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F/B1 일층, 지하 일층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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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글은 그리움으로 시작하고 어떤 글은 경멸로 시작한다. 때로는 추억으로 물들며 가끔은 다짜고짜 비판으로 운을 떼기도 한다. 어떤 것은 무난(함을 가장한 뻔함)하고 어떤 것은 파격적이다. 그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도 정하지 못하고 하얀 화면만 보고 있을 때도 있다. 

 

이런 시작은 어떨까. 자신의 게으름을 적당하게 변명할 수 있으면서도 솔직함과 연민에 조금은 더 점수를 얻는 리뷰가 되지 않을까. 아니다, 나는 이 리뷰만큼은, 쿨하게 쓰고 싶었다. 쿨하게, 그래 대체로 이렇게?      

 

김중혁을 좋아한다, 고 말하자. 김중혁의 단편소설들을 좋아한다, 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의 글 중, 맨 처음 접한『악기들의 도서관』을 읽었을 때 기분 좋은 흥분이 느껴졌다. 매우 흥미롭거나, 기막히게 잘 쓴(머리가 어질할만큼) 글을 앞에 둘 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전 된 기타를 만지는 듯한 전율. 단행본 속 그의 글들은 모두 재밌었고 대체로 특이했고 그럼에도 -뜨근하기보단- 따뜻하고 온순해보였다. 단행본의 모든 단편들이 모두 내 맘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 마냥, 하나도 빠짐없이 마음에 들었다. 평범하진 않지만 거슬리게 비범하지 않은 감각이. 허구인 걸 알아도 속을 것 같은 능청스러운 설정이. 무심하게 던지는 유머감각이. 기분좋은 고양이처럼 입술을 핥으며 웃게 된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단편은 「매뉴얼 제너레이션」과 「엇박자 D」인데 얼마 전, 신기하게도 고등학교 동창이 지금 매뉴얼 만드는 회사에 다닌다고 해서 다시 떠올랐다. 그래, 매뉴얼이 필요한 기계를 만드는 사람이 있는만큼 기계에 필요한 매뉴얼을 만드는 사람이 있지, 그걸 알려준 건 김중혁이었지, 라고.     

 

이렇게 시작할까. 뻔하디 뻔해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거짓말로 의심되는 '매뉴얼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동창'조차 사실이니까, 의외로 논리적인 글이 될 가능성도 있다. 아냐, 논리적인 건 자신이 없다. 나에겐 그런 지력이 없으니까. 그러면 감상적으로 가자(감성, 이 아니다).      

 

책을 읽다 보면 스승으로 삼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연인이었으면 하는 이를 발견하고, 가끔은 가족이 되주길 원하는 이들도 만난다. 김중혁은, 김중혁의 인물들은, 김중혁의 글들은, 친구였으면 좋겠다. 쓸모없는 것들만 만드는 발명가와 상상력의 틀을 깨는 해커와 그것도 재주다 싶게 엇박자로 노래를 부르는 D와 같은 인물들과 즐거운 술자리를 벌이고 싶다.    

 

라고 운을 떼볼까.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런 시작을 하고 싶었다.    

 

이맘 때 가을 하늘은 아득하게 예뻐서, 정말 예쁘다는 말 외엔 할 수 없게 예뻐서 목을 빼고 길을 걷는다. 가로수에 부딪히기 직전까지, 목이 아슬아슬 아플때까지 오래오래 보며 걷는다. 그러다 눈을 거두면 어쩐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계획으로 하는 삶은 허무주의자가 될 수 있고, 희망으로 하는 삶은 절망을 일으키기 쉽다는 것. 해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 밤은 반드시 두려움의 시간은 아니기에 반드시 두려움이 길어지지 않을거라고 믿는 것. 두콩이(자전거의 이름)를 깨끗이 해야겠다는 것. 그리고, 단편소설을 쓰고 싶다는 것을 기억해낸다.   

 

그래, 이 시작이 좋겠다. 자, 이제 걸어보자.  

 

백일장에는 몇몇 제재와 산문과 시의 선택지가 있었지만 나는 늘 산문이었다. 시를 택하는 아이들 중 많은 수가 좀 더 짧다는 이유로, 그저 그 자리를 어서 벗어나기 위한 꼼수로 택했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시를 선택할 수는 없었다. 시(詩)라는 말에 대한 외경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짧은 말 안에 내 뜻을 담는 법을 몰랐다. 나노처럼 집적된 작고도 명징한 세계, 로 보이는 시의 견고함을 나는 결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나는 보통의 친구들보다 늘 많은 페이지를 썼고 아이들은 내가 재능이 있거나 글에 능숙한 사람인 줄 알고 감탄했다. 부끄러웠다. 대학생이 된 후도 페이퍼의 페이지를 채우지 못해 절절매는 아이들은 똑같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더 부끄러웠다. 그저 나는 짧게 쓰는 법을 몰랐을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저렇게 해석될 것 같고, 저렇게 쓰면 이렇게 보여질 것이 두려웠다. 더 많은 것을 더 오래 더 자세히 말하고 싶었을 뿐, 재능이나 능숙함과는 일절의 관계가 없었다. 부끄럽고 슬펐다. 

 

시를 쓸 수 없었다. 소설 또한 요원했다. 하지만 가끔 단편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걸 떠올린다. 소설을 쓴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기억해낸다.

 

  

나는 곧잘 김중혁 작가를 '백수 삼촌' 같다고 생각해왔다. 아니면 오타쿠 삼촌, 까치머리 삼촌, 나랑 제일 친한 삼촌. 어쨌든 삼촌, 아저씨라기엔 그는 너무 가깝고 오빠보다는 좀 더 어리광을 부려도 될 것 같았다. 실상은 할 줄 아는 게 많은데도, 같이 있으면 무용한 이야기만 하고 내내 낄낄거리는데 그 시간이 누구보다 좋은, 그런 삼촌. 이 삼촌은 비트에도 뛰어나고 레고도 잘 만들고 게임도 썩 잘 만든다. 내가 엉뚱한 소리를 해도 다른 어른들처럼 꿀밤을 먹이긴커녕 나보다 더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그래서 가끔은 내가 덜 한심한 것 같다고 위안이 되기도 한다. 엄마가 없을 때 해주는 밥은 때론 엄마보다 맛있고, 각종 매뉴얼을 신문처럼 읽고 모으며, 화음같기도 하고 소음같기도 한 악기들의 소리를 모은 테이프를 가지고 있고, 낙서를 잘(자주, 와 잘, 모두)하고 유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가 하면 데이비드 카퍼필드를 멋지다고 생각하는 삼촌.

 

객관적으로 이 삼촌은 꽤 멋지고 대단하다. 다양한 이력과 현재진행형의 경력. 그것 모두를 한 시대에 한 사람이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실은 어마어마한 재능을 가진 사람일수도 있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그의 글을 마주하면 그냥 뭐 이만하면 됐지 싶은 생각이 든다. 나 자신이 그리 나쁘지 않은, 썩 괜찮을지도 모르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렇다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내가 얼마나 평범하고 진부하고 자주 찌질한지를 느끼게 하는데. 그런데도,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닐 거라고, 그래 뭐 뭐라도 되겠지, 뭐라도 안 되면 또 어때, 라고. 그건 그의 글이 가진, 공기가 호흡이 마음이 태도가, 바로 '이런 삼촌' 같은 데에 있다고 믿는다.

 

그의 매력은 특히, 단편에서 더 빛을 발한다. '대단해'나 '어떻게 이런 생각을' 파는 아니다. 그보단 '귀여워!'와 '느물느물 능글능글 현실그리기'라고 정의 내려볼까. 그의 글은 무심하고 영민하다. 예민하면서도 즐겁다. 따뜻한데 그 따뜻함을 쑥스러워한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사람이 활동하기에 최적의 온도는 영상 18~20도인데 김중혁의 글은 딱 19도,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역시, 신형철 씨는 최고. 내가 하려던 말이 그거랑게.

 

 

세 번째 소설집인 이번 소설도 비슷하다. 천연덕스럽고 온유하고 일견 무심하다. 그리고 약간 더 그로테스크하다. 자살하는 유리라니, 멜랑콜리하구나. 때묻은 연애 이야기가 갑자기 괴수의 전설로 변하는 건 어떻고? 스케이트 보드의 이야기는 영화 <파라노이드 파크>가 떠오르게 한다. 아, 이 매력적인 글. 하물며 매력적인 작가. 그 중에서도 「크랴샤」는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안다. 소멸된 것들은 되살아날 수 없다. 그리고 찢어진 것들은 절대 다시 붙지 않는다. 나는 삶과 마술을 때때로 바꾸고 싶어진다. 화장지가 붙는 대신 어머니가 되살아나는 장면을, 스카프가 비둘기로 변하는 대신 돈으로 변하는 장면을, 꿈꾼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나도 가끔 환각을 본다. 쉰이 넘은 다음 급격히 나빠진 시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있었다가 없어진 것들이 보일 때가 있다. 어머니가 문득 나타날 때도 있다. 말을 걸 뻔한 적도 있다. 어머니, 어쩐 일이세요? 말이 목에 걸렸다가 다시 들어간다. 운전하다가 문득 강을 쳐다보는데 사라진 다리가 눈에 나타나기도 한다. 운조빌딩을 지나갈 때도 그랬다. 그 자리에는 이미 거대한 쇼핑몰이 들어섰는데, 내게는 가끔 운조빌딩이 보인다. 바깥으로 툭 튀어나온 책상 같던 운조빌딩이 나타난다. 고개를 젓고 눈을 깜빡여본다. 환각은 금방 사라진다. 동그란 가로등 불빛이 수십 개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눈이 침침하다. 도시는 절대 낡지 않는다. 나만 낡아갈 뿐이다.   - 김중혁, 크랴샤

 

가장 낮은 곳, 혹은 진실에 접근하는 곳은 명징하게 대하기 어려운 것처럼 제일 좋아하는 것에 이유를 대기란 쉽지 않다. 「크랴샤」의 쓸쓸한 전조가, 마술과 현실을 상응시키는 대구가, 마술처럼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어조가, 소멸된 것들을 되살아날 수 없다는 단순하지만 확실한 진심이, 좋았던 것 중의 하나라고만 말해야겠다. 짧고도 명확하고, 그런데도 정서와 유머와 진심이 모두 담긴, 이 글이 무척이나 좋다.  

