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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간 ㅣ 사계절 1318 문고 61
지크프리트 렌츠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봄날은 간다>를 보며 사랑에 빠진 소년은 남자가 되고 사랑이 사라진 남자는 어른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더 리더』를 읽으며 비밀은 소년을 남자로 만들고, 비밀이 깨진 후 남자는 어른이 된다는 것을 배웠다. 『침묵의 시간』을 읽은 후 다시 알게 된다. 비밀이 깊을수록 사랑은 달콤하고 사랑이 달콤할수록 외로움도 깊어진다는 것을.
여기, 사랑에 빠진 한 소년이 있다. 소년은 아직 소년이라 부를 수 밖에 없을만큼 어리고 어리숙하다. 책의 처음, 소년은 그 사랑을 잃는다. 잃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잃는 것으로 끝나는 사랑이다. 소년은 어떻게 사랑에 빠지고 어떻게 사랑을 잃게 되었을까. 소년이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아니다, 이 가정은 너무나 어리석다, 소년이 사랑을 잃지 않았다면 그 사랑은 가시적인 결실을 맺을 수 있었을까.
아니다, 소년은 사랑에 빠졌지만 그 사랑은 은밀하다. 그것은 소년이 사랑하는 대상이 그의 선생님이기 때문이며 그 선생님이 소년과 나이 차이가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소년은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친구, 부모, 그리고 당사자인 그녀에게조차 쉬이 말하지 못한다. 자기 자신만이 자기 사랑의 증인인 사랑인 것이다.
사랑을 하는 사람은 모두가 수다스러운 동시에 고집스러워지는 법이거늘, 소년의 은밀한 사랑은 자신을 침묵하게 하고 넓어지게 한다. 대신 소년은 오래오래 생각한다.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는 방법, 그녀를 위해 자신을 자라게 할 방법, 그녀에게 더 다가갈 수 있는 방법. 아마도 그녀, 슈텔라는 소년, 크리스티안과의 '현재'를 떠올릴망정 '미래'는 생각하지 않았을텐데. 크리스티안은 그녀의 미래를, 자신의 미래를, 정확히는 그녀와 함께 하는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고 예측하고 꿈꾼다.
이 사랑은 깨진 사랑이다. 언젠가 깨어질 사랑이 아니라 이미 깨져버린 사랑이다. 소년은 그녀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들려주지 못했고 그녀의 의견을 듣지 못했다. 더 이상 그녀를 안고 사랑한다고 속삭여줄 기회도, 이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누군가에게 공언할 수 조차 없다. 이미 떠나버린 사랑, 끝나버린 과거는 돌아보지 않는다. 크리스티안의 사랑의 무게와는 무관하게 그녀는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랑이 되어버렸으니까.
단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사랑의 눈빛, 은밀한 맹세, 장난스런 눈빛, 함의가 담긴 표정들. 소년은 그것을 누군가에게 한 번도 내비칠 기회를 받지 못한다. 마치 없던 일이 되는 것처럼, 마치 모두가 깨고 나면 사라지는 백일몽처럼. 그녀는 정말 나를 사랑했을까. 소년은 바다를 볼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었을 것이다. 그녀는 정말 나를 사랑했을 거야. 소년은 바다를 볼 때마다 스스로에게 위안했을 것이다. 그렇게 소년의 사랑은 늘 침묵의 골에 괴여있다. 사랑을 처음 느꼈던 찰나도, 사랑을 확신한 순간도, 그녀를 향해 달려가는 호흡도 모두 침묵 속에 있거늘. 그는 설렘도 기다림도 비애와 애통도 모두 침묵 속에 버려둘 수 밖에 없었다. 네가 없으면 내 사랑을 증명할 방법이 어디에도 없는데, 그의 사랑은 네가 사라진 순간 모든 증거와 증인이 사라지는 사랑이었다. 아스라지는, 봄날의 햇살처럼 여름의 더위처럼 가을의 낙엽과 겨울의 눈처럼 시간 속에 스미는 사랑.
나는 이 통속적이고 비극적인 멜로 앞에 안타깝고 가엾고 뻔해서 마음이 짠했거늘. 작가는 한없이 냉정하고 과묵하고 덤덤하다. 마치 오래 전, 그런 일이 있었지, 라고 아주 먼 곳을 보며 말하는 이처럼. 그게 내가 마지막 했던 사랑이었지, 또 다른 소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노인의 눈길처럼. 지크프리트 렌츠는 이렇게나 덤덤하다.
하긴, 그는 언제나 그랬다. 『독일어 시간』에서는 날카롭고 맹렬하더니 『아르네가 남긴 것』으로는 탄식만 남기게 했고 『줄라이켄 사람들』에서는 따뜻하고 귀여웠다. 그 모든 순간에 그는 덤덤했다. 두어발자국 멀리 떨어져서 기록을 남기듯 무엇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되 어떤 것도 관여하지 않듯이. 『침묵의 시간』에서는 그 덤덤함이 절정으로 치닫는다. 통속적이고 뻔한 멜로, 금단의 사랑, 같은 선전적인 문구와는 관련없다는 듯이. 그 무연함과 묵묵함이 사람을 더 아프게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지.
이 책은 그가 여든의 나이에 쓴 글이다, 라는 글을 읽기 전까진 짐작도 못했다. 맙소사. 젊은이가 나이듦을 그럴듯하게 흉내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이미 많은 것을 지나버린 이가 마치 처음 겪는 것처럼 쓰는 것 또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이 책 어디에도 그런 기색은 없다. 노인의 젊음에 대한 찬미도, 자신의 시간에 대한 과시도. 그저 어쩔 수 없는 사랑에 빠져버린, 침묵 속에 사랑을 빠뜨린, 가끔씩 심장을 파르르 떠는 소년의 가슴이 있을 뿐이다.
아! 지크프리트 렌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