 당연히 돌아가셨다는 그의 어머니도. 한 때는 결혼까지 생각했던 진지한 사이였으나 모종의 사건이 발생해 그(이치로)와 그의 가족들을 떠났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믿기지 않을 우연의 일치로 그와 재회를 하게 된 것이다.

 

사야카는 일본인이긴 하나 발리에서 쭉 살았다. 문화인류학자인 부모님을 여의었기에 가족이나 형제도 없고 정해진 거처도 없다. 그리고 그녀에겐 이른바- 사이코메트리와 같은 초능력 비슷한 재능이 있다. 그녀의 결혼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부모님의 지인으로 알고 지내던, 정말 친구 이상의 감정은 없었던 사토루가 시한부를 선고받자 그녀에게 청혼을 한 것이다. 정확히는 아이를 낳아달라고. 사랑은 아니었지만 사토루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고, 그의 아이를 낳는 일이라면 기꺼이 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둘은 일종의 계약결혼을 하게 된다. 심지어 사토루의 어머니, 아버지는 이런 상황을 다 듣고도 그녀를 기꺼이 집안으로 들인다.

 

다소 비일반적인 설정과 상황이 펼쳐짐에도 이상하다는 생각보단 이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언제나 그랬다. 분명히 일상적인 이야기 임에도 오컬트 요소를 넣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을 좋아했다. 말갛고 상냥한 남자주인공과 다정하고 너그럽고 강한, 진짜 어른이 등장한다. 대개는 할머니나 어머니, 이모 등으로. 여기선 사토루의 엄마이자 사야카의 시어머니가 그러하다.

 

네 손, 그렇게 되기까지....... 정말 아팠겠구나.”

시어머니가 놀란 표정을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아아,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거야. 나는 넘쳐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저 그렇게 말해 주기를 바랐다. 책임이나 상처나 장애가 어떻다느니 하는 말이 아니라.

 

“(전략) 우붓에 가면 멋진 그림도 사 오고. 새와 숲이 있는 걸로. 현관에 걸어 두련다. 우리 집에서는 잘 없던 일이지, 그림을 걸어 둔다는 거, 즐겁게 그런 상상을 하고 있는데, 왜 없어진다고 그래.”

나는 도무지 눈물을 거둘 수 없었다. 내가 우리 부모님에게 듣고 싶었던 말을 시어머니가 전부 해 주었기 때문이다.

 

사려 깊고 현명하다. 아들을 보냈지만 미치루와 함께 내 가족이 되어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그녀를, 사야카는 부모님처럼 사랑한다. 이 이상한 결혼을 받아들여준 것도 사토루와 사야카가 모르는, 혹은 눈치 채지 못한 점 덕이었다. 아들의 따뜻한 표정, 친구였던 사람의 아이를 낳겠다는 사야카의 결정. 이들 부부는 타이밍이 어긋난, 늦된 사랑을 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사랑의 형태가 있고 이들의 사랑이 잘못되거나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거리를 뒀기 때문에 서로를 나무처럼 사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치로의 편지를 받은 사야카는 조금씩 달라진다. 과거를 마주하고 후회를 접고 미련을 청산하고. 임신을 하고 남편과 결혼하고 아이를 안으면서도 변화하고 성장했던 그녀는 이제 완전한 탈피를 한다. 젊었던, 어렸던 시절을 묻어두되 그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는, 단순하지만 묵직한 진실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서로의 옆에 선다. 내년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몰라도. 지금 당장은 미치루의 엄마로 사는 일, 남편을 그리워하는 사랑으로 만족하지만. 이들 관계가 어떻게 바뀔지는 그녀 자신도 모른다.

 

그의 스웨터와 가방 같은 것들이 되어 늘 따라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했던 시절. 그럴 수 있다면 이렇게 괴롭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같이 있을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 간절했다. 첫사랑이어서 그랬는지 나는 몸이 아플 정도로 그를 좋아했다.

 

문득 이런 문장들을 읽으면서 내 자신이 너무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아플 정도로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그가 품은 사물이 되고 싶을만큼 강렬하게 뭔가를 염원했던 적이 있긴 했나. 아니지. 분명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을 읽었던, 지금보다 어리고 여리고 유연했던 나는 그렇지 않았을 거다. 그땐 그런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거나 동경했기 때문에 그녀의 소설이 내게 유효하게 다가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반갑다는 마음이 든다. 늙고 낡고 시니컬한 나에겐 더 이상 아름답거나 주효할 수 없는 사야카의 사랑과 삶,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과거의 나와 같은 누군가에겐 충분히 반짝거리는, 멋진 이야기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어떤 시절과 시기를 지나는 이에게 이 책이 더욱 아름답길 바란다. 그리고 '이 작가 아직도 글을 쓰는구나' 하고 발견할 수 있고 '변하지 않았네'하는 아쉬움과 반가움이 공존할 수 있도록 요시모토 바나나가 글을 쓰고 있다는 것도. 게다가 요시모토 바나나 책이 국내에 처음 출간된 시기를 되짚어 보면 어떤 이는 옛날의 내가 읽던 그녀의 책을 보며 지금의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도 신기하다.


어떤 책들은 기억 속에서 계절과 함께 박제된다. 지르르르 귀가 얼얼해질 만큼 울어대는 매미와 물방울이 맺힌 아이스티의 유리잔, 손안에 꽉 들어찬 청사과의 맛. 이 책을 떠올리면 아마 이런 것들이 함께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나 자신도. 이 모든 것이 추억의 맛이라 생각하니 참으로 달고 달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7-24 0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