 

 

단편소설을 쓰고 싶었다. 레이먼드 카버나 피츠제럴드, 김애란 덕분에. 적은 양이라면 비교적 도전하기 쉽지 않을까 싶은 치졸한 비겁함 때문에. 소재의 문제, 라고 결론 짓거나 얼마간은 호흡으로 인해. 그 모든 것은 그럭저럭한 이유였지만 결정적이진 않았다. 결정적인건, 소거의 문제였다. 단편소설을 쓸 때는 어떤 문장을 제하고 어떤 논리를 빼고 얼마나 짧게 그러나 효과적으로 쓸까(소재,와 호흡, 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고민할 것이다(물론 장편이라고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나 단편소설은 물리적 제약이 있으니 더 크리라 짐작한다). 그렇다면 남기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훨씬 많을 것이고, 핵심 또한 남기는 쪽이 아니라 버리는 쪽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남기는 것보다 버리는 것에 더 인색하지 않았을까. 그렇기 때문에 모든 글은 길고 흐물거리는 변명이 되지 않았을까. 시(詩)에 대한 외경심의 근원 또한 그것이었겠지. 김중혁의 소설을 읽을 때는 -잊을 줄 알았던-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과 -잃을 줄 알았던- 단편소설에 대한 가파른 열망이 함께 펄럭거린다. 

 

길게 하고 싶었다. 문장도 호흡도 단어도. 그래야 조금 더 설명, 아니지 방어, 냉정하게 변명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는 깎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소멸된 것들은 살아날 수 없고, 깎아내린 것은 붙을 수 없는 이 도시생활에서. 더이상 소멸되고 깎아낼 것이 없어질 때까지. 

 

 

  

   

 

 

 

 

덧) 멋진 글을 쓰고 싶다고 아주 가끔씩 큰 맘을 먹는다. 하지만 그 결심은 대개 평소(평소가 어느만큼이냐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보다도 훨씬 이상한 글이 되버리고 만다. 필연적인 것처럼. 이 리뷰는 위와 같은 생각으로 썼다 지웠다만 반복하다, 그대로 옮겨본다. 정해진 건 제목 뿐. 처음부터 <판타스틱 c1+y 라이프>였다. '나는 이 속된 도시가 좋다. 여기에서 살아갈 것이다' 라는 작가의 말이 이 책의, 그리고 그의 모든 글의 핵심이자 소재라고 생각했기에. 그 덕분에 도시도 재밌는 곳, 이라고 생각하게 됐기에. 그런데 저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작을 했습니다, 라며 쓰다보니 영 제목과 동떨어져 눈물을 머금고 바꿨다.

 

하하. 리뷰도 못 쓰는 사람이 무슨 단편소설일까.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글은 절대 쇠퇴하지 않는다. 나만 겁을 먹고 있을 뿐이다(또는 형편없어질 뿐이다, 한심해질 뿐이다 등등으로 변용이 가능하다). 하긴 긴 사족으로 변명하는 것에 일단 기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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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4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25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25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27 2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10-26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동진 씨 팟캐스트에서 요즘 나오시는데,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예상한 것보다 너무 목소리가 굵어서..소설도 소설이고, 여러가지 잡글도 아주 재미있게 잘 쓰시더군요. 맞아요. 여러가지 필요 이상의 것들을 많이 알고 있지만, 실생활(아..'실생활'이라니)에 도움되는 것은 별로 모르는 듯한 이미지.

Shining 2012-10-27 20:38   좋아요 0 | URL
엇, 저도 빨간책방 듣습니다. 전 이동진 씨 말하는 것 듣고 놀랐는데_-; 라디오도 안 들어서; 말씀 하는 걸 처음 들었는데 오우 말씀도 잘 하시던걸요. 김중혁 씨도 어눌한데 결정적인 단어 사용이나 표현력에 있어선, 역시 작가구나 싶더라구요. 들으면서 걷다가 가끔 혼자 막 웃어서 지나가던 사람이 쳐다보면 민망하고 그러대요_-; 팟캐스트, 혹시 다른 거 권해주실 만한 거 있나요? +_+

맥거핀 2012-10-27 23:12   좋아요 0 | URL
제가 듣고 있는 것은 이미 거의 듣고 계실 것 같은데요?^^(김영하 씨 방송도 그렇고..) 저는 주로 듣는게 이거하고, 영화음악 방송 밖에는 없어요. 정은임 씨 예전방송 모아놓은 팟캐스트도 잘 때 주로 듣구요. 아..한동안 정엽 씨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을 주기적으로 듣기는 했죠. 지금은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매주 여배우들을 한 명 씩 초대해서 이야기를 듣는 코너가 있었거든요.

Shining 2012-10-27 23:46   좋아요 0 | URL
헛, 전 팟캐스트도 이것 밖에 안 듣는걸요^^; 빨간책방, 은 이동진 씨 블로그에서 소식을 읽은데다 첫 책이 <고래>와 <7년의 밤>이라 듣기 시작했거든요.

김영하 방송은, 소문은(?) 익히 들었는데 구태여 찾아 듣게 되진 않아서요; 사실 책 읽어주는 걸 그다지 좋아하질 않는달까, 집중을 못 하거나 너무 집중해서; EBS 책 읽어주는 라디오, 는 가끔 멍 때릴 때 틀어두긴 하지만요_- 라디오도, 성시경 씨가 푸른밤 할 때 듣고는... 아, 전 정말 비문명인이군요_-

이진 2012-10-27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우, 이 책도 좋아요. 여름방학 전에 학교에 주구장창 들고 다니며 읽었던 책이어요.
제목이 '바질' 이었나요, 그 단편도 좋았고 제일 처음 있던 단편도 좋았어요.
첫 단편(스케이트 보드 어쩌고 하는 거였죠, 아마) 읽으면서 상당히 재치있는 작가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저도 빨간책방 듣다보니 김중혁 작가, 음 뭐랄까, 너무 가벼운 사람이 되어버린 듯해요. 하도 실없는 농담을 하니까 ㅋㅋ

Shining 2012-10-28 00:00   좋아요 0 | URL
바질,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더군요ㅎㅎ 전 크랴샤, 가 최고였어요. 악기들의 도서관에서 매뉴얼 제너레이션 이후로 가장 좋았어요 :) 귀여운 사람 같아요, 김 작가님ㅋ 유쾌하고 재밌고, 뭔가 친구 되고 싶은 느낌ㅎㅎ
 
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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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꿈을 꿨습니다. 나는 길을 잃었지요. 어두캄캄하고 부연 안개가 낀 숲이었습니다. 숲이 나오는 거의 모든 동화, 거의 모든 동화에 나오는 무서운 숲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약간 무서웠습니다. 부엉이가 눈을 빛내고 온갖 벌레들이 내게 귀 기울이며 울고 있었습니다. 공기마저 나를 주목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부스럭, 하는 소리에 나는 주먹을 꽉 쥐었습니다. 나타난 건 당신이었지요. 나는 깜빡 울 뻔 했답니다. 당신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손을 내밀었고 나는 아무렇게나 그 손을 부여잡았지요. 우리는 사이좋은 그러나 겁먹은 남매처럼, 마치 헨젤과 그레텔처럼 그 길을 조금씩 헤쳐 나왔습니다. 당신은 말이 없고 조금 떨고 있었지만 손은 따뜻했습니다. 내 손이 너무 차다는 것이 깨달을 만큼, 그것이 거의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로 따뜻한 손이었습니다. 이 곳은 어디입니까. 나는 어떻게 이 숲에 나타났지요. 어째서 당신은 숲 속에 있었을까요. 왜 당신은 숲에서 나가는 길을 알고 있나요. 내가 오기 전부터, 혹 얼마나 오랜 시간 여기 있었나요. 우리는 숲을 나갈 수 있을까요. 나간 다음에도 내 손을 잡아 줄건가요. 나는 묻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어느 순간 혼자 현실에 남았더군요. 사실 내가 정말 묻고 싶은 질문은 단 하나였습니다.

 

당신은 지금도 그 숲에 남아 있나요.

 

 

안개가 고인 밤이었다. 사오 미터 간격으로 가로등이 박혀 있어 상당히 어둡지는 않았다. 가로등은 길쭉하게 위로 솟아 있었는데 윗부분에 조그만 삿갓을 쓰고 있어 어찌 보면 버섯 같기도 하고 달리 보면 파수를 서고 있는 무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잔디에 달라붙은 안개가 가로등 불빛을 받고 반짝거렸다. 나는 안개를 먹고 숨이 조금 갑갑했다.

