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제목 역시도 작가 특유의 리듬이 느껴집니다.
2009년 작가가 오랜 휴식을 끝내고 10년 만에 연재를 재개하면서 더불어 추진된 '무라카미 라디오 단행본 프로젝트' 두 번째.
역시나 52컷의 동판화와 함께 다양한 에피소드가 그려져 있었고 솔직 담백한 '인간 하루키'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이라는 영화에서 노인으로 분한 앤서니 홉킨스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나 다름없다"
솔직히 이 말을 보자마자 채소가 시시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닌가! 라 생각되었지만...
그는 이렇게 얘기하였습니다.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나 다름없다"라고 누군가 단호히 말하면 무심결에 "그런가?" 하게 될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채소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채소마다 마음이 있고 사정이 있다. 하나하나의 채소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면, 지금까지 인간으로서의 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하고 무심코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그럴 때도 있다). 뭔가를 하나로 뭉뚱그려서 우집는 건 좋지 않군요. - page 15
그렇게 '채소의 기분'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는 원래 소설가여서 소설 쓰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고 합니다.
거기에 비해 에세이라는 것은 본업도 아니고 그렇다고 취미도 아니어서 누구를 향해 어떤 스탠스로 무엇을 쓰면 좋을지 파악하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이 지나친 겸손은...)
그래서 '무라카미 스타일로 에세이 쓰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남의 악담을 구체적으로 쓰지 않기.
(귀찮은 일을 늘리고 싶지 않다.)
둘째, 변명과 자랑을 되도록 쓰지 않기.
(뭐가 자랑에 해당하는지 정의를 내리긴 꽤 복잡하지만.)
셋째, 시사적인 화제는 피하기.
(물론 내게도 개인적인 의견은 있지만, 그걸 쓰기 시작하면 얘기가 길어진다.)
그리하여 '쓸데없는 이야기'를 쓴다지만...
옛날 미국 서부의 술집은 대부분 전속 피아노 연주자를 두어 밝고 티없이 맑은 춤곡을 연주하게 했다. 그 피아노에는 '피아니스트를 쏘지 말아주세요. 그도 열심히 연주하고 있습니다' 하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 마음이 이해가 간ㄷ나. 술에 취한 카우보이가 "저렇게 시원찮아빠진 피아노 연주자가 있다니, 이런 빌어먹을!" 하고 피스톨을 빵 쏘아버린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일을 당하면 연주자도 곤란할 것이다.
피스톨, 갖고 있지 않으시죠. - page 35
어쩌죠...
저는 요즘 작가님의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좋은데요... 하하핫;;;
올림픽과 관련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사실 지금 올림픽 시즌이고 TV에서 중계를 우리나라 선수가 나오는 경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메달을 따는가, 따지 않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저자의 말에 새삼 우리의 자세를 되짚어보게 되었습니다.
현지에서 나는 일본 선수나 일본팀이 나오는 시합도 물론 보았지만, 그보다는 일본과 관계없는 경기를 계획 없이 볼 때가 많았다. 이를테면 독일과 파키스탄의 하키 시합이라든가. 그런 건 그냥 그 자리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이해가 얽히지 않은 만큼 순수하게 즐기고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고, 강하든 약하든 누구나 열심히 땀을 흘리며 애쓰는구나 하는 걸 실감하게 된다. 메달의 수는 국가나 국민의 수준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실제 올림픽에는 진짜 피가 흐르는 뜨거운 분위기가 있다. 신기한 '현장의 힘' 같은. 그런데 텔레비전 화면으로는 그게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어딘가로 느닷없이 증발해버린다. 일장기가 올라간다, 올라가지 않는다, 만으로 얘기가 진행되고, 아나운서가 소리를 지르며 여론으로까지 강하게 몰아간다. 이것은 선수들에게도 우리 자신에게도 불행한 일이 아닐까? - page 58 ~ 59
무엇보다 이 이야기가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어쨌든 내게는 '딱 좋다'가 인생에서 하나의 키워드가 되었다. 잘 생기지도 않고 다리도 길지 않고, 음치에 천재도 아니고 생각해보면 괜찮은 구석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지만, 그래도 나는 '이 정도면 그냥 딱 좋지 않은가'하고 생각한다. - page 114
'이쯤이 딱 좋네'하고 여유롭게 생각하기.
앞으로 나를 더 사랑하게 될 것 같습니다.
책에도 시기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던 이번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
다시 그의 책들을 읽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