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당시 30대였던 젊은 작가로서
'말의 정통적인 의미에서 독서 경험은 경험이라 할 수 있을까?'
'독서로 훈련된 상상력은 현실에서도 상상력이 될 수 있을까?'
이 두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이에 답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처음 활자의 부름에 반응했던 유년기부터 광기에 사로잡혀 활자를 잃어버리거나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계속 해명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명제였던 이 질문.
무엇보다 '악몽'과 '광기'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제2차 세계 대전과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핵폭탄으로 시작된 역사적 사실로서 악몽이 망각 속으로 사라지려고 할 때 그는 활자화된 악몽의 기록을 통해 그 기억을 소환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먼저 그것은 활자 너머에서 거대하고 깊은 어둠을 보고 희미한 빛을 인정해 온 자의 요청이며, 동시에 마침 외국어를 습득한 시기에 소설을 쓰게 되면서 타인에게 나의 지병과도 같은 악몽을 전달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 한 작가로서의 요청이다. 여기서 나는 질문하는 자이며 답해야 하는 자이다. 나는 거절하는 자이며 동시에 거절당하는 자이다. - page 80
그는 '읽는 행위'를 통해 자기 내면에 잠재된 '깊은 어둠'을 확인하고 나아가 그 속에서 '희미한 빛'을 발견하는 작가였습니다.
그리고선 '악몽의 전달자'로 활자화된 악몽을 통해 훈련된 상상력이 현실을 살아가게 하는 강력한 힘을 제공한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그의 『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를 읽고 난 뒤 이 책을 만나서일까.
그의 이야기가 이렇게나 친숙하게 다가올 줄이야!
숲속 골짜기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고
숲속에 있는 동안이 가장 자연스러운 환경이었기에
그의 작품들을 바라보면
지금 『읽는 행위』를 다시 읽고, 마침내 『동시대 게임』에 이르는 나의 숲이란 주제의 원형이 여기에 거의 모든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게다가 여기에 직접 묘사되는 숲은 바로 내가 그곳에 둘러싸여 태어나서 자랐던 현실의 숲이었다. 즉, 소설의 이미지는 원래 그 계기가 낭의 유소년기에 경험한 것이더라도 소설의 구성에 끼워 넣어 초고를 쓰고 고치는 과정에서 숲이란 요소도 다소간 허구적인 것으로 만들어지는 데에 반해, 『읽는 행위』에서 묘사된 것은 뜻밖에도 나의 기억 속 숲과 딱 포개지는 것이다. - page 232
그의 '숲'...
한없이 매혹적이면서 두려운, 삶과 죽음의 모태가 공존하는, 죽음과 재생이 일어나는 장소, 그 속에서 '빛'을 발견하는 작업이 '독서'라는 것을.
역시나 범접할 수 없다고 할까...
읽기를 통해 인간다움에 대해 고민하고 개인의 삶과 사회를 재조명하고자 한 작가로서의 태도를 보여주었던 오에 겐자부로.
시간이 흐른 이 시대에 더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니었나 싶었습니다.