 

 

며칠 전 한 권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170쪽이 되는 장편이라 부르기도 뭐하고 단편이라기엔 조금 긴 -사람들은 이걸 경장편이라고 부른다네요- 소설이었지요. 소설 속 인물들 - 은교 씨, 와 무재 씨, 라고 하는 사람들이지요- 도 첫 장면에서 길을 잃습니다. 나는 그 꿈을 떠올렸습니다. 그 때 우리도 그림자가 일어섰던가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나는 그 책의, 무재 씨와 은교 씨가 몹시 좋습니다. 아마 당신도 그렇겠지요. 여 씨 아저씨와 유곤 씨와 오무사 할아버지와 그들이 만지는 알전구와 퓨즈까지도 몹시 좋습니다. 당신도 그럴 것입니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부모님의 지원을 받으며 학점을 관리하고 스펙을 쌓은 학생과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겨우 학비를 벌고 생계를 유지하는 학생이 경쟁을 한다는 것은 애초 말이 되는 일일까, 하고요. 두 학생이 면접을 보러 왔을 때, 당신의 학점이 떨어지는 건 스펙이 없는 건 당신 개인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걸까요. 3만원 짜리 주사와 8만원 짜리 주사 중 아이에게 어떤 걸 맞히겠냐고 묻는 사회가 정말 공정한 것일까요. 두 아이가 같은 곳에서 시작한다고, 정말 그렇게 말할 수 있나요. 단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생물학적으로 지극히 당연한 본능에 따르게 되는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빚을 안게 되는 것이, 정말로 개인의 낭비때문인가요. 단지 누군가가 좀 더 열심히 노력하고 오래 참는다면 그 사람과 내가 같아질 수 있는, 정말 그런 곳에서 내가 살고 있는 걸까요. 애시당초 이 사회에 살아감에 있어 평등이란 말이 가당키나 한 건지 가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무재 씨와 은교 씨와 가,나,다,라,마 동에서 일하는 모든 인물들이 생각이 날 것 같습니다. 숨이 작고 연약한 것들의 고운 냄새를 맡고 싶어질 것 같아요.

 

참으로 신기합니다. 어떤 것 하나 공정할 수 없는 세상인데 사랑은 참 흔한 것 같더군요. 사랑이라는 말이 세상 도처에 널려 있어서 가끔 나는 길을 가다 사랑을 줍습니다. 참으로 여기저기 떨어져있지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똑같은 차림을 한 바로 앞 커플이 떨어트린걸까요. 아니면 커피숍 안에서 손을 맞잡고 웃는 저 남녀가 흘리고 들어간걸까요. 길거리에서 뽀뽀를 하는,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친구의 허리에 손을 얹은 남자일까요, 남자친구 무릎 위에 앉은 벤치의 여자일까요. 아니에요, 나는 그들을 행동을 폄하하거나 그 말들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랍니다. 그저, 그렇게 사랑이란 말이, 사랑이라는 표현이 사방에 있다는 게 다만 신기할 따름이죠. 

 

나는 사랑에 대해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은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지만 또 어느 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날은 알 것 같기도 하지만 또 어떤 날은 알다가도 모른다고 결론 내립니다. 나는 잘 알고 또 모릅니다. 아무거나 알거나 몇몇 것을 모르지요. 내가 알 수 있는 건 이런 것들입니다. 

 

 

은교 씨는 갈비탕 좋아하나요.

좋아해요.

나는 냉면을 좋아합니다.

그런가요.

또 무엇을 좋아하나요.

이것저것 좋아하는데요.

어떤 것이요.

그냥 이것저것을.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렇게 되나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쇄골이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다고 말하는 게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거기도 정전인가요?

네.

어두워요, 여기도, 라고 해 놓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은교 씨,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왜 울어요.

안 우는데요.

우는데요.

내버려 두세요.

무서워요?

네.

바보 같아요.

바보 아닌데요.

바보예요, 라고 말하고 무재 씨는 한숨을 쉬었다.

무재 씨, 하고 내가 말했다.

네,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끊지 마요.

안 끊어요.

바보라고 해도 좋으니 끊지 마요, 라고 말해 놓고 무재 씨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정전이 된 순간 겁 먹고 있을 상대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겁 먹은 상대방에게 바보라고 단언하며 한숨을 쉬는 마음이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바보라고 해도 좋으니 전화를 끊지 말라는 안도와 절박이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배드민턴이라도 할까요?

네.

언젠가, 라는 의미로 대답햇는데, 무재 씨가 왔다.

나는 요즘 잠이 오지 않아요, 운동을 하면 어떨까요, 운동을 하면 잠이 올까요, 오던데요, 그러면, 하고 전화로 대화를 나눈 뒤였다. 지금 갑니다, 라는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져서 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밤 아홉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진심일까, 싶었는데 그로부터 삼십 분이 지난 뒤에 무재 씨가 수통과 배드민턴 채를 챙겨서, 자전거를 타고 왔다.

배드민턴 합시다.

 

잠이 안 온다며 배드민턴을 하자며 달려온 이에게 그 다음 날, 어제는 잘 잤냐요? 라고 묻는 것이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무재 씨, 우리가 그걸 전부 먹나요?

전부 먹죠.

와.

좋아요?

네.

좋다니까 좋네요.

나도 좋아요.

이런 대화를 나누며 도(道) 경계를 넘었다.

 

당신이 좋으니까 나도 좋다는, 그 명징함이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림자 같은 건 따라가지 마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이참에 어두워지자고 생각하는 이에게 전화를 걸어주는 것이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차피, 차피, 라고 자신을 덮치는 그림자를 떨친 이야기를 듣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따끈하고 개운한 것을 먹고 싶어하는 상대방을 위해 차를 모는 것이,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얼마 전 반가울 정도로 오랜만에 감기에 걸렸습니다. 고열로 달뜬 상태에서 나는 밍그적거리며 상자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그 속에는 색색깔의 재질별로 무늬별로 다양한 머플러들이 있었죠. 목을 내놓고 다니는 게 못마땅하다며 제가 하고 온 머플러를 강제적으로 둘러주던 당신이었습니다. 당신은 하고 왔고 나는 하고 갔습니다. 몇몇 것은 돌려줬지만 그때 그때 돌려주지 못한 것들이 모여 이렇게 됐습니다. 신기하죠, 당신에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던 색깔이 있었습니다. 나에겐 샘나도록 잘 어울린다며 자뭇 흐뭇하게 웃던 당신이었는데. 이상합니다, 왜 당신이 아니라 내게 어울리는 겁니까. 내게 둘러주기 위해 사준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이상합니다. 왜 내가 좋아하던 문양이 있을까요. 이건 내가 당신께 빌린 것들인데 말이죠. 그러고보니 이상합니다. 당신은 목감기에 잘 걸리지 않았는데, 머플러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이렇게 많이 사서 내게 매주었을까요.

 

어쩌면 이것이 그것, 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네, 제가 아는 건 고작 이런 것들입니다.

     

목덜미를 당기는 듯한 어둠을 등지고 무재 씨 쪽으로 걸어갔다. 손을 잡아 보자 손이라기보다는 무언가의 뼈를 잡은 것처럼 메마르고 차가웠다. 그렇더라도 이것은 무재 씨의 뼈, 라고 생각하며 간절하게 잡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오래 혹은 멀리 그 숲에 있었다 한들 내가 찾아갈게요. 그림자가 일어서더라도 따라가지 않도록 조심하면 되는 거에요, 라고 말해줄게요. 따뜻하게 손을 데워갈까요. 아닙니다. 비록 따뜻한 손이 아니라면 또 어떻겠습니까. 내가 당신 옆에서,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도록 손을 잡아줄텐데요, 당신이 내게 그랬듯 말입니다. 머플러를 준비하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건 겨우 이런 행동들 뿐이니까요. 그리고 당신께 이 책을 선물할게요. 그것이 이 책이 끝끝내 말로는 하지 않았던 그것, 당신이 내게 보였던 것이 그것, 일거라 나는 감히 확신합니다.

 

이런 행동이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느낄 수 있는 사랑입니다.

 

  

 

 

 

 

 

 

덧) 낭비된 언어 없이 폼폼 솟는 사랑을 증명하는, 연약하고 아픈 것들을 곱게 돌아보는, 작가의 마음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누군가의 숲으로 기꺼이 뛰어드는 것, 같이 길을 잃을지언정 그가 혼자서 그림자를 따라가게 하지 않는 것이 사랑 아닐까.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둘러 줄 머플러를 고르는 것도 사랑이 아니었을까.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아무 말 없이 그 마음을 고백해야 한다면 이 책을 선물하는 걸로 하고 싶다. 열 권쯤 책을 쟁여놓고 하나씩 주고 싶다. 그렇다면 세상에 내 사랑의 목적은 열 곳은 된다는 말. 어둡고 좁은, 불공평한 세상에서 잘도 살았구나. 부끄럽고 대견하다.  

 

이 책을 내게 선물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사랑을 고백하게 된 그 분께 어설픈 리뷰로 윙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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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3 0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24 1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2-10-23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Shining 2012-10-24 13:07   좋아요 0 | URL
수다쟁이님 마음이 따뜻해졌다니 제 마음도 따끈해지는 것 같아요^^
이 책은 정말 언제나 고요하게 타는 벽난로같아요. 사랑스럽고 몽글하고 귀엽고.
아, 정말 좋아요.

