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벌판에 홀로 당당하게 서 있는 나무 표지판,
거기에다 진짜 붓으로 휘갈겨 쓴 글씨
골동품점
표지판 반대편이나 가장자리 등, 이곳저곳을 살펴봐도 어떤 골동품을 사고판다는 건지는 전혀 쓰여 있지 않은 이 간판을 걸고 있는 수상쩍은 컨테이너 가게.
문 옆에도 기묘한 것이 매달려 있었으니...
탁, 탁, 타르륵……
목탁을 세 번 부딪히면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들어오십시오."
마치 팝업스토어처럼 자리를 옮겨 다니며 나타나는 이 가게는
사연 많은 주인과 더 사연 많은 물건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길하거나 불길한 물건들의 사연은 손님들에게로 이어지고
이는 어느새 가장 수상쩍어 보이는 주인의 오랜 사연으로 귀결되게 되는데...
여러 세대의 탯줄을 담은 항아리속 끝없이 이어진 나선은 보는 이를 홀리는 듯 붙잡았던 조선 왕족 가문의 '태항아리'를 비롯하여
대대로 이어진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의 염원과 저주가 불길하게 남아 있는 물건 '놋그릇'
금빛 아이를 신으로 섬기던 마을의 전승에서 비롯된 '돈저냐'
아이들의 슬픈 한이 담겨 있는 '팔주령'
불길한 액운을 가져가준다는 '제웅'
민간신앙에 자리 잡은 이슬람의 상징 '이슬람불'
80년 전 탄광에서 자라나 홀로 기다리는 '먹'
용궁 설화와 권력의 야욕이 얽힌 '도장'
사랑이라는 강력한 이름의 저주인 '옥비녀'
까지...
아홉 개의 골동품이 연결하는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이야기는 듣는 이의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과연 이 물건들은 축복이 될 것인가, 저주가 될 것인가?
그리고 모든 이야기는 결국 한 곳으로 귀결되는데...
매년 대보름 다음 날, 그러니까 음력 1월 16일은 귀신날이라 부른다. 귀신이 드는 날이라는 것이다. 이날은 남자건 여자건 바깥일을 삼가고 문을 꼭꼭 닫아 귀신이 들지 않기만을 기원한다.
향을 피우고, 자리에 앉았다.
새벽 2시, 술잔에 보름달이 떴구나.
또 풍경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고개를 문 쪽으로 돌리고, 아직은 어색한 접객 미소를 띄우며 손님에게 말을 건넸다.
"오셨군요." - page 325
그야말로 기묘했던 이야기.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만남이 이토록 매력적일 줄이야...
한눈팔지 않고 몰입하며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소설은 요즘 제가 읽고 있었던 책과도 연결고리가 있어서 그 어느 때보다 책 읽는 재미를 느꼈었는데...
'바리데기 이야기'에 관심이 생겨 관련 책을 읽고자 했었는데 여기서도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함흥의 바리데기 이야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전개, 충격적인 결말로 현대에 와서도 상당히 악명이 높은 북쪽 바리데기 이야기
"살을 날린다는 표현을 들어보신 적이 있지요? 저주나 뭐 그런 뜻으로 해석해도 크게 차이는 없을 겁니다. 하여간 여섯 딸들을 어머니가 저주로 죽이는데......"
어머니의 원한을 그대로 받은 여섯 명의 딸은 그대로 죽고, 바리데기마저 그 여파를 직통으로 맞아 결국 죽고 만다. 바리데기의 제사를 지내주려던 어머니는 제물을 들고 가던 차에 기인을 만나고, 그 기인한테서 바리데기의 혼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
바리데기는 원한 때문에 악귀가 되어서, 어머니를 씹어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제물을 내팽개치고, 바리데기의 제사는 지내지 않기로 한다. 그 후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다가, 길에서 엎어져 허무한 죽음을 맞는다. - page 115
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팔주령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면 여기에 들어간 것은......"
남자는 나를 돌아보고는, 무심한 눈으로 말했다.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흔히들 착각하지만 무속에 남을 해하는 원리는 없으니까요. 한을 풀고, 원을 달래는 것이 무당의 일입니다. 주술과 무속은 다릅니다. 팔주령은 무당의 것, 손가락 주술은 저주하는 자의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이런 것이 존재하는가, 누가 이런 것을 왜 만들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만."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싱긋 웃더니 쾌활하게 다시 말을 이었다.
"역시 딸랑이가 아닐까요?"
"예?"
"딸랑이라는 것은,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서 만드는 물건이니까요." - page 134 ~ 135
사람과 물건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물건과 관계를 맺은 것만으로, 약하든 강하든 상호작용이, '인연'이 일어나게 되고
사람은 자기가 물건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인간 사회에서의 소유권과 관계없이 물건이 주인을 바꾸기도 한다는 것을.
"사람의 눈에는 꽃밖에 보이지 않지만, 꽃이 핀다는 건 뿌리가 내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보이는 곳에서는 하늘을 향해 활짝 웃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땅속을 파고들어 흙을 찢고 돌을 깨기도 하는 것이지요."
...
뿌리가 내렸기 때문에. - page 285 ~ 286
그리고 이 모든 건 결국 '사랑'으로 이어져있었음에...
사랑, 그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영상화해도 더없이 멋진 작품이 될 이 소설.
언젠가 저도 이곳으로의 초대를 받을 수 있을까...!
탁, 탁, 타르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