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아
라스 폰 트리에, 샬롯 갱스부르 (Charlotte Gainsbourg) 외 / 익스트림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2011년에 개봉한 영화 <멜랑콜리아>는 한 자매와 지구 종말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자매를 중심으로 크게 두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동생 저스틴의 결혼식 장면이 주를 이룬다. 시끌벅적한 결혼식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각자의 가치관과 욕망에 따라 스스럼없이 행동한다. 그들과 저스틴은 물과 기름처럼 전혀 섞이지 않는다. 이어 지구를 향해 접근해오는 '멜랑콜리아'라는 행성과 언니 클레어의 이야기가 영화의 후반부를 차지한다. 여기서도 저스틴과 클레어 부부의 대비되는 행동은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현실인 듯 현실 아닌 현실 같은(?) 기묘하고 환상적인 장면과 작품 전체에 흐르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은 영화의 느낌을 한층 더 우울하게 만든다. 또한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쉬지 않고 흔들리는 카메라 워킹은 끊임없는 존재의 불안을 나타내는 듯하다. 생각나는 몇 가지에 관해 두서 없이 적어 보았다.

1. 바그너와 쇼펜하우어
 영화를 보고 가장 가장 먼저 느낀 점은 음악이 주는 강렬함이다. 이 영화에서 절반 이상의 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는 단 한 곡의 배경 음악은, 고대 켈트족의 전설을 바탕으로 만든 바그너의 음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이다. 이는 사랑의 묘약으로 인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지게 된 한 남녀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바그너 개인적인 경험과 고대 전설, 특히 쇼펜하우어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이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악이 주는 분위기도 영화와 무척 잘 어울리지만 감독이 영화를 만들 때 바그너처럼 쇼펜하우어의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란 세상 모든 것을 살아있게 만드는, 즉 생명을 추동하는 근원적이고 맹목적인 에너지이다. 이것은 욕망이나 욕구 등을 비롯해 식물의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힘, 중력 따위의 자연 속에 있는 모든 힘을 뜻하며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럼 표상이란 무엇인가? 표상이란 이러한 의지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현상을 말한다. 세계란 근원적이고 맹목적인 의지 내지 충동이 표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2. 저스틴과 결혼식
 인간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무의식적인 '생의 의지'이다.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생의 의지는 세상을 이루는 근거가 되며 인간의 행동은 의지가 객관화된 맹목적인 몸짓 일 뿐이다. 생물계에서 생의 의지가 가장 강하게 표현된 것이 바로 생식 충동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사랑은 종족보존이라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자연(의지)의 기만 수단이며, 결혼 또한 이것을 위한 체계화된 사회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영화의 초반에 길게 나오는 결혼식 장면은 생의 의지를 노골적으로 표현하기 위함이다.
   
 조카가 늘 Steelbreaker aunt라고 부르는 저스틴은 의지의 초월을 열망하는 존재이다. (Steel은 강철같은 의지(?)로 봐도 되지 않을까?) 따라서 결혼식에서 충실한 의지의 꼭두각시인 사람들과 그녀는 도무지 어울릴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저스틴의 돌발적인 행동은 생의 의지를 부정하는 광기이며 종국에 그녀는 의지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그렇다면 결국 죽음뿐인가? 하지만 죽음은 한 개체의 소멸일 뿐, 의지 자체는 남기 때문에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완전한 의지의 초월을 위해서는 완전한 세계의 소멸이 필요하다.

3. 클레어
 극중 클레어와 그의 남편은 통념의 세계에 살고 있는 아주 보통의 존재이며 충실한 의지의 개체이다. 그런데 행성과 지구의 충돌이 가까워지면서 의지의 소멸을 직감하듯 클레어의 불안감은 점점 커진다.  클레어의 남편은 이성과 합리주의의 도구를 가지고 현상을 분석한다. 허나 그러한 도구들은 무엇 하나 확실하게 알려 줄 수 없으며 희미한 위안만을 줄 뿐이다. 믿고 있던 세계관의 붕괴는 존재에 균열이 생기게 하고 그 기반마저 뒤흔들어 결국 남편은 자살하고 만다. 개체는 소멸되었지만 그럼에도 의지는 여전히 남아있다. 

 반면에 저스틴은 날이 갈수록 심리적 안정을 찾아간다. 고통스러운 의지의 삶을 끝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차분하게 남은 날을 보내며 정말에 빠진 클레어를 일으키고 어린 조카와 함께 마법의 동굴을 만든다. 그렇게 결국 종말을 맞이하지만, 이제 더 이상 우울하지 않다.  
 

<2018년6월2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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