맥거핀 2012-10-23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자체가 하나의 소설이라고 해도 좋을 리뷰군요. 소설이 조용히 녹아들어가 있는 글이라서 좋습니다. 몇년전 읽었던 황정은의 소설을 다시 꺼내봐야겠습니다.

Shining 2012-10-24 13:10   좋아요 0 | URL
희랍어 시간, 리뷰처럼 개인적인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었던 책이었어요.
이 뒤에 출간 된 파씨의 입문, 은 약간 난해하고 호불호가 나뉠 수 있는데 이 책만은
거의 모두에게 최선이 아닐까 싶어요. 한글로 쓴 책에서 최고 중 하나라고 감히 말해봅니다.

아이리시스 2012-10-24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글로 쓴 책에서 최고.............인데 아직도 안 읽은 1인......
(아..나는 진짜 댓글학원 다녀야 해..)

Shining 2012-10-25 11:13   좋아요 0 | URL
제가 좋다고좋다고 막 설레발 쳐서 읽는게 더 미뤄진거 아니에요? 왜 그런거 있잖아요^^;(걱정걱정..)
댓글학원은 뭡니까? 음, 댓글 잘 쓰도록 가르치는 학원?(아이님은 댓글도 글만큼 잘 쓰시니까 그럴리 없을테고) 댓글만 다는 학원?(아이님은 댓글도 글만큼 많이 읽으니까 그럴수 있을지도) 궁금해요! 좋은데면 같이 다녀요ㅎㅎ

티티카카 2012-10-24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샤이닝님의 이런 섬세함이 정말 좋아요.

Shining 2012-10-25 11:15   좋아요 0 | URL
티티카카님 저를 너무 과대평가 하시는군요, 하하^^ 섬세함이라고 쓰고 감상적, 이라고 읽어주세요ㅋ
이 책, 세 번째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아니 읽을수록 좋아요.

이진 2012-10-27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이닝님, 저 이 책 읽고 있어요. 읽다가 너무너무너무너무(쓰지 못하는 수식어지만 이 단어 밖에 표현할 길이 없네요) 좋아서 방을 뒹굴었어요. 어쩌면 저런 글을 쓸까. 놀랍기도 하고, 따뜻하고. 하여튼 책 읽다가 며칠 전에 샤이닝님 리뷰를 본 기억이 나서 다시 들렀어요. 그 땐 제목만 보고는 껐는데, 좋아요 ㅠㅠㅠㅠㅠㅠㅠㅠ

Shining 2012-10-27 23:43   좋아요 0 | URL
이진님, 완전 오랜만! 잊어버리겠어요ㅠ

이 책 정말 좋죠? 진짜, 한글로 쓰여진 글 중의 베스트...라는 헌사가 아깝지 않아요ㅠ
신형철 님(님이래ㅋ)의 글까지. 오오오오오오. 펄펙트-_-b
 
침묵의 시간 사계절 1318 문고 61
지크프리트 렌츠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봄날은 간다>를 보며 사랑에 빠진 소년은 남자가 되고 사랑이 사라진 남자는 어른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더 리더』를 읽으며 비밀은 소년을 남자로 만들고, 비밀이 깨진 후 남자는 어른이 된다는 것을 배웠다. 『침묵의 시간』을 읽은 후 다시 알게 된다. 비밀이 깊을수록 사랑은 달콤하고 사랑이 달콤할수록 외로움도 깊어진다는 것을. 

 

 

여기, 사랑에 빠진 한 소년이 있다. 소년은 아직 소년이라 부를 수 밖에 없을만큼 어리고 어리숙하다. 책의 처음, 소년은 그 사랑을 잃는다. 잃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잃는 것으로 끝나는 사랑이다. 소년은 어떻게 사랑에 빠지고 어떻게 사랑을 잃게 되었을까. 소년이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아니다, 이 가정은 너무나 어리석다, 소년이 사랑을 잃지 않았다면 그 사랑은 가시적인 결실을 맺을 수 있었을까.

 

아니다, 소년은 사랑에 빠졌지만 그 사랑은 은밀하다. 그것은 소년이 사랑하는 대상이 그의 선생님이기 때문이며 그 선생님이 소년과 나이 차이가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소년은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친구, 부모, 그리고 당사자인 그녀에게조차 쉬이 말하지 못한다. 자기 자신만이 자기 사랑의 증인인 사랑인 것이다. 

 

사랑을 하는 사람은 모두가 수다스러운 동시에 고집스러워지는 법이거늘, 소년의 은밀한 사랑은 자신을 침묵하게 하고 넓어지게 한다. 대신 소년은 오래오래 생각한다.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는 방법, 그녀를 위해 자신을 자라게 할 방법, 그녀에게 더 다가갈 수 있는 방법. 아마도 그녀, 슈텔라는 소년, 크리스티안과의 '현재'를 떠올릴망정 '미래'는 생각하지 않았을텐데. 크리스티안은 그녀의 미래를, 자신의 미래를, 정확히는 그녀와 함께 하는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고 예측하고 꿈꾼다.

 

이 사랑은 깨진 사랑이다. 언젠가 깨어질 사랑이 아니라 이미 깨져버린 사랑이다. 소년은 그녀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들려주지 못했고 그녀의 의견을 듣지 못했다. 더 이상 그녀를 안고 사랑한다고 속삭여줄 기회도, 이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누군가에게 공언할 수 조차 없다. 이미 떠나버린 사랑, 끝나버린 과거는 돌아보지 않는다. 크리스티안의 사랑의 무게와는 무관하게 그녀는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랑이 되어버렸으니까.

 

단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사랑의 눈빛, 은밀한 맹세, 장난스런 눈빛, 함의가 담긴 표정들. 소년은 그것을 누군가에게 한 번도 내비칠 기회를 받지 못한다. 마치 없던 일이 되는 것처럼, 마치 모두가 깨고 나면 사라지는 백일몽처럼. 그녀는 정말 나를 사랑했을까. 소년은 바다를 볼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었을 것이다. 그녀는 정말 나를 사랑했을 거야. 소년은 바다를 볼 때마다 스스로에게 위안했을 것이다. 그렇게 소년의 사랑은 늘 침묵의 골에 괴여있다. 사랑을 처음 느꼈던 찰나도, 사랑을 확신한 순간도, 그녀를 향해 달려가는 호흡도 모두 침묵 속에 있거늘. 그는 설렘도 기다림도 비애와 애통도 모두 침묵 속에 버려둘 수 밖에 없었다. 네가 없으면 내 사랑을 증명할 방법이 어디에도 없는데, 그의 사랑은 네가 사라진 순간 모든 증거와 증인이 사라지는 사랑이었다. 아스라지는, 봄날의 햇살처럼 여름의 더위처럼 가을의 낙엽과 겨울의 눈처럼 시간 속에 스미는 사랑.

 

 

나는 이 통속적이고 비극적인 멜로 앞에 안타깝고 가엾고 뻔해서 마음이 짠했거늘. 작가는 한없이 냉정하고 과묵하고 덤덤하다. 마치 오래 전, 그런 일이 있었지, 라고 아주 먼 곳을 보며 말하는 이처럼. 그게 내가 마지막 했던 사랑이었지, 또 다른 소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노인의 눈길처럼. 지크프리트 렌츠는 이렇게나 덤덤하다.

 

하긴, 그는 언제나 그랬다. 『독일어 시간』에서는 날카롭고 맹렬하더니 『아르네가 남긴 것』으로는 탄식만 남기게 했고 『줄라이켄 사람들』에서는 따뜻하고 귀여웠다. 그 모든 순간에 그는 덤덤했다. 두어발자국 멀리 떨어져서 기록을 남기듯 무엇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되 어떤 것도 관여하지 않듯이. 『침묵의 시간』에서는 그 덤덤함이 절정으로 치닫는다. 통속적이고 뻔한 멜로, 금단의 사랑, 같은 선전적인 문구와는 관련없다는 듯이. 그 무연함과 묵묵함이 사람을 더 아프게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지.

 

 

이 책은 그가 여든의 나이에 쓴 글이다, 라는 글을 읽기 전까진 짐작도 못했다. 맙소사. 젊은이가 나이듦을 그럴듯하게 흉내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이미 많은 것을 지나버린 이가 마치 처음 겪는 것처럼 쓰는 것 또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이 책 어디에도 그런 기색은 없다. 노인의 젊음에 대한 찬미도, 자신의 시간에 대한 과시도. 그저 어쩔 수 없는 사랑에 빠져버린, 침묵 속에 사랑을 빠뜨린, 가끔씩 심장을 파르르 떠는 소년의 가슴이 있을 뿐이다.

 

아! 지크프리트 렌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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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8-01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여든 살의 지크프리트 렌츠라니. <줄라이켄 사람들> 귀엽고 <아르네가 남긴 것> 탄식만 남았고, 제 느낌을 꼭 짚어주셨네요. <독일어 시간>은 볼까 망설이다 두 권짜리라 여태 미뤄뒀지 뭐에요. (하하하하하하;;) 이 책 얼른 담아갈게요, Shining님 :)

그나저나 저 여태 <밀양>을 다시 못 보고 있어요. 시간은 많다고 생각하는데 왜 늘 금방 지나가는 걸까요...

Shining 2012-08-05 14:06   좋아요 0 | URL
글 올려두고 방치해뒀어요, 며칠ㅠ 미안해요 수다쟁이님, 이제 답글 다네요;

연륜이란 이런 거구나, 하면서도 마치 내가 소년이 된 것처럼 풋내나고 설레기도 했어요. 어떻게 이렇게 완숙하면서도 서툴게 쓸 수 있을까요? 멋졌어요^^

괜찮아요, <밀양>은 워낙 다시 보기 어려운 영화니까, 꼭 다시 보라고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영화니까요(웃음). 도서관 일지 안 써요?+_+ 저 그거 팬 될 것 같은데, 그거 쓰면 모두 다 이해할게요(ㅎㅎ).

비로그인 2012-08-05 22:07   좋아요 0 | URL
ㅋㅋ 저도 요즘 글 올려두고 방치해두기 일쑤랍니다, Shining님! (ㅠㅠ) 지크프리트 렌츠는 소 뒷걸음질 치듯이 만난 작가라서 이렇게 다시 만나서 무척 반가웠어요. 아마 내일 도서관 출근하면 바로 수중에 넣을 것 같아요! 도서관 일지... 계속 써봐야겠네요 ^ㅡ^ㅋ

Shining 2012-08-07 20:50   좋아요 0 | URL
와, 도서관에 출근(!)해서 바로(!!) 손에 넣을 수 있다니(!!!). 수다쟁이님 짱이에요-_-b(척)
도서관 일지, 기다리고 있는 팬이 있다는 것만 알아주심...(부담되죠?ㅎㅎ)

아이리시스 2012-08-05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저 책..평가단 할 때 받아서 누군지 몰랐고 왜 1318을 보내주냐면서 투덜투덜 투덜투덜 이랬는데 누구? 지크프리트 렌츠? 그게 누구야..( '') 아..저도 있을 거예요, 이 책. 그럼 저도 한 번 먼지 털고 읽어볼게요 :)

Shining 2012-08-07 20:52   좋아요 0 | URL
와! 아이님은 찾으면 막 책이 쑥 그러시구나... 없는 책이 없으셔-_ㅠ
완전 도라에몽이잖아요!(아이에몽이라 불러드리죠ㅋㅋ) 부럽습니다용 :)
 
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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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여러분 제가 엊그제도 글을 쓰고 오늘도 글을 쓰고 있어요. 이건 마감을 앞둔 레포트 쓸 때와 일 외에 거의 처음인 것 같아요. 게다가 이 글도 꽤 장문이 될 것 같은데 말이죠. 제 안에 이런 성실함과 열정(!)이 있었다니. 스스로에게 감동과 배신감을 함께 느끼는 중입니다. 저는 이 영광을 미용사 언니(어제 미스코리아 대회가 있었다더니 잠시 착각했어요)... 아니죠, 다카노 가즈아키 씨에게 돌립니다. 게다가 이 말투, 네, 오랜만에 구어체 리뷰에 도전해볼까 합니다. 오랜만에 하려니까 쑥스...럼을 느껴야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거 모르겠습니다! 저 지금 굉장히 흥분했거든요!!(느낌표 빵빵) 여지껏 제가 구어체 리뷰를 택할때는 거의 이 이유였죠. 리뷰를 쓰는 것이 아니라 말해야 하는 책이기 때문. 이 책도 누군가에게, 안 되면 혼자라도 말해야 할 그런 책입니다. 하하. 정확히는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책이기도 하죠. 아, 시작하기 전에 제가 읽느라 정신을 팔려 메모를 (정말)하나도 못했기에 인용은 단 한 문장도 없다는 안타까운 사실을 알려야겠습니다.

 

 

이 책의 장점은요, 아 장점이 너무 많아서 어떤 점부터 꼽아야할지 모르겠군요. 그래, 스토리를 이야기해볼까요. 『제노사이드』는 크게 세 군데의 물리적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 이야깁니다. 하나는 미국, 주로 펜타곤이라 불리는 높은 분들의 영역이 되겠구요. 또 하나는 일본, 고가 겐토라는 약학대학원생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미지의 인류가 살고 있는 콩고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이 되겠습니다. 이 세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차례차례 비춰가는데 물론 대부분은 동시간대에 이뤄지는 일이고요, 전혀 상관 없는 일들로 비춰지는 몇몇 사건들이 실은 서로간에 밀접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형식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헐리웃 블록버스터 영화 같은 진행이에요. 동시간의 다른 곳에서 이뤄지는 일들을 보여주는 영화들 있잖습니까. <아모레스 페로스>나 <바벨>같은? 아니면 <크래쉬>나 <밴티지 포인트>같은 영화들이요. 아니지, 헐리웃 영화 같을 뿐 아니라 영미문학 같기도 합니다. 등장인물이 외국인이고 배경이 외국이라서, 다카노 가즈아키 씨가 미국에서 체류한 적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저도 앞날개 보고 알았답니다, 영화 연출을 한 적도 있더군요. 그래서 헐리웃 영화스러운 진행도 자연스러운 걸까요?) 이야기의 굵기나 둘레, 진행, 묘사, 설명, 서사까지 모든 것이 그렇군요. 그런데 이 책의 장르가 뭘까요. 으으으음, SF가 가장 무난할까요. 아니면 과학 어드벤처나 스릴러, 액션(?) 어떤 면에서는 재난물일수도 있겠습니다.

 

 

장르소설을 쓰는 분들, 특히 영미권 작가들은 자신의 전직이나 경험을 살려 글을 쓰는 경우가 꽤 있죠. 존 그리샴과 제프리 디버는 변호사였고 마이클 코넬리는 기자였고 퍼트리샤 콘웰은 법의관이었으며 존 르 카레는 MI6에서 일한 사람이죠. 헌데 다카노 가즈아키 씨는 약학은 커녕 컴퓨터를 전공한 이력이 전혀 없으며 당연히 특수부대원으로 근무한 적도 없을 것에요. 그런데도 약에 대해 설명하고 컴퓨터 알고리즘을 해석하며 특수부대원들의 촉각을 묘사하는 것을 어떻게 이렇게 잘할까요. 아는 것을 말하는 것과 잘 모르는 것을 언급하는 것은 차이가 있죠. 말투, 어투, 쓰는 단어, 서술, 무엇보다 숨길 수 없는 자신감과 확신이 그렇죠. 잘 모르겠지만 그런다더라, 내가 알기론 그렇던데, 가 아니라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자, 내가 아는 것을 당신에게 들려줄게" 라며 거들먹거리는 게 아니라 "제가 아는 건 이런 겁니다", 라고 공손하게 말하죠. 작품을 위해 작가가 리서치를 철저히 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 해도 이 정도의 내용을, 이렇게 말하려면 얼마나 많은 공부를 했을까요. 품을 팔아 책을 찾고 독학을 하고 여기저기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았겠죠. 그 다음에는 그들이 설명하는 것을 자신의 머리로 옮기고 해석하고 확신한 다음 자기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머리가 아프고)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요. 저는 거의 경외의 감정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면 다카노 닐슨이라고 불러줘야 합니다. 암요.

 

 

게다가 『제노사이드』는 문장력도 좋고 진행의 속도나 이야기를 꾸려가는 방식 또한 좋습니다.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때로는 그들의 어릴적부터 현재까지, 또는 현재의 거의 모든 상황을 설명합니다. 가끔은 딱 한 번만 등장하는 인물도 나옵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 인물의 시점이 필요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지 않더군요. 페이지수가 상당하고 이야기의 둘레가 나무로 치자면 오백년 거대한 나무 정도 되는데도 사족이라고 느낄만한 부분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어요. 물론 이건 제 생각입니다, 게다가 저는 책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사람이니 믿지 못하셔도 제가 할 말은 없습니다요. 특히 소년병의 이야기 같은 경우는 짧은 이야기인데도 임팩트가 굉장히 컸어요. 아마 그 이유는 작가의 균형감각과 연결된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균형감각, 사람의 신체에서는 달팽이관이 그 역할을 한다죠. 그렇다면 사고의 균형감각은 어떨까요. 다카노 가즈아키 씨에게 제가 이 책으로 호감을 물씬 느꼈던 것은 그 부분이었습니다. 상당히 완벽주의자군, 오호 글도 잘 쓰네, 이런 객관적 감탄이 아니라 존경할만한 사람이라는 감상을 갖게 된 부분이죠. 이 책으로 비춰본 완벽한 편견에 따르자면 다카노 가즈아키 씨는 첫째로,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졌고요, 두 번째로 많이 배운 사람 같아요. 고학력이라거나 명문대를 나왔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많이 오래 배운 사람 말이죠. 왜, 배운 사람일수록 오히려 편협함이나 선입견이 견고해지고 자신의 지식에 틀에 갇히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배울만큼 배운 사람들이 더 보수적인 것 말이죠. 그런데 이 분은 자신의 지식과 사고를 더 많이 배우고 고민하도록 '지성'으로 끌어올려진 매우 드문 경우 같았습니다. 어떤 문제를 다각도에서 보려고 노력하고 그 중 어떤 것에 동의를 표할 것인지 진지하고 꼼꼼하게 결정하는 사람 같다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그건 작가로서도, 성인(成人)으로서, 원론적으로는 한 인간으로서 엄청나게 중요한 자질이잖아요? 갖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고요. 

 

 

제가 갖는 호오(好惡)가 작가가 한국에 대해 우호적인 사람이라서는 아닙니다, 전혀. 오히려 눈에 띄게 한국인, 한국에 대해 우호적이서 되레 의심을 했죠. 감상적인 이유에서는 아닌가, 조국에 대한 정서적 반작용이 아닌가 해서요. 헌데 이 분은 단지 한국인이 좋아요, 오, 김치 맛있어요, 그런 게 아니라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고, 일본인으로서 한국의 역사에 대해 수치심과 죄책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 일본의 과거에 대해 책임감과 비판을 서슴지 않더군요(때문에 자국에서는 좌익이라는 비판을 받았다고 하죠). 그건 한국이 좋아서, 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으로 비춰볼 때 이건 일본이, 나의 조국이, 비록 나의 조국이라 해도 그 일(들)은 잘못했기에, 라는 뉘앙스로 읽혔어요. 비단 일본 뿐 아니라 미국이나 여러 강대국들의 제노사이드에 대해서 심한 혐오감과 탄식을 갖고 있는 듯 보이더군요. 그리고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전쟁과 테러와 학살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고양이처럼 눈을 치켜뜨고 오랜 시간 관찰해온 것 같았습니다. 자, 이래이래서 너희는 나빠, 가 아니라 이런 사람들이 이런 결정을 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난 거야, 라고 -결코 무심코 넘길 수 없는 픽션으로- 묘사합니다. 학살당한 쪽과 학살하는 쪽을 함께 비춥니다. 그러면 독자들은 좀 더 큰 책임감을 갖게 되며 더 깊게 생각하게 되죠.

 

소년병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볼까요. 영화 <그을린 사랑>을 볼 때 저는 '충격의 반전'보다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러버린 그 남자의 삶에 더 신경이 쓰였거든요. 나는 평화롭고 문명화 된 환경에서 충분한 교육을 받았으니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요. 저 남자는 저런 환경에서 어릴 때부터 보고 듣고 당한 것이 그것이니.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폭력과 살인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구나, 하는 것 말이죠. 그런 환경에서 존엄함을 지키기 위해 폭력이나 살인을 하지 않을 자가 세상에 얼마나 될까. 저 남자의 지극한 선의(善意)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가. 등등의 생각 말이죠. 소년병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그 생각이 들더군요. 이 잔인한 꼬마, 가엾은 꼬마, 결국 이 꼬마도 이기가 만든 피해자였음을 말이죠. 때문에 더욱 이 현실에 입각한 사실에 잔인한 것이라는 생각에 몸서리쳤습니다.

 

 

이렇게 『제노사이드』에는 사람 울컥하게 만드는 부분이 꽤 있습니다. 다카노 가즈아키 씨는 심리학에도 탁월하신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무엇이 사람을 욱하게 만드는지를 잘 아시더군요. 그리고 그것을 글로 옮길 재간까지 있다니, 부러울 따름입니다. 그런데 실은 제가 이 무시무시한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좀 엉뚱할지 모르지만, 소설의 의미였어요. 대체 소설이 뭐냐고, 소설을 읽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냐고 누군가 물을 때마다 저는 나름대로의 대답을 했지만 그건 어쩌면 스스로에게 하는 변명 같았어요. 나는. 나는 이것 때문에 소설을 읽는다는 스스로의 정당함이었죠. 하지만 어떻게 그 정당함으로 타인을 설득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확실히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작 이 책 한 권을 읽으며 저는 어떤 이론서나 철학책 못지 않은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폭력이 나쁜 것은 누구나 아는 문제이며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어떤 의미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제는 압니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강자가 약자를, 권력이 이성을 어떤 식으로 눌러왔는지 문명화된 세계이기에 우리는 어느정도는 압니다. 수많은 책들이, 이론서들이, 언론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인지하고 받아들이죠. 하지만 그 인지와 받아들이는 것에는 개인차가 있고 그것을 접하는데는 -불편한 사실이지만- 계층과 계급차이가 분명 있을 겁니다. 같은 글을 읽는다한들 어떻습니까. 지나치게 어렵거나 낯설거나 막연하죠. 혹은 이해할 수 없거나 납득하기 어렵거나 설득되기 힘든 것들이 있죠. 하지만 소설은 그것을 보다 쉽고 보편적으로, 설득적으로 보여줍니다.

 

다소 단편적인 예를 들자면, 저는 그 전에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들어온 것보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으며 그 곳의 심각성을 짐작해봤고, 그때까지 재미삼아 읽었던 모든 꽃말책보다『꽃으로 말해줘』로 더 많은 꽃말을 외울 수 있었고, 그저 뉴스의 한 꼭지로 흘려듣던 과테말라 내전에 대해서는『나무소녀』를 읽으며 충격을 받았고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과『염소의 축제』를 통해 트루히요 정권에 대해 보다 면밀히 알게 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소설로 쓰여졌다고 진실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사실에 입각한 글, 그리고 그 사실에 입각한 글임을 믿기 위해 제가 스스로 찾아 보고 공부하고 읽어보게 하는 경각심만은 진실일 것입니다.

 

저는 이따금 소설을 읽으며 더 큰 진실, 혹은 진실을 가장한 거짓과 마주하곤 합니다. 때문에 현실 세계에 대해 더 촉각을 세우게 되고 세상을 보는 눈을 좀 더 키워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눈 앞의 것들에 현혹되지 않고 내 눈으로 세상을 보겠다고 생각합니다. 소설. 네, 소설(小說). 작은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의 이 작은 세상이 때로는 어떤 이론서보다 어떤 과학책보다 인간의 마음을 쉽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으며 동시에 스스로 어떤 사람인가를 증명하게 하는 것. 그것이 소설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다카노 가즈아키 씨의 등단작『13계단』도 좋았고 단편집인 『6시간 후 너는 죽는다』도 괜찮았어요. 『그레이브 디거』도 아쉬운 점은 있었지만 모터 달린 듯 읽게 되는 가독성과 사람을 집중하게 하는 강렬한 매력에 끌렸었죠. 『제노사이드』의 유일한-굳이 꼽자면- 단점은 결말부분이 다소 싱겁다는 것? 그 외에는 소설이 갖춰야 할 모든 미덕을 다 가졌다고 감히 말해봅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니 궁금하시죠? 정작 내용은 말 안 해주니 간질간질하시죠? 대체 뭔데 그래? 내가 한 번 읽고 말해주지, 싶으시죠? 후후후후. 그런 마음이 드신다면 제가 이 글을 매우 잘 쓴 거군요. 제가 어떤 말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읽으세요, 이 책. 그 말 외엔 모두 사족이 될 뿐이라고, 저답지 않게 단호하게 말해봅니다. 그럼 다시 구어체 리뷰로 만날 날까지. 저는 이만 총총.

 

 

 

 

 

 

덧) 저는 여태껏 '다카노 카즈야키'라고 발음했는데 이 책에 '다카노 가즈아키'라고 써있더군요. 이 책을 존중, 리뷰에는 다카노 가즈아키로 통일하고자 했습니다. 혹시 잘못 쓴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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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2-07-08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샤이닝님 리뷰를 보고 어제 서점에 갔었어야 했는데 ㅡㅡ;; 자꾸 만지작거리다가 안샀거든요. 13계단 좋았는데 결말이 밍밍했던 기억땜에 ㅠ 근데 이 리뷰가 제 맘을 흔드네여 ㅎㅎ

Shining 2012-07-10 11:00   좋아요 0 | URL
크, 아쉽다ㅠ 뽀님, 사실 이 책도 결말의 분량이 적고 단순해요, 그 앞의 과정이 너무 방대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요^^; 하지만요, 이 책 정말 멋져요! 아니지, 멋진 작가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게 해요ㅎㅎ 읽어보셔도 후회하지 않으실거라, 저답지 않게 단호하게 말합니다!_-*

마녀고양이 2012-07-09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카노 가즈아키는 제가 참 좋아하는 작가이고,
이 책 역시 장바구니에서 만지막거리고 있다지요. 관심이 가는 책인지라 열심히 읽었답니다.
제가 오랫동안 IT를 하다보니, 프로그래밍, 알고리즘 이런거 나오면 참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제프리 디버의 <브로큰 윈도우>가 너무 재미있기도 했구요. <모든 것은 F로 끝난다>도 참 좋아했는데
후속작 번역이 안 되네요............. 여하간, 이 책 사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불끈!

Shining 2012-07-10 11:06   좋아요 0 | URL
그렇구나, 마고님은 프로그래밍, 알고리즘 이런 거 좋아하시는구나ㅠ 저는 사실 촘 머리가 아팠어요;; 약에 대한 설명도 어찌나 자세한지-_ㅠ(문과계 사람ㅋㅋ) 그렇다면 이 책 취향에 맞으실 것 같아요>_< 감탄의 연속이었거든요, 저는ㅎㅎ <모든 것은 F로 끝난다>, 국내 번역작이에요?+_+ 처음 들어보는데; 제목이 팍팍 끌려요~

아이리시스 2012-07-12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이닝님! 이거 읽어본 사람들은 다 좋대요! 리뷰도 칭찬일색, 마케팅도 완전 자신만만. 그래서 저도 곧 읽을 거예요. 책이 생기거든요. 읽고나서 리뷰 읽어볼게요. 히히히히히히.

다음 책은 뭡니까!

Shining 2012-07-12 22:47   좋아요 0 | URL
이게 누구에요?>_< 아이님 오셨군요! 이 책 좋아요, 재밌고 깊고 배울 점도 많아요! 믿고 추천합니다(그런데 이렇게 강추받다가 실망하실까봐 촘 걱정ㅠ) 읽고 꼭 리뷰 써주세요~ 다음 책은 저도 잘..ㅋㅋ

2012-07-12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샤이닝님이 이렇게 극찬을 하시니 저도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이 리뷰 읽으려다 말았어요. 다 읽고 나서 읽을래요. ^^
샤이닝님, 역시, 최다 뽐뿌 유발자입니다. 아, 이 책은 도서관에 주문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도서관 김비서가 알아서 잘 해 줄 겁니다.ㅎㅎㅎ

Shining 2012-07-13 00:23   좋아요 0 | URL
아, 소심한 저는 살짝 걱정이 들어요; 아이님 댓글에 쓴것처럼 이러다 실망하실까봐...그런데 이 책은 객관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책이라서요!(다시 자신감 회복!) 좋겠다, 제 도서관의 김비서는 일 너무 많이 시킨다고 울면서 그만뒀어요, 제가 시 예산을 너무 많이 써서 눈치도 보인대요, 흑.

2012-08-06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이 책 다 읽었어요. 샤이닝님이 찬사를 뿜을 만한 책이네요.
저는 '정훈'의 캐릭터와 국적이 뜬금없다 생각했는데, 다카노 가즈아키 인터뷰에서 그는 그런 말을 했대요. 철길에 뛰어들어 다른 이를 구하고 스스로를 희생한 이수인이라는 한국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인간에게 있는 그런 무조건적인 선의의 모습을 소설 속에 담고 싶었기에, 이수인을 기념하는 마음으로, 한국인 '정훈'을 만들었다고. 그 말을 읽으니 이해가 갔어요. 그래서 저는 이 소설의 결말이 좋았답니다. 작가는 제노사이드를 할 줄 아는 종족으로 인간을 보지만, 또한 인간에게 있는 그런 무조건적인 선의에 주목하며, 인간이라는 종족에 대해 시니컬한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카리와 에마의 재회가 아닌, 겐토 부분을 끝으로 삼았다고 생각을... 그리고 저는 아버지 메일의 마지막 부분에 살짝 감동했어요.^^

여튼 (샤이닝님 말대로) 소설가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존경하고 싶은 작가예요. 이승우씨가 말한 강을 건너는 방법을 놓치지 않은 소설가이기도 하고, 또한 (샤이닝님 말대로) 균형잡힌 사고를 할 줄 아는, 오랫동안 깊이 배운 사람이기도 하고..

Shining 2012-08-07 20:57   좋아요 0 | URL
섬님이 이 책을 읽으셨다니, 괜히 제가 다 뿌듯한 건 왜일까요?ㅎㅎ

저도 인터뷰에서 읽었어요, 故 이수현 씨를 담은 인물을 넣었다는 말이요^^ 그런데 이수현 씨 뿐 아니라 한국, 한국인, 한국의 정서 같은 것에도 관심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저는 :)

제가 먼저 공언을 해버려서 세뇌되신건...ㅎㅎㅎ 노력을 많이 했구나, 애썼구나, 하는 감탄과 오랫동안 생각을 해온 사람이구나, 싶은 감명 같은 것까지 받았어요. 저 너무 오버하는 걸까요?(웃음)
 
혼자 책 읽는 시간 - 무엇으로도 위로받지 못할 때
니나 상코비치 지음, 김병화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특별히 사회성이 나쁘거나 협동심이 없는 것은 아닌데(혹 그렇다해도 그걸 숨길 수 있을 정도는 되는데) 고르자면 혼자인 쪽이 좋았다. 또는 혼자인 것이 싫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혼자임을 두려워 한 적이 없다고 해야겠다. 영화도 미술관도 연극도 도서관도 산책도 사실 혼자인 편이 좋을 때가 더 많았다. 운동도 구기종목이나 단체운동에는 흥미가 없고 그보단 조깅이나 수영, 자전거 등을 선호. 내가 가장 자주 하는 일 중 가장 좋아하는 일들 -책과 영화와 직소퍼즐과 각종 정리정돈;;- 은 모두 혼자 하는 것이 아니냐고 친구가 지적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입을 다물었고 어쩐지 비난받은 기분이 되어 울적했지만 생각해보면 궁극적으로 남과 같이 하는 일이 몇 가지나 될까?

 

혼자서 책 읽는 시간, 이라는 제목을 보며 난데없이 그때의 울분을 터트린다. 이봐이봐. 책을 같이 읽을 수가 있는거야? 만약 누

군가 책을 읽어주거나 함께 페이지를 넘겨가며 읽는다해도 결국 책은 혼자만의 것 아니냐고. 좀 더 나가서 말하자면 궁극적으로 남과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몇 가지나 된다고! 그렇다면 어째서 그녀는 혼자 책을 읽기 시작했을까.

 

저자인 니나는 세 자매의 막내딸이다. 저자의 말을 빌어 '형제간의 역학관계에서 볼 때 나타샤는 같이 노는 언니, 앤 마리는 신경 쓰이는 언니' 중 앤 마리를 병으로 잃게 된다. 언니를 잃고 삼 년, 그녀는 자신이 쉴 새 없이 뛰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자신이 도망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하루만에 읽은 그 날 그녀는 결심한다. 365일 프로젝트. 하루에 한 권 책 읽기. 그렇게 이 책은 티끌로 태산을 만든, 아니지 태산이 된 티끌들의 이야기다.

 

서평집과 독서 에세이 중간쯤 위치하고 있기에 책의 내용을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게다가 그녀가 읽는 책들, 언급하는 책들이 국내에 번역이 안 된 책들이 수두룩해서 '서평집'으로의 기능을 기대한다면 글쎄. 하지만 이 책에는 분명 애서가들에게 각별하게 다가올 부분이 있다. 정확히는, 우리가 어째서 책을 읽는지 혹은 어떻게 책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겪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모여있다.

 

당장 생각나는 챕터는 이것. 책을 빌리는 것과 빌려주는 것. 그녀는 지인으로부터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빌려 읽었던 적이 있는데 그 책을 읽고 논리적인 허점과 비판을 하는 바람에 그녀와 멀어졌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책을 빌려주는 것, 혹은 누군가에게 책을 빌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말한다. 친구가 책을 권할 때는 훨씬 더 많은 것이 걸려 있다. 책을 권하는 것은 손을 내미는 것이고, 저편이 손을 잡아주지 않아 거절당할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어떤 책을 권했는데 거절당한다. 그게 우정을 망가뜨릴 수 있는가?

 

하하. 나는 여지껏 책선물을 거의 한 번도 임의로 해본적이 없다. 내 자신조차 책선물을 받을 때 어떤 책이라고 명확히 지칭하는데 (가끔 선택의 가능성을 두기 위해 두 세가지 책을 말할 때는 있다) 친구에게는 어떠랴. 읽고 싶은 책을 말해달라고 하거나 정 아니면 A와 B 중 어떤 책을 받는 것이 낫겠냐고 물어본다. 물론, 서프라이즈한 즐거움은 포장지보다도 적지만 책이라는 것이 지극히 개인적이며 주관적이기에, 책장을 채우는 것은 소유주의 허락없이 할 일이 아니라는 판단하에 그쪽이 나은 것 같다. 

 

책추천도 안 한다. 밑도 끝도 없이 책 좀 추천해줘봐, 이런 사람 싫다. 내가 자신의 북마스터도 아닌데 웬 이래라저래라야? 싶은 것도 있지만(성격 나온다_-) 본인의 취향도 기호도 관심도 전혀 모르는데. 대체 내가 어떻게 추천을 해주냐고. 게다가 책추천이라는게 밑져야 본전인데 왜 나는 안절부절 못해야지? 이 사람이 맘에 들지 안 들지 생각하고 고민하고 결정했는데 그 뒤엔 나쁜 피드백이 돌아올까봐 염려하고. 책 추천은 어렵고 민감하다. 그 책이 나한테 좋았어, 와 너도 그 책을 읽어봐, 는 결코 같은 말이 아니니까.

 

 

독서를 통해 나는 삶이란 고통이 고르지도 않고 무한정 부담을 져야 하는 것임을 발견했다. 비극은 제멋대로, 불공정하게 떠안겨진다. 편안한 시간이 오리라고 약속했지만 거짓이 될 수도 있다.

 

이 두 책은, 그리고 내가 읽고 있는 모든 훌륭한 책들은 인간의 경험이 가진 복잡성과 전체성을 다룬다. 우리가 잊고 싶어하는 것들과 더 많이 원하는 것들에 대해 다룬다.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반응하기를 원하는지를 다룬다. 책들이 바로 경험이다. 그것은 사랑이 주는 위안, 가족의 성취, 전쟁의 고통, 기억의 지혜를 입증하는 저다들의 말이다. 기쁨과 눈물, 즐거움과 고통, 모든 것이 보랏빛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동안 내게 왔다. 나는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그토록 많은 것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온갖 무지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경험 중에는 내가 느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사건들이 있다. 그것은 독서의 힘을 통해 이루어진다. 책은 그런 마법을 어떻게 발휘하는가? 작가들은 어떻게 글을 쓰기에, 자신들이 만들어낸 캐릭터들을 독자들과 그토록 단단하게 묶어놓고, 책을 읽어나가는 우리를 그 캐릭터로 변화시키는가? 캐릭터와 플롯이 우리의 삶과 그토록 다른 경우에도, 특히 그럴 때일수록 왜 그렇게 될까?

 

책을 읽을 때, 나는 누구보다 나인 동시에 누구보다 내가 아닌 사람이 된다. 더운 여름날에도 나는 겨울의 구소련으로 날아가고, 여름밤의 베네수엘라로, 초봄의 도쿄와 늦가을의 코펜하겐으로 간다. 내 방에 앉아서도 체코와 케냐와 아르헨티나와 캐나다를 함께 여행한다. 70살의 할머니도 되어보고 9살 남자아이도 되어본다. 전쟁통의 화염속에서 콜록거리기도 하고 광활한 대지 위를 걷는 탐험가가 되었다가 코르셋을 입은 귀족아가씨가 되기도 한다. 어느 순간에는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며 할머니가 되고 또 어느 순간에는 아들이며 딸이자 동생이며 자식이 된다. 죽음의 비통함과 삶의 단애와 생의 무연함을 사랑의 떨림과 애증의 긴장을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이 모두 연인이거나 가족임은 아니며 헤어진다고 사랑하지 않는것도 아니고, 헤어짐이 만남보다 나은 순간도 만남이 헤어짐보다 어려운 시간도 온다는 것을 알게 한다.

 

작가의 아버지는 어릴 적 형제 셋을 한꺼번에 잃은 적이 있다. 아버지의 어머니, 그러니까 작가의 외할머니는 하룻밤에 한순간에 같은 집에서 당신 자신이 전혀 짐작도 못한 순간에 자식 셋을 잃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라고 작가는 자문한다. 나는 거기서 삶이 죽음보다 어렵고 용감한 것임을 또 한 번 느낀다. 이렇게 책은 감정의 진폭을 넓힌다. 책 속에 일어난 모든 일은 나를 꿈꾸게 하며 현실을 자각케 한다. 내가 결코 나이기에 알 수 없었던 것과 알게 되었던 것을 함께 인지하게 한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생각지 못한,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 세계와 상황 고민속으로 들어간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라면 무엇을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어떤 것을 선택하고 결정하고 행동할지가 곧 내가 됨을 알게한다. 그렇게 내가 어떤 사람임을 주지하게 한다. 팔십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해도 전쟁을 겪지 않아도 남자가 되거나 부모가 되지 않아도. 그 모든 것들을 알게 한다. 작가의 말처럼 단지 보랏빛 의자에 앉아서.

 

내가 잘못 생각한게다. 이 책의 제목은 탁월하다. 책은 혼자서만 읽을 수 있고, 책 읽는 순간 우리는 전적으로 혼자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택한 고독이고 그 고독의 대가는 배울 것이 충분하다. 이런 고독이라면, 얼마든지 선택할 만하다.

 

 

 

 

 

 

덧) 6월 중순에 읽고 이제야 쓰는 리뷰. 뭔가 특별하게 쓰고 싶어서 썼다 지웠다만 반복했다; 서평집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되는 책이다. 객관적으로 매우 좋다고 하긴 어려운데 몇 문장, 몇 문단 애서가들의 격한 공감을 얻을 구절들이 보인다. 당신이 애서가라고 자부한다면 읽어도 괜찮을 책.

 

보랏빛 의자에 앉아서 모든 곳을 갈 수 있다 해도 가끔씩은 다른 곳에서 읽고 싶을 때도 있다. 예를 들면 고성(古城)의 벨벳 의자에서 산도르 마라이나 슈테판 츠바이크를 읽는다면, 노천카페에서 피츠제럴드를 읽는다면, 햇살이 부서지는 강가에서 발을 담그고 헤세나 지드를 읽거나 덜컹이는 야간열차 안에서 온다 리쿠를 읽는다면 어떨까. 보랏빛 의자에 앉아서도 이토록 멋진데 그곳에서 그들을 읽는다면 말도 못하게 멋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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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7-02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임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함께'라는 단어도 받아들일 수 있는게 아닐까 하는게
최근의 제 결론입니다. 물론 이 결론은 앞으로 다양한 경험과 함께 또다시 변화하겠지만요~ ^^

보라빛 의자였나보네요. 보라빛, 환상, 권위, 엄숙함, 손에 닿을 수 없는... 독서와 어울리는군요.
이제 겨우 숨돌리는 시간들, 저는 제프리 디버를 펴들었네요, 링컨 라임에게 가보려구요.
즐거운 한주되셔요, 샤이닝님.

Shining 2012-07-02 16:27   좋아요 0 | URL
혼자인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혼자이고 싶어하는 것은 분명 다른 말 같은데, 주변 사람들에게는 냉정한 사람으로 비추기도 하더군요_- 그런데! 마고님께서 진리의 말씀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제야 짬이 좀 생기셨나봐요, 다행이고 부럽습니다(하하). 전 지크프리트 렌츠를 읽으려고 합니다.
링컨 라임과 함께 부디 마고님도 즐거운 한 주 보내시길 :-)

아이리시스 2012-07-02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스물 세살 즈음에요. 데이트하다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커피숍 갔거든요. 뭐 진득하게 독서하는 시간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여튼 좋잖아요, 수다도 떨지만 군데군데 책도 좀 보고 차도 마시는 광경^^

책을 보긴 보는데 따로 읽어도, 같이 읽어도, 이건 그런 짜증이 없는 거예요. 책을 같이 읽는다거나 읽어준다거나 다 저리 꺼지라고 해요!!! 그게 영화니까 멋있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회의적)

책읽는 시간이 고독이란 건 안 읽는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근데 샤이닝님은 이런 책 안 좋아할 것 같은데, 저는, 목차보고 목록만 작성하는 걸로 읽은 걸로 치거든요ㅋㅋㅋ

Shining 2012-07-03 11:47   좋아요 0 | URL
좋죠ㅎㅎ 왠지 생산적인것처럼 느껴지고^^ 저는 책 빌리면 바로 집에 가려고 해서_- 아님 카페에서 읽는데 진짜 책만 읽어서 압수당했어요; 책 읽으면서 걷다 가로수에 머리 받은 후론 거의 몰수당했어요;

맞아요! 실제로는 다 읽었어? 아직이야? 아 나 궁금해죽겠는데 언제 다 읽는거임_- 이러면서 레이저 쏘고 서로 짜증내고... 영화니까 멋지죠ㅋㅋㅋ 그리고 사랑에 홀딱 빠졌을 땐 아마 무슨 책을 읽어주든 그 사람만 보이겠죠, 뭐_-(저도 회의적ㅋ)

그럴지도 몰라요 :-) 근데 저는 고독은 고독인데 선택적 고독인 것 같아요. 법정 스님 말씀처럼 고립하고도 다른 아주 필요한, 생산적인 고독말이죠^^ 좋아하진 않은데 워낙 호평이라 궁금해서... 전체적으로 만족스럽기보단 몇몇 문단이나 문장 때문에 퍽 좋아지는 책이었어요 :-)

프레이야 2012-07-03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편이랄까요.^^
저 책을 사서는 읽지 못하고 바로 어느 여선생님에게 선물했는데 아주 흡족해 하시더군요.
이른 새벽 펼쳤는데 아침 내내 눈 못 떼고 있다고 문자가 와서 저도 기뻤었지요.
저는 재구매하려구요. ^^
님의 리뷰 읽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책을 읽는 장소에 대한 거에요. 멋진 풍경 속에 들어앉아 책이 읽어질까
싶기도 하지만 정말 그런 낭만을 즐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마구...ㅎㅎ
해변에서 책 읽는 서양인들 보면 참 그럴싸 하던데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Shining 2012-07-03 12:0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프레이야님 :)

책 선물한 사람으로 그보다 기쁜 말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읽지도 않고 완벽한 추천을!
대단하십니다+_+ 맞아요, 전 어떤 책을 읽으면 바다로 가는 기차안에서의 소금내와 덜컹거림과
꼬마들이 소근대는 소리가 함께 기억나거든요^^ 전 야간열차 안에서 미스터리 읽는게 로망이에요ㅎㅎ
프레이야 님께서 반갑게 인사해주셔서 좋은 하루 될 것 같아요, 후훗^^ 즐거운 화요일 보내세요 :-)

sslmo 2012-07-06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가지고는 있는데, 아직 시작을 못했어요.
여기저기서 괜찮다는 평을 보니 불끈~이예요.

'산도르 마라이'를 보게 돼서 반가운 마음에 참견을 합니다.
왜였는진 모르는데...두고 두고 오래 오래 남는 작품이었던 것 같거든요, 제 경우엔~.

Shining 2012-07-07 21:22   좋아요 0 | URL
나무꾼님~ 오랜만이에요>_<

서평집으로서 도움이 되진 않았어요 사실ㅎㅎ 대신 맘을 강하게 이끄는 구절이 숨어있었어요, 특히 저 '하룻밤에 셋'이야기ㅠ 가지고 계시다니! 어서 시작해보세요+_+

맞다, 나무꾼님 산도르 마라이 좋아하시죠. 저한테 처음 말 걸어주신 것도 마라이 덕분이었잖아요^^ 산도르 마라이, 저도 각별한 작가에요. 책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양철나무꾼님 만나게 해준 것도 모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